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장석훈 옮김 / 판미동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난이도 : ★​☆

1.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발췌 한 곳을 노트에 옮겨 적고, 또 한 번 블로그에 저장하면서 나름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2. 아. 너무 심취했나보다. 지금 횡재라는 카테고리에 적어둔 이웃에게만 공개하는 포스트를 다시 한 번 천천히 읽다가 덜컥 겁이 났다. 설마 이 블로그 주인장은 '도를 아십니까?' 혹은 '당신에게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라는 엉뚱한 소리를 건네면서 접근하는 사람(지난 주에 삼산 롯데백화점을 지나가는데 왠 아주머니가 나보고 그런 소리를 하시던데... 물론 나는 쿨하게 '됐어요'를 외치고 발걸음을 빨리 했다.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단언컨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여러차례 말해왔지만, 나는 무신론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인간은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의 세 스승이 권하는 죽음 이후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위해서 현재를 사는 사람은 아니다. 같은 의미로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혹은 선한 업을 쌓아서 육도의 가장 으뜸인 천도로 가는 꿈을 꾸며 현재를 보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면의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라는 말. 그리고 371. 참된 것과 바른 것은 같은 것이다. 진리를 알았다고 한다면. 그 앎으로 인해 우리가 바르게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앎이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유로 붓다나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공한 삶이란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삶이다.​ 라는 문장은 내가 원하는 삶 (참된 선을 추구하고, 그로부터 행복을 느끼는 삶)과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 참됨을 나만의 기준으로 곱씹어본다. 정의와 사랑이 생각보다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의를 추구하는 부분에서 소크라테스 형님의 칭찬을 받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붓다 형님에게는 사랑 때문에 좋은 소리를 못들을 것 같기도 하다. 

갈애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큰일이라고 혀를 차면서 걱정하며, 사랑 뿐만 아니라 태어난 이후부터 살아가는 모든 것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예 잊어버리기를 권하거나. 아니면 들끓는 에로스의 사랑을 보살로서의 자비로 대신하는 것은 어떠냐 되묻겠지만, 나란 놈은 그런 갈애에 빠져 몸부림쳤던 러시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백만송이 장미가 아름다워 보이고. 훌륭했던 작가와 그들의 뮤즈에 얽힌 여러 낭만 혹은 고통 혹은 파멸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는 그런 놈이라는 사실에 직면한다. 

3. 소크라테스 형님이 노예 상태의 인간의 증거로 제시한 무지에 관련해서는 '무지'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것을 이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계몽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슬기로운 지혜' 라는 개념을 '무지'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생각들이 허용된다면 나 역시 소크라테스와 같이 무지를 '참되지 않은 것' 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고 본다. 

4. 진리.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 이것은 세 명의 성인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137. 예수는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재물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도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고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된다고 했다. 붓다는 우리 삶의 목적이 명상을 통해 자기를 바라봄으로써 '아상'이라는 자아에 관한 환상을 깨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예수 형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요. 그러므로 진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했으니 자신을 따르고 자신이 설파한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형님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다이몬'을 통해 목소리를 전해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점에서. 싯다르타 형님 같은 경우에는 '붓다'라는 절대적 진리를 깨우쳤고, 그것을 명상을 통해 찾기를 바랐다는 점에서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해도 결론적으로 그것을 따르고 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라는 점에서 개인이 가진 중요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5. 소크라테스 형님이 줄곧 말씀하신 '영혼의 산파' 와 탄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것이 진실인가에 대해서 되묻고, 또한 그 방법이 아이러니한 형식을 나타낸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예전에 책을 읽어서 어렴풋하게 알고 있어서. 복습한다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붓다 형님의 사상적 틀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접한 바.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현실 속 무상한 존재를 정의하는 오온의 개념. 그리고 오온을 지니고 있는 '아'의 존재. '아'의 존재가 업, 윤회, 해탈로 이어지는 과정들과 윤회의 굴레에서 나뉘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 그리고 열반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팔정도(계정혜)로 고통을 소멸시키고, 사념처경이라는 명상을 통해 몸, 감각, 마음, 그리고 마음의 대상을 수행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그들을 열반이라는 절대적인 진리에 이르게 한다는 것 까지는 바라진 않지만. 그래도 그 모든 성찰과 고뇌를 씻어내기 위한 노력이 현재의 고독한 인간을 치유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모든 행위가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6. 예수에 관한 부분은 이 두 성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좀 미흡하게 읽었는데. 조만간 <젤롯>이라는 책을 통해 다시 공부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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