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의 경제학 - 모방은 어떻게 혁신을 촉진하는가
칼 라우스티아라 & 크리스토퍼 스프리그맨 지음, 이주만 옮김 / 한빛비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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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모방의 경제학>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요즘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하나, 둘 훑어봤다. 한 때는 책에 '경제'라는 단어만 들어갔다 하면 볼을 헤집고 읽으려 했었는데, 어느새 내 책상 근처에는 책 제목에 '경제'가 있는 책이 단 한 권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세계문학전집과 인문학. 특히, '철학'이 들어간 책들이 내 손이 뻗을 수 있는 공간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꽤 낯설법한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과거에 이 책을 만났더라면 지식의 '베끼기'가 그것을 독점하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효용이 큰 까닭을 책에서 이야기하는 몇 가지의 근거를 나열하며 글을 써내려갔을 터인데, 그것은 이제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2. 혁신. 창의력이 꺼지지 않고, 지금 이 시간에도 환하게 불을 밝히는 원인은 그것의 독점이 아니라 베낌으로 인한 전파에 있음을 <디지털 해적들의 상상력이 돈을 만든다>라는 책에서 먼저 읽어버린 탓이 크다. 무형의 지식은 인류의 역사가 그래 왔던 것처럼 자유롭게 전해져야만 더 큰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모방의 경제학>에서는 이 지식의 모습을 미식축구의 전술에 담아내어 그것의 발전과정을 아주 흥미롭게 설명한다. 스포츠 종목의 전술적 진보나 패션의 진보는 지식의 진보에 진배없다. 그것은 돌고 돈다. 미식축구뿐 아니라 최근 축구의 흐름 또한 속칭 티키타카라는 바르셀로나의 점유율 축구가 대세인데, 그 전술의 흐름을 좇거나 혹은 파헤치는 축구 경기를 보면서도 즐거움은 생성된다.  

 

3. 유형의 제품(특히, 명품)이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얻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소비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위재라는 상징성이 부여되어 있으며, 그것을 착용함으로써 남들에게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명품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은 오리지널의 존재가 잘 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을 가지려는 사람들을 위해. 쉽게 말해서 그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증명하는 모조품의 홍수에도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조품의 홍수는 이처럼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음을 알려주는 바로미터의 기능을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조품이 차고 넘쳐서 오리지널마저도 평범해지는 순간에는 그것을 재빠르게 잡아내는 사람들의 창작품으로 유행을 다시금 만들어낸다는 거다. 그렇다면 모조품은 자신도 모르게 유행의 순환을 빠르게 하여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4. 그런데 이런 모든 논의는 창조자들보다는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용한 주장이다. 즉, 공리주의적인 관점이라는 거다. 순환은 일단 그것을 베끼는 행위가 선행하고, 그다음 그것을 보완하거나 아니면 반하여 초월하는 무언가가 재창조되는 것이다. 모든 사건과 역사가 그러하다. 변증법적이다. 

 

그러니 순환의 열매를 취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베끼기의 경제학은 훌륭한 이론이나. 내가 주도하는 유행의 흐름에서 '나'의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최대한 그 흐름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 흐름을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대중'이라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기꺼이 자신의 성과를 여러 사람에게 공개하기도 한다. 그 공개는 과연 진보만을 위한 공개일까? 당신은 절대 나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한 기대 심리도 담겨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유명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니 말이다. 

 

5. 책을 '경제'로 빼곡한 그곳에 넣어둬야겠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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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 1 - 부익부 빈익빈 뱅크 1
김탁환 지음 / 살림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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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검은 액체가 전하의 혀끝에 닿는 순간을 상상하며 내 모든 감각을 깨우고 또 깨웠다. 사랑보다도 더 짙은…… 어떤 '지극함'을 배우고 익히는 나날이었다. -노서아 가비 131p-

 

1. <노서아 가비>을 읽었을 적. 김탁환 작가에게 받은 인상은 간결함이었다. 짧지만 심혈을 기울인 듯한 정갈한 문장이 기억에 남았었다. 이번 <뱅크>에서도 같은 기대를 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3권으로 이뤄진 <뱅크>의 분량에서 짐작하다시피 문장의 간결함이나 정갈함에 신경을 쓰기에는 신경 써야 할 곳도 많아졌고, 품고 있었던 엉킨 실타래의 양도 많아졌다.

 

정갈함의 상실과 더불어 단어의 선택에서 과거의 언어와 현재의 언어가 혼란스레 뿌려진 듯 하여 아쉬운 점도 있었다. 하지만 스릴있는 사건 전개에서 포착되는 재미와 가독성이라는 특유의 요소는 <뱅크>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게끔 하는 소설이기도 했다. 개연성이라는 측면에서의 갑작스러움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단절은 피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2. 소설이야기를 해보자면. <뱅크>는 복수극이었다. 그런데 그 복수가 각 주인공에게로 중첩된 구조였다. 주요 인물외 대부분의 인물이 이야기에 재료로 소모됨으로써 복선과 결말(음모)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사건(음모)이 공개되면서 카타르시스를 유도하는 그런 소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쉽게 말해서, 탐욕이 뿌린 복수라는 씨앗이 싹을 틔우고, 그 싹에서 자라난 씨앗이 또 다시 복수를 낳는다는 설정이다. 

 

박진태와 장철호. 이 두 인물이 바로 복수를 품에 안은 사람이다. 소설 <뱅크>가 금과 연동하는 조선의 화폐. 즉 실질적으로 가치가 있는 화폐를 유통시켜 외세에서 벗어나 민족 정신을 부흥시키려는 의미를 지닌 상징적 공간인 한국중앙은행의 건립 배경을 둘러싼 이야기라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돈을 다루는 곳. 즉, 부의 결승점을 향해 달려감으로써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경쟁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상한대로 두 인물의 가치관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利)를 우선시 할 것이냐. 아니면 (義)를 먼저 할 것이냐의 싸움. 그러니까 <뱅크>는 훌륭한 인재란 어떤 인재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주도권 싸움은 다소 싱거운 승리와 패배로 매듭지어진다. 

 

3. 책을 보다 TV를 켰는데, 정말 우연히 학생들과 질문을 주고 받는 안철수 의원(그때는 교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토시하나까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어떤 인재가 훌륭한 인재냐는 학생의 질문에 안철수 의원이 답하기를... 

 

다행스럽게도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그 프로그램의 정확히 그 부분만을 캡쳐한 분의 블로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블로거도 아마도 이 내용을 인상 깊게 봤나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뱅크>에 담긴 핵심적인 내용(송상의 상부상조 정신)도 이와 같다. 한 번 감상해보길 바란다. 

 

학생 : 이병철 삼성 전 회장님이 하신 말씀 중에 '기업은 사람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요. 사회를 이끌고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그런 인재상을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안철수 의원 : 인재상에 정답이 있는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시대마다 다 바뀌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 걸 인식하는 인재가 가장 중요한 것 같거든요. 어떤 회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앞으로는 만 명의 먹을거리를 만들 수 있는 인재가 중요하다고 했는데요. 거기에서 빠진 게 뭐냐면 만 명의 먹을거리를 만드는데 그 만개의 먹을거리를 전부 혼자서 다 독식하고 차지하고 심지어는 남의 것까지도 다 자기가 가져가버리면 그러면 그 사람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죠. 


그래서 기업으로 따지면 이런게 있잖아요 ' 기업의 목적은 수익창출이다' 그게 다 국민 상식 같죠? 그런데 사실 그건 틀린말이에요. 왜 그런가 하면 예를 들어 기업의 목적이 수익창출이라는 걸 너무 지나치게 믿고 그쪽방향으로 가다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익만 창출하면 된다고 스스로 정당화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예를 들어) 불량식품을 만들어요. 그러면 자기는 돈을 버는데 그 불량 식품을 먹고 수많은 어린이들이 아프고 사회가 나빠지잖아요. 그러니까 혼자서는 자기 목적 달성하고 자기는 잘 먹고 잘 사는데 사회 전체로 보면 그건 오히려 없는 게 더 좋은 암적인 존재, 범죄집단이잖아요.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인식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 그게 인재 같아요. 능력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4. 한편, 극에서 빠질 수 없는 소금 같은 존재인 애정에 얽힌 이야기도 등장한다. 두 주인공과 인향과의 삼각관계. 그 외에도 현주와 진태. 그리고 악의 근원인 권혁필. 조력자인 조명종 간의 지고지순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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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본질
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박석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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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V 프로그램들. 특히, 프로야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저 화면에 등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저 모습이 프로가 낼 수 있는 베스트가 아닐까?' 라고 말이다. 즉, TV를 통해 우리들에게 전달되는 화면은 엄청난 내공이 쌓인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의식과 본질>을 읽으면서 TV의 결과물조차도 책에 비하면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의식과 본질>은 뭐랄까... 시각적 외. 모든 감각의 내공. 특히, 내면의 고뇌가 누적된 결과물이랄까? 

 

동양과 서양의 종교와 철학의 개념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책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본질의 3가지 분류에 따라서 하나의 범주로 묶어내거나 해체하는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음...앞으로 이어나갈 글이 옳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를 적어보기로 한다. 

 

2. 

아무리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모든 불가능을 배제하고도 남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다. 

- 트위터 탐정 설록수, 189p-

 

토실여왕님의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이 문장은 <의식과 본질>에 따르면 세 번째 본질긍정론에 해당함을 알 수 있었다. 모든 불가능함을 제거하고 남은 것이 진실이라는 의미는 곧, 끊임없이 질문을 하면서 불가능을 제거하고 진실을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과 같은 맥락이고, 그것이 바로 본질이 표층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세 번째 본질론에 해당했다.   

 

3. 나는 항상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생각했다. 책의 개념에 따르면 나는 마히야(보편적 본질의 세계, 플라톤의 이데아)를 버리고 후위야(즉물적이며 경험적인 리얼리티를 표방)로 간 릴케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 역시 릴케처럼 이 세상의 본질의 유무에는 상관없이 내가 중심이 되어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고 봤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어쩌면 오만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알고자 하는 실존조차도. 실존 자체가 하나의 본질로서 작용함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결국, 내가 실존의 영역에서 보려 했던 것은. 즉, 무의식적인 문화적 학습을 통하여 얻어진 관점이라는 큰 틀로 봤을 때, 첫번째 본질긍정론을 따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의식과 본질>의 첫 번째 본질론은 표층의식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심층의식에서 깊게 사물을 보는 것인데, 그러한 바라봄에 있어서 모든 것을 무로 만드는 단계가 선행하고, 그 뒤에 순간적인 번뜩임이 등장하여 존재가 분절화하여 등장한다고 한다. 또한 그러한 번뜩임이 존재하는 문학이 대체적으로 시 문학에 많이 분포한다. 그래서 시에 등장하는 언어는 언어 그 자체가 사실적이지 않고 상징적인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이한 관점도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4. 참고로 두 번째 본질긍정론은 첫번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심층의식에서 본질을 찾는 것인데, 여기서는 샤머니즘처럼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원형의 본질이 있고, 그러한 본질은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의 가운데에 있는 M의 영역에서 이마주(상징적 이미지화)된 것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고 말한다.  

 

이래의 글은 갈림길을 읽고 적은 '사실'과 '진실'에 관한 생각이다.

 

소설 내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결과에 의하면 '사실'은 인간이 느끼는 개인적인 관념이다. 헌데 그것은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아주 커다란 개념이다. <갈림길>에 의하면 '진실'이란 신이 만들어놓은 것과 같다고 여겨진다. 그에 비하면 '사실'은 아주 작은 것을 다룬다. 그리고 '사실'이라는 것이 '진실'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실'을 '진실'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평생 노력하는 존재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다.

 

여기서 '사실'이란 표층에서 부유하는 인간의 판단이고, '진실'이란 아마도 두 번째 본질긍정론의 본질과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가깝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은 본질을 찾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한 모습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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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기다림 민음사 모던 클래식 63
나딤 아슬람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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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 참 둔한 사람이라는 것을 원래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뒤에 읽을 책이 잔뜩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좀처럼 소설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그냥저냥 대충 때우고 넘어갈 법도 한데, 읽히지 않는 글자들을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이번에는 하도 안 읽혀서 혼자 상상하며 연기까지 했다.) 이틀을 붙잡고 읽어냈다. 

 

단순히 읽어낸 것이 아니라 챕터가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이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다양한 관점에서의 날카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마커스가 탈레반에 들키지 않으려고 덕지덕지 붙여둔 진흙이 조금씩 떨어져 나오면서 보였던 벽화처럼 말이다. 나는 마침내 <헛된 기다림>의 막막하고 답답한 시작점을 견디고 무너뜨림으로써 소설 속 인물의 다양한 시점에서 비치는 여러 사유에 와 닿을 수 있었다.

 

2.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신념을 품고 살 필요와 그것을 표출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임스의 독백처럼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신념만 있을 뿐 자유는 없었다. 신념도 자신에게 필요하고 자신이 홀로 지켜내야 할 신념보다는 남이 부담해야 할 신념과 그것을 강제해야 하는 신념에 가깝다. 특히, 여성에게 더욱 가혹한 신념을 적용했다. 

 

냉전과 전쟁이라는 온도 차. 미국과 소련의 주도권 전쟁의 틈을 노리고 제각기 이득을 취하려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의 양대 군벌 간의 세력 다툼. 그리고 이슬람의 영역에 침범하여 그들의 신념에 반하는 이념(교육)을 심는 이방인들을 처단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탈레반의 학정. 이 모든 흐름에서 철저하게 배제되는 민중의 시선에서의 기록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몰고 왔다. 

  

도대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서술하는 사실주의적 구성과 거대한 세력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비극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인물들을 읽어내려가면서 왠지 <제노사이드>가 생각났다. 냉전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전쟁이 끊이지 않는 말살의 소용돌이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나'라는 존재의 관찰과 관점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아픔을 느꼈다. 

 

그러한 삶의 순간순간을 참고, 견뎌내어 그들(아프가니스탄)의 삶을 <헛된 기다림>이 아닌 희망의 기다림으로 바꾸어보려고 애쓰는 소수의 희생자들. 그리고 오늘 이시간에도 희망을 놓치지 않고, 큰 뜻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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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돌콩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0
홍종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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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누구도 태어나길 원치 않았던 존재임을 의미하듯. 일요일에 태어났다고 지어진 '공일'이라는 이름에는 그에 대한 가족의 어떠한 소망도 기대도 담겨있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움츠러들었던 존재는 동급생의 폭력에 시달렸다. 

 

학교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다마스 차량을 훔쳐 탄 무면허 운전자 공일은 자신을 그렇게 만든 가족이 그리 대단치 않은 가족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허술해 보였던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는 범죄자라는 낭떠러지에서 공일의 손을 잡아 끌어낼 여력이 충분했다. 

 

왜냐하면 <달려라 돌콩>의 공일에게는 비록 씨가 다른 아버지의 자식이지만 핏줄 모두를 보듬는 버팀목이 되려고 노력하는 형이 있었고, 유난스럽게 패악을 떨지만 차마 마지막 궁지에까지는 몰아넣지 않는 형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토록 엉망진창인 공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공일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을 던질 무언가를 찾길 진심으로 바라고 동시에 요구하는 공일보다 2살 많은 조카가 있었기 때문이다. 

 

2. 그런가 하면 학교라는 정글을 벗어난 넓은 공간에서 그를 기다리던 또래집단은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동갑이지만 누나 같은 푸근함이 매력적이었던 금주. 학교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영태. 그에게 처음으로 이성적이며 이채로운 관심을 보인 아영. 그런 이채로움의 눈길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그가 쥐고 있던 말 채찍이었고, 그녀의 한마디 말로 인하여 공일의 진로가 결정된다. 사랑의 힘이랄까? 그보다는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근본적인 욕망이랄까?

 

한편, '공일'에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친구는 자신과 빼닮은 모습(아무에게도 선뜻 등을 내주지 않던) 때문에 공일과 똑같은 이름을 얻게 된 '우공일'이라는 소가 있었다. '우공일'은 오직 공일에게만 마음을 여는 소였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돌콩들(제주도 조랑말)도 있었다. 제주도에 있던 실제 '돌콩'과 주인공은 아영에 의해서 동일시되기도 한다. 

 

108. "작다고 얕보지 마라. 내 안에도 천지의 모든 기운이 들어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줄기라고 안타까워하지도 말아라. 한번 잡으면 내 몸이 끊어지기까지 놓지 않는다. 너희는 언제 이렇게 목숨 걸고 무언가를 잡아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단단하게 익어본 적이 있는가?"

 

3. 제주도 조랑말의 겉모습. 그리고 오공일과 우공일의 겉모습. 그 둘을 연결하는 돌콩의 겉모습은 작고 약하고 볼품없는 존재를 의미하나, 반대로 그 속에 숨어 있는 단단한 알맹이를 의미하며, 그 알맹이가 영그는 성장의 소설이 바로 <달려라 돌콩>을 정의한다.

 

4. 다만 소설을 읽으면서 살짝 아쉬웠던 점은 학교와 바깥을 너무 상반된 공간으로 풀어낸 점. (그로 인하여 학교 바깥의 의지력있고 당찬 아영의 모습과 버스에서 소똥 냄새가 난다며 다짜고짜 채찍을 뺏어들고 동급생을 향해 휘둘렀던 아영의 모습 간의 괴리감) 

 

감정을 긴 호흡의 문장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비속어나 의성어로 짧막하게 표현한 점.

 

기수가 되기 여정에서 외형적인 면에서의 작은 존재라는 틀을 강조한 점. (이 부분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분명 인간의 외형적, 내형적인 다양한 개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었겠지만 그럼에도 외형적 틀에 맞춘다는 느낌이 많이 전해졌다는 점) 정도가 있었다. 

 

물론, 공일이 자기오 있는 동물과의 높은 친밀감은 마음을 열지 않았던 우공산이 마음을 열었던 점으로 증명할 수 있지만, 기수가 되길 반대했던 이유는 충분히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좀 가벼운 느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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