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를 위한 고전철학 가이드
존 개스킨 지음, 박중서 옮김 / 현암사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난이도 : ★

1. '여행자를 위한'은 제목은 다분히 중의적이다. 

이 책은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발자취를 찾아 직접 그리스와 터키. 그리고 이탈리아를 방문할. 말 그대로 여행객들을 위한 기본적인 지식을 충족시켜준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는 형상을 알아야 하는데. 형상을 아는 것은 곧 지식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스의 '폴리스'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건축물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아는 것.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적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고대 헬레니즘 시대에 살았던 대표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세계관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고대 철학가들의 사상을 살펴보기 위하여. 그리고 서양 문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오디세이아>를 읽을 준비를 하기 위한. 인문학의 '여행자를 위한' 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2. 쉬이 잠들지 않은 새벽에 '대체 왜 하필 고전철학인가?' 하는 물음을 곱씹어본다. 자연스럽게 <일곱 성당 이야기>에서 읽었던 ''완벽했던 과거'로서의 세 번째 유토피아가 다시 생각난다. 유토피아는 이상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인지 잘 알면서도 항상 그것을 꿈꾼다. 우리는 현재의 팍팍함과 미래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완벽했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신을 강제로 죽음으로 몰아넣고 힘들게 쟁취한 '실존'. 그것은 우리를 세상에 핏덩이로 태어나게 했고, 맨몸으로 세상과 맞서게 했다. '실존'은 인간의 존재. 인간을 넘어 개개인의 존재에 집중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과도한 권력을 부여한 실존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해방하고, 초월함으로써 자유를 얻은 인간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더불어 기도하고, 소원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진 텅빈 소외를 낳게 한다. 

볼 수가 없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저 합리화나 책임회피의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신의 보호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한 현실에 직면한 상황들 때문에 우리가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것. 그럼에도 최소한의 위로를 줄 수 있었던 유일신의 빈자리는 컸다.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완벽했던 과거의 절대자'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런 대안적인 부분에서 고전철학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유일신이 절대적인 지위에 올라서서 모든 가치를 획일화시키기 전의 세상. 

신과 인간이 함께 살아왔었던 시기. 인간의 모습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너무나 닮아있었던 신들과 함께 호흡했었던 시대. 나와 다른 신을 모시더라도 어떤 비난도 받지 않았던 것처럼 자유를 인정받고, 한편으로는 절제도 인정받았던. 그리고 나름대로 민주적이었던 바로 이 시대의 향수가 현대의 외로움에 굶주린 인간을 자극하는 것이다. 

3. 그렇다면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행자를 위한 고전철학 가이드>에서 소개하는 헬레니즘의 고전사상은 현대의 외로운 현대의 인간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가 될 것이다. 음... 어쨌건 '과거의 유토피아'를 인정하겠다는 의미이긴 한데. 그것은 <일곱 성당 이야기>가 바라보는 중세의 복권을 위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위로에 대한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이 책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짧은 강의를 통해서 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양한 인간의 성향을 상징하고 있으며, 호메로스의 글은 이들의 의식과 행위. 그리고 파멸까지 전달하기 때문에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4. 절대적 영구성은 불가능하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유연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하고, 진실을 얻기 위해서 끊임없이 질문하라 소크라테스의 당부는 우리를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 것이다. 

5. 에피쿠로스학파는 스토아학파와 반대로 쾌락을 추구한 학파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읽은 바로는 에피쿠로스학파는 단순히 감각적인 쾌락이 아닌 정신적인 깨달음과 그것을 통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학파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상당히 진지하게 삶의 흐름을 성찰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싶다. 

213. 에피쿠로스에게는 신들이 아예 없었거나, 있더라도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각종 자연현상을 신이 보낸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은 상태에서 원인을 탐색하고 찾아낼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삶을 최대한 잘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우리에겐 아무것도 아닐 것이며 우리가 태어나기 전 우리의 비존재의 영원을 돌아보는 일일 뿐 두렵지 않을 것이다. 

213. 충분한 것조차도 너무 적다고 여기는 사람은 무엇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214. 만약 당신이 피토클레스를 부유하게 만들기를 원한다면, 그에게 돈을 더 많이 줄 것이 아니라 그의 욕망을 감소시켜라. 

6. 그 외. 좋은 내용이 많지만. 그것을 다 옮기기란 어렵고(옮기기 뿐만 아니라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따라서 원전(원전번역)을 읽고, 이 책은 그에 해당하는 것을 발췌, 살펴봐야 더 충실한 독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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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킬링필드 - “나”와 “우리”와 “세계”를 관통하는 불평등의 모든 것
예란 테르보른 지음, 이경남 옮김 / 문예춘추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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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난이도 : ★

1. <불평등의 킬링필드>의 의미

불평등한 사회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보다 사회적 약자가 빨리 죽음(생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은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문제가 불평등의 정도라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왜 그런가?' 라는 질문이 나오면. 준비해야 할 대답은 이러하다.

불평등은 개인의 잠재력을 마음껏 펼쳐지 못하게 하는 억압으로 작용하고, 그것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희망을 앗아가고, 가난하게 늙게 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사항들은 <불평등의 킬링필드>의 저자 예란이형이 제시하는 통계조사의 결과에 따른 값의 방향성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일단, 우리는 예란 테르보른이 제시하는 통계치를 신뢰해야만 한다.

2. 불평등에 대처하는 또 다른 관점

이즈음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관점을 소개해본다. 말콤 글래드웰의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책 이야기다. 이 책은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무찌르고 성공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비결들을 다룬다.

그에 따르면, 약자들에게 지워진 억압과 고난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능력을 발전하게 하는 성장 동력이 될 것이다. 게다가 덩치가 큰 강자들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강함으로 독선에 빠져서. 변화를 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무뎌짐으로써 많은 빈틈을 허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충분히 공략할 수 있다. 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불평등을 평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에서 어떻게 이길 방법을 찾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내용인데, 과연 불평등은 약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약자를 강하게 만들 확률이 높을까? 

나는 당연히 전자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단은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나아가는 사회가 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책이 <불평등의 킬링필드>가 이닌가 싶은 생각을 해봤다. 

3. 불평등의 구동력

책의 84페이지에 보면 불평등의 메커니즘이 표로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4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대충 요약하자면, 4가지 요소의 이름은 각각 거리두기, 배제, 위계화, 착취로 정의했다. 

이들 단어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를 한 문장으로 고쳐 쓰면.  치킨게임의 승자가 사다리를 걷어차고, 사다리를 놔줄까 말까 형님으로 모시라 약을 올리고, 그렇게 부려 먹으면서 잉여이득을 획득한다.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이런 정도가 큰 사회일수록 불평등이 높고, 기회가 골고루 부여되지 않은 사회가 되고, 그것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라는 것이다. 

4. 평등메커니즘

그에 상응하는 평등메커니즘이라는 것을 같이 소개한다. 근접, 포용, 위계 해제, 재분배 및 복권. 이라고 정의되어 있는데 보다시피. 다 긍정적인 단어로서 불평등의 메커니즘의 반대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5. 어떤 평등이 바람직한가?

예란이형은 모두가 똑같이 평등해야 한다는 무차별적인 평등에는 반대한다. 가시적인 목표. 겉보기 평등을 위해 마구 돈을 퍼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어떤 재능을 가졌는지. 그 사람의 재능을 어떻게 꽃 피우게 할지 도와주는 방식을 추구한다. 뭐 물론 대부분이 그런 방식을 선호하긴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니 문제이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면 평등의 수요세력과 공급 세력. 가운데에 위치한 중산층의 힘이 필요하다며 관심을 호소하기도 하는데. 그것 또한 대부분이 그것을 해법으로 꼽고 있다. 문제는 이 또한 말처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들에게도 어떤 직간접적인 이익을 제공해야 하는데, 마땅치 않다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6. 그 외.

거시적으로 각 나라의 불평등 정도는 어떠한가의 이야기. 그리고 한국의 경우 상대적으로 우수한 편이라서 딱히 언급되지 않는다는 정도. 그리고 과거와 비교했을 때, 불평등의 차이는 점차 감소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는데.

글쎄.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비교해야 할 평등의 기준이 다른 나라의 경우일까? 아니면 과거의 경우일까? 그 두 기준보다 낫다고 안심할 수 있을까?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 나를 옭아매고, 차별을 느끼게 하는 부조리한 부분이 있으면 그것은 불평등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더 낫다고 안주하지 말고, 법과 제도가 공정하게 적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투표를 많이 해야 하는데…. 재보선 투표율이….

항상 느끼는 거지만 말은 참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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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성당 이야기
밀로시 우르반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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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 ★★☆

1. 한국어판 작가 소개의 첫머리에 움베르트 에코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덕분에 한국의 독자는 밀로시 우르반과 움베르트 에코를 같은 카테고리에 묶지 않을 수밖에 없다. '체코가 낳은 움베르트 에코'라는 수식어를 밀로시 우르반님께서 반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비교는 될 수 있으면 첫머리에 싣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움베르트 에코라는 작가의 명성만 들어봤지.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아 딱히 비교할 거리를 잡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투정을 부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342. 주변이, 현재가 전부 싫었습니다. 미래는 생각하면 두려울 뿐이었고요. 희망이 안 보였어요. 어딘가 안전한 곳, 뾰족한 바위 같은 불안감과 치명적인 절망의 역류에서 탈출해서 마음을 쉴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어요. 고독을 간절하게 원했고, 중세 성들의 폐허에서 그걸 찾아낸 거죠.

2. 다른 분의 서평을 읽고, 움베르트 에코와 밀로시 우르반은 '중세'라는 키워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움베르트 에코가 중세를 어떻게 표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밀로시 우르반의 '중세'는 카를 만하임의 유토피아의 네 가지 태도를 인용하여 설명한 가운데 세 번째 태도인 '완벽했던 과거'를 뜻하는 유토피아의 성격을 나타낸다고 해설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인물들은 과거. 그중에서도 인간보다는 신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던 중세의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그 모습들은 뭐랄까. 엄청난 광기에 사로잡혀 있어서 매우 극단적으로 보이고, 그러한 극단성은 오히려 중세에 대한 거리감만 불러일으키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느낀 것(중세의 거리감)이 정답이라는 듯이 '중세의 풍경이 자리한 현재의 시간' 을 아이러니로 풍자함으로써 책이 마무리 된다.   

결론은. 우르반 형님은 중세를 낭만적으로 보고, 맹목적으로 받드는 사람들의 바보 같은 모습을 통해 그런 해결책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세기말 체코의 분위기. 부조리한 현재는 암울하고, 다가오는 21세기는 실제로 오지 않을 것 같고, 그렇게 어떤 이는 과거의 향수를 필요 이상으로 부풀림으로 '낭만적인 과거로 돌아가자.' 라고 외치지만 그것은 현재의 암울함을 벗을 수 있는 답이 될 수는 없다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일곱 성당 이야기>는 일단 그것에 만족하는 소설이다. 

3.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형편없다. 필요에 따라서 고의적으로 설정한 것이지만, 그것을 알 수 없는 소설 내내 인물이 형편없으니 이야기 자체도 매력이 떨어졌다. 심지어 180페이지까지 읽었음에도 도대체 이 책이 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필요 이상으로 고딕을 찬양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밑도 끝도 없이 고딕을 절대적인 선의 지위에 올려놓고 찬양하다니…. 대체 고딕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지? 우리가 보통 인간의 이기심을 비판할 때, 자주 예로 드는 자연 파괴보다 더 나쁜 것이 고딕 파괴라니? 고딕이 유행했던 시기가 얼마나 큰 체코의 황금기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416. 축복받은 14세기, 후스파가 난동을 일으켰던 불행한 15세기, 거만한 르네상스의 시대였던 16세기, 심지어 저주받은 30년 전쟁의 시대에 가난과 배고픔 속에 사는 편이 지금 썩어가는 독물 같은 20세기의 비참한 삶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슬라브 민족의 나약한 꽃이라는 의미인 크베토슬라프 슈바흐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어떻게 보면 이런 사상을 지닌 주인공에 대한 비판의 의미로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주인공의 생각 뿐 아니라 행동도 개운치 않았다. 신을 복권하고, 중세의 귀족 가문을 부흥하고, 신성을 등에 업고 막대한 권력을 누리려는 꿈을 꾸는 세력인 형제회가 벌이는 일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능력을 알아봤고, 자신을 사용(?)할 수 있기에 못 이긴 척 그 체제에 타협하고 순응하는 것은. 친일파의 처세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4. 장점은 분명히 있다. 특히, 이 소설의 묘사는 엄청나게 세부적인 편인데. 눈에 보이는 것. 즉, 시선을 따라 서술하는 것과 행동을 시간에 따라 설명하는 묘사는 사실 좀 지루하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나(크베토슬라프 슈바흐)의 의식에서 빚어진 비현실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것은 이 섬세함이 장점으로 작용해서 흡입력을 부여했다. 그것이 형제회 부흥의 열쇠라는 장치로 소설에서는 그려지지만, 소설의 장치 외적인 면으로 떼어놓고 봤을 때도 상당히 훌륭하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뻔한 것을 대할 때면, 우리도 쉽게 예상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것을 자세하게 묘사해봤자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쉽게 예상할 수 없으므로 대체 작가가 어디서 영감을 얻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그려내는가가 궁금하지 않을까?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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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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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 ★

1. 롤리타는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고유명사다. 책 한 권 읽지 않는 내 동생도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보더니 "롤리타?"라고 피식할 정도니 말이다. 왜 웃느냐고 물어보진 않았다. 그러나 뉘앙스를 봤을 때,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그렇고 그런 뜻"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이다. 

2. 험버트가 돌로레스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 사랑했던 애너벨에 대한 이상을 자기 마음대로 덧씌웠다는 점. 또한 그런 '끼'. 아이돌 그룹 멤버의 누군가에게 '패왕색'이라는 별칭을 붙이는 것처럼 성적인 매력을 유난히 많이 풍기는 아이를 '님펫'이라고 정의하고, '롤리타'라는 단어로 되새김했다는 점. 그것에서 기인하는 포르노그라피의 야릇함을 기대하고 상상하고 즐기는. 더 나아가 파멸하는 모든 것. 그것을 충족하는 롤리타의 1부는 인간이 지닌 1차원적인 욕망을 대리만족케 한다.

그리고 이런 대리만족은 음지의 커뮤니티에서 '롤리타의 위상'을 드높였고, 그 위상이 얼어붙은 지면을 뚫고 양지로 뻗어나왔다. 이것이 롤리타의 유명세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3. 젊은 여성이 가진 매력에 대한 욕망을 정말 솔직하게 그리고 최대한으로 드러냈다고 느낀 최근의 사례를 꼽자면 아이유와 김창완이 출연한 힐링캠프에서 작가가 쓴 '썸을 탄다.' 라는 자막 정도와 김창완이 같이 곡 작업을 하면서 느낀 알 수 없는 질투심이라는 감정. 그것을 노랫말로 솔직하게 표출한 정도. 그 정도가 대중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정도일 것이다. 그 이상으로 수위가 높아지면 좀 곤란하다. 

4. 최근 험버트와 돌로레스의 경우처럼 사회적으로 힘을 가진 남성의 이기적인 욕망이 순수한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보여주는 작품이 제법 눈에 들어온다. 남성 우월주의가 만연한 환경 속에서 매력적인 여성을 한없이 타락케 하는 토머스 하디의 <테스>라는 작품을 소재로 하여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끝없는 사랑>이라는 드라마. 

그리고 위와는 반대로. 언더독이라는 측면에서 여성이 자신의 남다른 욕망을 발견하고, 욕망에 조응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님포매니악>이라는 영화가 시선을 잡아끈다.  

5.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롤리타>는 그저 내가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대리만족만 느끼고 처박아둘 정도로 형편없는 작품은 아니다. 다만, "대중적으로 다가가기에는 개운치 않은 점이 많기에 섣불리 추천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6. 내가 읽은 <롤리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다시 말해서, 작가의 자기비하의 성향이 짙어 보였다. 예전에도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었다. <절망(1936)> 의 주인공은 느닷없이 자신은 가장 훌륭한 작가라고 선언했고, 그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신이 본 것을 믿고, 계획을 꾸몄지만, 그가 믿어왔던 것은 전혀 닮아 있지 않았고, 그 덕분에 자신의 죄가 드러났다.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이 오판한 탓이었던 것이다.  

비슷하게 <롤리타>에서 험버트는 자신의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지만(물론, 우리는 그 생각이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것과 그가 천벌을 받는 것도 부족할 정도로 개망나니 짓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지막에 가서 외모를 제외한 모든 것이 자신과 무척이나 닮아있는(험버트는 자신의 외모가 매우 훌륭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단, 그의 말을 믿어본다 셈 치더라도) 

클레어 퀼티(길티를 이용한 언어 유희적인 네이밍)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묘사된 노린내가 진동하는 꼴사나운 장면. 그리고 퀄티가 제거되었음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격려하고 통쾌하게 여기는 아래층 이웃들의 반응을 통해서 험버트의 착각은 말끔히 깨진다.(로맨스 -> 범죄) 그렇게 작가와 험버트는 그것은 자신 만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고, 또한 깨닫는다. 

480. 우리의 난투극에는 황소를 때려눕힐 만한 주먹질도 없고 가구가 날아다니지도 않았다. 그와 나는 더러운 숨뭉치와 넝마를 채워넣은 커다란 인형 같았다. 두 글쟁이가 벌이는 싸움은 조용하고 매가리 없고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한 명은 마약에 취해 허우적거리고 다른 한 명은 심장병과 과음 때문에 맥을 못 췄다. 

490. "내가 방금 클레어 퀼티를 죽였소." 그러자 불그레한 남자가 두 자매 중 언니에게 술잔 하나를 건네면서 말했다. "잘하셨어요." 뚱뚱한 남자도 거들었다. "누군가 진작 했어야 할 일이죠." (중략) "그래. 언젠가는 다들 돌아가면서 그 친구를 죽여줘야 할걸."

7. <롤리타>에서 나는 개인의 방만한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족쇄가 되어 돌아온다는 섬뜩한 메시지를 읽었고, 이러한 점은 지난 번에도 언급(개인의 자유에 대한 지나친 맹신과 조장에 대한 부작용)한 바 있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달과 6펜스>같은 소설의 비판론적인 성격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을 추구하고, 최신의 것을 추구한다는 자부심에 젖어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집단인 지식인, 글쟁이가 부각되었기 때문에 더욱 잘 드러났다고 본다.  

8. 나보코프 형님은 비도덕과 속물적인 것을 누구보다도 싫어한다고 말한 것처럼, 소설 속의 험버트는 어느 누구보다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도덕성이 필요했고, 물려받은 유산으로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속물근성을 벗어던져야 했다. 비록, 그가 소설에서 일부러 드러내지 않으려 했어도 그의 잠재의식은 그것(비도덕한 속물근성의 인간)을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형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455.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의 양심이란 /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로 치르는 세금 같은 것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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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영역
사쿠라기 시노 지음, 전새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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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 ★

1. 준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이 있다. 의학적으로 그녀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20대 중반의 여성이다. 하지만 특유의 분위기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천재적인 능력은 그녀를 현대라는 시공을 초월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순수의 영역>이라는 제목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인가 싶기도 하다. 

2. 우리는 모두 꿈을 꾼다. 하지만 꿈을 꾸는 모든 사람이 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어릴적부터 그에게 강요되어온 꿈은 여전히 그를 억누르고 있다. 부모로부터 강요되어 왔고, 현재도 여전히 비밀리에 강요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노력해 온 그 역시 그 꿈이 강요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루지 못한 꿈은 그를 끊임없이 궁핍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 그에게 준카는

20. "딱 이 폭에 갇혀 있어. 글씨가. 종이 크기에 압도당했어. 뛰쳐나가고 싶은데 나가지 못하고 있고. 종이와 먹을 두려워하면서 썼어."

라고 했다. 속마음을 들킨 그는 그렇게. 그 순간.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의 이름은 류세이다.

3. 또 한 명의 여성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커리어우먼의 자신감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녀의 매력과 경제력은 남편을 자격지심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당당함은 섹시함으로 탈바꿈하여 다른 남성을 유혹하기도 하고, 그들로 하여금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도록 유도케 한다. 진심 어린 눈빛으로 거짓을 말하는 여자라고 소개된. 그녀의 이름은 레이코다. 

4. 자신의 능력을 믿으며 살아가는 한 남자가 있다.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자신의 일을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황량한 사막 그 자체였다. 자신에게 부여된 기대와 역할을 거부한 채, 홀로 모든 것을 이겨왔던 것 같다. 

가족의 꿈과 바램에서 한 발짝 벗어나서.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기에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란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렇게 그는 사랑이 고팠지만, 사랑하는 법은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누군가의 배려는 당연한 듯 여기고, 쾌감과 욕망을 자극하는 부적절한 욕정과 긴장을 즐길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깨닫는다. 이제껏 자신이 혼자서 이루어왔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그의 이름은 노부키다. 

5. 인물 소개에 많은 글을 할애했다. 왜냐하면 <순수의 영역>은 등장인물 간의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를 바라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관계 맺기의 어려움. 현실 세계에서의 실패와 절망. 그럼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인간 본연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질투와 탐욕을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다. 

넘봐서는 안될 어떤 것을 넘보는 세 사람의 삶. 그리고 너무 깨끗한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세상을 버티지 못하는 준코의 순수함. 그런 이야기가 <순수의 영역>에 담겨 있다. 

195. 언제부터였는지 두 사람 모두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 본의 아니게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오래된 관계가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둘이 동시에 납득할 수 있는 착지점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영영 같은 곳을 맴돌 것이다. 한 치라도 어긋나면 둘 다 상처를 입는다. 배려라는 표현은 표면적인 변명에 불과하다. 

=> 썸이라는 단어에 담긴 불편한 진실이 아닐까... 싶은 문장...

6.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애써 절제해야만 하는. 그러한 제한적인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상대방과 나의 거리를 재는데 만족하는 모습만큼이나 <순수의 영역>의 의도적인 컨텍스트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128. 138. 관광객이라는 것은 대체로 수 주일 또는 수개월 뒤에는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여행자에게는 애당초 돌아올 집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 상의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여러 해에 걸쳐 천천히 이동하는 것이 여행자다.' 

188. 준카야말로 진정한 여행자인지도 모른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이동하고 있다. 무리 없이 그녀만의 속도로 다른 장소로 움직이고 있다. 

265. 거리든 사람이든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유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다. 

275. 처음부터 이런 결말을 원했나 싶으면서도 그 '처음'이 어디였는지를 잊고 있다. '교활'이란 단어에 뺨을 맞은 기분이다. 

287.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 가득해지면 사람을 미워하고 싶어지는구나. 

339. 어머니의 손은 아들을 언제든 자신이 정해둔 길로 이끌어 파멸시킨다.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린 오만함은 영양분이자 독이요. 독이자 그래도 역시 사랑인 것이다. 

341. 허와 실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가고 있다. 모두가 끊임없이 흔들린다. 

372. 질투란 멈출 듯 반복해서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백 명이면 백 가지 형태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세기로, 혼자만의 시간을 괴롭힌다. 

7. 결국, 정리하면 사쿠라기 누님은 우리들은 모두 여행자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변화와 움직임을 두려워하는 우리는 관광객의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ㅇㄹ 관광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돌아갈 처음의 장소를 기억하지 못한다. '교활'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뺨을 때리기 때문이다. 

8. 요근래 고전에 너무 취했나보다. 그리하여 내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영역 언저리에 오래 머물러있었나보다. 

사쿠라기 누님은 현실감각을 잃은 나에게 관광객으로 대변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로 인해 마치 관광하듯 책을 읽던 나에게 지독한 현실감. (마치 관광하듯이 사람을 대하는 느낌)을 갖게 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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