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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잔해를 줍다
제스민 워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1.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읽은 소설을 잠시 멀리해야 할 것 같다. 작년에 읽었던 <네덜란드>라는 소설도 그렇고. <바람의 잔해를 줍다>도 그렇고. 깊은 영감을 준다기보다는 소시민을 어루만진다는 인상이 짙다. 소외계층이나 이민자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고른 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한마디로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말이다.
2. <바람의 잔해를 줍다>는 평범한 흑인 소녀가 겪은 예사롭지 않은 12일간의 삶을 기록한 일기로 읽으면 편하다. 그 12일 중에서 마지막 이틀은 카트리나와 대항한 기록이지만 앞의 열흘간의 기록은 그때. 그 장소를 살고 있는 애쉬와 기억을 공유하는 또래 간의 생활상이었다.
3. 책 소개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나는 이 소설이 나를 사로잡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 고민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화자로 나오는 ‘나’. 애쉬는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점이 거북했다. 이것들이 애쉬의 내면이나 관점이 될 수는 있지만, 독자가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바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같은 소설을 대표적인 예로 들어 이야기하자면, <예감>은 일인칭 화자의 내면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서술하기 위해 아주 제한적인 면만 보여주는 장치를 사용하는데, <예감>에 비한다면 <바람>의 애쉬는 너무나도 전지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완벽한 모습으로서의 재현을 원한다면 논픽션의 관점에서. 개인의 아픔을 말하려거든 애쉬라는 이름을 감췄어야 한다고(철처하게 '나'의 내면에 집충) 생각한다. '나은 소설'을 위해서라면 애쉬라는 이름을 감추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바람>이 추구하는흐름'으로 봤을 때는 조금 더 관찰자의 시점에서 서술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러지 않았다. 관찰은 관찰대로 하고 어린 소녀의 눈을 빌려서 이야기할 것은 한다. 그런데 그녀가 설명하려는 장면의 범위는 넓고도 넓다. 그렇다면 그 어린 소녀의 눈은 동정심을 이용하기 위해. 감성을 빌리기 위함이 아닌가?
4.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과연 고전다움이란 무엇일까? 리얼리티. 마크 트웨인의 모험시리즈와 같은 모험물. 어린 친구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성장소설. 향토적이며 자연주의적인 풍경. 신화에서 차용한 동일화나 대비. 반려동물과의 교감. 이런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요소의 몇 가지를 제거하는 아픔을 겪는 수고를 하더라도 우선은 인간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람의 잔해를 줍다>는 그러질 못했다. 이것. 저것. 들쑤시다가 그만둔 느낌이다. 차라리 12일간의 기록을 12권의 책으로 쓰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하루를 깊숙하게 파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5. 읽다가 멈췄었는데 다시 읽은 뒷부분은 괜찮았다. 특히, 마지막 이틀로 가면 갈수록 나아짐을 느낀다. 문장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상처가 공존하는……. 아무튼 나중에 나오게 될 그녀의 다음 작품을 다시 읽고는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