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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궤열차
윤후명 지음 / 책만드는집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1. 여행할 때. 사람들은 출발지와 도착지의 너무나도 다른 속도 차이에 몸과 마음을 맞추며 영감을 얻곤 하는데. 하물며 책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을까? <템테이션>과 <협궤열차>. 가장 속도감이 빠른 책과 느린 책을 차례로 읽으려니 내 마음은 여행할 때처럼 <협궤열차>의 느린 속도에 자연스럽게 발을 맞춰야만 했다.
가장 느린 책. <협궤열차>는 내가 그토록 사모해 마지않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작품이다. 일인칭 ‘나’의 눈으로 주변을 관찰하는 작품이다. 주변을 관찰? 이라기보다는 마치 물리학의 초끈이론에서의 진동하는 끈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상념들이 '나'라는 존재로부터 한순간에 퍼져 나온다.
2. 나뭇가지처럼 어떤 단상들이 규칙도 예고도 없이 뻗어나오는듯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것은 ‘류’라는 여인과 함께했거나 멀어졌던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 기억에 관계된 단상들이며, ‘협궤열차’가 상징하는 소멸이라는 감상에서부터 퍼져나오는 단상들이라 아주 낯설거나 난해하진 않았다. 스토리를 중심으로 빠르게 이어지는 소설들보다는 확실히 가독성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큰 줄기를 놓치지는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리고 소멸하는 존재. 인간의 태생적인 한계를 깨닫고 좌절하는 존재. 이러한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눈앞으로 다가오는. 자연스러운 퇴화물을 주위의 사물에서 발견하는. 예를 들면, 공룡발자국이나 협궤열차. 그리고 수인선 어느 자그마한 정거장의 역장.마지막으로 류와 함께 방문했던 스승님의 댁까지.
그들은 삶의 흔적만 남겨놓은 채 소멸해버렸다. 하지만 그의 의식 속에는 모든 것이 남아있었다. 흔적을 되짚으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홀로그램처럼 펼쳐졌다. 그렇지만 실체가 사라진 홀로그램에서 느껴지는 감성은 쓸쓸하고, 절망적이며, 비애에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시인 출신이면서 소설도 쓰는 윤후명 작가 특유의 환상적인 묘사로 젖어있다.
그래서 나는 <협궤열차>를 읽으면서 갑자기 늙어버린 것 같은. 그러니까1980년의 작가와 같은 연배가 되어버려 오늘 머리를 감기 위해 손을 뻗은 두피에서 하얀 백발이 한 가닥 두 가닥 자라나는 의식 속의 잔상에 직면했다.
4. <협궤열차>는 시여 침을 뱉으라고 외쳤던 김수영 시인의 정신과는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씌여진 소설이다. 그렇지만 이 책의 마지막에 실려있는 대담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협궤열차의 스타일은 우리의 문학에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문학의 다양성을 해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한국역사의 큰 줄기를 이루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이념논쟁, 4·19 혁명, 5.16쿠데타, 5.18 민주화 사건에서 대부분 이야기가 파생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피해의식에 짓눌려있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닌. 그러한 억압된 분위기의 형성으로서 한국문학은 창의성을 제한당하고, 인간에 대한 철학을 부재케 한다는 견해에 큰 동감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