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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14.
살인의 시대였다. 지루한 홍수처럼 전쟁이 집단적인 광기를 인간의 정념 구석구석에, 몸의 빈틈없는 구석구석에, 숲이며 도로, 하늘에 범람시키고
있었다. (중략) 거리에서 미치광이 어른들이 광분하고 있던 그 시대에, 온몸의 피부가 매끌매끌하고 밤색으로 빛나는 솜털밖에 없는 이들,
대수롭잖은 악행을 저지른 이들, 그중에 비행소년이 될 경향을 지녔다고 판정되었을 뿐인 이들을 줄곧 감금하는 기묘한 정열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록해둘 만하리라.
감화원(소년원)에
붙들린 소년들. 낯선 공간으로의 쉼 없는 이동, 마을 주민들의 무관심과 푸대접의 연속, 탈주. 그리고 동료들의 기다림. 마지막 종착지에서의
고압적인 어른들.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소설의 첫 장은 나로 하여금 너무나 갑작스럽게 전쟁의 파편과 그것이 튄 주변부로 몰아넣었다.
미처,
준비되지 않았기에.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는 <읽는 인간>에서 보여준 자상함과는 달리. 불친절한 작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주제가 명확한 오에 겐자부로 형님의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는 내가 언제
불친절했었느냐는 듯. 나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2.
비열한 어른을 향한 분노와 반항
213.
"저놈들은 서로를 죽여." 리가 증오에 가득 차서 말했다. "우린 숨겨주었는데 똑같은 일본 사람끼리 서로를 죽여. 산으로 도망친 녀석을, 헌병과
순경이, 죽창을 가진 농민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막다른 곳으로 내몰아 찔러 죽여. 저놈들이 하는 짓거리는 도통 알 수가
없어."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에 묘사된 기성세대는 한없이 비겁하고 한편으로는 잔인했다. 전염병이 도는 마을의 어른들은 감화원에서 이송된 소년들이
도착하자마자 방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그들만 마을에서 도망친다. 그뿐 아니라 탈출로를 막고, 감시보초를 세워서 소년들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86.
광차의 궤도가 가로막혀 있다는 건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갇힌 골짜기 마을을 겹겹이 중첩해 둘러싼 여러 마을 농민들의 결집된 적의,
그들의 완강하고 두꺼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벽을 가리켰다. 우리에겐 그것에 맞서, 그곳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가는 것이 분명히 절망적으로
불가능했다.
눈발이
휘날리는 추운 겨울, 전염병이 도는 극한의 상황에서 소년들은 커다란 의견의 충돌 없이 생존을 위해서 협력한다. 이송된 소년들과 그 열 다섯
명의 소년 가운데 한 사람인 '나'는 마을 너머에 사는 조선인 소년 '리' , 전쟁이 싫어서 탈영한 '군인', 미처 마을을 떠나지 못했던
'소녀'. 이 세 명의 타인을 그 마을의 어른처럼 배척하거나 공격하지 않았다.
3.
고비
오에
겐자부로 형님은 '나'의 동생을 순수함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읽는 인간>의 '수상한 이인조'가 암시하는 그런 역할의 부여인
듯싶었다.
동생은
마을에서 살아있는 강아지를 발견하고, '레오'라는 이름을 붙인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은. 동생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
이렇게 동생과 정이 들어버린 '레오'. 난폭한 성격의 강아지로 보이지 않던 '레오'는 '나'와 정을 나눈 '소녀'의 손목을 물어뜯는 대형 사고를
친다.
그
때문이었을까? 소녀는 감염 증세를 보인다. 전염병은 없다고 믿었던 소년들. 마을 사람들이 지레 겁먹고 오해했던 것이라며 안심했던 상황에서 드러난
전염병의 민낯. 이런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감염의 원인인 '레오'를 제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이
소설에서 가장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존재이자 순수의 상징 '동생'과 전염병의 근원을 제거하려고 하는 '소년들' 과의 갈등. 이 갈등은 결국,
'레오'가 소년들의 몽둥이에 맞아 죽음으로서 해결되지만, 소년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야만성을 환기시키는 작용을 한다.
화자
'나'는 그 갈등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레오'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순수한 동생은 커다란 마음에 상처를 입고, 말 없이 무리를 떠난다. 소녀
또한 소녀를 살리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했던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이른다.
뭉쳐있던
그들에게 발생하는 균열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4.
아이들을 다루는 어른의 필살기. 솎아내기
어른들은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되었다 싶었던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촌장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말라며 협박한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 이유로 조만간 다른 소년들이 마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협박이
통하지 않자 '어른'은 회유를 통해서 그들을 갈라놓는다. 탈영병은 동물을 사냥하듯이 죽창을 찔러 상처입힌 후 헌병대에 넘기고, 조선인 소년
'리'에 대해서는 그들의 가족의 안전을 위협함으로써 입을 막고, 나머지 13명의 소년에게는 배불리 먹을 음식을 제공함으로써 돌려세운다.
마지막으로
굴복하지 않은 한 사람이 바로 '나' 였다.
그런
그에게 촌장은 이야기한다.
228.
"알아? 너 같은 놈은 어릴 때 비틀어 죽이는 편이 나아. 칠푼이는 어릴 때 해치워야 돼. 우린 농사꾼이야. 나쁜 싹은 애당초 잡아
뽑아버려.(중략) 알겠어? 응? 우린 말이야. 너를 벼랑으로 밀어 떨어뜨릴 수도 있어. 널 죽인다 해도 누구 한사람 그걸 탓할 놈은
없어"
(중략)"너희들,
내가 이놈을 죽이면 그걸 순경한테 일러바칠 사람 있어?"
목을
꽉 졸려 뒤로 몸이 젖혀진 내 앞에서 동료들은 겁먹은 채 입을 꾹 다물어 나를 배반했다.
230.
"우린 너를 죽일 수도 있지만 살려주겠다. 넌 오늘 밤 안으로 마을에서 나가. 그리고 아주 멀리 도망쳐. 경찰에 신고해봤자 누구 한 사람 널
위해 증언할 놈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둬. 넌 감화원으로 되돌아가는 한, 탈주한 벌을 받게 된다는 걸 잊지마."
5.
표류하는 존재. 솎아내어진 '나'
231.
나는 갇혀 있던 막다른 구렁텅이에서 밖으로 추방당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바깥에서도 나는 여전히 갇혀 있을 테지. 끝까지 탈출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 안쪽에서도 바깥쪽에서도 나를 짓이기고 목을 조르기 위한 단단한 손가락, 우람한 팔은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다.
232.
나는 흉포한 마을 사람들로부터 달아나 밤의 숲을 내달려 나에게 가해지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맨 먼저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나에게 다시 내달릴 힘이 남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녹초가 되어 미친듯 분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