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테오도르 슈토름 지음, 윤용호 옮김 / 종문화사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노인이 “엘리자베트!”라는 여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테오드로 슈토름의 <첫사랑>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노인의 추억 속 10살의 라인하르트에서 다시 노인으로 돌아오는 라인하트르의 여정들의 흐름은 순차적이지만 어찌할 수 없는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흔히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 속설은 <첫사랑>의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베트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을 암시하는 사물들과 그 암시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아려오는 감정이 두드러지면서 여정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습게도 라인하르트의 갈색 외투와 비슷해 보이는 친구 에리히. 가깝지 않은 사이의 에리히가 그녀를 자세히 쳐다보면서 그린 그림. 에리히가 상속받는 임멘 호수의 커다란 농장. 라인하르트가 선물한 홍방울새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노란 카나리아.

 

에리히와 엘리자베트의 연관성을 띄는 다양한 암시들은 라인하르트가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와서 건네준 -라인하르트의 기억 속 그녀의 모습을 담아 손수지은- 한 권의 시집과 영원히 함께하자고 속삭였던 약속을 유효하지 않은 폐지조각으로 만든다. 그러고 보니 산딸기를 따지 못한 채 산에서 내려오던 두 사람에게 노인이 말했던“게으른 자는 먹을 없이 없다네.”의 충격은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예견하는 또 하나의 암시다. 

 

엘리자베트가 에리히와 혼인했다는 사실을 듣고, 제법 세월이 흘러 에리히가 엘리자베트 몰래 라인하르트를 임멘호수의 집으로 초대했던 날. 완전히 엘리자베트를 소유했다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에리히와는 반대로 우리의 라인하르트가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라인하르트 특유의 감성은 에리히와 확연히 비교된다. 너무나도 섬세하면서도 낭만적이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들을 만들었을까요?” 엘리자베트가 물었다.

“아, 그건 노래를 들어 보면 알 수 있지. 재봉사들, 이발사들 같은 유쾌한 부류의 사람들이라오.” 에리히가 대답하자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그 노래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네. 그것은 땅에서 자라기도 하고 하늘에서 떨어지기도 하며, 성모 마리아 이야기처럼 이 지역 저 지역으로 옮겨 다니면서 수많은 곳에서 동시에 노래로 불려진다네. 우리는 이러한 노래를 통해 우리 자신의 행위와 고뇌를 발견하는 법이지. 마치 모두가 그 노래를 짓는 데 힘을 모은 것처럼 말일세.” -78~79p-

 

라인하르트가 임멘호수 한가운데 피어있는 수련을 꺾기 위해 겪은 고초와 다시 한 번 둘이서 산딸기를 따러 갔지만 두 사람의 기억 속에 과거 그 시집 속에 있는 말라붙은 에리카만 남게 되는 이 슬픈 현실은 그들의 사랑이 이미 끝나버렸음을 드러내 주는 또 다른 상징들이다. 이처럼 <첫사랑>의 모든 사건은 상징의 연속이다.

 

나의 어머니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어요.

내가 다른 사람을 택해야 한다고,

예전에 내가 간직했던 것을,

내 마음은 그것을 잊어야 했어요.

내 마음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나는 어머니를 원망해요.

어머니가 잘못하신 거예요.

예전에는 영예로웠던 것이 지금은 죄가 되어 버렸어요.

나는 어쩌면 좋을까요?

 

나의 모든 자랑과 기쁨 대신

슬픔만 얻었어요.

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거친 들판 너머로

아, 나는 구걸하러 갈 수도 있을 텐데! -81p-

 

아마도 엘리자베트가 어머니 때문이라고 감정이입하기에 충분해 보이는 지방의 민요를 듣고서 감추지 못하는 떨리는 손조차 두 사람의 사랑을 돌이킬 수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엘리자베트에게 다시는 안 볼것이라고 말하고 떠난다. 어느 새 노인이 된 라인하르트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제법 슬픈 첫사랑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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