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새
케빈 파워스 지음, 원은주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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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독자에게 무언가를 툭 내뱉듯이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그것이 구린내가 나는 똥인지 아니면 황금으로 만들어진 똥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경우가 간혹 있다. 나는 <노란 새>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황금똥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황금똥을 실제로 구경해본 적이 없는지라, 작가의 주옥같은 배설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했다는 좌절을 느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우선 일독을 한 후, 다시 읽어야만 작가가 서술한 내면묘사를 직접 바트(나)의 입장이 되어 음미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해 봄에 전쟁은 우리를 죽이려 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이 신체적인 죽음뿐 아니라, 정신적인 죽음까지 상징한다는 것만 미리 알고 읽는다면 훨씬 더 이 소설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독 후의 감상을 남긴 후 바로 다시 읽기에 들어갈 예정이다. 

 

2. 앞서 읽어야 할 책에서 예고한 대로 <노란새>는 자전적 경험이 담긴 전쟁 소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껏 많은 전쟁 소설이 다룬 소재인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을 제일 먼저 기대해 봄 직하다. 실제로 이라크 파병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에게 쇄도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하니, <노란새>는 그 질문에 매우 충실한 소설이다. 

 

<노란 새>에서 내가 그러한 모범 답안지만 봤다면 황금똥이라고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극적 흥미를 유발시키는 차별화를 시도했다. 마치 추리소설 같은 플롯을 사용하여 반전이 있는 결말을 가장 나중에 공개하고, 결말의 원인과 결말 후의 반응(전쟁터에서의 시간과 귀국 후의 시간)을 교차시켜 서술했다. 전쟁의 고통과 귀국 후의 안도감이 교차할 것 같지만, 아쉽게도 주인공의 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절망을 떨쳐내지 못한 트라우마가 공존한다. 

 

개인적으로는 귀국 후의 심리적 불안감을 드러내는 서사에서 전쟁터의 인물들의 마지막이 어떻길래 주인공의 현재가 이러할까? 궁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시간차 플롯 덕분에 전쟁은 나쁜 것이라는 당연한 결론으로 귀결하는 대신 문학 작품에서 기대할 만한 스릴감과 약간의 거리 두기로서 이성적으로 사건을 지켜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3. 소설에서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나는 작은 부분에 관심을 보였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에이, 그냥 군대나 가야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군에 입대했다가는 이 책의 말마따나 그냥 좆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이 소설 속의 인물이 그런 마음가짐(남자다워지고 싶어서,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이런 사달이 났다. '설마 내가 전쟁터까지 가겠어?' 라고 생각했다가, 잘못 꼬여서 전쟁터에 차출된다. 

 

고작 스무 살 남짓한 친구들이 말이다. 그들이 전쟁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군대가 보균한 딱히 언급하지 않아도 알만한 그런 부조리한 문제에 노출되고, 그것이 현실로 급작스럽게 다가왔을 때, 그들은 저항할 힘을 잃고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그들은 1,000번째 죽음만 벗어나면 자신들만은 자유로울 것이라고 간절히 바랐건만, 그것은 그야말로 그들 만의 바람에 그치고 말았다.     

 

4. 글을 쓰고 난 뒤에 생겨난 마지막 생각들까지 마저 정리하자. 댓글에 대장물방울님께서 표지에 대해서 코멘트를 붙여주셨다. 나르시스의 느낌이 난다고. 사실 이 소설에서 그런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그런데 표지는 나르시스의 느낌이 뭍어났다. 그래서 표지와 소설의 내용과 전혀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래의 댓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소설은 나르시스도 아니고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의문이 형성된 이상 왜 이런 표지를 사용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러던 찰나. 우연히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의 동료 머프에 대한 묘사에서 그에 대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178. 무엇이 없어졌는지 설명할 재료가 충분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머프를 재구성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그림은 점점 더 흐릿해졌다. 내가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기억이, 다른 기억을 영원히 밀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어느 정도 비율이 있었다. 마치 거꾸로 퍼즐을 맞추는 것 같았다. 비슷한 모양들, 급격히 희미해지는 그림, 완전함과 완성을 방해하는 보드지의 흐릿한 황갈색.

 

머프는 그(나)의 곁을 떠났다. 이것은 스포가 아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소설의 초반에서부터 줄기차게 머프는 죽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스포는 어떻게 죽었느냐가 될 것이다. 그러니 안심해도 좋다. 어쨌든 머프는 그의 곁을 떠났고, 전쟁을 끝내고 귀국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머프에 대한 기억이 아주 멀어지지도. 그렇다고 생생하게 떠오르지도 않는 아주 불편한 기억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황갈색이요. 흐릿한 색감이다. 바로 표지의 색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5. 

 

210. 머프는 선택을 하고 싶어했다. 머프는 원하고 싶어했다. 머프는 내부에서 자라나는 무감각을 다른 무언가로 바꾸고 싶어했다. 머프는 그의 몸 주변에 모여드는 것을 결정하고 싶어했으며, 어쩌다 우연히 그에게 들러붙어 응축 원반처럼 주변에서 궤도를 도는 것을 거부하고 싶어졌다. 머프는 자신이 요구하지 않은 모든 것의 흩어진 잔해를 자신의 의지로 밀어내고 균형을 잡았다는 하나의 기억을 가지고 싶어했다. 

 

225.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박물관의 큐레이터 같았다. 나 자신조차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얻은 작은 패물 하나를 신발 상자에 다시 집어넣고, 다른 하나를 꺼내기도 했다. 여기에는 탄피 하나, 저기에는 군복 오른쪽 어깨에서 떼어낸 연대 기장 하나. 내가 살아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 삶의 흔적을 나타내는 물건들이었다.

 

236. 스털링 그의 인생은 궤도를 따라 도는 물체처럼 전적으로 의존적이었으며, 별 주변을 흔들거리며 도는 행성 중 하나로만 존재했다. 그가 한 모든 행동은 존재하는 기대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는 딱 한 가지 행동만 할 수 있었으며, 그건 그의 짧고 혼란스러운 인생의 마지막 행동이었다.

 

이것은 나와 머프. 그리고 스털링에 대한 성향에 대한 단적인 비교를 그려낸 문장이다. 이 소설은 머프 - 나 - 스털링의 구도로 형성되었음을 알려둔다. 이 비교를 보면서 나는 어쩌면 머프는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킨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은 최후를 맞이한 것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해봤다. 그렇다면 저 표지에 실린 성인(聖人) 같은. 미소년의 모습이 이해가 가능하다. 

 

어쨌든 소설을 읽을 당시에는 머프에 대한 존경심은 썩 크게 일지 않았는데, 어떻게 꼬인 퍼즐을 풀다 보니 무언가 보이는 느낌이다. 이런 마무리를 짓도록 도와주신 대장물방울님께 감사를 표하는 의미에서 노란 새의 함정을 건네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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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형제 민담집 -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
그림 형제 지음, 김경연 옮김, 박은지 그림 / 현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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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림 형제 초판 출간 20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된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이 책은 <요한 하위징아>가 동화에 대한 극찬을 내놓을 무렵 나의 눈에 들어온 작품이다. 하위징아는 그림 형제가 아닌. 안데르센(도깨비와 야채상, 오래된 집)의 작품을 언급했지만, 그래도 백설공주, 신데렐라, 빨간모자, 헨젤과 그레텔과 같은 유명한 동화를 많이 배출한 작가가 그림 형제 인지라. 하위징아가 말한 동화의 장점을 어떻게 형성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요한 하위징아> 77. 동화의 꿈나라에는 언제나 등장하는 단골 요소들이 있다. 그 중 한 요소는 소망 충족인데, 이것이 동화라는 장르를 만들어내는 아버지다. 동화 속의 모든 것은 행복한 결말을 향하여 내달린다. 

 

그림 형제는 하위징아가 정의한 소망 충족과 행복한 결말이라는 동화의 조건을 만족하는 작품을 수집했다. 그리하여 이 소망과 행복이라는 따스함을 접하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인본주의적 인간이 되려고 애썼다. 그것이야말로 그 시대가 원하는 도덕적 가르침이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형제의 동화는 그저그런 구전 이야기를 훌쩍 뛰어넘는 존재감(영혼을 깨우는)을 가진 작품이다.

 

2. 

 

<요한 하위징아> 78. 동화의 핵심은 소원이 성취되는 결말 부분이 아니라, 그 결말 부분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주인공이 자기 앞에 제시된 엄청난 도전에 맞서서 싸워나가는 것이다. 주인공은 보물, 왕국, 아내를 얻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모험을 해나가는 과정을 즐긴다. 혹은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동화는 날카로운 대조가 핵심이다. 

 

그림 형제의 동화에서도 결말 부분에 다가가는 과정은 반복적이며 점진적이다. 예를 들어 <백설공주>에서도 마녀는 백설공주를 세 번에 걸쳐(사냥꾼에 의해, 독이 든 빗, 반쪽에는 독 나머지 반쪽은 사과) 제거하려고 시도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 오히려 마녀가 벌을 받게 된다. 

 

순수한 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민담집에서 상당히 자주 등장(아주 살짝 변형한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하는 삼 형제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 똑똑한 첫째와 둘째가 물질적이거나 정신적 욕망에 타락하여 실패하는 임무를 세상 사람들에게 둔하다고 소문난 셋째가 보란 듯이 성공해 보이는 이야기는 인간의 순수성이 무엇보다 인간을 훌륭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철학할 시간> 31. 공자가 말했다. 강직함과 의연함과 질박함에 어눌함에 더하여 인에 가깝다고. '강의목눌'의 인물은 '교언영색'의 인물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전자는 자신을 위주로 언행을 도모하고, 강직하고 굳세어 함부로 휘둘리지 않으며, 말수가 적고 꾸밈이 없이, 모든 일을 그야말로 성심성의껏 행하는 사람.

후자는 남을 위주로 언행을 도모하고 남의 환심을 사는 데만 신경 쓰는 거짓의 달인

 

그러고 보면 이번에 읽은 <지금, 철학할 시간>에서도 그와 같은 맥락의 글을 한 꼭지 발견할 수 있었다. 공자의 말에 따르면 첫째와 둘째는 교언영색의 인물이요. 셋째는 강의목눌의 인물이다. 셋째는 온전히 '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인'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었다. 

 

3. 

 

<요한 하위징아> 79. 동화 속에서 발견되는 강렬한 행복은 보편적 타당성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와 그 특별한 주인공과의 동일시, 누구나 은밀하게 품고 있는 소망, 촛불 켠 방안에서 활짝 꽃핀 빛의 나무 등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더욱이, 세상은 실제보다 더 멋진 곳으로 분석되지도 않는다. 동화의 핵심에는 가혹한 현실이 그대로 존재한다.

 

우리는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며 자신의 덕을 함양한다. 그리하여 동화에서 최종 결말처럼 경제적인 보상이나 높은 명예와 지위를 기대한다. 하지만 동화에서의 경제적 보상과 명예. 그리고 아름답고 멋있는 반려자는 그것을 그리워하고 간절히 바랬던 사람보다는 그 외의 활동으로부터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하여 보상을 탐하는 자들은 엄청난 형벌을 당하고, 보상을 탐하지 않는 자가 되려 보상을 받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처럼 동화는 동화에 나오는 모두가 행복할 수 없는 역설적 구조이다. 누군가 보상을 받으면 누군가는 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렇게 때문에 가혹한 현실이 존재한다고 하위징아는 말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세 명의 아들 중에 모든 것을 얻는 사람은 셋째. 한스가 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백설공주 오로지 단 한 명이 되어야 하고, 그들이 아름답고, 훌륭한 성취의 반대급부로서 계모와 계모의 딸은 성질이 포악하고 못 생긴 정도. 그리고 그들이 받아야 하는 형벌의 잔혹함 정도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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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철학할 시간 - 소크라테스와 철학 트레킹
한석환 지음 / 유리창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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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라는 책이 있다. 집에 있는 책이긴 한데, 아직 읽어보질 않아서 뭐라고 소개해야 될지 고민이긴 한데, 그래도 이 책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지금, 철학할 시간>에 대한 설명도 어려워지므로 <변론>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해보기로 한다.

 

신탁에 의하여 '가장 지혜로운 인간'이 된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화하라"는 철학적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퍼뜨린다. 그 덕분에 자신의 무지와 환부가 까발려진 그 시대의 기득권이자 지식인. 시인, 정치가, 기술자의 대표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믿음으로써 죄를 범하게 하는 주동자로 소크라테스를 고발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왜 무죄여야 하는지를 변론한다. 그 변론을 담은 책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변론>을 소개한 이유는 <지금, 철학할 시간>이라는 책도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변론>과 <시간>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룬다는 점에서 같다고 봤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플라톤이 쓴 책이고, <지금, 철학할 시간>은 한석환이 쓴 책이다. 

 

한석환이 쓴 <지금, 철학할 시간>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변론에 담긴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2,00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새롭게 발견하거나 발전하거나 연관되는 관점들을 덧붙인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스티브 잡스의 어록도 나오지만, 그것보다는 대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함께 조명된다. 

 

<지금, 철학할 시간>의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동일한 선상(기득권의 황포에 희생된 자)에서 봤고, 이 두 사건을 이음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의미를 강화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2. 소크라테스의 철학에는 역설이 존재했다. 그는 자신이 무지한 것을 아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은 육체의 유혹에서 벗어나 영혼을 지속적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죽음을 악이고, 두려움의 근원이고, 우리가 피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는 현재의 관점을 거부한다. 그는 육체에서 탈출한 영혼의 결정체가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고, 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인 사후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와 같은 죽음 너머의 세계에 빛나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유죄를 받은 자가 이처럼 살기 위해서 탈옥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의 철학이 과연 신뢰성이 있는가?) 탈옥이나, 죽음을 벗어나기 위한 모든 변명과 타협과 사과를 거부한다. 그는 자신은 비록 죽을지언정. 영혼은 더럽혀지지 않지만, 무고한 자신을 죽인 자들은 그가 죽음과 동시에 영혼이 타락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화하여 증명된 것만 진리로 믿는다는 그의 가르침이라면 인간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죽음 너머의 세계를 어떻게 그렇게 확실할 수 있었는지 많이 의문스럽긴하다. 그 의문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 타인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현실에서 죽음이란. 죽은 자는 모든 것을 놓고 떠나가지만, 그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을 직접적으로 알거나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허물을 용서하고, 망자가 이뤄낸 업적을 크게 존경하는 것 같다. 그 정도가 필요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의미로 바라봤을 때, 소크라테스가 긍정한 사후세계의 밝음은 어떤 이가 죽었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추앙했던 그 분위기를 생각하여 내린 결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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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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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전적 의미로 자유 의지는 외적인 강제ㆍ지배ㆍ구속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뜻한다. 그런데 샘 해리스의 <자유 의지는 없다>에서는 이 개념을 완전히 부정한다. 쉽게 표현해서 우리가 어떤 사물을 접하며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과 행동들을 우리는 자유 의지로부터 생성된 고유한 관점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 알고보면 우리가 나고 자란 환경이 우리에게 건네주는 학습된 관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장 배경을 통한 학습에 의해서 실존은 더 이상 나만이 가진 고유의 존재가 아닌 존재가 된다. 어린왕자와 함께 길들여지는 장미와 여우라는 존재는 자유 의지에 의하여 형성 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름 모를 어린왕자가 똑같이 형성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왕자에 의해 규정되는 장미와 여우 뿐만 아니라 장미와 여우에 의해 규정되는 어린왕자라는 존재 자체도 형성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자유 의지라는 것이 없다면 말이다. 

 

2. 이처럼 <자유 의지는 없다>에서 주장하는 개념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의식이 만들어낸 정보가 인간의 행동과 선택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라는 기존의 책에서 읽었던 주장과는 다른 개념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는 <자유 의지는 없다>에서 주장하는 바는 행동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아예 행동을 결정시켜버린다.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행동이라는 과정에서 의식을 완벽히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기존의 책(새로운 무의식)에서 읽어낸 이해에 따르면 무의식이 만든 정보는 본질에 대한 편향이나 왜곡은 존재할지언정. 어쨌든간에 그 정보는 가공할 수 있는 정보로 저장되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다루는 것이 의식이 되므로, 무의식의 상위에 속하는 의식이 바로 자유 의지. 자유 의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그러니까 이 책에서 말하는 절충안(양립가능론)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유 의지는 없다>의 주장을 따른다면. 즉, 의식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면 엄청 우울한 결과가 유추된다. 칼 융이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의 내용. (자기 지식을 쌓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 제시한 방식인 자기 지식을 쌓는 행위가 부정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가 획득해온 태생적인 성장 환경과 초중고의 기본 교육이 이미 길을 닦아 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해서 나에서 나온 관점은 나의 관점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너에서 나온 관점은 너의 관점이 될 수 없게 된다. 모든 사람의 관점은 우리가 그 관점을 말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이미 어딘가에 형성되어 있는 관점이고, 너와 나.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러한 관점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논의의 전개로 인하여 내가 갖고 있던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측면에서 관점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개인의 경험을 통해 나온 고유한 성질의 관점이기 때문이다."란 생각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3. 이래서 토론이 필요한거구나 싶게 만드는 책이 <자유 의지는 없다>라는 책인 것 같다.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이 안된다. 이미 1과 2번에 걸쳐서 만들어낸 내 생각을 보면서 나도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결론으로 정리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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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로 꿈을 이루는 법
이종범 지음 / 토야네북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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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책 블로거입니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남깁니다. 

그래서 책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지만, 블로그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도 말이죠. 

이 책을 읽고 돈을 벌거나 파워블로거가 되기 위해서 무리(?)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블로그 자체의 플랫폼에 대한 많은 정보를 이해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 있고, 

그에 대한 생각을 책을 읽고 또 글로 남기게 될 것입니다. 


파워 블로거? 돈?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꿈이 중요하다. 그래서 <블로그로 꿈을 이루는 법>이라는 책의 제목에 많이 끌렸다. 책을 읽기 위해서 지민파파님의 블로그에 달았던 서평단 신청 댓글을 다시 보는 중이다. 지금껏 책을 읽기 위해서 많은 댓글을 달았지만, 이 댓글은 왠지 더 오글거린다. 구자철 선수가 구글구글이면, 나는 단글단글일까. 오글거리는 댓글을 쓰면서 쿨한 척 하고 있다. 그래서 더 오글거린다.   

 

2. 블로그로 꿈을 이룬다라…. 사실 꿈이라는 걸 마음에 품고 그것을 이뤘으면 하는 큰 바람이 있고, 블로그를 통해 내 꿈을 몰래 아주 조금씩 풀어놓는 중인 것은 맞다. 그래서 나에게는 블로그가 현재 읽고 있는 책만큼. 어쩌면 책보다 더 고마운 존재다. 항상 블로그라는 공간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블로그는 마음 놓고 나의 생각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자. 내가 쓴 글에 관심을 가져주고 글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이웃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블로그 이웃 덕분에 나는 좋아하는 책. 아쉽게도 내가 읽어보지 않았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을 체득하신 팜므파탈 여왕의 글을 읽는다. 그리고 이번 달부터 고블린의 일원으로 고전읽기 토론을 시작한다. 그리고 책을 육성으로 읽어주는 매력적인 음성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시는 분. 내가 아직은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서 글을 쓰는 분. 나보다 더 치열하게 책을 읽는 분. 그리고 한국의 추리소설계를 이끌어나갈 작가를 만나고, 또 그런 글을 읽으면서 자극받게 해주는 곳(대체로 자극을 많이 받을수록 댓글을 안 남기는 편이다. 딱히 뭐라고 남길 말이 없어서다.)이 바로 블로그다.

 

아마 블로그라는 공간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의 2005년. 아니 본격적으로 블로그를 시작한 2008년 말 즈음의 삶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하도록 좁은 안목으로 하루하루 살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3. <블로그로 꿈을 이루는 법>에서는 내가 애초에 알고 싶었던 플랫폼으로서의 블로그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건넨다. 일단, 블로그 운영의 가장 중요한 기초는 꾸준한 포스팅과 알찬 컨텐츠. 편법 없이 운영하며 항상 블로그를 생각하는 열정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블로그를 발전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작가의 말을 다시 한번 새긴다. 

 

이 책의 블로그 관리의 방법 중 몇 가지 권유를 받아들여 나는 부족한 내 블로그를 네이버와 다음. 그리고 네이트에 개인 홈페이지로 등록을 시켰다. 개인 홈페이지 이름은 갑작스러운 귀차니즘이 발동한 결과 '단예의 마구읽기'가 되었다. 어쩌면 캔슬될 수도 있다.

 

참. 개인홈페이지 등록을 위해서 다른 블로거는 홈페이지 등록이 되어있나 집적거리다가 훙치뿡캭님의 블로그가 등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벤트의 마녀와 뽐뿌질의 여왕이라는 별호를 가진 파워 블로거 훙치뿡캭님의 아이디를 네이버 검색창에 훙치라고 치면 자동검색어로 훙치뿡캭이라고 뜨는 것 지금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구글에 내 외부블로그 주소를 설정하여 그곳에서도 내가 블로그에 남기는 글이 검색결과에 나오게끔 설정했다. 그와 더불어 나의 RSS 주소도 등록해두었다. 또한 예전에 가입해둔 메타블로그 몇 군데를 정말 오랜만에 접속하여, 그동안 변경된 개인정보를 올바르게 설정했다. 

 

마지막으로, 블로그 운영에서 이것이야 말로 가장 큰 변화인데. 나는 지금까지 예스24 블로그에서 다음view로 글을 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과감하게 바꾸었다. 예스 블로그 대신에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본진인 이곳. 네이버 블로그에서 글이 발행되도록 설정을 변경했다. 다른 포털사이트에서 내 블로그를 찾은 분들이 나의 본진에 쉽게 방문할 수 있고, 좀 더 빠르게 댓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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