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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 -하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40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박형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닥터 지바고>의 유리 지바고는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지만, 삼촌 니꼴라이 니꼴라예비치의 영향과 궁핍한 유년기를 보낸 까닭에
“아래(국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혁명”과 “평화적인 비폭력주의 혁명”
이라는 톨스토이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인생의 개조! 그런 말을 예사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경험만은
비록 많이 쌓아 왔는지는 모르지만 한 번도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적이 없었던 사람들, 인생의 숨결, 인생의 고동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뿐이에요. 그러한 사람들은 존재라는 것을 아직도 자기네의 손이 닿아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원료의 덩어리, 이제부터 가공해야 할
소재로 생각하고 있어요. -406p-
러시아 내전 시대에 공산주의의 동몽이상(同夢異床) 차이? 아니.
러시아 혁명의 영광스러운 마지막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서로를 학살했던 백군과 적군 지도자의 문제점은 ‘어떻게 하면 인민들을 균일하게 다스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인간을 물리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덩어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생각은 유리가 가지고 있던 신념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유리는 그것에 따르지 않기로 한다.
당신네의 정신적 지도자들은 속담을 아주 좋아해요.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잊고 있지요. 억지로 환심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A 라고 말한 사람은 B라고 말해야 한다>라느니 <무어
인은 제 할 일을 했으니 무어 인은 돌아가도 괜찮다>라느니 하는 따위의 진부하기 짝이 없는 틀에 박힌 말은 딱 질색입니다. 나는 A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B라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407p 발췌-
유리 지바고의 선택은 혁명의 주체가 힘으로 개인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지식인들(고르돈과 두도로프)이 보인 행동 (불만이 있어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지식인들. 더 나아가서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말을 얼굴빛 변하지 않게 내뱉는 지식인들. 결국, 그들의 행위의 변(辨)을 외적인 곳에서 찾아내 정당화하려는 일반적인 지식인들의 모습) 과는
다른 차원의 모습이었다.
<닥터 지바고>의 유리의 고행은 기계문명과 자본주의가
불러오는 자연파괴와 물질만능주의에 반대하며 월든 호숫가에서 집을 짓고 자급자족의 생활을 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삶과 비견된다. 유리가
17장에서 남긴 시들은 기독교적인 색채만 지우면 전원적인 삶을 그리워하고, 평범한 삶을 꿈꾼다는 점에서 월든 호수에서 소로우가 남긴 글과
비슷하다.
<닥터 지바고>에 대한 감상이 이런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읽기 전부터 <닥터 지바고>의 유리와 라라의 만남만을 기다려왔던 것 같다. 그 장면의 본격적인 시작은
13장에서 시작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보리스 빠스쩨르나끄의 소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서사적인 글들을 서론쯤으로 넘겨버린 우를 범했다.
또한, 이 책은 서사적인 인물과 장면에 대한 글 이외에
벌어졌을 법한 사건을 가리는 행간이 너무 많다. 보리스 빠스쩨르나끄는 사건에
따른 감정을 직접 꺼내어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감정들 사이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스뜨렐리니코프의 절규는 그의 행동에 대해서 “왜?” 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모든 이들의 의문을 한번에 해결해주는
동시에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해답이 된다.
“그녀가 겪었던 온갖 부당한 처사를 몽땅 갚아주고, 그녀의 마음에서
저 불쾌한 기억들을 씻어내고, 그리하여 과거의 타락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 하게 하고, 또 세상에서 뜨베르스까야 얌스까야 거리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지요." -561p-
유리가 어린 시절 자신의 솔직한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라라를 보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꼈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사랑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그녀를 보내준다. 한편, 그녀의 남편 스뜨렐리니코프는
사랑하는 그녀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 현실을 엎어버리기 위해 죽는 날까지 행동한다. 이 시대의 러시아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이처럼 다양하다. 누가 그들을 가공할 소재 따위로 생각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