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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난이도 : ★★★
1. 예전에 소세키 작품을 몇 권 읽었을 때, "대표작은 바로 이 책이다." 라고 댓글로 계속 언급을 하면서도 아직 읽지 못했던 책이 바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다.
어떤 책에서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이 소설이 고양이의 눈으로 인간 세계를 바라본 책이라는 간략한 해설을 본 적이 있어. 소설을 직접 읽지만 않았을 뿐 대충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책도 바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다.
그런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 소설은 지금까지 나에게는 빚을 진 것과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여유롭게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상권까지는 그 여유로움이 지속되었던 것 같다. 익살스럽고 귀여운 고양이. 메이테이 선생의 밉지 않은 처세술이 단연 압권이었다. 그러다가 중권과 하권을 읽으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2. 이 책의 화자인 고양이는 쥐를 못 잡는다. 이것은 상징적인 메시지다. 쥐를 잡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언어로 해석하면 자신의 힘으로는 밥벌이를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밥벌이도 못하는 주제에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것 같지만, 고양이의 내면에 들어있는 날카로운 관점을 통해 주인 구샤미와 주인댁을 방문하는 친구와 제자들. 그리고 이웃 가네다의 허술한 일면을 독자들에게 낱낱이 풀어놓는다.
이처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남들의 생각과는 달리 자신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 라는 생각은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는 고양이나 고양이가 듣는 가운데 자기의 관점으로 타인의 행동을 비평하는 등장인물들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공공연한 진실이다. 그러한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도 각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품에 안고 남을 평가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완벽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아이러니함이 찾아온다. 말이 그럴싸하면 생활이 궁핍하고, 생활이 넉넉하면 교양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현실로 넘어와서 생각해보면. 단예라는 닉네임을 쓰고, 현실에서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다른 누군가의 기준에도 현실의 나라는 인간이 당신의 눈에 차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비판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마치 아사이 료의 소설 <누구>의 SNS 세계처럼 말이다. 이러한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 것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아닌가 싶다.
3. 고양이는 인간들이 즐겨 마시는 액체를 맛보다가 흠뻑 취해서 술독에 빠진다.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닿을 듯 말 듯한 고통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고양이는 세상사에 초연해진다. 이것을 인간 세상의 이야기로 해석하면 메이지 유신 시대의 일본의 변화에 직면하여 전통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근대화를 추구할 것이냐의 양 갈래 사이에서. "그냥 될대로 되라지" 하면서 끈을 놓아버리는 행동같이 느껴졌다.
그가 고민한 것은 개성과 전통의 양 극단 사이에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였다.
자세히 말하자면, 인간으로서 개성을 추구하는 것은 훌륭한 생각이다. 하지만 개성이 자라남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가장 먼저 추구한다. 하나하나 의심하기 시작하고, 따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인간은 분리된다.
그렇지만 집단주의에 순응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질문에도 쉽게 수긍할 수 없다. 전통을 옹호하는 그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편한것도 아니고 단순한 것도 아니다. 높은 신분. 그리고 이미 결정되어진 사회 체제. 그리고 소설에서 언급하는 남성우월주의 속의 차별화된 여성의 역할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아니 욕망을 포기하는 것 또한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정사실화된 자소설이라는 형식 속에서. 소세키와 동일인물인 구샤미의 행동과 마음으로 소세키의 생각을 짐작하건대.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서 근대화를 추구하는 것보다는 선불교로 상징되는 일본의 전통을 지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한 생각만 가지고는 현실을 견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전통을 고수하려는 자신의 생각을 반박하기 위해 만들어낸 고양이의 관점을 통해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비판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딱히 만족스러운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소세키의 답답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들을 거쳐오면서 마무리 단계에서 작가는 고양이가 까치발을 디딜 생각을 담념하게 만든다. 포기하는 행위가 이처럼 슬프게 다가올 수가 없다. 고양이의 내면을 작가의 다른 하나의 내면으로 생각했을 때. 나쓰메 소세키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길게 생각했는데 말이다.
4.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영약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쿠오바디스>의 페트로니우스 같은 면이 느껴지는 메이테이 선생의 처세술(어쩌면 킬로에 더 가까운...)이 돋보인다. 허술한 척하기도 하고, 뭔가 있는 척 하기도 하면서 자신을 얕잡아보는 그들로 하여금 한방 먹이고, 생각대로 해나가는 그 약삭빠름이... 정당한 행동이다....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양이를 술독에 빠뜨리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