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셔츠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3. 그 사건에 대한 접근 방법은 거의 언제나 역사적이고 사실적이었으며, 다큐멘터리나 일화적 형식을 띠었고, 증언을 바탕으로 정확한 기록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의 원형적 자료는 생존자의 회고록이었다. 

 

30. "당신은 무엇에 관해 쓰신 겁니까?"

"나는 홀로코스트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썼습니다."


1.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만, 그곳을 가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걸어왔던 쉬운 길(역사적이고 사실적이며 다큐멘터리나 일화적 형식)을 놔두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담은 상당히 특이한 소설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얀 마텔 특유의 문장과 소설 구조가 낯설어서 마치 미로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 그가 소설 전체에 덕지덕지 붙여둔 알레고리와 상징들. 그것을 박제사와 소설가 헨리의 대화. 그리고 박제사가 쓴 희곡 <20세기의 셔츠>의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간헐적인 대화를 통해 퍼즐처럼 짜맞추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2. 책 광고를 처음 봤을 때 한 마리의 나귀와 한 마리의 원숭이가 등장하는 우화소설이라길래 자연스럽게 동물농장이 생각났다. <20세기의 셔츠> 또한. 동물을 비이성적인 인간처럼 알레고리화시킨 그런 설정인 줄 알았는데, 이 두 마리의 동물은 보통의 동물과는 달리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서 인간을 내려다보는 존재로 느껴졌다. 

 

생전 본 적도 없는 배의 모양과 크기와 색깔과 맛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시켜주는 두 마리의 박제된 동물은. 이 세상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인간이 얼마나 추한지도 알고 있는, 더 먼 곳을 내다보고 있는 샤머니즘의 존재 말이다.  

 

3. 소설 초반에는 작가 헨리가 쓰고자 하는 홀로코스트의 플립북에 관한 설명과 평론가와 출판 편집자들은 그 작품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과 더불어 출간을 직접적으로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과 평론이 반반씩 섞인. 그리고 책의 앞과 뒤. 양면에 소설 표지와 평론 표지를 붙인 상상 속의 작품은 왠지 박제사가 쓴 희곡 <20세기 셔츠>와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박제사와 헨리의 평가가 담긴 이 책에 대한 복선의 측면이 짙었던 것 같다. 

 

4. 작가 헨리가 출판하고자 마음먹었지만, 세상에 빛을 보게 하는데 실패했던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라는 고민을 담은 작품은 어떻게 보면 엄청난 우연 덕분에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것을 창작한 박제사라는 수상쩍은 인물에 관한 의문은 작품 마지막의 비극적 결말을 토대로 봤을 때. 자신이 홀로코스트의 고문관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도 이근안이라는 고문기술자가 있고, 그의 회고록이 출간되기도 했었는데, 그 회고록을 직접 읽어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김근태 상임고문에게 "쥐어박아 미안하다” 라던가 ""전기고문? 건전지로 겁줬을 뿐" 이라는 다소 황당한 변명을 접하니. 그는 박제사처럼 폭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을 움츠러들게 하는지. 그리고 역사 속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과실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반성하지는 않은 것 같다. 

 

5. 이제는 동물의 껍데기만 간직하는 박제사가 된 그는 평생을 자신이 저질렀던 행위를 곱씹었고, 그것을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지 고민해왔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세상 어디에나 있을 셔츠라는 공간을 깨끗하게 만들 반짇고리 (바늘, 실, 골무, 헝겊 따위의 바느질 도구를 담는 그릇. 즉, 떨어진 셔츠를 최대한 복구할 수 있는 상징) 속에 홀로코스트(작품에서는 호러스)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도구를 저장해보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7. 반짇고리에 담긴 목록 전부 

 

고함원숭이, 검은 고양이, 말과 때때로의 침묵, 손짓, 한쪽 소매가 떨어져 나간 셔츠, 기도, 의회에서 회기를 시작할 때 갖는 기조연설, 노래, 음식 접시, 퍼레이드의 장식 꽃수레, 구두 모양으로 빚은 기념 도자기, 테니스 교습, 명백한 진실인 보통명사들, 하나의긴단어, 목록, 극한적인 상황에서의 공허한 격려, 목격자 증언, 종교적 의식과 순례, 정의와 경의를 표하는 사적인 행위와 공적인 행위, 표정, 두 번째 손짓, 말에 의한 표현, [원문 그대로] 희곡, 노볼리프스키 68번지, 구스타프를 위한 게임, 문신, 어떤 해를 상징하는 물건, 아우키츠. 

 

흥미롭게도 모든 것은 그 단어를 봐서는 전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없는 수수께끼투성이다. 하지만 <20세기의 셔츠>에서는 반짇고리 안에 들어있는 이 도구들의 쓰임새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입을 빌어서…. 그리고 작가 헨리의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생각엿보기를 통해서….

 

6. 우리는 그들의 대학살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처럼 우리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그리고 가장 홀로코스트와 비슷한 6 25 전쟁의 수난을 겪은 민족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그저 잔혹한 비극이었다고 기억하기보다는 그 잔혹한 사건과 아픔이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에둘러 가는 길을 함께 걸으면서 그날을 직접 겪고 고통스러워했던 사람들을 추모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것을 돕기 위해서 반짇고리에 적힌 구스타프를 위한 게임을 옮겨 적어본다. 이 게임은 총 13갠데 3가지만 옮겨본다. 


구스타프를 위한 게임 

 

게임 1. 열 살인 아들이 당신에게 말한다. 굶주린 가족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감자를 얻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아들이 사로잡히면 죽을 것이 뻔하다. 그래도 아들을 보내겠는가?

 

게임 2. 당신은 이발사다. 당신은 사람들로 가득 찬 방에서 일하고 있다. 당신이 그들의 털을 깎으면, 그들은 어디론가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당신은 매일 하루 종일 그 일을 한다. 한 무리가 다시 끌려왔다. 그들 중에서 당신은 절친한 친구의 아내와 여동생을 알아본다. 그들도 당신을 알아보고 반가운 눈인사를 보낸다. 당신은 그들과 포옹을 나눈다. 그들이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에 대해 묻는다. 당신은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게임 3. 당신은 손녀딸의 손을 잡고 있다.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한 채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모두가 기진맥진이다. 군인이 당신들을 한꺼번에 '진료소'로 데려간다. 하지만 그곳은 진료소가 아니라 군인의 표현을 빌리면 '알약 하나로 병을 고치는' 웅덩이다. 달리 말하면, 뒤통수에 박히는 총알 하나로 이 세상을 하직하는 웅덩이다. 웅덩이는 시신들로 가득하다. 아직 살아서 꿈틀대는 몸뚱이도 보인다. 지금 당신 앞에 여섯 명이 서 있다. 숙녀딸이 당신을 쳐다보며 질문을 한다. 뭐라고 물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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