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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평화
존 놀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11월
평점 :
난이도 : ★ ★ ★
1. 일인칭
일인칭에는 무한한 행간이 숨어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일인칭은 그래서 불확실하다. 나오는 모든 것들은 조립하기에 따라 전혀 새로운 사실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화자가 말하는 모든 것이 착각에서 빚어진 거짓일수도 있다는 반전도 존재한다. 그런 짜릿한 개연성을 아직까지 기억하게 만드는 소설도 있다.
<분리된 평화>의 일인칭은 흥미롭게도 관찰자적인 시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라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요소는 따로 있고, 그것이 화자에게 미친 영향을 일인칭 시점을 통해 이야기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은 중심에서 약 30%정도 떨어진 곳까지를 말할 수 밖에 없다고 느꼈다. 바로 앞에 읽은 작품이 <죄와 벌>이었다는 점에서 이런 구성은 치명적이었다. 여러 인물을 넘나들고, 그 인물에 빠져들어서 인물의 100% 내면을 그려내려고 노력하는 작품이 <죄와벌>이라면. <분리된 평화>는 중심에 도달하지 못한 '나'라는 인물이 풀어놓은 70%의 감상에 의존하여 나머지 30%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수반된다.
이것은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찾아내야하는 커다란 과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런 노력 덕분에 아주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 맛이 있다는 점은 매우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전쟁의 나비효과.
이 소설의 주인공인 '진 포레스트'의 회상으로 부터 시작하는 이 소설은 어떤 두려움에 대하여 말한다.
5. 닫혀 있는 방 안의 텁텁한 공기처럼 그 나날들을 둘러싸고 꽉 채웠던 익숙한 두려움, 너무도 짙어서 나로서는 아예 감지하지도 못했던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한 번도 알거나 느껴보지 못했던 나는, 두려움의 존재 역시 인식할 수 없었던 것이다.
15년 세월을 거슬러 뒤돌아보면, 내 삶을 에워싸고 있던 그 두려움을 나는 이제 명확히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그동안 내가 무척 중요한 임무를 성취해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야 만 것이다.
두려움의 메아리를 나는 느낀다. 또한 불안정하고 억누를 수 없는 기쁨도 솟구쳐온다. 두려움의 동반자이자 그 이면, 이따금씩 어두운 하늘을 가로지르는 오로라처럼 그 나날들을 환히 밝혀주었던 기뿜이.
이 두려움은 '전쟁의 두려움'인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극한의 체험을 하는데서 찾아오는 육체적 정신적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전쟁의 체험이라는 학습된 이미지로부터 오는 심리적인 동요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설명하면 좀 더 이 두려움에 대하여 정확히 설명했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다시 말해서. 이 두려움은 직접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간접적인 두려움인데. (직접과 간접의 위력은 아시다시피 직접 >> 간접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데번이라는 공간에서는 서서히 두려움에 붙잡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에 없던 질투심이 생기고. 조금 더 경쟁적이 되고, 난폭해지고, 뭐 기타 등등...
이러한 공격적인 인간의 성향은 전쟁이 빚어낸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본연의 것들이라는 주장도 옳다고 여겨지지만. 존 놀스 형님의 <분리된 평화>에서는 전쟁에게 그 원인을 돌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점은 골딩의 <파리대왕>에서도 나타나는데. <분리된 평화>와 <파리대왕>은 방식에서 반대로 접근했다.
<분리된 평화> 같은 경우엔 "전쟁의 두려움이 이러한 비극을 야기시켰다." 라고 본다면 <파리대왕>은 "비극이 발생했다. 인간 본연의 문제일까? 아니다. 곱씹어보면 어른들의 전쟁이 일으킨 두려움이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것이다," 라고 말이다.
어쨌든 <분리된 평화>는 겨울에 볼 수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풍겨나는 쓸쓸한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회색빛의 두려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품은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3. 순수의 소멸
그런 분위기에 주눅들지 않은 한 존재가 있었다. '피니어스'라고 불리는 이 존재는 그런 의미에서 <분리된 평화>에서 전쟁과 함께 중심축을 이루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기존에 존재했던 관습에 물들지 않고,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인물로서. 개인적으로는 두려움이 침범하지 못하는 순수라는 상징으로 해석했다. 결국, <분리된 평화>는 전쟁의 나비효과로 인하여 순수가 소멸되는 과정을 곁에서 목격한 화자가 늘어놓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소멸하는 과정을 요약해보자.
피니어스는 육체적인 자신의 전성기를 잃어버린다. 전쟁의 나비효과라는 파도에 휩쓸린 인간의 불안감에 의하여....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힘을 잃은 대신 장애라는 굴레를 짊어진 그에게 전쟁에 물든 사회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마음대로 폐기처분한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현실을 어른들이 만들어낸 거짓부렁이라고 부정할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까지 그에게 닥쳐오는 차가움에 직면하는 순간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순수함을 붙잡을 순 없었다.
그것을 15년 후에 깨닫게 된 화자가 풀어놓는 이야기가 바로 <분리된 평화>였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외부의 압력. 그것도 아주 간접적인 압력에도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 인용구의 말처럼 그것이 정말로 적이기는 했더라면 덜 슬펐을 것이다.
236.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느 시점에 와서는 자신 안의 그 무엇이 주변 세계의 그 무엇과 격렬하게 충돌함을 깨닫곤 했다. 내 동기들은 전쟁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종종 그런 충돌을 겪었다. 자신을 압도할 만크 적대적인 어떤 존재가 이 세상에 자신과 함께 있음을 느끼게 되면서, 인격 속의 단순함과 통일성이 파괴되어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어진 것이다.
오직 피니어스만이 그런 충돌을 벗어났다. 그는 남다른 활력을, 자신에 대한 드높은 신뢰를 품었고, 평온하고 자연스럽게 애정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지녔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그를 구원했다. 그가 집에서 성장하는 동안에도, 데번에 있는 동안에도, 심지어 전쟁 중에서조차 아무것도 그의 조화롭고 자연스런 통일성을 파괴하지 못했다. 그것 결국에 파괴한 것은 나였다.
238. 오직 피니어스만이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피니어스만이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끔찍한 충격을, 적을 목격하는 일을 다른 어딘가에서 겪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강박적으로 방어를 시작하고, 특정한 사고방식을 통해 자신이 맞닥뜨렸다고 생각한 악의에 대응하려고 했다. 그들의 태도는 세상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이렇게 선언하는 듯했다.
"아시겠지만 나는 그저 한 마리 개미일 뿐입니다. 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난 당신의 그런 적의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러즈버리 선생 같은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떻게 감히 이런 것이 나를 위협한단 말인가. 나는 이런 대우를 받기엔 훨씬 뛰어난 사람이란 말이다. 난 이 상황을 극복할 테다."
쿼큰부시처럼, 언제 어디서든 무턱대고 대들며 덤벼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브링커처럼 부주의하고 일반화된 분노를 키우는 사람들도 있었고, 래퍼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감싼 모호한 구름 속에서 나왔다가 오직 공포만을, 자신이 항상 두려워했던 그대로의 형체를 맞닥뜨리고 나서 맞서싸우기를 완전히 포기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피니어스만을 제외하고, 그들 모두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적에게 맞서 마지노선을 구축했다. 그들이 전선 너머로 보았더고 생각한, 그러나 결코 전선에서 그들을 공격하진 않았던 적에게, 정말로 적이 그들을 공격하긴 했다면. 아니, 그것이 정말로 적이기는 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