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운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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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난이도 : ★

1. 답정너 :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답정너 스타일의 로맨스 소설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19세기 유럽. 살롱문화가 귀족 사회에 유행했던 것처럼 휴전 이후 대한민국 상류사회​에서 탄생(자본주의 체제의 시작. 불완전한 후불제 민주주의 제도. 그 체제의 단점이 고스란히 부각)​한 댄디즘(세련된 복장과 몸가짐으로 일반인에 대한 정신적 우월을 은연중에 과시하는 태​도)소설이자 신데렐라 스토리의 소설이다.

그러나 인물은 댄디즘을 추구하진 않는다. 댄디즘 사회에서 인간이 지닌 순수한 사랑을 선택하는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그 과정에서 설득력은 다소 떨어졌다.   

2. 신데렐라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놀림을 받았더래요. 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강은경도 어머님을 잃고, 계모의 눈치밥을 먹다가 -어머니의 고향 동생이자 현 국회의원의 아내이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첩에게 남편을 빼앗긴 불운한 여인- 허찬희의 도움으로 상경을 결심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3. 중요한 것

어떻게 소설이 시작하는가. 전개되는가. 마무리 되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한 인간이라는 가치에 자연스럽게 예속된 경제 권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요즘 한국 막장 드라마의 특징. 

상류사회를 그려낸 드라마들을 보면 재벌과 정치 권력이 하나의 축으로 등장하고, 특유의 아름다움과 남들과는 다른 매력으로 뭇 사내들을 설레게 하는 신데렐라 스타일의 여자 주인공은 멋지고 잘 생기고 직업 좋고, 자상한 남자와 부와 행복을 모두 거머쥠으로써 권선징악이라는 극이 마무리된다. 선이 위너가 되고 위너가 모든 부유함을 가지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2010년의 재벌 주인공이 자신의 재력을 딱히 과시하지는 않지만(PPL이라는 고약한 장치 덕분에 그런 의도조차 흐릿해지는 분위기임에도.) 인간 성품의 훌륭함과 부유함이 저절로 '='의 등식으로 성립되고. 그것이 착하다는 기준으로서 선택의 항목이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 하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박경리 누님의 소설 <푸른 운하>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박경리 누님의 <푸른 운하>는 여자가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가치 속에 재벌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한 인간의 분위기와 인상과 성격이 경제적 배경을 초월하는 점이 인상 깊다. 이것이 운명적인 답정너 방식이라 설득력이 떨어지고 그 점에서 한계가 느껴지긴 하지만 말이다.)  

이것이 박경리 로맨스와 2010년의 로맨스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 다른 것은 대부분 유사하다. 

4. 이상적인 여성상

이 생각은 박경리 누님의 소설을 여러권 읽은 덕분에 떠올릴 수 있었다. 박경리 누님의 소설은 여성이 중심에 위치한다. 여성을 중심으로 삼각관계가 형성되는데. 기존에 읽었던 작품에서는 한국적인 유교적 가부장제를 ​자신의 힘으로 개척하고 극복하는 여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초월적인 인간과 자유로운 영혼'. 이것이 신여성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소설 <푸른 운하>의 은경은 초월이긴 초월인데 극복이라는 인상보다는 넓음(즉, 사랑과 포용)이라는 기준에서 초월을 다루고 있었다. 제목 <푸른 운하>에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 그 남자의 모든 부분을 품어 안을 수 있다는 모성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마치 보살을 보는 것 같은 은경의 모습은 기존 여성상의 변질된 모습이라는 상징으로써 대비의 방식으로 책에서 그려진다. 자신의 행복과 자유를 지나치게 추구하여 남편과 자식을 버리는 경란이라는 여성은 당당함이 있지만, 초월적 인간과 자유로운 영혼이 시대의 권력 의지에 조응하여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잘 보여주었고, 그녀를 통해서 이상적인 여성상의 변증법적 파괴를 보여준다. 그것은 경란과 은경을 동시에 관계하는 남성 이치윤에 의해서 성립된다. 

5. 순애보인 듯 순애보 아닌 순애보 같은 은경   

은경의 확실한 의사표현은 박지태의 자격지심을 증폭시키고, 은경의 확고한 이상형 앞에서는 선한 재벌은 그냥 사랑하는 치윤 씨의 친구이자 직장상사이자 착한 사장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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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철학 지도 - 나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학적 밑그림
김선희 지음 / 지식너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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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난이도 : ★

1. 지도

우리는 지도를 보면서 모르는 길을 찾거나. 현재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지도나 사전이라는 것의 기능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표준으로 수렴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미지의 어떤 곳을 헤매면서 느낄 법한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불안감을 씻을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예가 이럴진대.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그 안에 담긴 세계관은 인문학적 지도의 어디 쯤에 놓인 것인지. 이러한 막연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솔직히 가늠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세계지도처럼 촘촘히 짜인 그물망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 책이 표현하는 지도의 방식은 유토피아, 청년, 고통, 웃음, 집, 우정, 자기고백, 공부라는 8개의 작은 섬에 기본시설을 구축한 정도다. 표준과는 거리가 멀지만, 8개의 주제 제각각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2. 유토피아

유토피아라는 곳을 방문했을 때, 나는 비로소 <만조의 바다 위에서>가 구축한 세계관의 진정한 정체와 마주할 수 있었다. 

세 개의 층위로 이루어진(자치주, B-모어, 차터)에서 주인공은 중간지점에 있었다. 그곳은 타성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몸이 아프지 않거나 저항하지 않으면 자치주에 떨어지지 않고, 그럭저럭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

이런 세계를 구축한 것은 아마도 누군가의 의지가 작용했을 터인데. 그 의지라는 것을 '유토피아론'에서 찾을 수 있었다. 

34. 최선의 공화국은 일단 섬. 내부는 바둑판과 같은 공간적 구조. 도시의 구획은 작업적 구분에 따라 나뉩니다. 시장, 도축장 이런 식으로 모든 공간이 일의 성격에 따라 나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생산의 축은 농업입니다. 나머지는 체계적인 분업 시스템을 통해 운영됩니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다 노동을 해야 합니다, 예외가 되는 이들은 학자, 사제, 공무원 뿐입니다. 그러나 노동 면제도 영속적인 것은 아닙니다. 뛰어난 역량을 보인 학자들은 노동을 면제해주지만 그렇지 못하면 다시 노동을 해야 합니다.  

37. 문명과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을 경험했을 노자는 이 경쟁과 폭력의 고리를 끊는 방법으로 소국과민과 같은 새로운 공동체를 제안. 

이것이 기반이었다. 그리고 B-모어에서 차터로 적을 옮긴 리웨이 또한 자신이 계획한 공동체를 꿈꾼다.  그것은 노자의 소국과민의 성격과 닮아 있다. 

이렇게 이창래 형님께서 느낀 한계와 문제의식은 <8개의 철학 지도>의 유토피아의 설명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38. 이 정형적 공간의 안정적 질서는 현실의 모순을 제거한 결과로 여겨지지만 사실 다른 면에서 본다면 이 정형성과 고정성은 새로운 디스토피아, 즉 유토피아의 반대쪽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유토피아 담론들이 평등을 앞에 내세우지만 이들이 말하는 평등은 제각각일뿐더러 단순하게 이상화할 수 없는 복잡한 성격.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평등을 비롯해 새로운 세계의 이념을 현실화시키고 또 유지하기 위해 소수의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41. 통제 가능한 닫힌계에 대한 상상은 어쩌면 현실에 대한 변혁의 의지라기보다는 현실 도피의 한 양상일 수도. 간섭받지 않는 세계는 동시에 타자를 배제하는 세계. 유토피아에 대한 꿈은 이러한 이중성에 연결, 

결국, 유토피아가 이루어질 수 없는 가장 큰 문제는 절대적인 이상향의 기준은 제각각이라는 점. 그리고 어느 누군가에게 사유화됨으로써 타자를 자신의 아래에 두고, 계급화된다는 점일 것이다.  

3. 유토피아의 현대화

오늘날 디지털 세계의 집약체인 스마트 폰은 개인에게 하나의 유토피아를 제공했다. 패턴을 입력하고서야 진입할 수 있는 화면들은 남들에게 공개되지 않을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것에 몰입하는 것은 과연 자발적인 의지를 통한 행위일까? 아니면 기술집약적 산업에서 만들어진 도구에 길들여진 것일 뿐일까? 다시 말해서, 스마트 폰에 의해 소외(통제)되는 것일까?

이런 소중한 통찰을 <8개의 철학지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어간 생각들은 8개 중에 단 하나의 지도에서 이어진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앞으로 7개의 가정을 방문해야한다. 이 책은 하나의 소스로 읽으면 재미가 없고, 그 주제와 알맞은 책을 발견하면 배가 되리라 생각한다. 

4.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청년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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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조의 바다 위에서
이창래 지음, 나동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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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 ★

1.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다. 근미래의 디스토피아와 그것을 극복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라는 개략적인 틀은 잘 알겠다. 주인공 '판'을 쫓아가는 시점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독특한 상상력이 가미되어 마치 그림형제나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는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 환상적이었음에도 사실적으로 읽혔다. 개인적으로는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장르라고 본다. 

하지만 그 시점보다 훨씬 더 멀찌감치 떨어진 시점. '판'이 떠난 뒤 남은 보통 사람들(도전하지 못하는 B-모어의 사람들)의 막연한 관점을 작가의 생각과 혼합해 놓은 매우 추상적인 시점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야기의 전개를 가로막은 감이 있다. 또한, 의식의 흐름에 너무 치우친 감이 있다. 그 덕분에 정말 어렵게 다가왔다.   

2. 세계관

아주 흥미롭다. 책의 커버에도 자세히 소개되고 있듯이, 이 소설은 3개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하층에 주인공이 살고 있었다. B-모어라는 곳이다. 이곳은 모든 정보가 통제되어 있었다. 눈과 귀를 막은 이유는 B-모어라는 곳은 다른 곳(차터)에 살고 있는 인간을 위해서 식량을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만들어 놓은 터전이기 때문이다.  

B-모어에서 판은 잠수부로 일하고, 레그는 토마토 농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완벽히 통제된 공간은 아니었다. 친족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는 B-모어에서 태어나는 우수한 인재를 위해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시험이 있었다. 이것은 정말 치졸한 당근책이다. 

작품에서는 상위도시로 진출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상황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의 사회를 뒤집으려고 무언가를 해보려 하지만 이미 타성에 젖어버려 그것조차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타성에 젖은 인간', 다시 말해서 '매너리즘'은 이창래 형님의 소설에서 주요한 문제로 등장한다. 판이 캐시 양의 저택에서 목격한 6명의 여인들도 타성에 길들여져 있었다. 

한편, 차터라는 상급지역이 있었다. 이곳은 수많은 B-모어가 생산한 물자를 취하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귀족의 지위를 누리는 자와 그들을 모시는 자로 나뉜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차터와 B-모어 사이에 하인이 모여있는 또 다른 공간이 있는 것 같았다. 가령 판이 교통사고를 당한 뒤에 옮겨진 곳 같은...

3. '판'은 B-모어를 탈출했다. 시험에 통과해서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레그가 어느 날 행방불명 되었기에 그를 찾아 'B-모어'를 떠났다. 여기에서 주요 동기로 작용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녀는 매우 인간적이며 낭만적인 성향을 지녔고. 동료애가 강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잃지 않는 강력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종교적 메시아로도 해석될 수 있는 초월성을 지닌 인간 '판'은 이창래 형님이 현대인에게 제시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4. <만조의 바다 위에서>라는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만조의 바다 위라는 공간은 다시 되돌아가기는 어려운 공간이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거친 물살처럼 '판'이 거쳐가는 하루하루는 다시 돌리기 어려운 날들이었고, 또한 그 날에는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사랑을 찾아서 그 사랑을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처음의 소망과는 달리. 책에서는 확실히 공개되지 않는 그와의 만남의 날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변수가 있었다. 그렇게 만조의 바다 위는 불규칙성을 의미한다. 

한편, 만조의 바다 위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 체제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차터로 진출한 판의 유일한 혈육 보 리웨이의 딸 조시의 생일선물로 커다란 수족관이 들어왔는데. 그것의 이름이 만조였고, 그것이 요즘 유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유행하는 그것의 안에는 온갖 인공적인 것들이 담겨서 자연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었다. <만조의 바다 위에서>의 계급 사회가 그것과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5. <만조의 바다 위에서>는 '판'이라는 초월적인 인간에게 모든 문제를 온전히 떠맡긴 것은 아니었다. 개인에게 닥친 역경의 극복과 관련해서는 개인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말한다. 하지만 결국, 그 개인의 의지를 함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동체라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로이 떨어져 성공을 하게 된 '차터에서의 이름은 올리버인 동시에 B-모어에서 리웨이'였던 사내는 그 사실을 깨닫고 그녀와 앞으로 탄생할 자신의 씨족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쉽게 말해서, 그 울타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였고, 어떤 문제를 극복할 에너지는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메시지였다.

6. 여기서 C-질환이라는 변수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은 <만조의 바다 위에서>의 세계에 큰 위협을 가하는 요소인데. 개인적으로 추측해봤을 때, 근친 간의 혼인으로 생긴 질환이 아닌가 의심된다. 사람들을 가두어 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상황이 얼마나 지속되어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벌어질 수밖에 없을 사건이고, 그로 인한 병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티븐슨의 <오랄라>라는 작품도 그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따라서, 공동체 형성은 정신적인 평온을 위한 필요와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정신적인 강화를 위해서 필요하나. 그것은 계획적인 강요와 통제에 의한 만들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7. 정리하자면 이 소설에서 제시하는 디스토피아의 극복을 위한 유토피아는 자발적인 공동체의 형성을 통해서 따스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올곧은 마음을 가진 인재를 길러낸다는 것. 그것이 곧 밝은 미래를 위한 길이라는 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고, 멘붕에 빠져 자신을 놓아버리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8. <만조의 바다 위의 풍랑>은 변하거나 약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곳을 헤쳐나갈 우리에게 좀 더 나은 성능을 지닌 배와 노 한 자루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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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장석훈 옮김 / 판미동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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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 ★​☆

1.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발췌 한 곳을 노트에 옮겨 적고, 또 한 번 블로그에 저장하면서 나름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2. 아. 너무 심취했나보다. 지금 횡재라는 카테고리에 적어둔 이웃에게만 공개하는 포스트를 다시 한 번 천천히 읽다가 덜컥 겁이 났다. 설마 이 블로그 주인장은 '도를 아십니까?' 혹은 '당신에게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라는 엉뚱한 소리를 건네면서 접근하는 사람(지난 주에 삼산 롯데백화점을 지나가는데 왠 아주머니가 나보고 그런 소리를 하시던데... 물론 나는 쿨하게 '됐어요'를 외치고 발걸음을 빨리 했다.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단언컨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여러차례 말해왔지만, 나는 무신론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인간은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의 세 스승이 권하는 죽음 이후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위해서 현재를 사는 사람은 아니다. 같은 의미로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혹은 선한 업을 쌓아서 육도의 가장 으뜸인 천도로 가는 꿈을 꾸며 현재를 보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면의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라는 말. 그리고 371. 참된 것과 바른 것은 같은 것이다. 진리를 알았다고 한다면. 그 앎으로 인해 우리가 바르게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앎이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유로 붓다나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공한 삶이란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삶이다.​ 라는 문장은 내가 원하는 삶 (참된 선을 추구하고, 그로부터 행복을 느끼는 삶)과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 참됨을 나만의 기준으로 곱씹어본다. 정의와 사랑이 생각보다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의를 추구하는 부분에서 소크라테스 형님의 칭찬을 받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붓다 형님에게는 사랑 때문에 좋은 소리를 못들을 것 같기도 하다. 

갈애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큰일이라고 혀를 차면서 걱정하며, 사랑 뿐만 아니라 태어난 이후부터 살아가는 모든 것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예 잊어버리기를 권하거나. 아니면 들끓는 에로스의 사랑을 보살로서의 자비로 대신하는 것은 어떠냐 되묻겠지만, 나란 놈은 그런 갈애에 빠져 몸부림쳤던 러시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백만송이 장미가 아름다워 보이고. 훌륭했던 작가와 그들의 뮤즈에 얽힌 여러 낭만 혹은 고통 혹은 파멸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는 그런 놈이라는 사실에 직면한다. 

3. 소크라테스 형님이 노예 상태의 인간의 증거로 제시한 무지에 관련해서는 '무지'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것을 이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계몽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슬기로운 지혜' 라는 개념을 '무지'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생각들이 허용된다면 나 역시 소크라테스와 같이 무지를 '참되지 않은 것' 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고 본다. 

4. 진리.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 이것은 세 명의 성인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137. 예수는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재물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도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고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된다고 했다. 붓다는 우리 삶의 목적이 명상을 통해 자기를 바라봄으로써 '아상'이라는 자아에 관한 환상을 깨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예수 형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요. 그러므로 진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했으니 자신을 따르고 자신이 설파한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형님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다이몬'을 통해 목소리를 전해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점에서. 싯다르타 형님 같은 경우에는 '붓다'라는 절대적 진리를 깨우쳤고, 그것을 명상을 통해 찾기를 바랐다는 점에서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해도 결론적으로 그것을 따르고 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라는 점에서 개인이 가진 중요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5. 소크라테스 형님이 줄곧 말씀하신 '영혼의 산파' 와 탄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것이 진실인가에 대해서 되묻고, 또한 그 방법이 아이러니한 형식을 나타낸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예전에 책을 읽어서 어렴풋하게 알고 있어서. 복습한다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붓다 형님의 사상적 틀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접한 바.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현실 속 무상한 존재를 정의하는 오온의 개념. 그리고 오온을 지니고 있는 '아'의 존재. '아'의 존재가 업, 윤회, 해탈로 이어지는 과정들과 윤회의 굴레에서 나뉘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 그리고 열반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팔정도(계정혜)로 고통을 소멸시키고, 사념처경이라는 명상을 통해 몸, 감각, 마음, 그리고 마음의 대상을 수행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그들을 열반이라는 절대적인 진리에 이르게 한다는 것 까지는 바라진 않지만. 그래도 그 모든 성찰과 고뇌를 씻어내기 위한 노력이 현재의 고독한 인간을 치유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모든 행위가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6. 예수에 관한 부분은 이 두 성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좀 미흡하게 읽었는데. 조만간 <젤롯>이라는 책을 통해 다시 공부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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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특별한 재수강 - 자네, 참삶을 살고 있나?
곽수일.신영욱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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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 ★

 

1. 책을 읽으면서 책 한 권이 생각났다. 작년에 위즈덤하우스의 소셜평가단을 하면서 알게 된 <하워드의 선물>이라는 책이다. 

 

그 책의 소개를 옮겨본다. 

 

어떻게 후회 없는 삶을 살 것인가?


인생의 전환점에서 만난 필생의 가르침『하워드의 선물』. 40년 넘게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한 미국 경영학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하버드 경영대학원 최고의 교수인 하워드 스티븐슨이 수많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갈팡대는 독자들에게 ‘후회 없는 인생을 사는 12가지 지혜’를 전해준다. 


하워드 스티븐슨을 인생의 또 다른 아버지로 여겼던 제자 에릭 시노웨이와 하워드가 수년 동안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 에릭이 느낀 감동뿐만 아니라 그가 노교수에게 전수받은 인생의 지혜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스스로 원하는 성공을 정의하고 후회 없는 만족스런 삶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실용적이며 실질적인 조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정말 비슷한 구석이 많은 책이다. 한국 경영학계의 노스승 곽수일 교수. 남들이 보기엔 성공했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성공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행복까지 누리기를 원하는 제자 신영욱. 서울대에서 생사관리라는 별명으로 악명 높기로 소문 난 수업이 시간이 흘러 다시금 이어진다. 그렇게 스승은 가르침을 전해주고, 제자는 또 그것으로서 나름의 깨달음을 얻고….

 

<하워드의 선물>이 그것을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주고자 했다면, <어느 특별한 재수강>은 그것을 수강이라는 이름으로 경청하고 또 받아들였다. 준다는 것과 받는다는 것. 문화적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2. 작년에 <하워드의 선물>을 읽고 쓴 리뷰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그것을 보면서 그때 느꼈던 기분을 상기해보면 뭐랄까. 그저 미친듯이 마구 달리고 싶었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멈춰 있었는데 또 다시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었다.

 

사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아직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나는 올해도 미친듯이 달려야 하고, 향후 몇 년은 달려야 한다. 블로그의 서평 개수는 현저하게 줄었으니... 블로그에서는 잘 해왔다고 이야기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이 책은 책의 내용과 관계없이 과거의 나를 현재의 나의 앞에 데려와 비교하고, 강제로 반성하게 만들었다. 

 

 

3. 그럼에도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책보다 확실히 낫다고 생각한다. 인상적으로 읽은 부분은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는 것'과 '스마트 폰이나 기타 다른 편리한 것에 의해 소외'되어버린 한국인의 고질적인 문제를 파헤친 부분이다. 

 

우리와 같은 시간과 그 시간 안에서 끊이지 않고 메아리치는 절규가 이어지는 세상에서 공생하기에. 우리가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잘 꿰뚫어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고 단호하게 제공한다. 그리고 그 답에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수강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만약, 내가 <하워드의 선물>을 알지 못했다면 평가는 달라졌을것이다. 독창성이라는 부분에서 과감하게 별 하나를 삭제했지만, 내가 어떤 책을 두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인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4. 요즘 다시금 블로그에 올리는 책에 관련된 출처를 밝히라는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다. 핵심만 말하자면 돈을 주고 사보면 진짜 리뷰고, 공짜로 받아서 보면 가짜인 것이라는 얘기인데.

 

까놓고 얘기해서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돈 주고 사서 읽는 책을 읽으면 그 시간은 책을 읽는 시간이고, 공짜로 받은 책을 읽은 시간은 책을 읽은 시간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니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싶었고, 이 책을 읽기 위해 어떻게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단 말인가? 대체 왜 책 이야기 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아야 하는가?

 

돈을 주든 안주든 상관없이 그 책이 관심이 생기고 읽고 싶으면 읽는 거고. 책을 주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관심이 없는 책은 읽지 않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나 같은 경우엔 오히려 이런 출처를 명시하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좋은 책은 좋은 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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