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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여러 곳에서 제기하는 번역문제 때문에 읽기 망설였던 작품이다. 소문에 걸맞게 이야기의 시작부터 생소한 한자어의 나열이 몰입을 방해하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이 한자어들은 자취를 감춘다. 소제목과 입을 맞추며 일어나는 등장인물 간의 갈등 부분이 어느새 한자어의 불편함을 추월하여 달려나가고, 잭과 랠프가 야기하는 급박한 상황의 긴장감에 흠뻑 몸이 젖는다.
갑작스러운 번역문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까지 해봤다. ‘번역자가 어린이를 위해. 그들이 이 책을 쉽게 만질 수 없게 넘기 어려운 장벽 하나를 초반부에 세워 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좋은 것만 보고 들어도 모자랄 판에 또래의 친구에게서 엿보이는 무인도에서의 나약하고 악랄한 인간 본성의 디스토피아를 공개하기 꺼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회의 형태는 개인의 윤리적 성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 외관상 아무리 논리적이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정치체제에 따라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모랄이다. -320P-
골딩은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의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 라고 했단다. 그는 과학자로 교육받은 경험이 있는 이력에 걸맞게 주제를 증명해내기 위해 능숙하게 실험의 변수를 통제하기 시작한다. 무인도에 불시착하게 된 어린 친구들을 실험도구로 사용하여 소라와 안경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면밀히 관찰한다.
소설 곳곳에서 발견되는 무분별한 상징물 중에서 특히 소라와 안경. 그리고 얼굴에 칠해놓은 진흙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소라는 민주주의를 상징이고, 안경은 근대의 문명을 상징이며, 얼굴을 가린 진흙은 원시사회로의 상징이었다.
<파리대왕>을 통해서 우리는 멧돼지 고기 앞에서 지금껏 인류가 이루어낸 정치체제와 물질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살펴볼 수 있다. 창살에 꿰어진 돼지 머리가 파리를 꾀어냈다고 해서 동일하게 사용하는 '파리대왕'이라는 단어가 실제로는 성서에서 유래한 말로 더럽고 본능적인 악을 뜻한다고 한다. 이 머리를 바라보는 사이먼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파리대왕과의 대화에서 랠프와 잭이 <짐승>을 보고 도망쳤던 이유이면서도 이 전쟁의 근본 원인. 인간의 뿌리 깊은 나약함을 엿볼 수 있다.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 -214P-
이 책을 보면서 또 한 가지 느낀 점은 리더의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파리대왕>의 무인도 전투는 랠프와 잭의 구도로 이어지는데, 승리를 거두는 쪽은 잭이 된다. 이 승리에서 나약하고 악한 인간 본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랠프의 리더십 부재의 문제점 또한 눈에 띄게 드러난다.
그들이 다수결로 랠프를 선출한 이유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부분과 소라를 불어서 사람들을 모았다는 이유밖에 없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다수결을 부정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대장으로 선출된 랠프의 정치력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봉홧불을 피워 올리는 당위성을 설명하지 못해 계속 옆자리에 앉아있는 돼지에게 의존하고, 랠프 스스로도 자신이 그 자리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임을 느끼는 내면의 혼잣말은 그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에 반해서 불시착 전에 성가대를 이끈 경험이 있는 잭이라는 인물은 탐욕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마키아벨리식의 통치력을 갖춘 인물로서 랠프보다는 비교적 우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인도에서의 싸움은 단순히 인간의 나약함과 악함의 문제뿐만 아니라 군대를 이끄는 지도자의 역량에도 일부분 달려있다는 사실 또한 추론해볼 수 있는 문제가 된다.
즉, 잭이라는 장수의 역량이 뛰어났기 때문에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객관적인 결과로 이 전투에서 잭의 성향이 악에 가까우므로 인간의 본성을 악으로 정의하고, 악이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식의 결론은 마땅치 않다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견해이다. 물론, 지키는 것보다 깨부수기가 훨씬 더 쉽다는 사실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아주 불리한 싸움임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어미 멧돼지를 사냥하는 장면을 서술하면서 그 묘사를 남성이 여성을 강간하는 것처럼 써놓은 작가의 수법의 치밀함을 지적하는 작품해설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을 일러주었다.그러고 보니 무인도를 지배한 잭의 세력이 랠프를 쫓는 모습의 묘사를 마치 인간이 멧돼지를 사냥하듯 했고, 쫓기는 랠프의 심리에서도 자신이 문명인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는 멧돼지가 되어야만 하는 모순을 설명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