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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난이도 : ★★
1. 노르웨이의 숲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면서. 이 책의 원제목이기도 하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18년의 시간이 흐른 뒤. 낯선 함부르크 공항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면서 불현듯 추억에 잠긴다. 그렇다. 노르웨이 숲은 그에게는 아주 특별한 음악이요. 음악은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매개체로 사용된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응답하라 1994의 음악과 마찬가지로...
2. 하이칼라
하이칼라는 일본 근대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데 그 의미는 개략적으로 '서양의 옷이나 음식을 포함한 서양의 것을 차용하고 있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상실의 시대>는 이것들을 낮잡아 보지 않는다. 오히려 사대주의적 측면에서 바라본다. 이것을 작가가 관찰한 시대상의 규정이라고 본다면 솔직하게 마뜩치 않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를 규정짓고 있는 상징들은 대부분 서양의 것이다. 그들이 즐겨 듣거나 연주하는 팝, 재즈, 클래식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곁에 두었던 책들을 다른 이가 읽는 책들과 완벽하게 차별화시킴으로써 와타나베라는 인물을 특수성을 가진 브랜드로 만들어냈다.
<상실의 시대>를 덮고 와타나베와 그가 읽었던 책의 제목을 기억해본다. 가장 먼저 <위대한 개츠비>가 연상되고, 차례대로 <호밀밭의 파수꾼>, <마의 산>, <로드짐>, <수레바퀴 아래에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등의 작품들이 지나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책들이 그저 읽고 있는 책의 기능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 곳곳에 그 작품과 비슷한 느낌을 풍겨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의 불빛을 바라보는 와타나베를 개츠비와 동일화시킴으로써 그를 사랑을 추구하는 낭만주의자로 만들었으며, 그의 아웃사이더 기질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의 그것처럼 느껴졌으며, 나오코와 레이코가 거주했던 정신병동과 그곳의 생활은 <마의 산>의 공간과 일치했으며. <로드짐>은 읽어보지 않아서 건너뛰고, <수레바퀴 아래에서> 역시 그들이 처한 상황이. 죽음이 주는 무게가 수레바퀴에 깔린 것처럼 느껴지게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우리피데스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는 역설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결국에 하느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겠거니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상징이었다.
3. 죽음 그리고 스무 살의 사랑
스무 살의 와타나베에게 이 세상은 자기중심적이었다. 자신이 즐겨 듣고, 읽는 것을 통해서 세상을 규정했다. 하지만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와타나베는 이 세상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거리두기로 회상은 시작된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이 문장은 <상실의 시대>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핵심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삶과 죽음의 이분법 위에 놓여있는 직접적인 인물. 그러니까 소설 속의 기즈키가 아니라 그와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했던 주변 사람(와나타베, 나오코)에게 적용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나오코의 죽음 이후에 그것은 와타나베와 레이코로 전이된다. 한편, 미도리의 아버지의 죽음은 와타나베와 미도리로 연결된다.
와나타베와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 이들은 소중했던 사람의 죽음을 바라본다. 그리고 장례라는 행위로서 그를 땅에 묻는다. 그럼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가 이별한다. 그렇게 떠나보낸다. 하지만 마음속에 그에 관한 추억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이 바로 소설 속 등장인물이 느끼는 존재의 정체다. 그리고 그것의 무게는 죽은 자와 어떤 경험과 감정을 공유했는가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4. 반딧불이에서 상실의 시대로
내가 책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아 발췌를 시작했던 부분이 정확히 2부의 끝 부분을 가리켰다.
그의 문장은 인물의 행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바라보는 사유로서 완성되었다. 내겐 '마치'로 시작하는 그의 엉뚱하거나 깊이 있거나 특유의 하루키식 직유보다는 그의 사유가 담긴 문장이 훨씬 묵직하게 전달되었다.
해설을 보니 2장과 3장의 내용은 그의 단편 <반딧불이>의 내용과 같고. 이 소설은 그 단편에서 이야기를 이어붙여서 완성된 것이라고 하던데. 그 경계면을 유심히 지켜본 결과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본론을 말하자면. 반딧불이라는 소설은 죽음과 가깝고, 상실의 시대는 삶과 가까운 소설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반딧불이>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와타나베의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 그리고 기즈키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서 키싱구라미처럼 거의 한 몸 같았던 나오코와 셋이서 어울려 지내다가 기즈키가 갑작스런 자살을 선택한다.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자신을 파괴하듯이 관계를 맺는다. 그 이후 또 한번 갑작스럽게 나오코가 와타나베의 곁을 떠나 정신병원으로 향한다. 그렇게 와타나베는 홀로 남겨진다. 이런 구성을 보면서 삶보다는 죽음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에서는 와타나베와 나오코에게 미도리와 레이코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등장한다. 와타나베에겐 미도리가. 나오코에게는 레이코가 곁에 있었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죽음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동시에 삶에 대한 통로가 조금씩 열리게 됨을 알 수 있었다.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나가사와 선배는 경계의 의미로 설정된 듯싶다.
소설에서 나오코는 자신이 짊어진 죽음의 무게를 끝내 이겨내진 못했지만, 와타나베에게는 미도리. 그리고 레이코는 와타나베에게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삶에 대하여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으로서 존재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오코의 무게에 짓눌린 와타나베는 자신이 있는 곳을 잃어버렸지만, 전화선으로 이어진 미도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인식한다. 이렇게 소설이 마무리되는 것으로 봤을 때, <상실의 시대>는 죽음의 무게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을 위해서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보자는 저자의 의지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