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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성당 이야기
밀로시 우르반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평점 :
난이도 : ★★☆
1. 한국어판 작가 소개의 첫머리에 움베르트 에코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덕분에 한국의 독자는 밀로시 우르반과 움베르트 에코를 같은 카테고리에 묶지 않을 수밖에 없다. '체코가 낳은 움베르트 에코'라는 수식어를 밀로시 우르반님께서 반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비교는 될 수 있으면 첫머리에 싣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움베르트 에코라는 작가의 명성만 들어봤지.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아 딱히 비교할 거리를 잡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투정을 부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342. 주변이, 현재가 전부 싫었습니다. 미래는 생각하면 두려울 뿐이었고요. 희망이 안 보였어요. 어딘가 안전한 곳, 뾰족한 바위 같은 불안감과 치명적인 절망의 역류에서 탈출해서 마음을 쉴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어요. 고독을 간절하게 원했고, 중세 성들의 폐허에서 그걸 찾아낸 거죠.
2. 다른 분의 서평을 읽고, 움베르트 에코와 밀로시 우르반은 '중세'라는 키워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움베르트 에코가 중세를 어떻게 표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밀로시 우르반의 '중세'는 카를 만하임의 유토피아의 네 가지 태도를 인용하여 설명한 가운데 세 번째 태도인 '완벽했던 과거'를 뜻하는 유토피아의 성격을 나타낸다고 해설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인물들은 과거. 그중에서도 인간보다는 신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던 중세의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그 모습들은 뭐랄까. 엄청난 광기에 사로잡혀 있어서 매우 극단적으로 보이고, 그러한 극단성은 오히려 중세에 대한 거리감만 불러일으키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느낀 것(중세의 거리감)이 정답이라는 듯이 '중세의 풍경이 자리한 현재의 시간' 을 아이러니로 풍자함으로써 책이 마무리 된다.
결론은. 우르반 형님은 중세를 낭만적으로 보고, 맹목적으로 받드는 사람들의 바보 같은 모습을 통해 그런 해결책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세기말 체코의 분위기. 부조리한 현재는 암울하고, 다가오는 21세기는 실제로 오지 않을 것 같고, 그렇게 어떤 이는 과거의 향수를 필요 이상으로 부풀림으로 '낭만적인 과거로 돌아가자.' 라고 외치지만 그것은 현재의 암울함을 벗을 수 있는 답이 될 수는 없다는 메시지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일곱 성당 이야기>는 일단 그것에 만족하는 소설이다.
3.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형편없다. 필요에 따라서 고의적으로 설정한 것이지만, 그것을 알 수 없는 소설 내내 인물이 형편없으니 이야기 자체도 매력이 떨어졌다. 심지어 180페이지까지 읽었음에도 도대체 이 책이 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필요 이상으로 고딕을 찬양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밑도 끝도 없이 고딕을 절대적인 선의 지위에 올려놓고 찬양하다니…. 대체 고딕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지? 우리가 보통 인간의 이기심을 비판할 때, 자주 예로 드는 자연 파괴보다 더 나쁜 것이 고딕 파괴라니? 고딕이 유행했던 시기가 얼마나 큰 체코의 황금기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416. 축복받은 14세기, 후스파가 난동을 일으켰던 불행한 15세기, 거만한 르네상스의 시대였던 16세기, 심지어 저주받은 30년 전쟁의 시대에 가난과 배고픔 속에 사는 편이 지금 썩어가는 독물 같은 20세기의 비참한 삶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슬라브 민족의 나약한 꽃이라는 의미인 크베토슬라프 슈바흐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어떻게 보면 이런 사상을 지닌 주인공에 대한 비판의 의미로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주인공의 생각 뿐 아니라 행동도 개운치 않았다. 신을 복권하고, 중세의 귀족 가문을 부흥하고, 신성을 등에 업고 막대한 권력을 누리려는 꿈을 꾸는 세력인 형제회가 벌이는 일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능력을 알아봤고, 자신을 사용(?)할 수 있기에 못 이긴 척 그 체제에 타협하고 순응하는 것은. 친일파의 처세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4. 장점은 분명히 있다. 특히, 이 소설의 묘사는 엄청나게 세부적인 편인데. 눈에 보이는 것. 즉, 시선을 따라 서술하는 것과 행동을 시간에 따라 설명하는 묘사는 사실 좀 지루하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나(크베토슬라프 슈바흐)의 의식에서 빚어진 비현실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것은 이 섬세함이 장점으로 작용해서 흡입력을 부여했다. 그것이 형제회 부흥의 열쇠라는 장치로 소설에서는 그려지지만, 소설의 장치 외적인 면으로 떼어놓고 봤을 때도 상당히 훌륭하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뻔한 것을 대할 때면, 우리도 쉽게 예상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것을 자세하게 묘사해봤자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뻔하지 않은 것은 결코 쉽게 예상할 수 없으므로 대체 작가가 어디서 영감을 얻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그려내는가가 궁금하지 않을까?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