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 영혼의 치유자 - 눈으로 보는 융 심리학
클레어 던 지음, 공지민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1. 이 책은 카를 융의 평전이다. 이 책은 그의 사상을 심도 있게 논의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카를 융이라는 한 인간의 삶에는 어떤 고난들이 있었는지. 그러한 고난을 경험하면서 한 사람의 인간에 존재하는 아주 상반된 성향이라는 뜻을 지닌 '대극'을 발견했고, 발견에 그치지 않고 그 둘 사이의 통합을 연구함으로써 자신을 극복했던 외로운 학자의 업적을 기려냈다. 그리고 그 외로운 뒷모습을 지켜봤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첨부해두었다. 

 

2. 대표적인 심리학자인 융과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친밀하게 지냈다(그들이 생각하는 사상 간의 격차는 처음부터 존재했지만 융은 그것을 체계적으로 부수지 못했고, 경험의 부족을 토로한다.)고 한다. 그렇게 인연을 맺어오다가 결국, 융은 꿈에서 나타나는 무의식의 산물은 프로이트의 "억압된 성욕"이라는 견해에 반대함으로써 갈라서게 된다. 

 

만약, 프로이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문화는 단지 억압된 성욕이 표출된 병적인 결과라는 것인데, 융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카를 융의 평생의 경험을 따르면 꿈이 알려주는 상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물리학으로 따지자면 꿈은 원자와 같았다. 철학 사상으로 보자면 꿈이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플라톤의 동굴에서의 그림자가 아닌 존재(이데아)의 측면이 강했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데아와 카를 융의 원형의 차이점이라면 플라톤의 '존재 너머'에는 '선' 만이 존재할 수 있었고, 그것을 모방하여 원래의 존재를 유혹하고 변질시키는 예술을 멀리함으로써 선의 추구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것에 반해서. 융의 원형은 선과 악을 모두 인정하고, 양극단(대극)을 전부 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에게는 온화한 천사 같은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갑고 냉정하며 잔인한 악마의 요소도 함께 지니고 있음을 주장한다.

 

3. 그는 여러 나라의 신화, 영지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연금술. 그리고 동양의 사상과 종교 같은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인용하자면. 그리스도살로메땅의 영혼인 Ka[고대 이집트인이 생각한 사람 혹은 신의 혼], 만다라,  파네스[오르페우스 밀교 신화의 자웅 양성을 지닌 개벽의 신], 중국의 연금술서인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 주역 등) 정상 학문과는 다소 거리가 먼. 

 

그 당시에는 명맥이 희미하게 유지되고 있었던 분야를 깊이 공부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유럽인들의 제국주의적인 행태에 염증을 느낀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한계 짓던 '유럽인'이라는 틀을 깨고, 다양한 인류 속의 중립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양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깨달음을 통해 자신이 어릴 때부터 품어온 의문점(외향적인 제1 자아와 내향적인 제2 자아)을 풀어줄 도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그가 말하고자 하는 영혼과 그 너머의 세계는 이미지로만 상상하기에는 상당히 다채롭고 화려한 모습이다. 깊이 파고들기에는 어려운 주제인 동시성이라는 그의 사상은 물리학의 양자역학과 관계되고, 차원 이론과도 관계있는 상당히 생각할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그러나 그처럼 현실 생활과는 다소 먼 주제는 일단 제쳐 두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내린 그의 결론만 놓고 보면 그는 사람들의 개성화. 즉,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정확히 파악한 뒤, 그것에 맞추어 충실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지난번에 읽었던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라는 책이 환상적이고 다차원적인 요소가 배제된 책으로서, 일반인들에게 가장 추천할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그 책에서 주장하는 바도 한결같다.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대중의 한 사람으로 만족하지 말고, 개인의 목적을 위해 애쓰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카를 융의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징한 삶의 권유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술철학 : 플라톤에서 들뢰즈까지
시릴 모라나.에릭 우댕 지음, 한의정 옮김 / 미술문화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아름다움에 대해서 언급했던.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가장 먼저 평가했던 인물은 플라톤이었다고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선과 같은 의미이고, 그것은 우리가 잡을 수 없는 이데아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의 예술활동과 산물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흐리는 것이며, 진리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영역(무려 최대 3단계나 떨어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는 모방. 즉, 미메시스에 대해서 개방적이었다. 모방을 좀 더 인간에게 유리하게 적용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엔 세상을 모방한 예술 작품을 통해 나쁜 것들은 배설하여 치유하고, 좋은 것들은 정화하여 고양시킨다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 예술의 카타르시스를 긍정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하는 창조물에게는 엄격한 규칙이 주어졌다.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바람직함. 그것이 요구되었다. 

 

3. 한편, 플라티노스라는 신플라톤학파는 '일자' 라는 새로운 관념을 가지고 등장한다. 플라톤처럼 감각미 보다는 예지미를 더 우월하게 보는 관점은 같지만, '존재너머'에 있는 이데아와 유사한 성질의 예지미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플라톤이 거부했던 감각미든 뭐든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끌어들여 결국에는 궁극적인 미로 향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그것을 예지미의 현현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4. 세월이 흘러 디드로라는 계몽주의자가 등장한다. 그가 이상향으로 삼은 예술의 성격은 민중을 계몽하기 위한 것과 동시에 사실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어야 했다. 그의 미는 예술과 종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 정치로 확대되어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 디드로의 주장을 가장 잘 실천에 옮긴 예술가로는 자크 루이 다비르를 들 수 있겠다. 

 

5. 에드먼드 버크라는 학자는 오랜 세월동안 유행해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주의. 즉, 비례를 강조하는 예술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예를 들면 여성의 몸이나 식물의 꽃 같은 경우는 전혀 비례의 미와는 관련성이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 그와 더불어 숭고(낭만주의와 관련이 있는)라는 새로운 개념을 발표하기도 하고, 미에 관한 단일적인 기준보다는 좀 더 복합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어떤가라는 의견을 개진한다.  

6. 칸트의 미는 개인의 주관성에 의존한다. 하지만 주관성에 의존하되. 궁극적인 미의 기준은 일정하다. 그래서 목적지는 정해져있다. 또한, 칸트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아름다운 무엇이다. 동시에 어떤 개인적인 욕망을 품지 않으면서도 아름답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무심한 상태에서 본 예술작품에 대해서 아름답다고 칭찬을 할지라도 결국, 예술은 자연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칸트는 생각하고 있었다.

 

7. 헤겔의 미학은 칸트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헤겔은 예술미와 자연미에 관한 논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예 자연미를 빼버린다. 즉, 진리라는 성격이 짙은 '존재 너머'의 모호한 어떤 것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헤겔이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인간의 창조와 관계를 맺게 된다. 갑자기 인간. 특히 예술가의 존재가 강하게 떠오른다. 예술가가 생각하는 관점이 포착한 순간의 분리. 그것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보다 중요해진다.  

 

8. 니체가 생각하는 예술은 일단 비극이 중심이 된다.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니체가 언급하는 비극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이야기했던 카타르시스의 배설과 정화와 같은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통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술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합체된 무엇으로 형성된다. 

 

9. 베르그송의 미학은 예술가 집단과 평범한 인간 집단을 나눈다. 앞서 이야기한 디드로의 계몽주의적 측면과도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긴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디드로의 예술가에게는 시민들을 위해서 지켜야 할 것과 알려야 할 것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것에 반하여. 베르그송의 예술가는 모든 판단을 예술가의 자율(이것을 초탈이라고 부르기로 한다.)에 맡기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가가 보지 못하는 것은 범인 역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예술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10. 알랭은 상상력을 경계한다. 넓은 범위의 포괄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그것이 단순한 몽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몽상이 되면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없으며, 몽상만 하는 자는 예술가가 아니라 견자에 머무를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상상력으로 빚어놓은 관점과 창의력. 그것에 더하여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 그리하여 예술가에게 장인의 지위가 부여된다. 하지만 몽상만 하는 견자들은 무언가를 만들려 하지 않는다.

 

11. 메를로 - 퐁티. 앞에서 언급한 사상가처럼 예술가의 정신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한다. 앞서 이야기한 베르그송, 알랭,메를로 - 퐁티까지 전부 인간의 존재에서 창조되는 산물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인다. 퐁티가 경계하는 것은 과학적 합리주의다. 과학적 사고는 인간 사고의 틀을 고정시키고, 효율성이라는 경제적 이득을 뺀 나머지 가치를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므로 상당히 멀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진정 뛰어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 개개인이 유기물 같은 존재가 되어서 되어서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에 마치 화학반응을 하듯이 가까이 접근하여 세밀하게 개성을 탐지하고 그것을 현상화하는 것이 예술가의 정신이 진정으로 해방되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퐁티가 원하는 이상향은 폴 세잔의 예술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12. 들뢰즈는 여기에서 더 발전한다. 철학자에 비해서 낮은 지위에 머물렀던 예술가와 예술가의 사유과정을 철학자의 사유과정과 동급으로 격상하여, 예술과 철학을 같은 기준으로 끌어올린다. 예술은 완전 무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정의하자면 지각과 정서를 집합한 감각적 집합체를 통해 창조한다고 설명한다.  

 

들뢰즈가 생각하기에는 예술이란 저항이라고 한다. 저항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모르겠지만, 우리가 실수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본능이 명령하는 비이성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부적절한 행동을 경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술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13. 간단하게 적어봤는데, 모호한 부분이 많다. 앞으로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베르 카뮈 - 태양과 청춘의 찬가
김영래 엮음 / 토담미디어(빵봉투)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1. 이 책은 간접적이거나 혹은 직접적이다. 소개팅에서 만날 사람에 대한 사전 정보를 하나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나. 소소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직접 알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따라서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의 문장은 카뮈의 손끝으로부터 나온다. 주선자의 역할은 카뮈가 남긴 전집 가운데서 소개해 주고 싶은 부분 정도만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열 개의 단어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다 : 세계, 고통, 대지, 어머니, 사람들, 사막, 명예, 비참, 여름, 바다 - 작가수첩 3 -

 

2. 개인적으로 처음 이 책을 한번 천천히 읽고 난 뒤, 지금은 이 열 개의 단어로 분류시켜놓은 편집자의 분류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차라리 나중에 카뮈를 전작하는 것이 카뮈를 아는데 더 쉬울 것 같다는 일종의 유예의 목마름이 간절하다.(당연히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이런 책이 출간되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 책 한 권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유예를 바라게 만든 이유는 이 책의 비어있는 공간이 나로 하여금 의심만 안겨다 주기 때문이다. 특히. Part 2. 카뮈를 읽다에서 <이방인>에 대해서 편집자가 발췌한 부분은 너무나도 허술하기 그지없다. 이방인의 2부는 아예 싹둑 잘려 나갔고, 1부의 일부만 짧게 옮겨놓았다. 이래서는 이 책을 읽고 <이방인>이 어떤 소설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만약 카뮈의 전집을 읽고도 이와 같은 모호함이 지워지지 않았다면 그제야 나는 그것이 순전히 나의 부족함 탓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듯하다. 

 

3. <알베르 카뮈>는 거의 대부분의 문장이 아포리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아포리즘에서는 생각해볼 거리가 없지는 않지만, 아포리즘의 짧은 길이 만큼. 그 생각 또한 짧은 순간 떠올랐다가 붙잡을 새도 없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흩어지는 가운데 그 아포리즘과의 짧은 만남 속에서 기어코 붙잡아둔 몇 가지 상념들은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 상념들 또한 단편적이라 무언가에 연결시키기엔 참으로 막막할 따름이다.

 

4. 아포리즘을 읽고 나서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여행과 두려움 간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우리는 언어와 환경. 모든 것이 낯선 곳으로의 추방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보호막이 벗겨지고 두려움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발전을 위한 두려움. 해체 후 재구성을 위해서 필요한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해봤다. 

 

5. <이방인>같은 소설에서는 상당히 짧고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는 카뮈였는데, 자신의 의식을 붙잡기 위해서는 그 역시 상당히 복잡하고 추상적이며 정리되지 않은 문장을 사용하는 것 같아서 왠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 문장에 묻어나는 답답함과 눈물. 즉, 모든 것을 말로서 표현하려고 하는 고통이 왠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6. 뭔가 더 읽고 많은 것을 남겨야 하는데 이 책 만큼은 조금 천천히 접근해보기로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방인 알베르 카뮈 전집 2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드디어 이방인이다. 사실 소설은 꽤 간단하다. 그런데 이 간단한 작품을 초월하는 분량의 어마어마한 (사실 내용이 크게 와 닿지는 않는다. 그 양에 치가 떨릴 뿐.) 비평이 따라붙는다. 그 비평을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너무 뫼르소 같은 문장이 되어버렸나….

 

<이방인>은 이방인(자신이 느끼기엔)일 수도. 이인(타인이 느끼기엔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다. 뫼르소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매우 불합리한 죽음으로 가는 여정(반대로 검사나 배심원들에게는 매우 합리적인 죽음)을 그렸다. 솔직히 뫼르소가 판결을 받는 과정을 찬찬히 살펴보면 상당히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피고인은 뫼르소인데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변론의 목소리를 삼키며 가만히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인>이 풍기는 부조리의 성격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심판>의 주인공인 요제프 K가 겪은 부조리. 즉,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고 끌려간 상황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방인>의 부조리는 뫼르소 그가 자초한 부조리기 때문에 카프카의 그것보다는 약했다. 

 

2. 뫼르소를 두고 카뮈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것에 나는 뫼르소를 니힐리스트라는 생각을 덧붙인다. 그는 이미 깨달았던 것이다. 인생의 덧없음을 말이다. 아마도 이러한 니힐리즘은 세계대전의 고통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카뮈의 아버지가 전쟁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유년기를 힘들게 보냈다고….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도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사회가 정해둔 절차에 순순히 모든 것을 맡기는 모습을 보인다. 겉은 귀차니즘으로 가득하고 말이다. 쉽게 말해서 뫼르소는 어떤 현상을 되돌리거나 진화시키려고 애쓰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것을 인정하고,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엄마의 장례식의 이질적인 풍경같이 비인간적이며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는 것 같은 느낌은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아기를 잉태한 숭고한 순간에 현실적이며 물리적인 불편함을 비집고 끼워둔 채 접근하기도 하고, 고향에 대한 향수는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과는 달리 지긋지긋한 것일 수도 있다는 그의 생각 말이다. 그런 것처럼 뫼르소 역시. 보통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관념들을 무시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경향을 타인에게 거리낌 없이 선보인다.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요즘 한 뮤지컬 배우가 너무 피곤해서 사인회를 하기 싫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행위 또한 잘못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면의 솔직함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럴 수 있고 자연스러운 심리의 표출이다. 문제라면 뫼르소. 그리고 그 뮤지컬 배우 둘 다 남들이 보는 공개적인 곳에 그것을 표출해버린 것이랄까. 어쨌든 사람이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모두 다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또 너무 도덕적인 이득을 챙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드라마나 영화일 뿐. 자신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3. 이처럼 본능에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낸 뫼르소에게 왜 부조리라는 벌이 따르게 되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니힐리스트를 벗어나기 위해 고의로 그렇게 했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던 그 원인과는 상관없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손에 있는 피스톨을 당긴 그 순간에 뫼르소의 모든 것에 균열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결정지을 그 절정의 순간 그가 고수해왔던 니힐리스트의 면모를 벗어버린다. 뫼르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버렸다. 그것은 모든 것에 순응해왔던 그의 일상과는 다른 아주 새롭고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뫼르소는 그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지키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순간 어쩌면 마리와 결혼할 수도 있겠다는 감정을 느낄 수도 있었고, 레몽과의 우정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4. 하지만 지금껏 그를 결정지어왔던. 규정지어왔던 니힐리스트적인 삶은 그가 살기 위해 무엇을 한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큰 족쇄가 되어버렸다.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타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보기엔 그는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사실 법정까지 가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공개적으로 밝혀지고, 또 문제가 될 리 없었다. 다만 좀 특이하고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 원래의 뫼르소였다면, 태양에 눈이 멀어 모든 행동을 멈췄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니힐리즘을 야기한 사회인가? 아니면 니힐리즘인가?  그것도 아니면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뫼르소. 그의 행동(니힐리즘에서의 탈피라는 변화)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거짓말과 변명을 할 줄 알아야 하는 인간 본연의 기능에 충실해야 하는건가? 여전히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세기의 셔츠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3. 그 사건에 대한 접근 방법은 거의 언제나 역사적이고 사실적이었으며, 다큐멘터리나 일화적 형식을 띠었고, 증언을 바탕으로 정확한 기록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의 원형적 자료는 생존자의 회고록이었다. 

 

30. "당신은 무엇에 관해 쓰신 겁니까?"

"나는 홀로코스트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썼습니다."


1.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만, 그곳을 가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걸어왔던 쉬운 길(역사적이고 사실적이며 다큐멘터리나 일화적 형식)을 놔두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담은 상당히 특이한 소설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얀 마텔 특유의 문장과 소설 구조가 낯설어서 마치 미로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 그가 소설 전체에 덕지덕지 붙여둔 알레고리와 상징들. 그것을 박제사와 소설가 헨리의 대화. 그리고 박제사가 쓴 희곡 <20세기의 셔츠>의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간헐적인 대화를 통해 퍼즐처럼 짜맞추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2. 책 광고를 처음 봤을 때 한 마리의 나귀와 한 마리의 원숭이가 등장하는 우화소설이라길래 자연스럽게 동물농장이 생각났다. <20세기의 셔츠> 또한. 동물을 비이성적인 인간처럼 알레고리화시킨 그런 설정인 줄 알았는데, 이 두 마리의 동물은 보통의 동물과는 달리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서 인간을 내려다보는 존재로 느껴졌다. 

 

생전 본 적도 없는 배의 모양과 크기와 색깔과 맛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시켜주는 두 마리의 박제된 동물은. 이 세상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인간이 얼마나 추한지도 알고 있는, 더 먼 곳을 내다보고 있는 샤머니즘의 존재 말이다.  

 

3. 소설 초반에는 작가 헨리가 쓰고자 하는 홀로코스트의 플립북에 관한 설명과 평론가와 출판 편집자들은 그 작품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과 더불어 출간을 직접적으로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과 평론이 반반씩 섞인. 그리고 책의 앞과 뒤. 양면에 소설 표지와 평론 표지를 붙인 상상 속의 작품은 왠지 박제사가 쓴 희곡 <20세기 셔츠>와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박제사와 헨리의 평가가 담긴 이 책에 대한 복선의 측면이 짙었던 것 같다. 

 

4. 작가 헨리가 출판하고자 마음먹었지만, 세상에 빛을 보게 하는데 실패했던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라는 고민을 담은 작품은 어떻게 보면 엄청난 우연 덕분에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것을 창작한 박제사라는 수상쩍은 인물에 관한 의문은 작품 마지막의 비극적 결말을 토대로 봤을 때. 자신이 홀로코스트의 고문관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도 이근안이라는 고문기술자가 있고, 그의 회고록이 출간되기도 했었는데, 그 회고록을 직접 읽어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김근태 상임고문에게 "쥐어박아 미안하다” 라던가 ""전기고문? 건전지로 겁줬을 뿐" 이라는 다소 황당한 변명을 접하니. 그는 박제사처럼 폭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을 움츠러들게 하는지. 그리고 역사 속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과실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반성하지는 않은 것 같다. 

 

5. 이제는 동물의 껍데기만 간직하는 박제사가 된 그는 평생을 자신이 저질렀던 행위를 곱씹었고, 그것을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지 고민해왔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상 어디에나 있을 셔츠라는 공간을 깨끗하게 만들 반짇고리 (바늘, 실, 골무, 헝겊 따위의 바느질 도구를 담는 그릇. 즉, 떨어진 셔츠를 최대한 복구할 수 있는 상징) 속에 홀로코스트(작품에서는 호러스)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도구를 저장해보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7. 반짇고리에 담긴 목록 전부 

 

고함원숭이, 검은 고양이, 말과 때때로의 침묵, 손짓, 한쪽 소매가 떨어져 나간 셔츠, 기도, 의회에서 회기를 시작할 때 갖는 기조연설, 노래, 음식 접시, 퍼레이드의 장식 꽃수레, 구두 모양으로 빚은 기념 도자기, 테니스 교습, 명백한 진실인 보통명사들, 하나의긴단어, 목록, 극한적인 상황에서의 공허한 격려, 목격자 증언, 종교적 의식과 순례, 정의와 경의를 표하는 사적인 행위와 공적인 행위, 표정, 두 번째 손짓, 말에 의한 표현, [원문 그대로] 희곡, 노볼리프스키 68번지, 구스타프를 위한 게임, 문신, 어떤 해를 상징하는 물건, 아우키츠. 

 

흥미롭게도 모든 것은 그 단어를 봐서는 전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없는 수수께끼투성이다. 하지만 <20세기의 셔츠>에서는 반짇고리 안에 들어있는 이 도구들의 쓰임새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입을 빌어서…. 그리고 작가 헨리의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생각엿보기를 통해서….

 

6. 우리는 그들의 대학살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처럼 우리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그리고 가장 홀로코스트와 비슷한 6 25 전쟁의 수난을 겪은 민족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그저 잔혹한 비극이었다고 기억하기보다는 그 잔혹한 사건과 아픔이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에둘러 가는 길을 함께 걸으면서 그날을 직접 겪고 고통스러워했던 사람들을 추모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것을 돕기 위해서 반짇고리에 적힌 구스타프를 위한 게임을 옮겨 적어본다. 이 게임은 총 13갠데 3가지만 옮겨본다. 


구스타프를 위한 게임 

 

게임 1. 열 살인 아들이 당신에게 말한다. 굶주린 가족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감자를 얻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아들이 사로잡히면 죽을 것이 뻔하다. 그래도 아들을 보내겠는가?

 

게임 2. 당신은 이발사다. 당신은 사람들로 가득 찬 방에서 일하고 있다. 당신이 그들의 털을 깎으면, 그들은 어디론가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당신은 매일 하루 종일 그 일을 한다. 한 무리가 다시 끌려왔다. 그들 중에서 당신은 절친한 친구의 아내와 여동생을 알아본다. 그들도 당신을 알아보고 반가운 눈인사를 보낸다. 당신은 그들과 포옹을 나눈다. 그들이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에 대해 묻는다. 당신은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게임 3. 당신은 손녀딸의 손을 잡고 있다.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한 채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모두가 기진맥진이다. 군인이 당신들을 한꺼번에 '진료소'로 데려간다. 하지만 그곳은 진료소가 아니라 군인의 표현을 빌리면 '알약 하나로 병을 고치는' 웅덩이다. 달리 말하면, 뒤통수에 박히는 총알 하나로 이 세상을 하직하는 웅덩이다. 웅덩이는 시신들로 가득하다. 아직 살아서 꿈틀대는 몸뚱이도 보인다. 지금 당신 앞에 여섯 명이 서 있다. 숙녀딸이 당신을 쳐다보며 질문을 한다. 뭐라고 물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