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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난이도 : ★★★
1. 롤리타는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고유명사다. 책 한 권 읽지 않는 내 동생도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보더니 "롤리타?"라고 피식할 정도니 말이다. 왜 웃느냐고 물어보진 않았다. 그러나 뉘앙스를 봤을 때,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그렇고 그런 뜻"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이다.
2. 험버트가 돌로레스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 사랑했던 애너벨에 대한 이상을 자기 마음대로 덧씌웠다는 점. 또한 그런 '끼'. 아이돌 그룹 멤버의 누군가에게 '패왕색'이라는 별칭을 붙이는 것처럼 성적인 매력을 유난히 많이 풍기는 아이를 '님펫'이라고 정의하고, '롤리타'라는 단어로 되새김했다는 점. 그것에서 기인하는 포르노그라피의 야릇함을 기대하고 상상하고 즐기는. 더 나아가 파멸하는 모든 것. 그것을 충족하는 롤리타의 1부는 인간이 지닌 1차원적인 욕망을 대리만족케 한다.
그리고 이런 대리만족은 음지의 커뮤니티에서 '롤리타의 위상'을 드높였고, 그 위상이 얼어붙은 지면을 뚫고 양지로 뻗어나왔다. 이것이 롤리타의 유명세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3. 젊은 여성이 가진 매력에 대한 욕망을 정말 솔직하게 그리고 최대한으로 드러냈다고 느낀 최근의 사례를 꼽자면 아이유와 김창완이 출연한 힐링캠프에서 작가가 쓴 '썸을 탄다.' 라는 자막 정도와 김창완이 같이 곡 작업을 하면서 느낀 알 수 없는 질투심이라는 감정. 그것을 노랫말로 솔직하게 표출한 정도. 그 정도가 대중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정도일 것이다. 그 이상으로 수위가 높아지면 좀 곤란하다.
4. 최근 험버트와 돌로레스의 경우처럼 사회적으로 힘을 가진 남성의 이기적인 욕망이 순수한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보여주는 작품이 제법 눈에 들어온다. 남성 우월주의가 만연한 환경 속에서 매력적인 여성을 한없이 타락케 하는 토머스 하디의 <테스>라는 작품을 소재로 하여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끝없는 사랑>이라는 드라마.
그리고 위와는 반대로. 언더독이라는 측면에서 여성이 자신의 남다른 욕망을 발견하고, 욕망에 조응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님포매니악>이라는 영화가 시선을 잡아끈다.
5.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롤리타>는 그저 내가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대리만족만 느끼고 처박아둘 정도로 형편없는 작품은 아니다. 다만, "대중적으로 다가가기에는 개운치 않은 점이 많기에 섣불리 추천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6. 내가 읽은 <롤리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다시 말해서, 작가의 자기비하의 성향이 짙어 보였다. 예전에도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었다. <절망(1936)> 의 주인공은 느닷없이 자신은 가장 훌륭한 작가라고 선언했고, 그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신이 본 것을 믿고, 계획을 꾸몄지만, 그가 믿어왔던 것은 전혀 닮아 있지 않았고, 그 덕분에 자신의 죄가 드러났다.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이 오판한 탓이었던 것이다.
비슷하게 <롤리타>에서 험버트는 자신의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지만(물론, 우리는 그 생각이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것과 그가 천벌을 받는 것도 부족할 정도로 개망나니 짓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지막에 가서 외모를 제외한 모든 것이 자신과 무척이나 닮아있는(험버트는 자신의 외모가 매우 훌륭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단, 그의 말을 믿어본다 셈 치더라도)
클레어 퀼티(길티를 이용한 언어 유희적인 네이밍)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묘사된 노린내가 진동하는 꼴사나운 장면. 그리고 퀄티가 제거되었음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격려하고 통쾌하게 여기는 아래층 이웃들의 반응을 통해서 험버트의 착각은 말끔히 깨진다.(로맨스 -> 범죄) 그렇게 작가와 험버트는 그것은 자신 만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고, 또한 깨닫는다.
480. 우리의 난투극에는 황소를 때려눕힐 만한 주먹질도 없고 가구가 날아다니지도 않았다. 그와 나는 더러운 숨뭉치와 넝마를 채워넣은 커다란 인형 같았다. 두 글쟁이가 벌이는 싸움은 조용하고 매가리 없고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한 명은 마약에 취해 허우적거리고 다른 한 명은 심장병과 과음 때문에 맥을 못 췄다.
490. "내가 방금 클레어 퀼티를 죽였소." 그러자 불그레한 남자가 두 자매 중 언니에게 술잔 하나를 건네면서 말했다. "잘하셨어요." 뚱뚱한 남자도 거들었다. "누군가 진작 했어야 할 일이죠." (중략) "그래. 언젠가는 다들 돌아가면서 그 친구를 죽여줘야 할걸."
7. <롤리타>에서 나는 개인의 방만한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족쇄가 되어 돌아온다는 섬뜩한 메시지를 읽었고, 이러한 점은 지난 번에도 언급(개인의 자유에 대한 지나친 맹신과 조장에 대한 부작용)한 바 있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달과 6펜스>같은 소설의 비판론적인 성격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을 추구하고, 최신의 것을 추구한다는 자부심에 젖어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집단인 지식인, 글쟁이가 부각되었기 때문에 더욱 잘 드러났다고 본다.
8. 나보코프 형님은 비도덕과 속물적인 것을 누구보다도 싫어한다고 말한 것처럼, 소설 속의 험버트는 어느 누구보다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도덕성이 필요했고, 물려받은 유산으로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속물근성을 벗어던져야 했다. 비록, 그가 소설에서 일부러 드러내지 않으려 했어도 그의 잠재의식은 그것(비도덕한 속물근성의 인간)을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형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455.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의 양심이란 /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로 치르는 세금 같은 것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