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밥이다 - 매일 힘이 되는 진짜 공부
김경집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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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목차를 차례대로 훑어보면 철학/ 종교/ 심리학/ 역사/ 과학/ 문학/ 미술/ 음악/ 정치/ 경제/ 환경/ 젠더. 총 12가지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접하고 나면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읽을 때는 좋은데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참 고통스럽다.

 

일단 개중에서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을 살짝 나열해보자. 철학, 종교, 심리학, 역사, 과학, 문학, 미술, 음악. 정치, 경제, 환경, 젠더... 죄송...   

 

2.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과거 학자들의 사상을 한 단어로 (소크라테스의 질문, 플라톤의 이데아, 유일신으로서의 기독교,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찰스 다윈의 다윈주의, 케인스 주의, 신자유주의) 단순화시켜 받아들이는 것에서 생각을 확장하여. 그들이 사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왜'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려는 넓은 시야에 있다고 생각한다. 

 

비교할 책 몇 권의 제목이 떠오르는데, 그 책들은 읽을 당시에는 꽤 유용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인문학은 밥이다)을 그 책과 비교해보면 과거의 그 책은 어떤 사상가의 사상은 어떠했는지만을 간단히 설명하는 것. 그것이 목적이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3. 여기서 다루는 12가지 학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흘러왔다. 그리고 이 책은 학문들의 큰 줄기만을 붙잡아둔다. 그것을 토대로 파악하건대, 학문과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은 절대적인 존재에 기대어 존재하는 인간에서. 존재의 힘으로 스스로 일어섬으로써 자신의 개성을 자각해왔고 그것을 표현해온 인간으로 발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책의 미술 부분의 이야기를 보면 미술의 발달이 재현미, 표현미, 인식미로 진화됐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것은 과거에는 실물처럼 보이게 그린 작품을 좋은 것으로 생각했던 시대 (재현미), 미적 기준이 사물을 '재현' 하는 것이 아닌 작가의 능력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되는 것을 으뜸으로 생각했던 시대(표현미), 그리고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 각각에 의해 새롭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시대(인식미)라고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이 사조의 변천사는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고낭사자초로 줄여지는 시대사조. (고전 - 낭만 - 사실 - 자연- 초현실)의 이름. 고전에서 초현실주의로 갈수록 무언가를 모방하기보다는 자기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인식의 힘'이 중요하게 생각된다. 

 

음악도 그러했다. 과거에는 귀족들에게 헌정하기 위한 음악이었고, 그들의 지원 아래에서 작업을 했던 음악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다양한 장르. 혹은 시대에의 외침을 목적으로 음악을 생산한다. 

 

종교 역시 그리스 로마 시대의 많은 신들을 추앙했던 다신교에서 권력을 옹립하려는 기득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유일신의 기독교가 발전했고, 그 이후의 세계는 여전히 신성을 믿는 인간과 인간을 종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대립으로써 흘러오게 된다. 

 

철학도 그러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진리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던 플라톤의 이데아에서부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던 데카르트의 철학의 발전과정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의식이 엿보인다. 

 

4. 결국, 인문학이라는 것은 과거 누군가가 내놓은 생각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억눌린 세상을 부수기 위해서 탄생한 생각이었고, 우리는 그 생각을 엿봄으로써. 지금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공부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마주하게 된다. 

 

그러한 공부가 쌓이면 제목처럼 밥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물질과 물질로서의 치환의 의미가 아니라.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게 하는 유용한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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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존으로 승부하라 - 매일매일을 최고의 날로 만드는 습관
마크 맥키언 지음, 이은주 옮김 / 작은씨앗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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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 ★

 

1. 원래는 읽을 계획이 없었던 책인데. 책이 무척 얇기도 하고, 뒷커버의 빨간글씨. 시간관리가 아니라 시간창출에 대해서 말하겠다고 하여 궁금증도 생기고. 이 책을 앞에두고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자니. 올해도 이제 얼마남지 않았구나. 난 지금까지 시간을 어떻게 관리했던가? 왜 시간을 낭비했는가? 하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술술 페이지를 넘겼다.

 

2. <고존으로 승부하라>라는 책에서는 하루 24시간을 고존(go-zone),  슬로우존 (slow-zone), 그리고 노존(no-zone)이라는 세 단계로 분배한다. 

 

고존(go-zone)은 자신이 목표로 하는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며, 대략 하루에 2시간정도 잡아둔다. 슬로우 존 (slow-zone)은 고존으로 진입해서 집중하려고 할 때 방해가 되는 잡일(?)들을 처리하는 시간이며, 노존(no-zone)은 일에 관련한 모든 생각과 활동을 내려놓고 쉬는 시간이라고 한다. 

 

중요한 점 한 가지는 슬로우 존에서의 활동은 고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이며, 또 다른 한 가지는 고존에서 과열되었던 시간은 노존의 휴식을 통해 고스란히 보상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2시간 고존에 있었다면. 2시간은 반드시 노존으로 쉬어줘야 한다는 의미다. 

 

3. 고존에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카페인 섭취를 통한 단기적인 각성효과를 피하기를 권한다. 카페인의 섭취는 섭취 지속 시간 이후 인간을 나른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약물을 주입하지 않고도 충분히 고존과 슬로우존 노존의 관리를 통해서 높은 효율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데, 고존에서의 집중력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 신체적으로는 운동(최소 주 2회 30분)을 추천하고, 정신적으로는 노존에서의 휴식을 권한다.

 

4.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한 시간 공부하더라도 집중해서 공부하면 좋은데, 그러한 집중력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이 적힌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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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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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 ★

 

1. 이 책은 박경리 선생이 타계한 후 공개되지 않았던 일본에 관한 글들 (1부의 내용)과 언론을 통해 발표된 그녀의 인터뷰 기사, 그리고 다나카 아키라라는 인물이 '한국인의 민족주의'에 관한 비판문에 대한 반론까지 (2부와 3부)를 담아냈다. 

 

2.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소감. 메모해 둔 그대로 옮겨 적어본다. 

 

'단지, 눈으로 문장을 훑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기백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온몸이 오싹해지는 기분.'

 

3. 박경리 선생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기원에서부터 격렬한 어조로 잘못된 부분을 꼬집는다. 일본의 고대신화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국의 허상을 철저히 해부하고, 그 후손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천황의 지배 아래에서 통치할 것이라는 믿음을 뜻하는 만세일계와 현인신을 비판한다. 

 

박경리 선생은 일본이라는 나라는 신국이라는 체제 안에 모든 가치관을 복속시켜버리는 국가로 봤다. 다시 말해서, 세계에서 일본 열도로 흘러들어온 모든 사상들. 가령, 불교나 유교 같은 사상. 그리고 메이지유신 시대에 받아들인 서양 문명이 사상 본연의 가치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신국의 통치체제에 맞게 변형, 축소되어 조그맣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박경리 선생은 일본은 유물론적인 기준으로서 실용적이며 현실적인 가치를 따지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국가라고 판단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의 실용성은 신국의 '신'이라는 관념에 많이 치우친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4. 사무라이 정신. 할복. 그리고 세계대전 당시의 카미카제 부대. 이들은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칼을 배에 쑤셔넣는)으로 죽으라 하는 그들의 주군은 누구인가? 먹이사슬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국과 만세일계와 현인신에 닿아있다. 

 

한국인은 한이 쌓이면 울분을 토하지만, 일본인은 안으로 계속 그 슬픔을 밀어넣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체념하게 되고, 자기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고, 그로부터 마조히즘을 느낀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박경리 선생은 일본의 문학는 삶의 문학이 아닌 죽음의 문학이라고 이름 짓는다. 선생이 쓴 산고 안의 소제목처럼 그것을 풀어낼 '출구가 없는 것'이다.

 

출구를 찾아서 일본의 근대문학은 크게 요동친다. 선생이 보기에 죽음의 문학은 인간의 삶 자체를 조명하는 문학이 아닌. 욕망의 의식을 바깥으로 끌어내어 관찰하는 문학이다. 관찰의 형태로 사랑과 치정이 구분될 수 없는 모양새로 얽힌다. 자살이 미화된다. 이로부터 탐미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장르가 탄생한다. 

 

5. 이 책에서는 탐미주의라 하면서 대표적으로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나생문>, <지옥변> 같은 작품을 예로 드는데. 그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기에, 나는 내가 읽어본  자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을 생각했다. 

 

나는 그 작품을 통해서 "그렇게 사랑하면 안 된다. 그것은 사랑은 아니다." 라는 도덕적인 교훈과 ' 욕망을 마음대로 절제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이라는 생각을 얻었지만, 사실은 그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미친 사랑 그 자체며, 그러한 행위 자체였다. 

 

그렇기에 작품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선생의 이야기를 곱씹어본다면, 확실히 탐미주의라는 장르는 도덕적 관념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고,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에 기인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탐미주의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더러운 욕망을 발견하게 될 뿐인데. 이러한 욕망을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용인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발전한다. 변증법의 구도로 봤을 때, 도덕(선)과 욕망(악)은 서로 부딪히면서 나아감을 모색해야 하는데, 그것에 이르지 못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59. 사람은 아니 모든 생명은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살기 위하여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도 삶의 투쟁, 삶의 인식, 삶의 조화 그 모든 삶에 수반되는 엄청나게 거대하고 신묘한 본질적 삶의 교향악 위에서 군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술은 삶의 추구며 방식이다. 


70. 역사는 시작되었고, 근세, 반세기 동안 약자는 삶의 터전을 잃었으며 국토가 유린당하고 민족이 살육당했던 제국주의 식민시대 죽지 않기 위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우린 민족주의 반일사상의 불꽃을 간직해야만 했다. 


그러나 광복 후 과연 민족주의 반일사상은 쓸모없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세계의 현실은 여전히 약자의 호주머니를 강자는 털어내고 있으며 아흔아홉 섬의 곡식을 가진 자가 한 섬 가진 자로부터 빼앗아 백 섬을 채우려는 이것이 오늘날의 민족과 민족 간의 현실인 것이다. 


뿐인가, 영토의 침략보다 더욱 악성인 것은 땅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장본인은 누구인가. 이득을 많이 챙기는 자다. 많이 벌어들이는 만큼 땅을, 지구를 파괴하고 황폐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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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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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 ★★☆

 

1. 진실을 찾아가는

 

이 소설은 묘한 구석이 많다. 이 소설의 서사가 독자에게 그다지 친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 묘함을 만들어내는 첫 번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은 9살 소년인 오스카의 1인칭으로서 대부분 이루어지지만, 그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가 쓴 다른 1인칭의 글이 예고도 없이 번갈아 등장한다.

 

게다가 이 접점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독자가 알 수 있는건 오스카의 아버지는 9 11 사건 (오스카의 나이 7살)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새로운 남자친구와 시시덕거리고 있다. 정도뿐이다. 이것은 일인칭 화자인 특이하면서도 영리한 오스카의 시야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최대한의 영역이다. 

 

온통 수수께끼투성이다. 그러한 모호한 상황에서 어떤 장면을 각인시켜주는 부수적인 기능이 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라는 오스카의 사진첩에서 뽑아낸 사진들이다. 주인공인 오스카가 아버지가 남긴 열쇠의 자물쇠를 찾기 위해 떠돌았던 기간 동안 사진기에 담아낸 사진이 실제 사진의 모습으로 현상되어 여러 페이지에 걸쳐서 나열되어 있다. 

 

각자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오는. 아주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했던 이야기의 접점은 '상실과 부재' 그리고 '극복' 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하나로 합쳐진다. 연인을 잃은 남자. 연인을 잃은 여자. 아버지를 잃은 자식. 자식을 잃은 부모. 그리고 또 다시 아버지를 잃은 자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2.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혹은 하고 있을 때. 또는 하고 나서. 그 행동에 대한 모든 이유와 절차와 결론을 상대방. 특히, 가족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럴 수는 없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몇 분간의 순간이 불러올 파장을 예측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마주했을 때도.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잘못으로 인한 결과를 예측할 수 있으므로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겠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말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은 것 같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두려움을 피하고 싶어서 내린 순간의 선택이 오해를 낳고, 그러한 오해로 인해 갈등이 쌓여버린 장면으로부터 되돌리기 버튼을 누름으로써 소설이 시작되었다. 

 

그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게 한. 다른 시기에 일어난 같은 성격의 사건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911 테러와 드레스덴 폭격)이 끼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서 개인들은 어떤 고통을 겪고, 어떻게 후회를 하고, 바로 잡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지에 관해서 들려준다. 

 

문제는 무엇인가? 에 대해서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라고 답하는 것은 간단하고 모범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솔직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뉘우치고 다가서는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엄청나게 시끄럽게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솔직히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간적인 부분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보면 포어의 서사가 왜 독자에게 친숙하지 않은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것. 즉, 구구절절하지 않음. 하지만 그것에서 믿음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3. 확실히 이해되지 않는 몇 가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모든 것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퉁치고 싶지만. 그래도 여전히 알고 싶은 몇 가지가 있다. 

 

80. 그런데 왜 엄마가 갑자기 나에 대해서 잊어버리기 시작했을까? 자물쇠를 찾으러 아파트를 나설 때마다 아빠에게 더 가까워졌기 때문에, 내 기분은 조금씩 더 가벼워졌다. 하지만 엄마한테서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시에 조금씩 더 무거워졌다. 

 

- 오스카는 부츠가 무거워진다고 했다. 왜 그의 부츠는 무거워졌을까? 엄마와 아빠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기분 때문이었을까? 

 

- 스티븐 호킹의 편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371. 나는 내 삶을 문자로 분해했어, 사랑은 "5, 6, 8, 3"을 누르고, 죽음은 "3, 3, 2, 8, 4"를 눌렀어, 고통을 기쁨에서 빼면 무엇이 남을까? 내 삶을 합산하면 뭐가 나올까?

 

- 토마스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누른 전화번호의 의미는 무엇일까? 숫자에 담긴 의미보다는 자신의 사랑을 그것으로는 표현하지 못한다는 애절함을. 다이얼 소리로 묘사한 것일까? 그 다이얼 소리 때문에 그가 말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

 

- 터키 죄수 크루트 슐루터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인가?  

 

- 아버지의 꽃병 안에 들어있는 열쇠. 소설의 갈등을 풀기 위해 등장하는 열쇠는 가족 간에 좀 더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회하고 있는 가족의 풍경이 오스카의 가족뿐만 아니라 블랙 씨의 가족에게도. 그리고 세상의 모든 가족에게 벌어지는 모습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을까? 

 

- 엄청나게 가깝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오스카를 압박하는 트라우마는 엄청나게 가깝게 다가오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소통을 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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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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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소세키 작품을 몇 권 읽었을 때, "대표작은 바로 이 책이다." 라고 댓글로 계속 언급을 하면서도 아직 읽지 못했던 책이 바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다. 

 

어떤 책에서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이 소설이 고양이의 눈으로 인간 세계를 바라본 책이라는 간략한 해설을 본 적이 있어. 소설을 직접 읽지만 않았을 뿐 대충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책도 바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다. 

 

그런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 소설은 지금까지 나에게는 빚을 진 것과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여유롭게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상권까지는 그 여유로움이 지속되었던 것 같다. 익살스럽고 귀여운 고양이. 메이테이 선생의 밉지 않은 처세술이 단연 압권이었다. 그러다가 중권과 하권을 읽으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2. 이 책의 화자인 고양이는 쥐를 못 잡는다. 이것은 상징적인 메시지다. 쥐를 잡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언어로 해석하면 자신의 힘으로는 밥벌이를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밥벌이도 못하는 주제에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것 같지만, 고양이의 내면에 들어있는 날카로운 관점을 통해 주인 구샤미와 주인댁을 방문하는 친구와 제자들. 그리고 이웃 가네다의 허술한 일면을 독자들에게 낱낱이 풀어놓는다. 

 

이처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남들의 생각과는 달리 자신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 라는 생각은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는 고양이나 고양이가 듣는 가운데 자기의 관점으로 타인의 행동을 비평하는 등장인물들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공공연한 진실이다. 그러한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도 각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품에 안고 남을 평가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완벽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아이러니함이 찾아온다. 말이 그럴싸하면 생활이 궁핍하고, 생활이 넉넉하면 교양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현실로 넘어와서 생각해보면. 단예라는 닉네임을 쓰고, 현실에서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다른 누군가의 기준에도 현실의 나라는 인간이 당신의 눈에 차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비판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마치 아사이 료의 소설 <누구>의 SNS 세계처럼 말이다. 이러한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 것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아닌가 싶다. 

 

3. 고양이는 인간들이 즐겨 마시는 액체를 맛보다가 흠뻑 취해서 술독에 빠진다.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닿을 듯 말 듯한 고통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고양이는 세상사에 초연해진다. 이것을 인간 세상의 이야기로 해석하면 메이지 유신 시대의 일본의 변화에 직면하여 전통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근대화를 추구할 것이냐의 양 갈래 사이에서. "그냥 될대로 되라지" 하면서 끈을 놓아버리는 행동같이 느껴졌다.  

 

그가 고민한 것은 개성과 전통의 양 극단 사이에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였다.

 

자세히 말하자면, 인간으로서 개성을 추구하는 것은 훌륭한 생각이다. 하지만 개성이 자라남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가장 먼저 추구한다. 하나하나 의심하기 시작하고, 따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인간은 분리된다. 

 

그렇지만 집단주의에 순응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질문에도 쉽게 수긍할 수 없다. 전통을 옹호하는 그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편한것도 아니고 단순한 것도 아니다. 높은 신분. 그리고 이미 결정되어진 사회 체제. 그리고 소설에서 언급하는 남성우월주의 속의 차별화된 여성의 역할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아니 욕망을 포기하는 것 또한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정사실화된 자소설이라는 형식 속에서. 소세키와 동일인물인 구샤미의 행동과 마음으로 소세키의 생각을 짐작하건대.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서 근대화를 추구하는 것보다는 선불교로 상징되는 일본의 전통을 지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한 생각만 가지고는 현실을 견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전통을 고수하려는 자신의 생각을 반박하기 위해 만들어낸 고양이의 관점을 통해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비판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딱히 만족스러운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소세키의 답답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거쳐오면서 마무리 단계에서 작가는 고양이가 까치발을 디딜 생각을 담념하게 만든다. 포기하는 행위가 이처럼 슬프게 다가올 수가 없다. 고양이의 내면을 작가의 다른 하나의 내면으로 생각했을 때. 나쓰메 소세키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길게 생각했는데 말이다. 

 

4.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영약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쿠오바디스>의 페트로니우스 같은 면이 느껴지는 메이테이 선생의 처세술(어쩌면 킬로에 더 가까운...)이 돋보인다. 허술한 척하기도 하고, 뭔가 있는 척 하기도 하면서 자신을 얕잡아보는 그들로 하여금 한방 먹이고, 생각대로 해나가는 그 약삭빠름이... 정당한 행동이다....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양이를 술독에 빠뜨리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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