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떠돌이 소의 꿈 - 이중섭의 삶과 예술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예술기행
허나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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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나영 작가의 <이중섭, 떠돌이 소의 꿈>은 이쪽 계통은 문외한인 나에게 이중섭 화가의 고난의 삶과 세상에 남긴 흔적으로 안내해 주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십대 시절 그녀는 이중섭 화가의 <흰 소>를 처음 마주하면서 느꼈던 흰 소의 굳건하고 의연한 인상 덕분에 미술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현실적인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천재화가 이중섭에 대한 짝사랑은 <이중섭, 떠돌이 소의 꿈>으로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었다.


2.


작가는 마치 순례 기행을 하는 것처럼 이중섭 화가가 생전에 머물렀던 고장(일본, 부산, 제주도,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답사하고, 도시가 되어버린 현재의 공간에서 이중섭의 흔적을 찾으려 애쓴다. 물론, 사후 60년이 지난 뒤에서야 방문한 그곳에는 이중섭이 남긴 흔적보다는 이중섭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이 대부분이었다.

허나영 작가는 이중섭 화가의 어려웠던 시절의 삶과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보낸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절박하게 작품 활동을 했던 이중섭 화가를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을 우리들에게 소개한다. 대중들에게 공개된 이중섭 화가의 작품에 대한 여러 갈래의 전문가 해설들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자신의 의견도 간결하게 전달해준다.


민족화가 이중섭의 한국 화공이라는 정체성과 이중섭 화가의 분신으로 평가받는 소의 몸짓을 그린 역동적인 작품, 아이들. 특히 이중섭 화가의 자식을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그려낸 군동화. 그가 머물렀던 고장의 목가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 풍경화, 그리고 담배를 감싸는 은지에 스케치(드로잉)를 한 은지화, 마지막으로 일본으로 떠난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와 엽서에 그린 작품들까지. <이중섭, 떠돌이 소의 꿈>에서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


3.


이 책에는 작품의 모범 답안이 있다. 그렇지만 인상 깊었던 몇 가지 내용을 정리해보고 싶어서 느낀 것을 써보려 한다. 다음에 이중섭 화가와 관련된 작품을 다시 만났을 때를 위해서.


107. 이중섭이 그리는 아이들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특유의 간단한 윤곽선으로 아이들의 다양한 움직임을 그리고, 많지 않은 색으로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래서인지 이중섭의 군동화는 인기가 꽤 높다. 어쩌면 우리 역시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추억하고 있어서는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그림 속에서 재미있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이중섭이 그린 아이들은 즐거움, 행복, 기쁨 등 긍정적 감정으로 충만하다.


이중섭 화가가 그린 군동화의 특징은 작가가 소개하는 그대로다. 대표적으로 <서귀포 환상>이라는 작품이 그렇다.  

 

나는 이 작품의 밝음에서 이중섭 화가의 더 큰 쓸쓸함을 감지한다. 배고프고 추운 날의 추억이었지만, 온 가족이 함께 였었던 제주도에서의 1년 남짓한 시간. 그림에 담긴 찰나의 행복을 다른 시간으로 끌어왔다는 점에서 이중섭 화가는 작금의 힘든 현실을 어떻게든 이겨내려 애쓰는 마음이 느껴졌다. 이중섭 화가는 아름다운 순간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이러한 밝음을 과시하듯이 꺼내놓음으로써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희망을 채우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의지를 굳건하게 다지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SNS에 올리는 행복한 사진들처럼 말이다.


4.

이중섭 화가가 그린 소들의 모습은 조금씩 변화하는 그의 자화상을 옮겨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144. 이중섭에게 소는 가장 오랫동안 그렸던 소재로, 오산학교 시절부터 소를 그려왔다. 소를 오랫동안 그린 것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다. 첫째로는 한국의 민족성을 상징하기 위한 소재로 소를 사용했다는 견해다. 일본 유학시절 당시 여자 친구였던 마사코에게 자신이 그린 것은 조선의 소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사실과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조선 유학생들 사이에서 소와 관련된 그림이나 연극이 공공연하게 만들어졌다는 점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중섭이 소로 한국의 민족성을 드러낸다고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한국의 화공이므로 한국적인 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언급한 점에서 한국을 재표하는 동물로 소를 화폭에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으로 이중섭이 그린 소는 불알을 강조한 수소라는 점에서 화가 자신의 은유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어떠한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소처럼 무거운 걸음'을 걸으며 그림을 그린다고 쓴다. 조카 이영진이 회상한 서귀포 단칸방 벽에 있던 시 <소의 말>에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라면서, "맑에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라  쓰고 있다. 슬픈 현실이지만 희망을 갖고자 하는 이중섭의 심경을 담았다는 것이다.


146. 특이한 점은 소만을 단독으로 그린 소 그림에서 유독 거친 붓질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군동화나 소가 아이들이나 가족과 함께 있는 그림에서는 둥근 윤곽선으로 형태를 그리고 화면도 밝은 분위기가 대부분이다. 히자만 소가 단독으로 그려진 그림에서는 유독 매우 화가 나 있는 듯 거칠게 표현되어 있다.  

 

가난 때문에 가족과 생이별하게 되었어도 재능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우수한 작품을 남긴다면 잃어버린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이고 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린 소의 모습은 이처럼 거칠었지만 위풍당당한 자신을 그대로 닮아 있다. 그러나 곧이어 소개하는 그림은 이중섭 화가의 자아와 그의 굳건한 믿음을 방해하려는 무언가의 싸움을 의미하듯 두 마리의 소가 서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  

 

이 싸움을 두고 허나영 작가는 예술성만 쫓고 싶은 이상적 자아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현실적 자아의 싸움으로 해석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궁핍하지만 모든 어려움을 창작 활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뜻하는 흰 소와 이런 마음가짐으로 온 종일 창작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도무지 진전을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뜻하는 푸른 소의 싸움이 아닌까 싶었다. 실제로 그가 그린 작품들은 팔리긴 했지만 제 값을 받지도 못하거나 돈을 떼이기가 부지기수였고, 그나마 벌어들인 돈도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느라 탕진해버렸으니 말이다.


151. 이중섭에게 소는 바로 자신이다. 동시에 자신이 '한국의 화공'이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듯 한국의 소이기도 하다. 그는 다른 어떠한 소재보다 황소의 움직임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를 더 자세하게 표현했다. 이는 이중섭이 얼마나 소와 하나가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다. 머릿속으로 익히고 가슴속에 새겨 손을 통해 표현되는 경지를 넘어 자신이 울 때 함께 울고, 괴로워할 때 함께 소리쳐주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시간차를 두고 그린 동일한 배경의 황소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노쇠함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듯이 그렸지만 살아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 어쩌면 이중섭 화가의 말년의 비극을 예고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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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도티의 삶을 바꾸는 마술가게
제임스 도티 지음, 주민아 옮김 / 판미동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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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크릿>처럼 설득력도 없이 우주의 기운 운운하며 '성공/처세'에만 매달리는 자기계발서를 매우 싫어한다.


2.


<닥터 도티의 삶을 바꾸는 마술가게>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은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나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같은  '자기계발형 소설' 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게도 이 이야기가 놀랍게도 모두 실화라고 한다. 그것도 신경외과 의사이자 달라이 라마의 후원을 받는 단체에 속해있으며. '연민과 이타심 연구 및 교육 센터'의 창립자'인 작가. 제임스 도티가 직접 겪은 일이라고 한다.

이 책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딛고 일어난 자신의 인생담을 대중들에게 강연하던 중 이야기 자체에 흥미를 느낀 출판업자의 권유로 쓴 글이라고 한다.  


3.


<닥터 도티의 마술가게>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자기계발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주인공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한 사람의 멘토가 우연히 등장한다. 그 멘토는 자기 계발 공식을 하나씩 나열하고, 주인공은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배운다. 

루스의 마술로 이름 붙여진 이것을 작가는 1. 몸의 긴장 풀기, 2. 마음 길들이기, 3. 마음 열기, 4. 의도를 명확하게 하기로 분리하여 이해하기 쉽게 소개한다. 이것을 멘토와의 대화로 풀어보고, 직접 요약정리까지 해준다. 요약한 바에 따르면 루스의 마술이라는 4단계 공식은 명상과 <시크릿>류 같은 로드맵 그리기 같았다. 그것을 받아들인 주인공은 당연하게 성공에 이르게 된다.


이 책의 해답이 수많은 자기 계발 작가가 내린 정답과 가까운 것은 맞지만, 이 책만이 유일한 정답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느꼈다.


4.


솔직히 처음에는 <시크릿>처럼 싱겁게 끝날 것 같아서. 이 책을 추천한 사람들은 정말로 제 정신이 아니구나 싶은 배신감도 들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 2부와 3부. 그의 소망대로 의사가 되기 위한 여정과 자신의 뜻대로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점점 오만해져가는 주인공. 그리고 롤러코스터같이 오르내리는 인생의 성공과 좌절의  과정을 읽으면서 <시크릿>과 조금은 다른 점들을 찾을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크릿>은 세속적인 성공 비법만을 다루는 책이지만, <닥터 도티의 삶을 바꾸는 마술가게>는 물질적 성공보다는 내면의 평화로움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책이다. 거기에 덧붙여 내면의 평화로움이 실제로 몸의 건강과 연결되는 이유 뇌와 심장의 연결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설득력있게 주장하는 책이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의 중요성은 ​도티 박사에게 찾아온 두 번의 커다란 위기를 겪으면서 드러나게 다. 7500만 달러를 날려버리고 파산했을 때, 그리고 임사체험을 겪을 때, 그를 지탱한 것은 물질적 풍요로움이 아니었다.  


271. 마음의 나침반. 미주 신경을 통한 뇌와 심장 사이에 존재하는 사실상 일종의 의사소통이다. 흔히 뇌가 심장에 많은 신호를 보낼 것 같지만 연구에서 밝혀진 바로는 심장이 뇌에 훨씬 더 많은 신호를 보낸다. 체내 인지 체계와 감정 체계는 둘 다 지능형이지만, 심장에서 뇌로 가는 신경 연결이 그 반대 경우보다 훨씬 많다. 우리의 사고와 감정은 둘 다 강한 힘을 갖고 있지만 강렬한 감정은 사고를 침묵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강렬한 감정에서 쉽사리 빠져나올 수는 없다. 우리는 뇌를 합리형으로, 심장을 관계형으로 구분하고 둘을 따로 분리하지만 궁극적으로 뇌와 심장은 하나의 통합된 지능 체계 중의 일부다. 심장을 둘러싼 신경 회로망은 사고와 추론에 있어 필수적인 부분이다. 개개인의 행복과 집단의 안녕은 뇌와 심장의 통합과 공동 작업에 달려 있다. 루스가 나한테 시켰던 훈련은 내 몸 안의 두 개의 뇌, 다시 말해 '머리-뇌'와 '심장-뇌'를 통합하는 데 유용했을 것이다.


5.


147. "계속 그렇게 하면. 날마다, 매주, 매달, 해마다, 네 머릿속에서 그 창을 통해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뭐든 진짜 현실이 될 거야. 그 창 안에 있는 것을 네가 이미 가졌다고 상상하면 할수록, 또는 그 창 안에 있는 모습대로 네가 이미 되었다고 상상하면 할수록, 그 일은 더 빨리 이루어질 거야."


다시 고민한 결과,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닥터 도티의 마술가게>에서의 도티의 성공에 <시크릿>이 일정부분 맺어져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닥터 도티의 마술가게>는 <시크릿>처럼 당신이 품고 있는 모든 탐욕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성공'이라는 문제를 나와 타자. 개인과 사회로 확장시켜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평화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한다. 이것이 루시의 진심이었고, 이 사실 뒤늦게 알게 된 도티는 '마음의 글자'로 내면을 평화롭게 하는 비법을 밝혀내었다.


281. 가르침의 핵심이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그건 바로 뚜렷한 의도와 목적을 갖고서 친절하고도 연민 어린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내가 마음을 빼앗긴 분야 중 하나는 뇌와 심장이 어떻게 역할하며 상호작용하는지 이해하는 것이었다. 연민, 친절, 배려는 뇌 안에서 그들만의 전형적인 테마를 구성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쪼록 작가의 진심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는데.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이 앞부분을 너무 <시크릿>으로 만들어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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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약속
로맹 가리 지음, 심민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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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맹 가리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있는 <새벽의 약속>에는 절대적이며 위대한 '신'이 등장한다. 이 신은 인류를 전쟁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는 신들. 어리석음의 신 '토토슈' 와 절대진리의 신 '메즈자브카'. 그리고 편견과 증오의 신 '필로슈'를 혼자서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신이었다.


이토록 위대한 신이 로맹 가리를 탄생시켰다. 로맹 가리는 유대인이면서 러시아의 빈민으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상태로 태어났다. 신은 갓 태어난 로맹 가리를 품에 안고, 이상적인 국가. 프랑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신은 자신을 생함으로써 그를 길러냈다. 로맹 가리의 재능을 믿음으로 살펴주었으며. 그가 위대한 작가와 군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시련에 맞서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13. 나는 팔로 OOO의 어깨를 감싸 안고서, OOO를 위해 내가 벌이려고 하는 모든 투쟁들을 , 내가 내 인생의 새벽에 나 자신과 맺은 약속을 생각하였다. OOO 말이 다 옳았던 것이 되게끔 만들리라. OOO의 희생에 의미를 주리라, 저들과 당당히 세계의 소유권을 두고 겨루어 이긴 다음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는 약속을. 나는 걸음마를 할 때부터 저들의 권능과 잔인함을 알아보도록 너무도 단단히 배웠던 것이다.


로맹 가리는 인생의 어느 새벽에 한 약속을 평생 지키겠다고, 평생동안 신의 말씀을 따르겠노라 맹세한다. 왜냐하면, 신이 자신의 곁에 머무른다면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무사히 비껴나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정체모를 확신이긴 했지만 말이다.


46.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나는 항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고 위험과 대면하였다. 어떤 일도 내게 일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OOO의 해피엔드이므로, 인간이 절망적으로 세계에 부과하려하는 천칭의 균형 이론을 통해 나는 항상 자신을 OOO의 승리로 보았다. 


아래의 문장은 전쟁 중에 그를 찾아온 신의 목소리다. 이 목소리의 공통점은 로맹 가리의 의도대로 무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의 무의식으로부터 튀어나와 그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경고음을 알렸다.


318. OOO는 분개하였다. OOO는 잠시도 나를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OOO는 화를 내고 노발대발하고 항의하였다. 나는 OOO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OOO는 내 피의 혈구 하나하나에서 흥분하였고, 내 심장의 맥박마다 화를 내고 폭동을 일으켰으며, 나를 들볶고 무엇이든 해보라고 재촉함으로써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다. 

320. OOO의 모습은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OOO의 본성 중 가장 강한 무엇이 그때까지 내게 남아 있던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무엇을 결정적으로 눌러 이김으로써, OOO가, 광폭함과 흥분과 무절제와 공격성과 제스처와 드라마에 대한 취향 등 극단적 성격의 모든 면모들을 고스란히 발휘하며, 정말 나로 화해버렸던 것은, 그 이상하고 얼룩덜룩한 군중 속을 고독하게 헤매던 긴 시간 중 어느 때 였을 것이다.
 

321. OOO는 내가 가는 어디에도 따라다녔고, OOO의 목소리는 가차 없는 조롱을 품고 내 속에서 올라왔다. 


2.


159. 다른 수많은 낙오자들이 그렇게 하듯 문학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점점 더 웅변적이고. 점점 더 찬란하고, 점점 더 절망적인 가명으로 뒤덮인 노트들이 책상 위에 쌓여갔고, 단숨에 과녁을 꿰뚫고 싶은, 지체없이 성화를 훔쳐내어 의기양양하게 세계를 밝히고 싶은 욕망 속에서, 나는 책들의 표지 위에서 내게는 새로운 것들인 앙투안 드 셍텍쥐페리, 앙드레 말로, 폴 발레리, 말라르메, 몽테를랑, 아폴리네르 같은 이름들을 읽었다. 


로맹 가리는 우여곡절 끝에 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그가 문학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은 사르트르의 경우와는 달랐다. 사르트르처럼 운명이 저절로 그를 문학이라는 본질로 이끌지 않았다. 신은 가장 먼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다른 분야의 재능이 그에게 없음을 확인했다. 재능이 없어서 테니스 코트 위의 광대가 된 적도 있었다. 망신을 당하는 순간에도 요술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로맹 가리는 다른 수많은 낙오자들이 그렇게 하듯 문학쪽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고백한다.   


134. 마지막 공은 그의 한계 밖에 있으며 그의 모든 작품들은 그 고통스런 확인의 소산인 것이다. (...)

파우스트의 진정한 비극은 자기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다는 사실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비극. 그것은 당신을 위해 당신의 영혼을 사줄 악마가 없다는 사실이다. 구매자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건, 아무도 당신이 마지막 공을 손에 널을 수 있도록 도와주러 오지 않는 것이다. 


재능이 없다는 절박함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작가라는 꿈. 그것마저도 실패할 수 없었던 로맹 가리는 열심히 쓰고, 읽었다. 물론, 창조주의 기대에 부응하여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로맹 가리가 유일하게 부러웠던 점은 마지막 공을 잡을 수 없어도, 그의 재능을 사주고. 재능이 꽃피도록 기다려준 구매자가 바로 곁에 있었다. 아니. 마지막 공을 잡기까지의 그 인내와 노력을 높이 평가해준 구매자가 곁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3.


신의 가호속에서 그는 조금씩 성장한다. 로맹 가리가 재능을 발견하기 전의 이야기. 성스러운 작업에 임하고 있는 위대한 거장에 대한 추억에 대한 에피소드와 사랑을 알게 되지만 그 덕분에 인간은 어떤 것을 결정적으로 획득하거나, 또는 확고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간직할 수 없음을 깨닫는. 유년 시절의 순수함을 읽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로맹 가리의 성장을 보여주는 문장을 읽는 즐거움이 훨씬 컸. 특히, 165페이지의 유머에 대한 고찰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신에게 무조건 의지하는 방법 외에 유머로서 현실을 넘어뜨리고, 적들의 항복을 받아내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상징한다.  


165, 본능적으로 나는 유머라는 것을 발견해내었다. 현실이 우리를 찍어 넘어뜨리는 바로 그 순간에도 현실에서 뇌관을 제거해버릴 수 있는 완전히 만족스럽고 능란한 방법 말이다. 유머는 살아있는 동안 내내 나의 우정어린 동료였다. 진정으로 적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순간들. 그 순간들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유머 덕분이었다. (...)

나는 기꺼이 그 무기가 내 자신을 향하게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나' 나 '자아'를 통해 그 유머가 바로 우리의 근원적 조건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유머는 존엄성의 선언이요, 자기에게 닥친 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의 확인이다. 완전히 유머를 잃은 내 '친구들' 중의 어떤 이들은 나의 글, 나의 말 속에서 내가 이 중요한 무기로 하여금 내 자신을 향하게 하는 것을 보고 슬퍼한다. 유식한 그들은 마조히즘과 자기 혐오에 대하여 말하며, 나아가서는 내가 가까운 사람을 이 해방 작업에 끌어들이기라도 하면, 노출증과 상스러움에 대해 말한다. (...)


사실인즉, '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자아'를 과녁으로 삼지 않으며, 다만 그것을 뛰어넘는다. 인간 조건의 덧없는 모든 육화물들을 통해 내가 공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인간 조건 자체에 대해서요, 밖에서부터 우리에게 부여된 상황, 뉘른베르크의 어떤 법처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된 법에 대하여서 인 것이다. 


남들로부터 조금씩 작품을 인정받고, 전쟁 중에도 쓰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작가의 꿈을 계속해서 이어가던 도중. 결국, 로맹 가리는 마지막 공을 잡을 수 있도록 설계해놓은 커다란 재능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재능이었다.


244. 나의 자아 중심주의는 사실 어찌나 대단한 것인지 나는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나 자신을 발견하며, 그들의 상처 속에서 아파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짐승들, 나아가선 식물들에게까지 확산된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투우장에 모여 상처 입고 피 흘리는 황소를 전율도 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아니다. 나는 그 황소다. 


아울러 <유럽의 교육>과 <자기 앞의 생>에서 읽어낼 수 있었던 '인간됨의 명예'. 이것 또한 신이 그에게 선물한 큰 선물이 아닌가 싶다.


213. 내 책들이 모두 존엄성과 정의에의 호소로 가득 차 있고, 그 속의 인물들이 그토록 열심히, 그토록 소리 높여 인간됨의 명예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스물 두 살이 되도록 병들고 지친 늙은 여인의 노동에 의해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OOO가 무척 원망스럽다. 


4.


179. OOO가 내게 기대하고 있는 것을 이루어내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정의를 보지도 못한 채, 무게와 척도의 인간적 법칙을 하늘에 투영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OOO가 지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에겐 양식에의, 양풍에의, 순리에의 도전이요.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강도 짓이요. 경찰을 부르고 도덕과 법과 권위에 호소해도 좋을 무엇인 것 같이 생각되었다. 


<새벽의 약속>에서 로맹 가리는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신과의 작별의 순간을 걱정한다. 그의 불안함은 너무나 당연했다. 왜냐하면, 로맹 가리의 신은 로맹 가리처럼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신의 이름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로맹 가리는 어머니가 로맹 가리 당신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함을 느꼈고, 더욱 자신의 재능을 향해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의 욕심처럼 일이 풀리지 않는다.


250. 시계와 겨루는 내 경주는 절망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으며, 나의 문학은 그것을 반영하였다. 세상이 놀라서 입을 헤 벌리게 할 어떤 굉장한 꽹과리를 울리고 싶은 욕망 속에서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이상으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위대해지려 하다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과장에 지고 말았다. 모두에게 내 키를 깨닫게 하기 위해 발 끝으로 섬으로써, 나는 내 야망의 치수만을 보여주었다. 천재성을 보여주려 결심한 나머지, 내가 도달한 것은 재능의 결여뿐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을 느낄 때, 올바르게 노래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전쟁 중 내가 죽은 줄로 알았을 때 내 원고 중 하나를 평가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로제 마르탠 뒤 가르가 '성난 양'이라고 했던 것은 옳은 말이었다. 아마도 내 투쟁의 고통스런 성격을 간파했던지, OOO는 나를 돕기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였다.


그는 또 다시 좌절하고 있었다. 세상을 진정시키고, 다스릴 수 있는 유머의 힘을 발견하고, 세상의 모든 존재에서 자신과 닮은 점을 찾아내고, 그의 소설이 지닌 '인간됨의 명예'라는 빛나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로맹 가리는 여전히 마지막 공을 잡으려고 성급하게 글을 썼고, 설익은 원고지를 보며 슬퍼하고 있었다. 


좌절의 이유는 어머니의 남은 삶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기 때문이고, 반면에 그의 역사는 이제 시작되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로맹 가리에게는 신이었던 어머니의 존재는 그의 다급함을 간파하고, 로맹 가리의 의식 안에서 독립된 존재로 자리함으로써 그를 격려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가 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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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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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단순하다. 1부의 제목이 읽기. 2부의 제목이 쓰기이길래 그냥 집어들었다. 이 제목을 통해서 내가 알고 싶었던 의미란 'how to'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는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글을 쓰는가? 나는 그게 궁금했다. 사르트르의 <말>에서 그것을 굳이 찾으라고 하면 못찾을 것도 없지만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가 아니었다.


2.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 자서전이다. 읽기와 쓰기라는 소제목만 보고 읽은 책인데 자서전이었다. 59세에 발표한 이 작품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서술한다. 사건 위주의 서술이 아니라 생각 위주의 서술이다. 사르트르의 깊은 성찰과 빛나는 문장을 읽을 수 있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삶을 살아왔는지 아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3.


이 책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책이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로 태어나서 우여곡절을 거치며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없는 실존을 사르트르라는 존재의 본질로 빚어나가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여러가지 시행착오들은 진정성있게 다가온다.


4.


이제 본론을 시작해보자.

인정욕구. 사람들은 누구나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한다. 보통 사람들은 인정욕구(타인의 기대)를 충족하며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자신의 내면에 인정욕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에 큰 좌절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본질이 아닌 타자가 원하는 본질. 엄밀하게 말해서 할아버지가 요구하는 본질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어른들에게 신동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그렇게 해서 남들의 환심을 구걸했다. 이러한 감정들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아주 깊게 생각한다.


이 문장들은 그런 점을 토로하는 문장들이다.


33. 나는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다. (중략) 나쁜 소문이나 안 날까 무척 두려워했던 나는 오직 나의 훌륭한 행동을 통해서만 남을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고는 그런 안이한 승리를 스스로 마련하고는 자기의 성질이 착하다고 혼자 믿어버린 것이다.  (중략) 나는 악이 발붙이기에는 나쁜 땅이다. 착한 연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애써 노력하거나 스스로를 억제할 필요가 없었다. 

34. 세대의 싸움에서 흔히 어린애와 노인은 한패가 되는 법이다. 어린애가 신탁을 내리면 노인이 그것을 푼다. 자연은 말을 하고 경험은 통역을 하는 것이다. 

36.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창조해 나간다. 나는 증여자인 동시에 증여물이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나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 알았겠지만, 죽었으니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남들의 사랑에 함빡 젖어 있으니까 권리가 없고 또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주니까 의무도 없다. 단 하나의 임무가 있다면 그것은 환심을 사는 것이다. 만사를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44. 사람은 저항함으로써만 자신을 확정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속속들이 불확정적인 존재였다.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앞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사랑한 일이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워하는 동시에 환심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또한 환심을 사려는 동시에 사랑할 수도 없는 법이니까.  


나는 나르시스였을까? 아니, 나르시스조차 아니었다. 남의 환심을 사는 데만 너무도 골몰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으니 말이다.


93. 결국 나는 가짜 어린애였고, 가짜 샐러드 바구니를 들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내 행위가 한낱 시늉으로 변질하는 것을 느꼈다.(중략) 어릿광대 짓으로 어른들의 비위를 맞추기만 했던 내가 어찌 그들의 속내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겠는가?


5.


54. 할아버지의 서재는 거울 속에 사로잡힌 세계였다. 그것은 현실의 세계와 똑같은 무한한 부피와 다양성과 의외성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터무니없는 모험에 나섰다. 책이 눈사태처럼 쏟아져내려 그 속에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의자와 책상 위로 기어올라가지 않고는 못 배겼다.


결과적으로. 유년시절의 그는 타인의 환심에 굶주렸던 수동적인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책더미에 파묻힌 점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결정적인 장면이긴 하지만. 완벽을 위해서는 하나의 오점마저도 용서할 수 없었던 사르트르는 인정욕구의 그늘진 면을 바라본다.


완벽한 것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생각한 그의 관념은 그것을 쫓기 위한 필생의 노력이 이어질 것을 예고했다. .


56. 사람과 짐승이 모두 '진짜로' 거기 있었다. 삽화는 그들의 몸이고 글은 그들의 영혼이며 독특한 본질이었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짐승은 그 원형과 다소간 닮은 점은 있지만 원형의 완전성에는 못 미치는 흐리멍덩한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정신 상태로 보아 플라톤주의자가 된 나는 지식에서 출발해서 사물로 향했다. 나로서는 사물보다도 관념이 한결 현실적이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관념이 먼저 주어졌고, 더구나 사물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그것은 동화되고 분류되고 규정되고 사색된 세계, 그러면서도 아직도 무서운 세계였다. 나는 책에서 얻은 무질서한 경험과 현실적인 일들의 부조리한 흐름을 혼동했다. 나의 관념론은 바로 여기에 유래한 것이며 나는 그것을 청산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한편, 어머니와 할머니에 의하여 할아버지의 책장(뜻모를 어려운 책더미)에서 벗어나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는 책(81. 어머니는 나를 다시 어린이답게 만들어 줄 만한 책들을 구하기 시작했다)의 황홀경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러한 책을 읽으며 어린 사르트르는 막연히영웅을 꿈꾸게 된다. 영웅 (초인, 철인 )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낙관적인 세계를 꿈꾼다. 어린 나이의 사르트르는 그곳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했다.

82. 그것은 순수한 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선 앞에 무릎 꿇기 위해서만 나타난 악이어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면 모든 것이 다시 제대로 자리 잡게 되어 있었다.


84. 이러한 잡지와 책을 통해서 나는 내 속에 가장 깊이 스며든 환상인 낙천주의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6.


영웅을 꿈꾸고, 영웅이 되려는 그의 상상력은 책을 읽는 것을 뛰어넘어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나중에 이르러서는 직접 글을 쓰는 행위로 전이된다. 보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의 전환. 여기에 여러 변곡점이 숨겨져 있다.


95. 사람들은 내게 우리 모두가 서로 연극을 꾸미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타일렀고 나도 그 점을 인정했다. 다만 나는 그 주역을 맡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청천벽력에 망연자실한 순간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가짜 주역을 연출하고 있음을 깨달은 때였다. 대사도 있었고 여러 차례 무대에 얼굴을 내놓기도 했지만 정작 나 자신을 보여 줄 장면은 없었다. 한마디로 내 역할은 어른들의 상대역에 불과했다.


124. 모든 일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다. 상상적인 아이였던 나는 상상으로 나를 방위한 것이다. 나는 한결같이 정신적 유희만을 일삼았다. 나는 잘못 등장했다가 병풍 뒤로 물러가고, 온 세계가 조용히 나를 요구하는 바로 그 순간에 알맞게 다시 출현하곤 했던 것이다. (중략) 이제는 남의 환심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압하는 것이 목표였다. 


136. 나는 한없이 흐뭇했다. 내가 살고 싶은 세계를 발견했고, 절대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등이 다시 켜졌을 때의 불안은 또 어떠했던가! 그 등장인물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는데, 그들은 그들의 세계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들의 승리를 내 골수에 사무치도록 느꼈지만, 그것은 다만 그들의 승리였고 내 것은 아니었다. 거리로 나서자 나는 내가 여분의 존재라는 것을 다시 느껴야 했다. 


그는 책과 영화에서 이상적인 세계를 발견했고, 그 세계를 눈으로 훑어가면서 절대의 경지와 쾌감에 도달했지만. 책을 덮거나 전등이 꺼지는 순간 그 존재들은 사라지는 허무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 허무함은 어린 사르트르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 주위에서 주인공의 승리를 응원하는 여분의 존재라는 것을 상징하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이 감정은 낯선 감정이 아니었다. 몸이 약한 사르트르로서는 이러한 허무함과 여분의 존재라는 감정은 현실에서도 종종 느끼는경험이었다. 결국, 책과 영화를 보는 것. 이러한 수동적인 형태의 생활로는 그가 원하는 본질에 닿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보는 것이 수동적이라면 쓰는 것은 능동적이다. 154페이지의 인용구. 그의 상상이 상상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글로 현상화가 일어날때의 전율을 읽으면 보는 것과 쓰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게된다. 그는 말과 글을 통하여 세상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책 속의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안에서 그는 마침내 절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절대자로서의 쾌감을 마음껏 즐겼다.


154.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기쁨이 넘쳐흘러서 금방 펜을 놓았다. 속임수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말이 사물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써 놓은 꼬불꼬불한 작은 글씨가 도깨비불과 같은 빛을 잃고 차츰차츰 탁하고 단단한 물질처럼 굳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를 흥분시켰다. 그것은 허상의 실상화였다. 내가 호명만 하면 사자도 제2 제정 시대의 대장도 또 사막 지대의 베두인도 어김없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글자와 한 몸이 되어 영원히 사로잡혀 있게 될 운명이었다. 


166.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 글을 쓰기 전에는 거울 높이밖에는 없었다. 한데 최초의 소설을 쓰자마자 나는 한 어린애가 거울의 궁전 안으로 들어선 것을 알았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그런들 어떠랴, 나는 기쁨을 알았다. 이중의 노리개와 같던 어린애가 이제 자기 자신과 사적인 데이트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7.


쓰는 것은 쾌감을 불러왔지만, 진정한 쓰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그의 고백은 '깊이에의 강요'와 비슷하다. 상상하고 글로 써내려간 글 안에서만 영웅이 되는 것에 만족했던 어린 사르트르는 이제 조금씩 자신의 글을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한마디로 위대한. 그것을 넘어 절대적인 작가를 욕망한다.


180. 위대한 작가는 편력기사와 닮은 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남들로부터 뜨거운 감사의 표현을 자아내는 사람들이다. 


183. 벌써 나의 존재를 요구하는 곳이 어디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너무 이르다. 나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욕망을 채워 줄 아름다운 대상이다. 그러니 앞으로 얼마 동안은 무명으로 남아 있어도 전혀 상관없다. 때로는 할머니가 대여 도서관으로 나를 끌고 갔다. 생각에 잠긴 듯한 키 큰 부인들이 불만스러운 낯을 하고 마음을 채워 줄 작가를 찾아서 이벽에서 저 벽으로 조용히 왔다 갔다 했다. 나는 그 거동이 재미있었다. 물론 그런 작가가 있을 리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니까 말이다. 아직은 그들의 치맛자락에 묻혀 있는 꼬마, 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 꼬마니까 말이다


183에 적힌 그의 자신감을 봤을 때, 사르트르는 언젠가는 반드시 위대한 작가가 될 인물이었다. 184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마침내 사르트르라는 존재가 스스로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을 알린다.


184. 샤를 슈바이체르가 할아버지라는 것이 분명하듯이, 내가 작가라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날 때부터 그랬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불안이 이와 같은 흥분을 좀먹는 때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보증해준 것으로 믿었던 그 재주가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는 싫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의 사명이라고 치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를 밀어주는 사람도, 나를 진실로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어서 그런 사명을 나 스스로 꾸며 냈다는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세계로부터 불쑥 출현하여, 남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는 그런 '타자로서의 나'가 되기 위하여 '자연'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나는 내 '운명'을 마주 보았고 똑바로 인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자유'였다. 나는 내 자유를 마치 외적인 힘처럼 내 앞에 우뚝 세워 놓았던 것이다. 요컨대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완전히 속일 수도 없었고 미몽에서 완전히 깨어날 수도 없었다. 나는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망설임은 전부터 지녀 오던 문제를 다시 야기했다.


이런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사르트르라는 존재의 '본질'. 이것의 깨달음은 불멸의 존재를 꿈꾸는 단계로 한단계 더 발전한다. 죽음 이전의 삶이란 이란 자신이 위대한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고, 죽음 이후의 삶이란 살아있는 동안의 노력이 제대로 평가될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


207. 나는 죽음에 현혹되었다. (중략) 나는 죽음과 영광을 같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내 목표로 삼았다. 나는 죽고 싶었다. 때로는 무서운 생각이 이런 초조감을 짓눌렀지만 그 공포가 오랫동안 계속된 일은 없었다. 나의 거룩한 기쁨이 다시 태어나, 나는 벼락이 떨어져 뼈까지 홀랑 타 버릴 순간을 기다렸다. 우리의 깊은 의지는 서로 떨어질 수 없이 얽힌 기도와 도피로 이루어져 있다. 남들로부터 생존의 구실을 얻기 위해서 글을 쓰겠다는 나의 주책없는 기도에는 비록 허풍과 거짓이 많았지만 동시에 어떤 현실성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 그 후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글을 쓰고 있지 않는가?


209. 나는 다시 태어나고 마침내 완전한 인간이 된다.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우렁차게 외치는 인간, 물질만이 지니는 단호한 부동성으로 자기 자신을 정립한 완전한 인간이 된다. 사람들이 나를 들고 열어 본다. 나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또 때로는 파닥거리게 한다. (중략) 나의 힘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서 악한 자를 쳐부수고 착한 자를 보호한다. 아무도 나를 잊을 수 없고 무시할 수도 없다. 나는 다루기 쉽지만 무서운 우상이다. 나의 의식은 조각조각 갈라진다. 잘 된 일이다. 다른 의식들이 나를 나누어서 지니니까 말이다. 남들이 나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그들의 눈 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이다. 남들이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가 보편적이면서도 독특한 언어로 변모해서 그 모든 사람들의 입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수백 만의 시선을 위해서 나 자신을 장래의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나는 가장 깊숙한 불안을 준다. 내게 손을 대려고 하면 나는 살짝 사라져 버린다. 나는 아무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곳에 '있다'. 인간의 기생충인 나는 나의 선심을 통해서 인간을 파먹고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나의 부재를 되살리게 한다.  


8.


환심을 사려는 인간 -> 책과 영화를 통해 영웅을 상상하는 인간 -> 자신의 손끝으로 직접 영웅을 써내려가는 인간 -> 위대한 작가가 되려는 인간 -> 죽음을 초월한 존재가 되려는 인간

솔직히 말해서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다. 그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었고, 글을 써왔던 것이다. 이 마음가짐이 어느 순간에 시작되어서 얼마나 지속되어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광기와도 같은 이 집념은 그의 마지막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아주 조금은 그의 내면에 새겨져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제 그의 고백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268.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었다. 선택된 자, 지옥의 연대기 편집자, 자신의 원형질액을 들여다보는 유리와 강철로 된 사진 현미경이었다. 
 
270.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도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은 그 속에 자기를 투사하고, 거기서 제 모습을 알아본다. 오직 이 비판적 거울만이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중략) 사람이란 신경병을 떨어 버릴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이라는 고질병에서 치유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닳고 지워지고 모욕당하고 따돌림당하고 묵살당한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온갖 특징은 50대 인간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대개의 경우 그것들은 어둠 속에 납작 엎드려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방심하기만 하면 당장 다시 고개를 들고 변장을 하고는 백일하에 뚫고 나온다. 나는 오직 나의 시대를 위해서만 글을 쓴다고 진심으로 주장하지만, 현재의 내 명성이 짜증스럽다. 
 

272. 그런 이야기는 그만해 두자. 할머니 같으면 이렇게 말하리라.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 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 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죽음과 시대를 초월한 존재가 되려는 인간 -> 그저 묵묵히 쓰고자 하는 보통 존재의 인간


이 세 부분을 읽어보면 초인이 되려는 그의 욕망. 그의 글을 통하여 몇 세대 이후의 인간도 그를 잊지 못하고, 그를 기억하고, 그를 사랑하게끔. 그렇게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싶어하는 그의 욕망. 그가 '문학병'이라고 일컫는 그것이 많이 수그러들었음을 알 수 있다. 270에서 그는 그저 욕망에 의한 글쓰기가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글쓰기. 다음 시대가 아닌. 현재를 위한 글쓰기에 매진하려고 한다.


272에서는 초인과 철인에 대한 권위의식마저 벗어던진다. '엘리트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할머니의 말씀 덕분이기도 하고, 책에서 간략하게 서술하는 교우관계의 긍정적인 요소를 통하여 깨닫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에서는 272의 문장이 가장 중요한 문장이긴 하지만, 그가 272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겪었던 모든 생각들이 소중하다고 나는 느꼈다. 그가 문학병이라고 말한 그 광기마저도. 그러한 광기가 없었다면 '본질'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고, 깨달음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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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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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희경 작가의 다섯번째 장편소설 <비밀과 거짓말>은 지방의 소도시 K읍에 관한 이야기다. 이곳은 소설 내내 K라는 이니셜로 표현한다. 작가의 실제 고향이 전북 고창이라 K라고 붙인 것은 아닐 것이다. K읍은 작가의 고향 뿐 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 고향을 뜻함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개개인. 각 존재의 근원이라고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겠다. 처음에는 읽으면서 K읍이 고향이 아니라 더 넓게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몇가지 점에서 국가보다는 고향이라는 개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K읍은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을 고향의 모습으로 현실화한 공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방의 소도시. 촌동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고향은 별볼일 없는 동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소설에서 K읍은 여행객들이 어디를 가기 위해 잠시 들렀다 가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원도 없고, 볼거리도 없기 때문에 K읍의 사람들은 인재를 키워내서 고장을 알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K읍 사람들이 인재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이자 사상이었다.


2.


양반사회 시스템의 신봉자이자 '가문의 전통'을 위해 살아가는<비밀과 거짓말>의 아버지인 정욱은 9대째 K읍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지역유지의 후손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씨가문의 막내아들이다, 정욱은 막내로 태어나는 바람에 가문의 재산을 그렇게 많이 상속받진 못했다. 그럼에도 시대를 읽는데 능한 정욱의 재주와 임기응변. 거기에 덧붙여 가문의 영향력으로 3공시대에 건축업으로 성공하여 지역 내의 기반을 닦는다. 그의 활약상이 소설에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그런 정욱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1960년대 초에 태어났다고 명시(22P)된 이 두 아들의 이름은 영준과 영우다.


이 두 인물은 전통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는다. 격렬하게 저항한다. 그들이 가문의 전통과 맞서는 이유. 소설의 선후관계가 명확하지 않은데, 정리해보면. 정씨가문의 첫째 아들. 즉 정욱의 첫째 형이자 집안의 장손이 단명하여, 영우가 정씨가문의 장손으로 입적되야 했기 때문에 이제 더는 형과 아버지와 한편이 아니라는 강압적인 명령. 그것에 어떤 부조리를 느꼈을 수도 있다.


96. 영우는 대나무집이 보이면 언제나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 무렵의 영우는 자기 편이 아닌 사람을 가려내어 미워하기 시작할 나이였다. 영우가 그렇게도 많은 부정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자기 편일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채 판정을 유보한 대상은 영준이었다. 가장 확고한 한편은 물론 아버지였다. 아버지라는 세계만이 영우의 유일한 꿈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우가 사춘기 이후 십오 년이란 세월 동안 끊임없이 도망쳤던 것 역시 아버지라는 존재로부터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존재는 영우에게 절망과 고독을 의미했다. K읍의 아들이 아버지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출세와 유랑, 그리고 죽음 세 가지 뿐이었다.


그리고 이건 소설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소설의 뉘앙스로 판단한 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영준이 K읍을 떠나기로 결심한 데에는 명선의 죽음에 얽힌 정욱과 영준 사이의 비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준이 이토록 가문을 떠나려고 애쓰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나가던 정욱의 사업이 망했기 때문에 고장에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할 것이다. 


210. 현대인들은 관심이 없다. 가문과 자신이 공동 운명체로서 공과 화를 함께 짐져야 했던 김인우의 기록은 개인적 단자로서 살아가는 도시인에게 단지 '옛날이야기' 일 뿐이다. 혈연은 물론이고 지연과 학연에 의한 부당한 권력은 개인의 능력에 따른 기회 균등이라는 근대적 모럴을 위배한다. 어느 한 사람의 사상적 자유를 집안 전체의 잘못으로 만들어 권력자의 의도대로 사회를 통제하려는 연좌제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했다. 도시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조차 부분적인 동시대인일 뿐이다. 그것이 도시로 나온 K읍의 아들 영준이 생각하는 '사형제 이야기'의 진실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은 고장을 떠나려고 한다. 그리고 떠났다. 영준은 출세를 하는 척 유랑하며, 영우는 유랑하기 위해 유랑한다. 그렇게 둘은 K읍을 떠나 어른이 되고도 K읍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148. 자신의 고향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아직 어린애와 같다. 타향이 다 고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계가 다 타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


3.


176.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모조리 돌려주겠다는 철저한 자기 존재의 부정이 위악의 가속도를 받아 전의를 단련시켰다.


177. 아무것도 즐기지 못하고 아무것에도 집착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이유는 한 가지다. 자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가문의 사람에게는 출세를 하는 척. 서울로 떠난 영준은 '출세= 법학' 이라는 고리를 끊고자 유랑을 결심한다. 유량의 도구로 선택한 것은 영화였다. 영준은 가문과의 질긴 인연을 끊고, 자기만의 것을 발견하여 그것에 집착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영준은 영화 안에 자신의 온전한 무언가를 담아내기 위해서 살아간다. 자신의 사상을 담아내기 위해 자신의 출신을 감춘다.


소설 속. 굉장한 감각을 가진 영준의 동료 박난아(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의 모두 의미심장하다. 단 한번 박난아라는 본명으로 지칭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바나나로 소개되는 그녀. 나는 그녀의 생각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박난아로 기억할 것이다.). 그녀의 말은 영준의 단호한 결심을 표면에 드러내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171. 감독님 처음 봤을 때는 고아인 줄 알았어요. 가족이 있다는 게 상상이 안 됐어요. 아무하고도 상관없이 태어나 줄곧 혼자 성장하고 혼자 살아온 사람 같더라고요. 이웃이나 동료는 있지만 친척은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 자기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남은 음식은 그 자리에서 버리는 사람. 규칙적으로 면도와 쇼핑과 운동을 하고, 병원에 입원하면 간병인을 고용하고 명절에는 혼자 외국여행을 가고 또 보험이나 적금 든 건 없고 은행통장은 하나밖에 안 갖고 있고 그리고 어쩌다 등 뒤에서 따라오는 자기 그림자를 보면 어색한 표정을 짓는 사람.


<비밀과 거짓말>의 아버지와 두 아들은 K읍을 떠나 오랜 시간 잘 살아간다. 그러다가 아버지 정욱의 죽음과 죽음으로 K읍을 떠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과 유산의 상속자로 언급된 명선의 이름이 공개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준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상속자에 적혀있는 낯익은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영준의 사촌 누이였는데,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어떻게 유산을 전해줄 수 있을까? 사촌 누이. 명선. 그 이름의 진실을 찾아 가는 것이 <비밀과 거짓말>의 진짜 시작이다.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은 마치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플롯과 비슷했다.


4.


225. 성장이란 자신이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위치한 보잘것없는 좌표를 읽게 되면 그 때 비로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년들은 일찍부터 자기라는 존재를 자각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만나기까지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소년이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한가지 연료는 환멸이다.


이 지면을 통해서 결론을 이야기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루어져서는 안될 사랑 때문에 비극이 찾아왔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결론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영준과 영우는 전통(아버지)이 가려놓은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말하기엔 망설여지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형제는 시간과 공간을 자각하고 좌표를 읽을 수 있게 된다. 그 좌표를 마주하면서 아버지와 영우, 아버지와 영준. 이 각각의 관계에서 알게된 진실까지도 공개된다.


283. 정욱은 이따금 생각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비밀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과연 모두가 진실일까. 어쩌면 객관적 진실보다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진 진실이 더 진실할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면 그럴만한 필요가 있는 것이다.


283의 이 문장은 왜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비밀을 감춰왔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생각은 자신보다 주위의 시선이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을 내려놓았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항복 선언이다. 나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은희경 작가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옳지 않음의 반작용이 <비밀과 거짓말>을 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모자람을 많이 느꼈다. 필요이상으로 생각들을 써내려갔지만, 사실 제대로 읽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가장 핵심문장이라고 생각되는 한 구절을 옮기며 마무리하면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결심한다.


5.


191. 인간은 강인함으로 인해 위대해지지만 약점을 통하지 않고는 완성되지 않는다. 위인이란 존재는 철인경기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종으로서의 긍지를 주어 인간을 고양시킨다. 반면 약점투성이인 사람은 때로 인간을 안심시키며 자신과 화해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192. 조금의 망설임이나 어긋남도 없이 앞뒤가 딱 들어맞는 것은 거짓말이기 쉽다. 완벽한 미모라면 성형미인일지도 모르고 기승전결이 완전한 스토리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불완전하게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략) 진실이란 대개 추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밀이나 거짓말은 나약한 존재인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수단이다. 진실이라는 공의에 의해 쫓겨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도달하여 몸을 숨기는 막다른 골목의 어둠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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