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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 : 플라톤에서 들뢰즈까지
시릴 모라나.에릭 우댕 지음, 한의정 옮김 / 미술문화 / 2013년 6월
평점 :
1. 아름다움에 대해서 언급했던.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가장 먼저 평가했던 인물은 플라톤이었다고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선과 같은 의미이고, 그것은 우리가 잡을 수 없는 이데아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의 예술활동과 산물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흐리는 것이며, 진리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영역(무려 최대 3단계나 떨어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는 모방. 즉, 미메시스에 대해서 개방적이었다. 모방을 좀 더 인간에게 유리하게 적용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엔 세상을 모방한 예술 작품을 통해 나쁜 것들은 배설하여 치유하고, 좋은 것들은 정화하여 고양시킨다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 예술의 카타르시스를 긍정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하는 창조물에게는 엄격한 규칙이 주어졌다.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바람직함. 그것이 요구되었다.
3. 한편, 플라티노스라는 신플라톤학파는 '일자' 라는 새로운 관념을 가지고 등장한다. 플라톤처럼 감각미 보다는 예지미를 더 우월하게 보는 관점은 같지만, '존재너머'에 있는 이데아와 유사한 성질의 예지미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플라톤이 거부했던 감각미든 뭐든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끌어들여 결국에는 궁극적인 미로 향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그것을 예지미의 현현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4. 세월이 흘러 디드로라는 계몽주의자가 등장한다. 그가 이상향으로 삼은 예술의 성격은 민중을 계몽하기 위한 것과 동시에 사실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어야 했다. 그의 미는 예술과 종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 정치로 확대되어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 디드로의 주장을 가장 잘 실천에 옮긴 예술가로는 자크 루이 다비르를 들 수 있겠다.
5. 에드먼드 버크라는 학자는 오랜 세월동안 유행해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주의. 즉, 비례를 강조하는 예술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예를 들면 여성의 몸이나 식물의 꽃 같은 경우는 전혀 비례의 미와는 관련성이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 그와 더불어 숭고(낭만주의와 관련이 있는)라는 새로운 개념을 발표하기도 하고, 미에 관한 단일적인 기준보다는 좀 더 복합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어떤가라는 의견을 개진한다.
6. 칸트의 미는 개인의 주관성에 의존한다. 하지만 주관성에 의존하되. 궁극적인 미의 기준은 일정하다. 그래서 목적지는 정해져있다. 또한, 칸트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아름다운 무엇이다. 동시에 어떤 개인적인 욕망을 품지 않으면서도 아름답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무심한 상태에서 본 예술작품에 대해서 아름답다고 칭찬을 할지라도 결국, 예술은 자연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칸트는 생각하고 있었다.
7. 헤겔의 미학은 칸트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헤겔은 예술미와 자연미에 관한 논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예 자연미를 빼버린다. 즉, 진리라는 성격이 짙은 '존재 너머'의 모호한 어떤 것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헤겔이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인간의 창조와 관계를 맺게 된다. 갑자기 인간. 특히 예술가의 존재가 강하게 떠오른다. 예술가가 생각하는 관점이 포착한 순간의 분리. 그것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보다 중요해진다.
8. 니체가 생각하는 예술은 일단 비극이 중심이 된다.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니체가 언급하는 비극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이야기했던 카타르시스의 배설과 정화와 같은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통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술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합체된 무엇으로 형성된다.
9. 베르그송의 미학은 예술가 집단과 평범한 인간 집단을 나눈다. 앞서 이야기한 디드로의 계몽주의적 측면과도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긴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디드로의 예술가에게는 시민들을 위해서 지켜야 할 것과 알려야 할 것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것에 반하여. 베르그송의 예술가는 모든 판단을 예술가의 자율(이것을 초탈이라고 부르기로 한다.)에 맡기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가가 보지 못하는 것은 범인 역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예술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10. 알랭은 상상력을 경계한다. 넓은 범위의 포괄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그것이 단순한 몽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몽상이 되면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없으며, 몽상만 하는 자는 예술가가 아니라 견자에 머무를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상상력으로 빚어놓은 관점과 창의력. 그것에 더하여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 그리하여 예술가에게 장인의 지위가 부여된다. 하지만 몽상만 하는 견자들은 무언가를 만들려 하지 않는다.
11. 메를로 - 퐁티. 앞에서 언급한 사상가처럼 예술가의 정신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한다. 앞서 이야기한 베르그송, 알랭,메를로 - 퐁티까지 전부 인간의 존재에서 창조되는 산물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인다. 퐁티가 경계하는 것은 과학적 합리주의다. 과학적 사고는 인간 사고의 틀을 고정시키고, 효율성이라는 경제적 이득을 뺀 나머지 가치를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므로 상당히 멀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진정 뛰어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 개개인이 유기물 같은 존재가 되어서 되어서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에 마치 화학반응을 하듯이 가까이 접근하여 세밀하게 개성을 탐지하고 그것을 현상화하는 것이 예술가의 정신이 진정으로 해방되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퐁티가 원하는 이상향은 폴 세잔의 예술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12. 들뢰즈는 여기에서 더 발전한다. 철학자에 비해서 낮은 지위에 머물렀던 예술가와 예술가의 사유과정을 철학자의 사유과정과 동급으로 격상하여, 예술과 철학을 같은 기준으로 끌어올린다. 예술은 완전 무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정의하자면 지각과 정서를 집합한 감각적 집합체를 통해 창조한다고 설명한다.
들뢰즈가 생각하기에는 예술이란 저항이라고 한다. 저항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모르겠지만, 우리가 실수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본능이 명령하는 비이성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부적절한 행동을 경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술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13. 간단하게 적어봤는데, 모호한 부분이 많다. 앞으로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