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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평점 :
1.
은희경 작가의 다섯번째 장편소설 <비밀과 거짓말>은 지방의 소도시 K읍에 관한 이야기다. 이곳은 소설 내내 K라는 이니셜로 표현한다. 작가의 실제 고향이 전북 고창이라 K라고 붙인 것은 아닐 것이다. K읍은 작가의 고향 뿐 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 고향을 뜻함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개개인. 각 존재의 근원이라고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겠다. 처음에는 읽으면서 K읍이 고향이 아니라 더 넓게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몇가지 점에서 국가보다는 고향이라는 개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K읍은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을 고향의 모습으로 현실화한 공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방의 소도시. 촌동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고향은 별볼일 없는 동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소설에서 K읍은 여행객들이 어디를 가기 위해 잠시 들렀다 가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원도 없고, 볼거리도 없기 때문에 K읍의 사람들은 인재를 키워내서 고장을 알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K읍 사람들이 인재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이자 사상이었다.
2.
양반사회 시스템의 신봉자이자 '가문의 전통'을 위해 살아가는<비밀과 거짓말>의 아버지인 정욱은 9대째 K읍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지역유지의 후손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씨가문의 막내아들이다, 정욱은 막내로 태어나는 바람에 가문의 재산을 그렇게 많이 상속받진 못했다. 그럼에도 시대를 읽는데 능한 정욱의 재주와 임기응변. 거기에 덧붙여 가문의 영향력으로 3공시대에 건축업으로 성공하여 지역 내의 기반을 닦는다. 그의 활약상이 소설에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그런 정욱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1960년대 초에 태어났다고 명시(22P)된 이 두 아들의 이름은 영준과 영우다.
이 두 인물은 전통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는다. 격렬하게 저항한다. 그들이 가문의 전통과 맞서는 이유. 소설의 선후관계가 명확하지 않은데, 정리해보면. 정씨가문의 첫째 아들. 즉 정욱의 첫째 형이자 집안의 장손이 단명하여, 영우가 정씨가문의 장손으로 입적되야 했기 때문에 이제 더는 형과 아버지와 한편이 아니라는 강압적인 명령. 그것에 어떤 부조리를 느꼈을 수도 있다.
96. 영우는 대나무집이 보이면 언제나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 무렵의 영우는 자기 편이 아닌 사람을 가려내어 미워하기 시작할 나이였다. 영우가 그렇게도 많은 부정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자기 편일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채 판정을 유보한 대상은 영준이었다. 가장 확고한 한편은 물론 아버지였다. 아버지라는 세계만이 영우의 유일한 꿈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우가 사춘기 이후 십오 년이란 세월 동안 끊임없이 도망쳤던 것 역시 아버지라는 존재로부터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존재는 영우에게 절망과 고독을 의미했다. K읍의 아들이 아버지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출세와 유랑, 그리고 죽음 세 가지 뿐이었다.
그리고 이건 소설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소설의 뉘앙스로 판단한 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영준이 K읍을 떠나기로 결심한 데에는 명선의 죽음에 얽힌 정욱과 영준 사이의 비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준이 이토록 가문을 떠나려고 애쓰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잘 나가던 정욱의 사업이 망했기 때문에 고장에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할 것이다.
210. 현대인들은 관심이 없다. 가문과 자신이 공동 운명체로서 공과 화를 함께 짐져야 했던 김인우의 기록은 개인적 단자로서 살아가는 도시인에게 단지 '옛날이야기' 일 뿐이다. 혈연은 물론이고 지연과 학연에 의한 부당한 권력은 개인의 능력에 따른 기회 균등이라는 근대적 모럴을 위배한다. 어느 한 사람의 사상적 자유를 집안 전체의 잘못으로 만들어 권력자의 의도대로 사회를 통제하려는 연좌제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했다. 도시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조차 부분적인 동시대인일 뿐이다. 그것이 도시로 나온 K읍의 아들 영준이 생각하는 '사형제 이야기'의 진실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은 고장을 떠나려고 한다. 그리고 떠났다. 영준은 출세를 하는 척 유랑하며, 영우는 유랑하기 위해 유랑한다. 그렇게 둘은 K읍을 떠나 어른이 되고도 K읍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148. 자신의 고향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아직 어린애와 같다. 타향이 다 고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계가 다 타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
3.
176.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모조리 돌려주겠다는 철저한 자기 존재의 부정이 위악의 가속도를 받아 전의를 단련시켰다.
177. 아무것도 즐기지 못하고 아무것에도 집착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이유는 한 가지다. 자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가문의 사람에게는 출세를 하는 척. 서울로 떠난 영준은 '출세= 법학' 이라는 고리를 끊고자 유랑을 결심한다. 유량의 도구로 선택한 것은 영화였다. 영준은 가문과의 질긴 인연을 끊고, 자기만의 것을 발견하여 그것에 집착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영준은 영화 안에 자신의 온전한 무언가를 담아내기 위해서 살아간다. 자신의 사상을 담아내기 위해 자신의 출신을 감춘다.
소설 속. 굉장한 감각을 가진 영준의 동료 박난아(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의 모두 의미심장하다. 단 한번 박난아라는 본명으로 지칭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바나나로 소개되는 그녀. 나는 그녀의 생각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박난아로 기억할 것이다.). 그녀의 말은 영준의 단호한 결심을 표면에 드러내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171. 감독님 처음 봤을 때는 고아인 줄 알았어요. 가족이 있다는 게 상상이 안 됐어요. 아무하고도 상관없이 태어나 줄곧 혼자 성장하고 혼자 살아온 사람 같더라고요. 이웃이나 동료는 있지만 친척은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 자기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남은 음식은 그 자리에서 버리는 사람. 규칙적으로 면도와 쇼핑과 운동을 하고, 병원에 입원하면 간병인을 고용하고 명절에는 혼자 외국여행을 가고 또 보험이나 적금 든 건 없고 은행통장은 하나밖에 안 갖고 있고 그리고 어쩌다 등 뒤에서 따라오는 자기 그림자를 보면 어색한 표정을 짓는 사람.
<비밀과 거짓말>의 아버지와 두 아들은 K읍을 떠나 오랜 시간 잘 살아간다. 그러다가 아버지 정욱의 죽음과 죽음으로 K읍을 떠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과 유산의 상속자로 언급된 명선의 이름이 공개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준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상속자에 적혀있는 낯익은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영준의 사촌 누이였는데,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어떻게 유산을 전해줄 수 있을까? 사촌 누이. 명선. 그 이름의 진실을 찾아 가는 것이 <비밀과 거짓말>의 진짜 시작이다.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은 마치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플롯과 비슷했다.
4.
225. 성장이란 자신이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위치한 보잘것없는 좌표를 읽게 되면 그 때 비로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년들은 일찍부터 자기라는 존재를 자각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만나기까지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소년이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한가지 연료는 환멸이다.
이 지면을 통해서 결론을 이야기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루어져서는 안될 사랑 때문에 비극이 찾아왔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결론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영준과 영우는 전통(아버지)이 가려놓은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말하기엔 망설여지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형제는 시간과 공간을 자각하고 좌표를 읽을 수 있게 된다. 그 좌표를 마주하면서 아버지와 영우, 아버지와 영준. 이 각각의 관계에서 알게된 진실까지도 공개된다.
283. 정욱은 이따금 생각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비밀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과연 모두가 진실일까. 어쩌면 객관적 진실보다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진 진실이 더 진실할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면 그럴만한 필요가 있는 것이다.
283의 이 문장은 왜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비밀을 감춰왔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생각은 자신보다 주위의 시선이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을 내려놓았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항복 선언이다. 나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은희경 작가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옳지 않음의 반작용이 <비밀과 거짓말>을 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모자람을 많이 느꼈다. 필요이상으로 생각들을 써내려갔지만, 사실 제대로 읽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가장 핵심문장이라고 생각되는 한 구절을 옮기며 마무리하면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결심한다.
5.
191. 인간은 강인함으로 인해 위대해지지만 약점을 통하지 않고는 완성되지 않는다. 위인이란 존재는 철인경기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종으로서의 긍지를 주어 인간을 고양시킨다. 반면 약점투성이인 사람은 때로 인간을 안심시키며 자신과 화해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192. 조금의 망설임이나 어긋남도 없이 앞뒤가 딱 들어맞는 것은 거짓말이기 쉽다. 완벽한 미모라면 성형미인일지도 모르고 기승전결이 완전한 스토리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불완전하게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략) 진실이란 대개 추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밀이나 거짓말은 나약한 존재인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수단이다. 진실이라는 공의에 의해 쫓겨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도달하여 몸을 숨기는 막다른 골목의 어둠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