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평화
존 놀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이도 : ★  


1. 일인칭


일인칭에는 무한한 행간이 숨어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일인칭은 그래서 불확실하다. 나오는 모든 것들은 조립하기에 따라 전혀 새로운 사실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화자가 말하는 모든 것이 착각에서 빚어진 거짓일수도 있다는 반전도 존재한다그런 짜릿한 개연성을 아직까지 기억하게 만드는 소설도 있다.  


<분리된 평화>의 일인칭은 흥미롭게도 관찰자적인 시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라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요소는 따로 있고, 그것이 화자에게 미친 영향을 일인칭 시점을 통해 이야기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은 중심에서 약 30%정도 떨어진 곳까지를 말할 수 밖에 없다고 느꼈다. 바로 앞에 읽은 작품이 <죄와 벌>이었다는 점에서 이런 구성은 치명적이었다. 여러 인물을 넘나들고, 그 인물에 빠져들어서 인물의 100% 내면을 그려내려고 노력하는 작품이 <죄와벌>이라면. <분리된 평화>는 중심에 도달하지 못한 '나'라는 인물이 풀어놓은 70%의 감상에 의존하여 나머지 30%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수반된다


이것은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찾아내야하는 커다란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런 노력 덕분에 아주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 맛이 있다는 점은 매우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전쟁의 나비효과.


이 소설의 주인공인 '진 포레스트'의 회상으로 부터 시작하는 이 소설은 어떤 두려움에 대하여 말한다. 


5. 닫혀 있는 방 안의 텁텁한 공기처럼 그 나날들을 둘러싸고 꽉 채웠던 익숙한 두려움, 너무도 짙어서 나로서는 아예 감지하지도 못했던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한 번도 알거나 느껴보지 못했던 나는, 두려움의 존재 역시 인식할 수 없었던 것이다. 


15년 세월을 거슬러 뒤돌아보면, 내 삶을 에워싸고 있던 그 두려움을 나는 이제 명확히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그동안 내가 무척 중요한 임무를 성취해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야 만 것이다. 


두려움의 메아리를 나는 느낀다. 또한 불안정하고 억누를 수 없는 기쁨도 솟구쳐온다. 두려움의 동반자이자 그 이면, 이따금씩 어두운 하늘을 가로지르는 오로라처럼 그 나날들을 환히 밝혀주었던 기뿜이. 


이 두려움은 '전쟁의 두려움'인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극한의 체험을 하는데서 찾아오는 육체적 정신적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전쟁의 체험이라는 학습된 이미지로부터 오는 심리적인 동요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설명하면 좀 더 이 두려움에 대하여 정확히 설명했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다시 말해서. 이 두려움은 직접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간접적인 두려움인데. (직접과 간접의 위력은 아시다시피 직접 >> 간접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데번이라는 공간에서는 서서히 두려움에 붙잡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에 없던 질투심이 생기고. 조금 더 경쟁적이 되고, 난폭해지고, 뭐 기타 등등... 


이러한 공격적인 인간의 성향은 전쟁이 빚어낸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본연의 것들이라는 주장도 옳다고 여겨지지만. 존 놀스 형님의 <분리된 평화>에서는 전쟁에게 그 원인을 돌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점은 골딩의 <파리대왕>에서도 나타나는데. <분리된 평화>와 <파리대왕>은 방식에서 반대로 접근했다. 


<분리된 평화> 같은 경우엔 "전쟁의 두려움이 이러한 비극을 야기시켰다." 라고 본다면 <파리대왕>은 "비극이 발생했다. 인간 본연의 문제일까? 아니다. 곱씹어보면 어른들의 전쟁이 일으킨 두려움이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것이다," 라고 말이다.  


어쨌든 <분리된 평화>는 겨울에 볼 수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풍겨나는 쓸쓸한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회색빛의 두려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품은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3. 순수의 소멸


그런 분위기에 주눅들지 않은 한 존재가 있었다. '피니어스'라고 불리는 이 존재는 그런 의미에서 <분리된 평화>에서 전쟁과 함께 중심축을 이루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기존에 존재했던 관습에 물들지 않고,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인물로서. 개인적으로는 두려움이 침범하지 못하는 순수라는 상징으로 해석했다. 결국, <분리된 평화>는 전쟁의 나비효과로 인하여 순수가 소멸되는 과정을 곁에서 목격한 화자가 늘어놓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소멸하는 과정을 요약해보자.


피니어스는 육체적인 자신의 전성기를 잃어버린다. 전쟁의 나비효과라는 파도에 휩쓸린 인간의 불안감에 의하여....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힘을 잃은 대신 장애라는 굴레를 짊어진 그에게 전쟁에 물든 사회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마음대로 폐기처분한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현실을 어른들이 만들어낸 거짓부렁이라고 부정할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까지 그에게 닥쳐오는 차가움에 직면하는 순간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순수함을 붙잡을 순 없었다. 


그것을 15년 후에 깨닫게 된 화자가 풀어놓는 이야기가 바로 <분리된 평화>였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외부의 압력. 그것도 아주 간접적인 압력에도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 인용구의 말처럼 그것이 정말로 적이기는 했더라면 덜 슬펐을 것이다. 


236.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느 시점에 와서는 자신 안의 그 무엇이 주변 세계의 그 무엇과 격렬하게 충돌함을 깨닫곤 했다. 내 동기들은 전쟁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종종 그런 충돌을 겪었다. 자신을 압도할 만크 적대적인 어떤 존재가 이 세상에 자신과 함께 있음을 느끼게 되면서, 인격 속의 단순함과 통일성이 파괴되어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어진 것이다. 


오직 피니어스만이 그런 충돌을 벗어났다. 그는 남다른 활력을, 자신에 대한 드높은 신뢰를 품었고, 평온하고 자연스럽게 애정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지녔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그를 구원했다. 그가 집에서 성장하는 동안에도, 데번에 있는 동안에도, 심지어 전쟁 중에서조차 아무것도 그의 조화롭고 자연스런 통일성을 파괴하지 못했다. 그것 결국에 파괴한 것은 나였다. 


238. 오직 피니어스만이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피니어스만이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끔찍한 충격을, 적을 목격하는 일을 다른 어딘가에서 겪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강박적으로 방어를 시작하고, 특정한 사고방식을 통해 자신이 맞닥뜨렸다고 생각한 악의에 대응하려고 했다. 그들의 태도는 세상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이렇게 선언하는 듯했다.


"아시겠지만 나는 그저 한 마리 개미일 뿐입니다. 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난 당신의 그런 적의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러즈버리 선생 같은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떻게 감히 이런 것이 나를 위협한단 말인가. 나는 이런 대우를 받기엔 훨씬 뛰어난 사람이란 말이다. 난 이 상황을 극복할 테다."


쿼큰부시처럼, 언제 어디서든 무턱대고 대들며 덤벼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브링커처럼 부주의하고 일반화된 분노를 키우는 사람들도 있었고, 래퍼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감싼 모호한 구름 속에서 나왔다가 오직 공포만을, 자신이 항상 두려워했던 그대로의 형체를 맞닥뜨리고 나서 맞서싸우기를 완전히 포기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피니어스만을 제외하고, 그들 모두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적에게 맞서 마지노선을 구축했다. 그들이 전선 너머로 보았더고 생각한, 그러나 결코 전선에서 그들을 공격하진 않았던 적에게, 정말로 적이 그들을 공격하긴 했다면. 아니, 그것이 정말로 적이기는 했더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
페테르 우스펜스키 지음, 공경희 옮김 / 연금술사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이도 : ★


1. 자멸로 실패한 남자

 

오소킨은 돈도 잃고, 사랑도 잃었다. 매 순간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당장 눈 앞의 쾌락과 편안함이라는 이익을 쫓느라 멀리 있는 목표를 상실. 아니 목표를 정하지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불안정한 일면은 예전에 읽었던 <왜 살찐 사람은 빚을 지는가?>라는 책을 통해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책의 이론에 따르면 오소킨은 쌍곡선 할인의 지배를 받는 전형적인 인간이고, 이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겪는 공통적인 모순점일 것이다. 

 

<왜 살찐 사람은 빚을 지는가?> 리뷰 중에서...

 

인간을 자멸하게 하는 유혹은 인간의 본능과 관계된 부분이라서 통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없는 존재(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한)라는 이론을 지지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눈앞에 닥친 일에 더 높은 비중을 주고. 훗날 계획하는 일은 원래보다 낮은 비중을 주는 시간할인율( 할인율 : 미래가치를 현재가치로 환산해주는 교환비율 즉, 이자율과 반대방향의 개념)이 작동하여 짧은 기간에는 높은 할인. 긴 시간에는 낮은 할인의 경향을 띠는 쌍곡선의 할인이 발생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원래 계획했던 중요한 일과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일의 선호 관계가 역전하고,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하다가 낭패를 보기 마련이라는 충고를 건네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자만을 내려놓고, 자신에 대한 절제력을 꾸준히 점검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인간이 자멸하지 않고 스스로 다짐했던 길을 향해 걸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2. 지금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인생을 다시 산다면

 

37. "미리 알 수만 있다면! 탁자 위에서 가장자리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앞 못 보는 새끼 고양이처럼 기어 다니는 것이 우리의 불행이에요. 앞에 놓인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거예요.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앞길을 조금만 볼 수 있어도!"

 

우리가 만약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하여 사랑했던 여자가 떠나고,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틀림없이 우리들도 오소킨처럼 절규할 것이다.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을텐데라고 후회랗 것이다. 아마도 과거를 돌려달라고 할 것이다. 

 

페테르 우스펜스키 형님은 친절하게 오소킨의 소원을 들어준다. 현실에거 비현실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어떻게 보면 다시 돌린다는 게 비현실이지만 현실이기도 하다. 수능에 다시 도전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재도전하는 것은 다시 해보면 잘 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소킨 앞에 나타난 마법사는 다음의 한 마디를 덧붙인다. 

 

28.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지, 모두 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

 

<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에서는 마법사의 말처럼 손쉽게 인생을 다시 시작한 오소킨의 인생은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채. 흘러갔다. 재수가 삼수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잘못된 선택을 내리기 직전 쌍곡선 할인의 인간 본성은 다시금 오소킨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181. 그 두 시간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가치 있어. 오늘 그 일로 인해 머리가 잘린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타네츠카에게 키스할 거야... 이제 꿈속에서 날듯이 호수 위로 날아가고 싶어. 


192. 남이 내게 좋거나 필요하다고 정해 주는 일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권리를 누리고 싶어. 난 이제껏 어떤 일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거야.


204. 멀리서는 모든 걸 볼 수 있지만, 상황에 가까이 있으면 더 이상 전체를 볼 수 없어. 오직 별개의 부분들만, 아무 의미도 없는 사소한 것들만 보이는 거야. 


3. 운명은 어지간해서는 바꿀 수 없다. 하지만...

현재를 바꾸기 위하여 과거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실패와 마주한 오소킨과 마법사 형님의 대화는 직접적인 강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해석하면 신의 명령으로도 들린다. 어쨌든 그 이야기를 정리하면 쌍곡선 할인이라는 마수에서 약간이나마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 

289. "그렇다면 이것은 바퀴에 올라타고 계속 도는 것과 같아요! 이것은 하나의 덫이에요!"

"친구여, 그 덫이 인생이라고 불리는 거야. 그대가 한 번 더 실험을 반복하고 싶다면 나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어. 하지만 경고하는데 그대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거야.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만 있어."

293. "이 삶을 계속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오?"

"그건 그대의 일이야. 그대 스스로 결정해야만 해. 하지만 한 가지는 기억하게. 지금 상태로 맹목적으로 돌아간다면 그대는 다시 똑같은 일들을 할 것이고, 전에 일어났던 일들이 반복되는 걸 피하지 못할 거야. 결코 수레바퀴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고,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이 굴러갈 거야. 그대는 내게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지. 나는 '삶을 살라'고 대답하겠네. 그것이 그대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야."

298. 난 무엇이든 바꾸려면 먼저 그대 자신이 변해야만 한다고 이미 말했네. 그리고 이것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 자신이 바뀌려면 오랜 기간의 지속적인 노력과 많은 앎이 필요하지. 지금의 그대는 그런 노력을 할 수 없고,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조차 몰라. 아무도 혼자서는 그렇게 될 수 없어. 사람들은 늘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처음에 그들은 자신들이 수레바퀴 위에서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믿으려 하지 않지. 나중에 그 진실을 깨닫기 시작하면, 그들은 그것이 필요한 전부라고 생각해. 이제 자기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았으며, 무엇이든 바꿀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지지. 곧 그들은 모든 것이 대단히 쉽고 간단하다고 선전하는 사기꾼들을 발견하게 돼. 이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환상이야.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큰 고통과 때로는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 얻어낸 기회를 잃어버리지."

301. "그대 스스로는 아무것도 바꿀수 없으며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하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지. 왜냐하면 오늘 깨닫고 내일 잊어버리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인간은 이 깨달음과 함께 살아가야만 해."

302. 인간은 진정한 앎을 가져야만 해. 그리고 진정한 앎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만 하지. 또 배움을 얻으려면 자기희생을 거쳐야만 해. 자기희생 없이는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어. 

303. 인간은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것만을 받을 수 있고, 그가 그것을 위해 무엇인가를 희생한 것만 사용할 수 있지. 이것이 인간 본성의 법칙이야. 따라서 만약 중요한 앎이나 새로운 힘을 획득하기 위해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그 순간 자신에게 중요한 다른 것들을 희생해야만 해. 나아가 그것을 위해 포기한 만큼만 얻을 수 있지. 

그 밖에도 그의 마음 상태 때문에 일어나는 부차적인 어려움들이 많아. 그는 자신이 처한 무력한 상황을 깨닫는다면 모르는 채로라도 희생하는 데 동의할 거야.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쁠 거야. 왜냐하면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새로운 어떤 것, 혹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얻을 가능성이 생기니까. 그가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똑같은 상태로 남거나 심지어 더 악화되지."

306. 위대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자기희생과 끝없는 추구를 통해 진정한 앎에 도달해야만 해.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인생을 바꿀 수 있어. 인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앎이 없이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삶을 반복하게 되지. 인생의 더 큰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도 추구의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은 삶을 바꿀 가능성을 잃게 되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시내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난이도 : ★

 

1. 독특

 

지금까지 읽어왔던 소설들. 특히, 욕망과 성을 다룬 소설들은 인간의 성적 욕구를 애초부터 사실(진리)로 못박아둔다. 그런 후에 욕망을 어떻게 해소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한 해소 과정에서 권력의 상하관계가 형성(테스나 롤리타에서는 남성이 여성을...)되고, 이를 통해서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파멸케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에 집착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마리 다리외세크 누님의 <가시내>는 성과 욕망을 다루되. 어른의 시선이 아니라 소녀의 시선으로 접근한다. 솔랑주라는 소녀의 시선에는 호기심이 있었다. 그 이유는 소녀에게 2차 성징이 찾아오면서 신체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러한 갑작스런 변화에 호기심을 느끼는 모습을 담아낸다. 모든 것이 그것에서부터 출발함을 알린다. 호기심. 불온한 의도나 욕구를 충족하려는 의도는 한참 후의 얘기다. 첫 출발점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108. 삶의 이런 어리석음, 이 육체의 어리석은 필요, 이 모든 것의 체증. 그녀는 물이 담긴 오목한 손바닥에 얼굴을 담근다. 차가운 바위와 쇠가 느껴진다. 물이 그녀의 젖가슴 사이를 흐른다. 그 우스꽝스러운 형태. 무거워진 치마가 그녀의 넓적다리에 달라붙고, 그녀의 사타구니가 뒤집힌 와이자를 그린다. - 텅 빈 동시에 가득 찬, 탐욕스럽게 부풀어 오른 이 고집스러운 존재 - 이것에 이토록 골몰하는 사람이 그녀뿐일까?

 

2. 님펫

 

여기서 나보코프 형님이 만들어낸 님펫이라는 존재와 <가시내>의 솔랑주라는 인물의 존재가 만난다. 순수한 호기심. 그것이 이성에게 얼마나 큰 유혹인지. 그런게 누구를 유혹할 수 있는 무기인지조차. 아니. 유혹이라는 것 자체를 전혀 모른 채 한꺼번에 매력을 어내는 어린 여성에게 다 이미 알 만큼 알아버린 남자들은 욕정을 느끼는 것이다.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마리 누님은 모든 소녀의 의식이 완전히 열리지 않았음을 암시하고자 서술 방식을 특이하게 (흐름이 이어졌다가 끊어지듯이 불규칙하게. 단절하여)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먼 곳의 어떤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의 느낌이나 생각이나 대화들. 바로 그 순간의 무엇만 <가시내>에서는 서술하는 것에 충실한 것이다

 

3. 또래 세계

 

주인공의 신체 변화에 따른 호기심과 두려움. 그리고 그 과정을 공유하는 또래 집단의 모임(학교 생활)은 흥미로운 상황이 발생한다. 자신과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떨어진다는 것 자체가 고역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체적인 변화와 경험의 공유를 방해하는 요소가 등장한다. 다름 아닌 외부 요소로 인한 차별인데. 그것에는 부모의 경제적인 요소에 따른 편 나누기 정도가 될 것 같다. 가장 친한 친구가 로즈 였는데 둘 사이가 서서히 멀어지는 이유도 이것이고, 뤼르비드의 허물을 폭로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그랬다. 거기에 덧 붙여서 남자 문제까지 버무려진다. 그렇게 우정은... 사랑에 굴복한다. 

 

246. 사랑과 우정의 차이는, 사랑은 완벽한 합의인 반면, 우정은 사랑보다 강하지만 파괴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거야. 

 

4. 그녀의 남자. 과거와 미래

 

솔랑주는 두 남자 사이에서 고민한다.  어릴 때부터 그녀의 육아를 담당했던 비오츠와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아르노. 나는 그 둘 사이의 갈등을 보면서 솔랑주가 어떤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과거는 안정이요. 미래는 모험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비오츠는 솔랑주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로서 익숙함을 의미하고, 아르노는 솔랑주에게 여태껏 알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는 매개체라는 점에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아르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어린 소녀를 깨우치게 하는 데. 그것이 책에 적힌 것을 앵무새처럼 받아들여 되풀이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눈뜨지 못한 솔랑주에게 그 이야기들은 신선했다. 

 

아르노의 말 


"네 나이 땐 당연한 거야. 난 네 나이 때 스스로를 과대평가했어. 지금보다 사는 게 더 힘들었지. 우린 다른 사람들과의 관게를 통해서만 자신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야. 우리는 의식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아. 그래서 정해진 성격도 없고 결정된 것도 없었지. 이 말을 한 사람은 사르트르야. 네가 외롭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건, 그건 훌륭한 거야. 완전 훌륭하지..."

 

"너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게를 통해서만 너 자신을 규정할 수 있어. 확실히 그래, 이것도 사르트르가 한 말이야.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사람이지."

 

"잘 들어 봐. 넌 너 자신이 되어야 해. 그게 가장 좋아. 다른 사람들과 대면해서, 너 자신이 되라고. 사실 다른 사람들과 대면해서도 그게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야.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늘 선택할 수 있지. 항상 선택을 하고, 전적으로 자유로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선택에 의한 거야."

 

"사실 그 반대인지도 몰라. 말하자면 우린 자신만의 영화를 찍기 위해 대중을 필요로 하지. 그런데 대중은 영화를 필요로 하지 않아. 대중이 필요로 하는 건 <사실>이지. 네가 절망에 완전히 짓눌려 있지만 않다면 말이야. 헤겔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 우리의 의식 속에는 시간(연표)와 공간(너도 알지, 공간), 두 개의 매개 변수와 열두 개의 사각형, 우리가 개념들을 들여 보내는 열두 개의 범주가 있다고, 우리는 그렇게 앎에 다가갈 수 있다고."

 

이 말들이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은 소녀 솔랑주를 꾀기 위한 감언이설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의도가 느껴졌다. 

 

소설 속 삼각 관계에서 솔랑주의 선택이 이들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설정되지만. 각각의 관계. 솔랑주와 아르노. 그리고 솔랑주와 비오츠의 관계 속으로 파고 들게 되면 성적으로 자신의 만족보다 남성의 만족을 위해서 학대되는 여성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성행위에서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수동적인 장면의 묘사로서... 이것을 로즈 어머니의 자조섞인 한 마디를 통해 읽을 수 있었다. 

 

216. 네 어머니는 안목이 뛰어나지만 그걸 발휘하지 못해. 여자들의 비극이지. 너희 세대도 우리의 투쟁을 계속하고, 우리의 유산을 이어받아야 할 거야. 

 

5. 천재성

 

이 책을 권하는 데는 이 누님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문장을 옮겨보는 것 보다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

 

129. 그녀는 자신이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이 자기 주변을 둘둘 감싸는 환상을 본다. 그 환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난간위에 손을 올린 채 회전하고 난간 위의 손을 바라본다. 뭔가가 그녀와 벽 사이에서 진동한다. 마치 그녀가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것처럼. 그녀는 여기에 있다. 이제부터 그녀는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어디엔가 존재할 수도 없는 채로 계속 여기에 머물 것이다. 생존의 수단 같은 이 육체 안에. 그녀는 플레이모빌을 그러모은다. 그것을 손의 오목한 부분에 올려놓는다. 찰칵,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몸짓이, 손짓이 무한히 계속된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모습이 찍힌 영화를 보는 것처럼.

 

130. 그녀는 자기 방에 틀어박힌 채 파괴되고 있다. 그녀를 보는 눈도 없고, 그녀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증인도 없다. 그녀를 구성하는 원자들이 그녀를 떠난다. 먼지들이 유리창에 떠다닌다. 아주 작은 구름 하나, 빛줄기에 관통된 베일 하나. 

 

305. 이상해요. 난 퐁당 오 쇼콜라를 먹었고, 그건 이미 내 배속에 있어요. 그런데 혀에 여전히 그 맛이 느껴져요. 우리는 곧 식탁에서 일어날 거고, 내가 지금 아저씨에게 하고 있는 말은 가느다란 경계 같은 거예요. 과거와 마래 사이의 아주 가느다란 경계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거예요. 이해가 돼요? 바로 그거라고요! 우리가 경험하는 건 이미 과거에 속하고, 곧 미래가 와요. 글자 그대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알겠어요? 그 경험은 이미 끝났어요. 내가 먹은 크렘 앙글레즈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고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난이도 : ★

 

1. 정체모를 leadeR가 판치는 사회

 

우리 사회에 만연한 리더십 열기를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이야기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에이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무슨 말을 이렇게 많이 쓴 거야? 그냥 대학진학률이 80%가 넘는 사실. 수능 시험날 SKY 로고가 박힌 초콜릿, 빵, 우유 따위를 선물하는 것이 우리에게 숨어있는. 혹은 우리가 욕망하는 리더 DNA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아닐까?

 

한국에서 리더를 꿈꾸는 약 80%의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생산직이 아닌 관리직 혹은 전문직. 특히, 공무원이나 대기업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직접 생산하지 않고, 누군가가 생산한 것을 이어주거나 통제하는 직군으로 들어선다는 의미다

 

물론, 리더의 의미를 광범위하게 살피면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그리고 형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리더는 어찌되었건 리드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직접 생산하지 않고, 관리하고 싶은 희망 사항은 <호모도미난스>의 정신조종능력처럼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권력의지와 같은 의미이고, 이러한 권력욕이 우리 사회의 리더십 열기와 맞닿아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다. 

 

2. 과두정. 그리고 배가 많으면 산으로 간다는 정의론 


이에 맞서 <호모도미난스>의 작가 장강명 형님은 리더가 다수가 되는 과두형의 사회에 대한 우려를 제기한다. 리더라고 불리는 이들은 소설에서처럼 다른 사람을 물건 다루듯 쉽게 다룰수 있을지는 몰라도. 기본적인 것들을 직접 개발하거나 생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217. 환원숭이들은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환원숭이라소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갈취하는 것뿐입니다. 천 선생님은 발전소를 돌릴 수 있습니까? 지하철을 운행할 수 있습니까? 그보다 더 복잡한 정치와 경제시스템은 어떻고요? 환원숭이가 어느 이상으로 많아진다는 건 모든 제도와 조직이 무너진다는 걸 의미해요.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 서양에서 유행했었던 과두제라는 정치제도. 제각각 리더가 되기 위한 인간의 욕심이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이어진 산물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평민보다 조금 더 뛰어난 능력을 개발한 과두제 구성원들은 아마도 <호모도미난스>의 슈란이나 캄팻처럼 자신의 행동을 이런 방식으로 정당화하고 있었을 것이다. 

 

214.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권력의지가 있어요. 살아 있는 인간은 다른 사람이 자기 운명에 간섭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살아 있는 인간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정하고 싶어해요. 제가 정상이고, 류 박사님이나 시현씨가 비정상이에요. 저는 권력이 좋아요. 모든 사람이 다 그럴 거예요. 독재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걱정 마세요. 저는 다만 저 아닌 다른 누구도 독재자가 되게 놔두지 않겠다는 것뿐이에요. 그게 민주주의 아닌가요?

 

3. 독재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하는 행위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독재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아이러니. 

 

자신이 행하는 것은 사회 평화를 위해서 불가피하게 선택한 방식이라고. 그렇게 해야만 정의를 지킬 수 있다고 부르짖지만. 어쩌면 모두가 제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면서 신념을 담아 부르짖는 정의라는 것은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슈란과 캄팻을 저지한 시현을 바라보는 황쿤의 시선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317. 쿤은 웨이리원이나 안시현이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흰원숭이들의 세계에는 법이 없으며, 무법지대에서 그들이 행사하려는 강제력에 이런저런 장식을 달아봤자 폭력이라는 근본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법정'은 마분지로 만든 집처럼 조잡한 것이다. 변호인도 없고, 항소할 기회도 없으며, 양형 기준도 없다. 리원과 시현은 자기들이 가진 힘을 마분지로 제어해보려 한다. 그들은 통제라는 개념에 집착한다. 한 사람은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해서,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갖지 못한 정신조종능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4. 욕망을 쉽게 이루면...

 

40. 삶에 대한 의지고 세계에 대한 책임감이고 뭐고 간에 그저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일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욕구에 빠졌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호모도미난스> 세계의 리더들 역시 그들의 지위를 만끽하고, 그들의 욕구를 분출시키는 동시에 쉽게 그것을 해결했을 때 찾아오는 갑작스러운 자살충동의 기분은 다시금 되뇌어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삶의 의욕을 잃을 테니 말이다. 

 

41. 두터운 안개 속에 갇힌 듯한 답답함, 전후좌우뿐 아니라 위아래까지 구분할 수 없게 된 기이한 방향감각 상실, 끝없이 추락하는 듯한 나른한 기분, 자신과 주변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과 무한한 권태..

 

이 소설에서는 이러한 무기력함과 곧바로 이어지는 자살 행위를 정신조종능력을 부여하는 동력인 X유전자의 탈출로서 매우 흥미롭게 그려낸다. 쉽게 말해서 그들이 몸을 버리고 탈출하는 이유는 숙주가 기능을 다 한 셈이다. 즉, 욕망의 유전자는 일반적인 것이 아닌 이반적인 경로를 통해 우리는 지배한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인간의 선악론으로 읽을 때, 인간 외적인 것이 인간을 악하게 만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성선설적인 해석으로도 읽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이도 : ★

 

1. 근대 일본의 시류 속에서 물성화된 인간의 회의나 문명에 대한 비판적 태도

 

이 주장은 지금까지 읽은 소세키의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요소다. 근대화된 시대의 특징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인간을 경제적 수단의 하위개념으로 끌어내린다는 불안감에 맞서서 소세키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니힐리스트를 자처한다. 

 

<그 후>의 주인공인 다이스케가 생산적 활동을 하지 못하고, 의존적인 삶을 연명하는 것은 근대 일본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반항 의식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분명히 사회의 문제가 있다고 인정더라도 <그 후>의 다이스케의 행동을 무조건 시대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2. 그 후. 어떤 그 후인가? 

 

시점에 관련하여 여러 생각을 했다. 정리한 결과. 여기서 말하는 그 후는 잘못된 과거의 선택. 그 후. 라고 결론지어봤다. 

 

다이스케가 현실을 외면한 채. 내면 안에서 오만가지 잡념(이 책에서 그려지는 여러 의미있는 서사를 잡념이라고 표현하긴 사실 많이 애매하다.)과 싸우게 된 데에는 과거의 떳떳하게 행동하지 못했던 책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소세키가 주장하고자 했던 근대 일본사회의 부조리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문제라고 본다(다이스케의 경우로 봤을 때) 그렇기에 다이스케가 말하는 근대 일본의 문제(1의 내용)는 자기 정당화를 위한 투정 쯤으로 여겨졌다. 

 

미치요와 다아스케 간에 얽힌 과거사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지만,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추측건대. 다이스케는 과거에 미치요를 사랑했으나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회피했던 것 같다. 그것이 아니라면 친구를 위해서 어줍지도 않은 의협심을 발휘했던 것 같다. 후회를 남길 선택 이  꽤 긴 시간을 살아왔고. 시간이 흘렀음에도. 다이스케는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과거에서 해방되지 못한 다이스케. 너무 늦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사회 통념상 받아들여지지 않을것임을 불을 보듯 뻔하게 예감하지만 그럼에도 어긋난 인연을 바로 잡으려는 한 남자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의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로 했던 경제적인 지원을 바란다면 결코 꿈꿔서는 안될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사랑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사랑은 부적절한 사랑이었으니...) 아버지의 명을 따라서 정략적 결혼만 한다면 부족하지 않을 내일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이스케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제껏 그를 살펴주었던 가족과 친구들을 배신한 상당히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은 고려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와 판단에 따른 결론이니 말이다. 

 

하지만 책의 맨 첫 부분. 무기력하게 누워서 자기의 심장 소리만 듣고 있던 다이스케와 책의 마지막 부분. 자신이 내린 결정으로 인하여 변하게 될 두려움의 소용돌이 안에서 괴롭지만 그래도 문장의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다이스케의 모습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그와 같은 변화를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다이스케가 측은하게 여겨졌다. "꼭 그렇게 해야만 했나요?" 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 뿐이다. 


51. 다이스케에 따르면, 성실성이건 열정이건 완성된 상태로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돌과 쇳덩이가 맞부딪치면 불꽃이 튀듯이 상대에 띠라 마찰이 잘되었을 때 두 당사자 간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자신에게 내재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적 교류 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는 성실성이나 열정이 생길 리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