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조의 바다 위에서
이창래 지음, 나동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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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 : ★

1.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다. 근미래의 디스토피아와 그것을 극복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라는 개략적인 틀은 잘 알겠다. 주인공 '판'을 쫓아가는 시점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독특한 상상력이 가미되어 마치 그림형제나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는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 환상적이었음에도 사실적으로 읽혔다. 개인적으로는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장르라고 본다. 

하지만 그 시점보다 훨씬 더 멀찌감치 떨어진 시점. '판'이 떠난 뒤 남은 보통 사람들(도전하지 못하는 B-모어의 사람들)의 막연한 관점을 작가의 생각과 혼합해 놓은 매우 추상적인 시점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야기의 전개를 가로막은 감이 있다. 또한, 의식의 흐름에 너무 치우친 감이 있다. 그 덕분에 정말 어렵게 다가왔다.   

2. 세계관

아주 흥미롭다. 책의 커버에도 자세히 소개되고 있듯이, 이 소설은 3개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하층에 주인공이 살고 있었다. B-모어라는 곳이다. 이곳은 모든 정보가 통제되어 있었다. 눈과 귀를 막은 이유는 B-모어라는 곳은 다른 곳(차터)에 살고 있는 인간을 위해서 식량을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만들어 놓은 터전이기 때문이다.  

B-모어에서 판은 잠수부로 일하고, 레그는 토마토 농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완벽히 통제된 공간은 아니었다. 친족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는 B-모어에서 태어나는 우수한 인재를 위해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시험이 있었다. 이것은 정말 치졸한 당근책이다. 

작품에서는 상위도시로 진출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상황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의 사회를 뒤집으려고 무언가를 해보려 하지만 이미 타성에 젖어버려 그것조차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타성에 젖은 인간', 다시 말해서 '매너리즘'은 이창래 형님의 소설에서 주요한 문제로 등장한다. 판이 캐시 양의 저택에서 목격한 6명의 여인들도 타성에 길들여져 있었다. 

한편, 차터라는 상급지역이 있었다. 이곳은 수많은 B-모어가 생산한 물자를 취하는 지역이다. 이곳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귀족의 지위를 누리는 자와 그들을 모시는 자로 나뉜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차터와 B-모어 사이에 하인이 모여있는 또 다른 공간이 있는 것 같았다. 가령 판이 교통사고를 당한 뒤에 옮겨진 곳 같은...

3. '판'은 B-모어를 탈출했다. 시험에 통과해서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레그가 어느 날 행방불명 되었기에 그를 찾아 'B-모어'를 떠났다. 여기에서 주요 동기로 작용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녀는 매우 인간적이며 낭만적인 성향을 지녔고. 동료애가 강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잃지 않는 강력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종교적 메시아로도 해석될 수 있는 초월성을 지닌 인간 '판'은 이창래 형님이 현대인에게 제시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4. <만조의 바다 위에서>라는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만조의 바다 위라는 공간은 다시 되돌아가기는 어려운 공간이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거친 물살처럼 '판'이 거쳐가는 하루하루는 다시 돌리기 어려운 날들이었고, 또한 그 날에는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사랑을 찾아서 그 사랑을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처음의 소망과는 달리. 책에서는 확실히 공개되지 않는 그와의 만남의 날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변수가 있었다. 그렇게 만조의 바다 위는 불규칙성을 의미한다. 

한편, 만조의 바다 위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 체제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차터로 진출한 판의 유일한 혈육 보 리웨이의 딸 조시의 생일선물로 커다란 수족관이 들어왔는데. 그것의 이름이 만조였고, 그것이 요즘 유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유행하는 그것의 안에는 온갖 인공적인 것들이 담겨서 자연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었다. <만조의 바다 위에서>의 계급 사회가 그것과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5. <만조의 바다 위에서>는 '판'이라는 초월적인 인간에게 모든 문제를 온전히 떠맡긴 것은 아니었다. 개인에게 닥친 역경의 극복과 관련해서는 개인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말한다. 하지만 결국, 그 개인의 의지를 함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동체라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로이 떨어져 성공을 하게 된 '차터에서의 이름은 올리버인 동시에 B-모어에서 리웨이'였던 사내는 그 사실을 깨닫고 그녀와 앞으로 탄생할 자신의 씨족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쉽게 말해서, 그 울타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였고, 어떤 문제를 극복할 에너지는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메시지였다.

6. 여기서 C-질환이라는 변수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것은 <만조의 바다 위에서>의 세계에 큰 위협을 가하는 요소인데. 개인적으로 추측해봤을 때, 근친 간의 혼인으로 생긴 질환이 아닌가 의심된다. 사람들을 가두어 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상황이 얼마나 지속되어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벌어질 수밖에 없을 사건이고, 그로 인한 병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티븐슨의 <오랄라>라는 작품도 그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따라서, 공동체 형성은 정신적인 평온을 위한 필요와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정신적인 강화를 위해서 필요하나. 그것은 계획적인 강요와 통제에 의한 만들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7. 정리하자면 이 소설에서 제시하는 디스토피아의 극복을 위한 유토피아는 자발적인 공동체의 형성을 통해서 따스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올곧은 마음을 가진 인재를 길러낸다는 것. 그것이 곧 밝은 미래를 위한 길이라는 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고, 멘붕에 빠져 자신을 놓아버리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8. <만조의 바다 위의 풍랑>은 변하거나 약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곳을 헤쳐나갈 우리에게 좀 더 나은 성능을 지닌 배와 노 한 자루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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