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의 추구, 2001>을 읽으면서 더글라스 케네디라는 작가는 고전스타일을 현대사회의 구조에 알맞게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템테이션>을 읽고서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상류사회를 할리우드로. 그곳의 귀족가문을 재력가 필립 플렉으로. 그리고 상류사회로 진입하는 인물을 주인공 데이비드 아미티지로 적절히 옮겨놓았다.
이 작품에서 악역을 맡은(귀족사회 구성원은 대부분이 부조리하며 악하다.) 플렉의 재력이 할리우드의 성공으로 얻어진 산물이 아니라는 점은 뭐랄까 조상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풀이하면 될까? 아무튼. 이런 구도는 우리가 즐겨왔던 소설들을 그대로 따랐다고 볼 수 있다.
2. 그러나 <템테이션>을 고전소설의 현대적 해석이라고 한정 짓는 것은 이 소설에 대한 엄청난 과소평가라고 생각한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트레이드 마크(탁월한 심리묘사, 긴박감 넘치는 스토리, 블랙유머와 재기 넘치는 입담) 중에서 블랙유머와 재기 넘치는 입담 쪽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왜냐하면, 그 덕분에 <템테이션>의 인물은 입체적인 인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3. <템테이션>엔 단순히 스피디한 전개와 입체적인 인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살로, 소돔의 120일>이라는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전체주의 성향이 초래하는 비이성적이며 부조리한 면모들.
이러한 부조리를 미처 준비되지도 않은 극장 안의 대중들에게 폭로하고 싶어 안달이 난 필립 플렉이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주인공 데이비드 아미티지에게 퍼부어댄 한 사람에 대한 전체주의적 말살은 비이성의 반복을 낳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4. 그렇지만 <템테이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러한 비이성에게 굴복하지 말라. 우리는 굴복당하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아미티지처럼 보기 좋게 이겨낼 것이다였다. 그리고 그 메시지 속에서 알랭 드 보통이<철학의 위안>에서 전해준 세네카와 니체의 가르침이 요약된 듯한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446p. ‘우리 모두가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건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그 확인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존재는 결코 혼자서 완성될 수 없다. 나를 바라보는 타인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 나의 삶과 삶의 공로를 인정해줄 때 우리의 삶은 더욱 빛이 난다. 그러므로 세네카는 우정이라는 요소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부분으로 봤는데, 이 문장은 그런 가르침과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소설 속의 아미티지는 세네카의 가르침대로 우정으로. 자신을 믿어주는 자에 힙입어 위기를 벗어난다. 하나의 유혹. 그로 인한 배신 때문에 위기가 찾아왔지만, 그것 이외에 끝까지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과의 우정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450~451p. 모든 인생 이야기에는 위기가 있다. 세상 모든 일은 결국 이야기다.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에는 필수적으로 위기가 포함된다. 분노, 갈망, 기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삶에 대한 실망, 자신이 원하는 삶이라고 상상하는 삶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절망. 이런 위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우리는 위기를 통해 믿게 된다,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걸 믿게 되고, 모든 게 그저 순간에 불과한 거라 믿게 되고, 자신이 하찮은 존재에서 벗어나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는 위기를 통해 깨닫게 된다. 싫든 좋든 우리는 누구나 나쁜 늑대의 그림자 아래에 있음을,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는 위험 아래에 있음을,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게 행하는 위험 아래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위기를 가장 높은 곳에서 조종하는 자는 누구인가? 누구의 손이 우리를 조종하는가? ‘신’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상황’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의 위기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그가 그 모든 위기를 조종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편을 탓하고, 어머니를 탓하고, 직장 상사를 탓한다. 그러나 어쩌면, 정말 혹시 어쩌면, 자기 자신이 그 모든 위기를 조종했을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에도 악당은 있다. 나를 함정에 빠뜨리고, 깔아뭉개고, 그 다음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은 악당. 그리고 그 악당의 이름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진정한 악당은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위기는 삶이라는 전체 속에 자연적으로 수반되는 구성요소라고 말하는 이 문장. 그리고 한 인간을 완성하게 하는 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그 위기를 제공한 누군가를 탓하며 고통에 빠졌던 주인공과 같은 우리들.
위기는 나에게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작용이 어쩌면 나의 존재를 빛나게 만들 거름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하는 이 문장은 니체가 우리에게 건낸 험난한 산 정상까지 오르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던 그 고통의 양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게 <템테이션>은 문학으로 우리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