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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슬 시티
김성령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1.책을 읽다 보면 구성적인 부분에서 논리적 오류가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제법 있는데, 어떤 책은 논리적 오류가 계속 눈에 밟히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책은 오류를 발견해도 ‘그래 소설이니 당연히 허구라를 치고 있는 게지’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때가 있는 것 같다. 이중잣대라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다. 프로야구에서도 같은 코스의 공이 스트라이크가 되기도 하고 볼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김성령의 <바이슬 시티>는 후자에 가까웠다. 나에게 ‘허구라의 스트라이크’로 다가왔던 것 같다.왜냐하면, 이 소설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분명한 주제의식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 소개에 <1984>나 <파리대왕>이라는 비교 불가능한 명작을 나열해버린 것은 조금 아쉽다. 왜냐하면, 괜스레 비교되는 포지션이 형성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독자가 가진 고유한 즐거움 하나를 잃어버리기 만들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소설을 끼워 맞춰보고 즐거워하는 중요한 재미 말이다.
선과 악의 구도를 설정해놓고, 선의 성장과 흩어짐과 성장의 반복 과정과 숭고한 희생. 그리고 악의 우두머리인 바이슬의 어처구니없는 몰락을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 헨릭 시엔키에비츠의 <쿠오 바디스>와 상당 부분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바이슬 시티>는 <1984>와 <파리대왕>이라는 태생적인 근원에서 시작해서 <쿠오 바디스>의 평면적인 설정과 소수의 선이 악을 이겨내는 결말까지 유사한 작품으로서 고전적 색채를 짙게 풍기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2.<바이슬 시티>는 시민 자신의 유토피아가 아닌 미국정부 당신의 유토피아를 위해 건설된 바이슬 시티라는 정(정치가)·경(경찰)·조(조직폭력배)간의 유착관계로 형성된 불합리하고 폐쇄적인 지배당의 공간에서 흩어져있던 소수의 개인이 침묵을 벗어던지고, 진실을 자유롭게 말하면서 개혁의 유토피아를 이뤄낸다는 작가의 솔직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바이슬 시티>에서 격렬한 정치투쟁의 드라마를 쓰고 있는 주역을 15세의 아이들이 맡는 아주 희한한 그림이 그려진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미래를 이끌 주역이기에 미리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반개혁부의 아이들에게 힘을 부여하려는 지배당의 논리와 반개혁부에 대항하여 부조리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시드니와 네이튼과 개혁부가 첨예하게 맞선다. 반개혁과 개혁의 대립 때문에 시드니가 극복해야만 했던 무거운 아픔들은 꽤나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새벽에 오랜만에 울컥했다. 문장이 아닌 이야기에서…….
결국, 학교에서 시작되는 반개혁부와 개혁부의 싸움이 바이슬 시티 전체의 승패를 결정짓게 되는 주요한 사안으로 자리 잡는다. 데미안의 전략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데미안도 인정한 부분이다. 시드니의 의지로 지켜주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의 작품에서만 만나고 싶다. 덧붙여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만약 세습 바이슬이 맥과이어라고 가정한다면, 개혁부의 승리는 훨씬 더 완벽할 것 같다. 그렇게 상상하기에 너무나도 충분한 개연성이다.
개혁파 어른들은 ‘사회가 잘못되었다’ 또는 ‘사회를 뒤바꿔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지, 정작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69p-
여러분은 침묵 속의 다수였던 겁니다! 이 침묵을 깨고 나온다면, 여러분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목소리를 갖게 되는 겁니다. -196p-
돌연변이와 정상인의 수가 같아지면 더 이상 그들을 돌연변이라고 부를 수 없게 돼요. -35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