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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새
케빈 파워스 지음, 원은주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1.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독자에게 무언가를 툭 내뱉듯이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그것이 구린내가 나는 똥인지 아니면 황금으로 만들어진 똥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경우가 간혹 있다. 나는 <노란 새>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황금똥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황금똥을 실제로 구경해본 적이 없는지라, 작가의 주옥같은 배설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했다는 좌절을 느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우선 일독을 한 후, 다시 읽어야만 작가가 서술한 내면묘사를 직접 바트(나)의 입장이 되어 음미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해 봄에 전쟁은 우리를 죽이려 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이 신체적인 죽음뿐 아니라, 정신적인 죽음까지 상징한다는 것만 미리 알고 읽는다면 훨씬 더 이 소설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독 후의 감상을 남긴 후 바로 다시 읽기에 들어갈 예정이다.
2. 앞서 읽어야 할 책에서 예고한 대로 <노란새>는 자전적 경험이 담긴 전쟁 소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껏 많은 전쟁 소설이 다룬 소재인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을 제일 먼저 기대해 봄 직하다. 실제로 이라크 파병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에게 쇄도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하니, <노란새>는 그 질문에 매우 충실한 소설이다.
<노란 새>에서 내가 그러한 모범 답안지만 봤다면 황금똥이라고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극적 흥미를 유발시키는 차별화를 시도했다. 마치 추리소설 같은 플롯을 사용하여 반전이 있는 결말을 가장 나중에 공개하고, 결말의 원인과 결말 후의 반응(전쟁터에서의 시간과 귀국 후의 시간)을 교차시켜 서술했다. 전쟁의 고통과 귀국 후의 안도감이 교차할 것 같지만, 아쉽게도 주인공의 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절망을 떨쳐내지 못한 트라우마가 공존한다.
개인적으로는 귀국 후의 심리적 불안감을 드러내는 서사에서 전쟁터의 인물들의 마지막이 어떻길래 주인공의 현재가 이러할까? 궁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시간차 플롯 덕분에 전쟁은 나쁜 것이라는 당연한 결론으로 귀결하는 대신 문학 작품에서 기대할 만한 스릴감과 약간의 거리 두기로서 이성적으로 사건을 지켜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3. 소설에서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나는 작은 부분에 관심을 보였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에이, 그냥 군대나 가야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군에 입대했다가는 이 책의 말마따나 그냥 좆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이 소설 속의 인물이 그런 마음가짐(남자다워지고 싶어서,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이런 사달이 났다. '설마 내가 전쟁터까지 가겠어?' 라고 생각했다가, 잘못 꼬여서 전쟁터에 차출된다.
고작 스무 살 남짓한 친구들이 말이다. 그들이 전쟁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군대가 보균한 딱히 언급하지 않아도 알만한 그런 부조리한 문제에 노출되고, 그것이 현실로 급작스럽게 다가왔을 때, 그들은 저항할 힘을 잃고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그들은 1,000번째 죽음만 벗어나면 자신들만은 자유로울 것이라고 간절히 바랐건만, 그것은 그야말로 그들 만의 바람에 그치고 말았다.
4. 글을 쓰고 난 뒤에 생겨난 마지막 생각들까지 마저 정리하자. 댓글에 대장물방울님께서 표지에 대해서 코멘트를 붙여주셨다. 나르시스의 느낌이 난다고. 사실 이 소설에서 그런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그런데 표지는 나르시스의 느낌이 뭍어났다. 그래서 표지와 소설의 내용과 전혀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래의 댓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소설은 나르시스도 아니고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의문이 형성된 이상 왜 이런 표지를 사용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러던 찰나. 우연히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의 동료 머프에 대한 묘사에서 그에 대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178. 무엇이 없어졌는지 설명할 재료가 충분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머프를 재구성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그림은 점점 더 흐릿해졌다. 내가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기억이, 다른 기억을 영원히 밀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어느 정도 비율이 있었다. 마치 거꾸로 퍼즐을 맞추는 것 같았다. 비슷한 모양들, 급격히 희미해지는 그림, 완전함과 완성을 방해하는 보드지의 흐릿한 황갈색.
머프는 그(나)의 곁을 떠났다. 이것은 스포가 아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소설의 초반에서부터 줄기차게 머프는 죽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스포는 어떻게 죽었느냐가 될 것이다. 그러니 안심해도 좋다. 어쨌든 머프는 그의 곁을 떠났고, 전쟁을 끝내고 귀국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머프에 대한 기억이 아주 멀어지지도. 그렇다고 생생하게 떠오르지도 않는 아주 불편한 기억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황갈색이요. 흐릿한 색감이다. 바로 표지의 색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5.
210. 머프는 선택을 하고 싶어했다. 머프는 원하고 싶어했다. 머프는 내부에서 자라나는 무감각을 다른 무언가로 바꾸고 싶어했다. 머프는 그의 몸 주변에 모여드는 것을 결정하고 싶어했으며, 어쩌다 우연히 그에게 들러붙어 응축 원반처럼 주변에서 궤도를 도는 것을 거부하고 싶어졌다. 머프는 자신이 요구하지 않은 모든 것의 흩어진 잔해를 자신의 의지로 밀어내고 균형을 잡았다는 하나의 기억을 가지고 싶어했다.
225.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박물관의 큐레이터 같았다. 나 자신조차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얻은 작은 패물 하나를 신발 상자에 다시 집어넣고, 다른 하나를 꺼내기도 했다. 여기에는 탄피 하나, 저기에는 군복 오른쪽 어깨에서 떼어낸 연대 기장 하나. 내가 살아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 삶의 흔적을 나타내는 물건들이었다.
236. 스털링 그의 인생은 궤도를 따라 도는 물체처럼 전적으로 의존적이었으며, 별 주변을 흔들거리며 도는 행성 중 하나로만 존재했다. 그가 한 모든 행동은 존재하는 기대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는 딱 한 가지 행동만 할 수 있었으며, 그건 그의 짧고 혼란스러운 인생의 마지막 행동이었다.
이것은 나와 머프. 그리고 스털링에 대한 성향에 대한 단적인 비교를 그려낸 문장이다. 이 소설은 머프 - 나 - 스털링의 구도로 형성되었음을 알려둔다. 이 비교를 보면서 나는 어쩌면 머프는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킨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은 최후를 맞이한 것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해봤다. 그렇다면 저 표지에 실린 성인(聖人) 같은. 미소년의 모습이 이해가 가능하다.
어쨌든 소설을 읽을 당시에는 머프에 대한 존경심은 썩 크게 일지 않았는데, 어떻게 꼬인 퍼즐을 풀다 보니 무언가 보이는 느낌이다. 이런 마무리를 짓도록 도와주신 대장물방울님께 감사를 표하는 의미에서 노란 새의 함정을 건네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