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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영역
사쿠라기 시노 지음, 전새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난이도 : ★
1. 준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이 있다. 의학적으로 그녀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20대 중반의 여성이다. 하지만 특유의 분위기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천재적인 능력은 그녀를 현대라는 시공을 초월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순수의 영역>이라는 제목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인가 싶기도 하다.
2. 우리는 모두 꿈을 꾼다. 하지만 꿈을 꾸는 모든 사람이 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어릴적부터 그에게 강요되어온 꿈은 여전히 그를 억누르고 있다. 부모로부터 강요되어 왔고, 현재도 여전히 비밀리에 강요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노력해 온 그 역시 그 꿈이 강요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루지 못한 꿈은 그를 끊임없이 궁핍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 그에게 준카는
20. "딱 이 폭에 갇혀 있어. 글씨가. 종이 크기에 압도당했어. 뛰쳐나가고 싶은데 나가지 못하고 있고. 종이와 먹을 두려워하면서 썼어."
라고 했다. 속마음을 들킨 그는 그렇게. 그 순간.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의 이름은 류세이다.
3. 또 한 명의 여성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커리어우먼의 자신감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녀의 매력과 경제력은 남편을 자격지심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당당함은 섹시함으로 탈바꿈하여 다른 남성을 유혹하기도 하고, 그들로 하여금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도록 유도케 한다. 진심 어린 눈빛으로 거짓을 말하는 여자라고 소개된. 그녀의 이름은 레이코다.
4. 자신의 능력을 믿으며 살아가는 한 남자가 있다.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자신의 일을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황량한 사막 그 자체였다. 자신에게 부여된 기대와 역할을 거부한 채, 홀로 모든 것을 이겨왔던 것 같다.
가족의 꿈과 바램에서 한 발짝 벗어나서.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기에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란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렇게 그는 사랑이 고팠지만, 사랑하는 법은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누군가의 배려는 당연한 듯 여기고, 쾌감과 욕망을 자극하는 부적절한 욕정과 긴장을 즐길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깨닫는다. 이제껏 자신이 혼자서 이루어왔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그의 이름은 노부키다.
5. 인물 소개에 많은 글을 할애했다. 왜냐하면 <순수의 영역>은 등장인물 간의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를 바라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관계 맺기의 어려움. 현실 세계에서의 실패와 절망. 그럼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인간 본연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질투와 탐욕을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다.
넘봐서는 안될 어떤 것을 넘보는 세 사람의 삶. 그리고 너무 깨끗한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세상을 버티지 못하는 준코의 순수함. 그런 이야기가 <순수의 영역>에 담겨 있다.
195. 언제부터였는지 두 사람 모두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 본의 아니게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오래된 관계가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둘이 동시에 납득할 수 있는 착지점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영영 같은 곳을 맴돌 것이다. 한 치라도 어긋나면 둘 다 상처를 입는다. 배려라는 표현은 표면적인 변명에 불과하다.
=> 썸이라는 단어에 담긴 불편한 진실이 아닐까... 싶은 문장...
6.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애써 절제해야만 하는. 그러한 제한적인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상대방과 나의 거리를 재는데 만족하는 모습만큼이나 <순수의 영역>의 의도적인 컨텍스트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128. 138. 관광객이라는 것은 대체로 수 주일 또는 수개월 뒤에는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여행자에게는 애당초 돌아올 집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 상의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여러 해에 걸쳐 천천히 이동하는 것이 여행자다.'
188. 준카야말로 진정한 여행자인지도 모른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이동하고 있다. 무리 없이 그녀만의 속도로 다른 장소로 움직이고 있다.
265. 거리든 사람이든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유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다.
275. 처음부터 이런 결말을 원했나 싶으면서도 그 '처음'이 어디였는지를 잊고 있다. '교활'이란 단어에 뺨을 맞은 기분이다.
287.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 가득해지면 사람을 미워하고 싶어지는구나.
339. 어머니의 손은 아들을 언제든 자신이 정해둔 길로 이끌어 파멸시킨다.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린 오만함은 영양분이자 독이요. 독이자 그래도 역시 사랑인 것이다.
341. 허와 실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가고 있다. 모두가 끊임없이 흔들린다.
372. 질투란 멈출 듯 반복해서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백 명이면 백 가지 형태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세기로, 혼자만의 시간을 괴롭힌다.
7. 결국, 정리하면 사쿠라기 누님은 우리들은 모두 여행자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변화와 움직임을 두려워하는 우리는 관광객의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ㅇㄹ 관광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돌아갈 처음의 장소를 기억하지 못한다. '교활'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뺨을 때리기 때문이다.
8. 요근래 고전에 너무 취했나보다. 그리하여 내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영역 언저리에 오래 머물러있었나보다.
사쿠라기 누님은 현실감각을 잃은 나에게 관광객으로 대변되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로 인해 마치 관광하듯 책을 읽던 나에게 지독한 현실감. (마치 관광하듯이 사람을 대하는 느낌)을 갖게 한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