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리라
조정현 지음 / 답(도서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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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애소설?


조정현의 <바다의 리라>는 기회가 있을 때 한국 문학을 많이 읽어보자 결심하고 고른 작품이다. 그렇게 고른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달콤하지만 슬픈 연애 소설이다. 그중에서도 첫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소설이다.


그런데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만이 하나 생겼다. 연애소설인데 대체 표지가 왜 이럴까 싶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유은기의 등장이 너무나 눈부셨기 때문이다. 오디션에서 제 실력을 발휘해보지도 못하고 돌아선 우울한 여 주인공. 주다인에게 나타난 은기는 마치 귀여니의 소설 <그놈은 멋있었다>의 남자 주인공처럼 매력적인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다음 작가의 발견. 7인의 작가전 선정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출간 전에 이 소설의 161페이지 정도만 먼저 공개되었는데. 만약 그 부분까지만 읽은 독자라면 대체 왜 이 작품이 7인의 작가전 선정작일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거기까지 읽었을 때, 나 역시 이 소설. 끝까지 읽어야 할까 고민했을 정도로 아주 평범한 학원 로맨스 소설이었다.


그런 판타지가 덕지덕지 붙은 로맨스 소설이라는 생각에, 표지까지 이 모양이니 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 매력을 알지 못하는 소녀. 작고 말라빠진 소녀. 연약하고 수줍은 소녀 주다인이 키도 크고 잘 생긴. 그리고 재능도 뛰어난 완벽한 유은기를 만나고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은 솔직히 말해서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2. 연애소설!


조정현 작가의 <바다의 리라>는 다른 그렇고 그런 연애 소설과는 다른 반전의 매력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반전 자체도 훌륭했지만, 소설에서는 온전히 서술되지 않은 은기의 삶. 소설의 반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은기가 노력해온 나날에 숨은 마음이 너무나 공감이 갔다. 은기의 삶. 비록, 포장지는 다른 사람의 것이었지만, 내용물은 온전히 은기의 것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그는 그녀를 생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이 포장지에 얽힌 이야기는 이 소설을 무궁무진한 각색이 가능한 작품으로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했다. 그것이 악한 의도로 변질되어 은기와 다인 두 사람 모두를 차가운 늪으로 빠뜨릴 수도 있고, <바다의 리라>처럼 최소한 사랑하는 여자의 빛을 되찾아 주는 결말로 마무리될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둘 다 빛나는 존재가 될 수도 있고 말이다.   


나는 은기의 포장지에 얽힌 모든 것들에 공감했다. 은기가 훗날 첫사랑인 다인과 재회했을 때, 그녀에게 정말 완벽한 남자로 보이고 싶고, 또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꽃피울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주고 싶은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린 시절 천재 소리를 들을만큼 재능이 뛰어난 존재였지만 지금은 너무나 초라해져서 자신감을 상실한 다인. 그런 그녀의 은기를 향한 사랑이 깊어가면 갈수록 다인은 어린 시절 가지고 있던 찬란함을 되찾아가지만, 반대로 환상적인 은기의 겉모습에 감추어왔던 모습이 서서히 공개되는 과정도 너무 인상적이었다.


새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된 채, 방치되었던 가족도 돌봐야 했고, 사랑도 과거와 어린 나이에 만난 한 천재 소녀의 밝은 빛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어둠을 감추는 동시에, 또 자신이 다인에게는 또 하나의 빛으로 보여질 수 있을 정도의 밝은 빛을 다른 통로를 통하여 자가발전 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3.

<바다의 리라>는 다인과 은기만을 위한 소설은 아니다. 은기와 다인을 상징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 이야기에도 관심이 쏠리고, 은기를 똑같이 닮은 여인 레이의 마음에도 반했고, 있고, 친오빠를 끔찍하게 사랑하여. 은기가 상처받을 것을 걱정하는 동시에 동생보다 연인을 더 사랑하는 오빠를 질투하는 동생 은서의 마음도 읽을 수 있었다.  


4.

<바다의 리라>의 각 장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작은 폰트로 누군가의 내면을 서술하는데. 이 문장이 정말 매력적이다. 다인의 내면을 서술한 문장이 대다수인데. 이것은 이 책을 두 번 읽게 만드는 이유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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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0
서유미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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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행나무 노벨라


서유미 작가의 <틈>은 젊은 감성을 위한 테이크아웃 소설 시리즈라는 컨셉으로 출간된 작품 중 하나다. 이 시리즈는 손바닥 크기100페이지 남짓한 짧은 분량이 특징인데. 개인적으로는 일반적인 소설에서 분량만 얇아져서 서유미 작가의 날카로운 문장을 더 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2. 불륜. 신뢰 관계에서 벌어진 틈


45.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건, 그가 언젠가부터 자신이 있는 곳과 행선지와 동행인을 속였고 마음을 숨기거나 다른 마음을 품은 채 살았다는 뜻이다.


5동안 연애를 했던 애인과 헤어졌을 때,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온 남편이 그녀를 배신하게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 횡단보도 앞. 정지선을 넘은 것도 모르고 정신을 팔고 있는 차. 그 차는 다름 아닌 남편의 차였다. 그런데 차 안에서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자리에는 유난히 목선이 아름다운 어떤 여인이 그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여인의 목선이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여자는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두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그녀의 외형은 처녀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 그녀의 겉모습은 누가 봐도 아줌마였다. 아줌마라고 불리는 것이 처녀로 불리는 것보다 훨씬 더 익숙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 변화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애써 정당화했다.


45. 따져보면 원인은 도처에 있다. 때로는 존재의 이유조차 파멸의 원인이 된다. 멀쩡하게 매달려 있던 줄이 갑자기 끊어지거나 바닥이 무너지기 전에는 그것이 얼마나 허약하고 허술한지 깨닫지 못한다. 틈이 벌어지고 부서지고 깨진 뒤에야 그게 애초에 견고하지 않고 연약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랑은 얼마나 훼손되기 쉬운가. 믿음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누군가 정신 차리라고 여자를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사실 흘러버린 세월과 그에 따라 뚱뚱해진 체형이 남편이 그녀가 아닌 다른 여인에게 미소를 흘리는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독한 아픔과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그녀는 그녀 자신을 학대하며 또 다른 원인을 찾아냈을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남편의 잘못이었다. 육아와 살림을 모두 떠맡기는 것도 모자라 젊음까지 관리하라니. 너무 가혹했다.  


3. 동병상련. 같은 틈을 공유한 사람들


69. 누군가에 대해 알게 되는 건 길이가 아니라 깊이라는 걸 시간이 아니라 순간이라는 걸 절감했다.


정윤주. 미호와 지유의 엄마지만. 소설에서는 작가에 의해 '여자'라고 지칭된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남편의 불륜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런 자신을 제어할 방법은 아무리 찾아봐도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그녀를 애처롭게 보이게 했다.  


<틈>에서 목욕탕(찜질방)은 그녀와 같은 상처받은 존재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한편, 흡연 문제로 남편과 다툼이 발생하고, 그로 인하여 틈이 벌어진 민규 엄마 김승진은 목욕탕에 있는 여자 흡연실에서 끽연의 자유를 만끽한다, 윤서엄마 임정희라는 인물은 민규 엄마의 소개로 친해진다. 이 세 람의 만남은 남편과 남을 헐뜯는 삭막한 사회에 지친 영혼들의 만남이었고, 동시에 부부생활의 벌어진 틈을 공유한 사람들끼리의 만남이었다.


78. 찜질방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흘리는 다양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땀 흘리는 것보다 지저분한 얘기를 주고받는 일에 관심이 더 많았다. 동창이나 친척의 남편, 시어머니, 친구 아들, 친구 딸에 대한 자랑과 험담은 가장 흔한 소재였다. 중간 중간에 누군가 105동 여자 알지? 110동 반장 말이야, 하고 미끼를 던지면 동네 여자들은 살진 잉어들처럼 달려들었고 요리조리 물어뜯었다. 그것이 진실인지 루머인지의 여부보다 먹음직스러운가, 뜯어 먹을 게 많은가가 더 중요했다. 그런 얘기는 솔깃하고 흥미진진했지만, 얘기의 현실성보다 말하는 사람의 욕망만 덕지덕지 들러붙어서 찐득하게 흘러내렸다.


아줌마들이 모이면 보통 이런 안 좋은 소문들을 나눔으로써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녀들은 그런 영양가 없는 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이 세 여인은 뒷담화가 성행하는 시간과 그것을 쏟아내는 사람과 거리를 두었기에 만날 수 있었다. 자기 자녀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의 어머니로 얼굴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는 동질감이 그녀들을 한순간 가깝게 했다.


4. 벌어진 틈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102. "남자 다 거기서 거기예요. 아주 괜찮은 놈, 천하의 나쁜 놈만 빼면 그놈이 그놈이야. 다들 치명적인 흠 하나씩은 있다고요. 여자도 그렇지만. 그게 내가 견딜 수 있는 거냐. 없는 거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결론을 말하자면, 끙끙 앓던 고민을 세 사람의 비밀로 공유한다. 이로써 심리적으로 위안을 얻는다. 미호와 지유의 엄마인 정윤주는 남편의 서재를 뒤져서 불륜의 흔적을 찾고, 혼자 아파하는 어리석은 짓은 이제 그만둔다. 그녀는 남편을 불러내어서 직접 얼굴을 보고, 그 여자가 누구인지 물어볼 것 같았다. 


민규 엄마처럼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맞바람을 필 것 같지는 않았다. 민규 엄마는 좀 더 쾌락에 조금 더 큰 비중을 둔 인물이고,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틈>이라는 소설은 엄연히 정윤주의 삶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봤을 때, 민규 엄마는 그저 조력자의 역할이고, 그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민규 엄마 정도의 개방적인 성격이 필요하다고 서유미 작가는 판단했던 것 같다. 반면에 윤서 엄마의 역할은 굉장히 미미하다. 둘보다는 셋이 나을 것 같아서 억지로 끼워넣은 느낌이랄까? 윤서 엄마 한 사람으로 모든 여성을 담아내려는 듯한 의도가 보였다. 


정윤주와 임정호의 만남 이후에 어떤 전개가 이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녀가 좋아서 먼저 접근했던 임정호라는 자상한 남자는 과거의 임정호일 뿐. 현재의 임정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단서는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틈과 그가 생각하는 틈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는 정도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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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미니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전행선 옮김 / 북플라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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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택


모든 범죄 소설이 그렇듯이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소설은 시작된다.

<이니미니>에서도 살인 사건은 발생한다. 그것도 연쇄적으로... 그것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불특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살인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살인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은 이 소설의 타이틀 롤인 헬렌 그레이스에게만큼은 불특정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살인자는 그녀를 절대로 유능한 경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를 시험에 들게 한다.


<이니미니>는 혼인을 앞둔 남녀, 회사동료, 엄마와 딸의 관계처럼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제물로 선택한. "어느 것을 고를 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딩동댕" 이것은 악마에겐 분명히 재미있는 놀이의 하나이자. 동시에 인간의 존재를 실험하는 시험이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만 살아남는다. 물론, 그것은 남은 자들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선택을 하지 못하면 둘 다 죽어야 했다.  


패륜적인 범죄에 누군가 희열을 느낀다. 자신과 친밀한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죽는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살았다고 해도 그것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그가 노리는 것이었다. 죽을때까지 그 날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


170. 희생자보다 총을 쏜 사람이 궁극적으로 더 고통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생존자가 평생 떠안고 갈 심리적 외상이 목적이고 기쁨이었을까?


그의 실험. 그의 즐거운 놀이는 결과적으로는 실패한다. 살기 위해서 서로를 죽이려 들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엄마는 혼자만 살기 위해, 바닥에 놓인 총으로 딸을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헬렌 그레이스가 마음을 준 마크는 부상당한 자기보다는 찰리를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그녀를 무사히 탈출시킨다. 살인자의 오만함을 상징하는 찰리의 탈출은 그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알렸다.  


2. 악마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이니미니>에 간간히 등장하는 살인자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의 가정이 정상적이 아니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도박과 마약에 빠진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하고, 삼촌이라고 불리웠던 주위의 남성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어린 그녀의 반복된 하루.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스스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나약한 그녀의 최초의 정당방위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법은 그녀에게 25년의 세월 동안 감옥에서 지낼 것을 명했고, 그녀가 희생해서 인간다운 삶을 되찾아주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는 마치 과거를 완전히 잊은 듯. 그녀를 단 한번도 찾지 않고, 철저히 외면했다.


헬렌. 그녀도 물론, 그렇게 파괴된 가정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는 그 사건 때문에 정상적인 사랑을 하지도 못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해질 때마다, 샵을 찾아가 자신에게 채찍질(마조히즘)을 해달라고 울부짖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니미니>는 그렇게 자신을 잠시동안 나락으로 떨어뜨린다고 해서, 그녀가 숨기고 싶었던 과거가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헬렌은 자신이 경찰이 된 후부터 지금까지 일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왜냐하면, 헬렌은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다시 생겨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헬렌이 과거를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헬렌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은 매듭짓지 못하고, 온 상처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다.


그런데 악의에 가득 찬 누군가는 그런 그녀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이해의 결여로 인하여 누군가가 그녀가 해결해온 방식에 반대표를 던졌다.


39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살면서 수도 없이 여러 번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야 할지. 아니면 아예 깊숙이 묻어버려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사랑하는 연인 간에, 직장에서, 가족과 친구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드러낼 준비가 되었는지 결정해야 한다.


헬렌은 자신이 만들어낸 우상의 이미지가 곧 산산조각이 나버릴 위기에 놓여 있음을 직감했다. 이제는 삶 속으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위험에 처한 목숨을 구해내야 할 때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과거 속에 깊이 묻어 두었던 악몽 같은 사건과 결정들을 끌어냄으로써 커다란 희생을 치르게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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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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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 살인의 시대였다. 지루한 홍수처럼 전쟁이 집단적인 광기를 인간의 정념 구석구석에, 몸의 빈틈없는 구석구석에, 숲이며 도로, 하늘에 범람시키고 있었다. (중략) 거리에서 미치광이 어른들이 광분하고 있던 그 시대에, 온몸의 피부가 매끌매끌하고 밤색으로 빛나는 솜털밖에 없는 이들, 대수롭잖은 악행을 저지른 이들, 그중에 비행소년이 될 경향을 지녔다고 판정되었을 뿐인 이들을 줄곧 감금하는 기묘한 정열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록해둘 만하리라.

 

감화원(소년원)에 붙들린 소년들. 낯선 공간으로의 쉼 없는 이동, 마을 주민들의 무관심과 푸대접의 연속, 탈주. 그리고 동료들의 기다림. 마지막 종착지에서의 고압적인 어른들.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소설의 첫 장은 나로 하여금 너무나 갑작스럽게 전쟁의 파편과 그것이 튄 주변부로 몰아넣었다.


미처, 준비되지 않았기에.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는 <읽는 인간>에서 보여준 자상함과는 달리. 불친절한 작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주제가 명확한 오에 겐자부로 형님의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는 내가 언제 불친절했었느냐는 듯. 나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2. 비열한 어른을 향한 분노와 반항


213. "저놈들은 서로를 죽여." 리가 증오에 가득 차서 말했다. "우린 숨겨주었는데 똑같은 일본 사람끼리 서로를 죽여. 산으로 도망친 녀석을, 헌병과 순경이, 죽창을 가진 농민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막다른 곳으로 내몰아 찔러 죽여. 저놈들이 하는 짓거리는 도통 알 수가 없어."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에 묘사된 기성세대는 한없이 비겁하고 한편으로는 잔인했다. 전염병이 도는 마을의 어른들은 감화원에서 이송된 소년들이 도착하자마자 방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그들만 마을에서 도망친다. 그뿐 아니라 탈출로를 막고, 감시보초를 세워서 소년들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86. 광차의 궤도가 가로막혀 있다는 건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갇힌 골짜기 마을을 겹겹이 중첩해 둘러싼 여러 마을 농민들의 결집된 적의, 그들의 완강하고 두꺼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벽을 가리켰다. 우리에겐 그것에 맞서, 그곳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가는 것이 분명히 절망적으로 불가능했다.


눈발이 휘날리는 추운 겨울, 전염병이 도는 극한의 상황에서 소년들은 커다란 의견의 충돌 없이 생존을 위해서 협력한다. 이송된 소년들과 그 열 다섯 명의 소년 가운데 한 사람인 '나'는 마을 너머에 사는 조선인 소년 '리' , 전쟁이 싫어서 탈영한 '군인', 미처 마을을 떠나지 못했던 '소녀'. 이 세 명의 타인을 그 마을의 어른처럼 배척하거나 공격하지 않았다.  


3. 고비


오에 겐자부로 형님은 '나'의 동생을 순수함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읽는 인간>의 '수상한 이인조'가 암시하는 그런 역할의 부여인 듯싶었다.   


동생은 마을에서 살아있는 강아지를 발견하고, '레오'라는 이름을 붙인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은. 동생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 이렇게 동생과 정이 들어버린 '레오'. 난폭한 성격의 강아지로 보이지 않던 '레오'는 '나'와 정을 나눈 '소녀'의 손목을 물어뜯는 대형 사고를 친다.


그 때문이었을까? 소녀는 감염 증세를 보인다. 전염병은 없다고 믿었던 소년들. 마을 사람들이 지레 겁먹고 오해했던 것이라며 안심했던 상황에서 드러난 전염병의 민낯. 이런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감염의 원인인 '레오'를 제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이 소설에서 가장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존재이자 순수의 상징 '동생'과 전염병의 근원을 제거하려고 하는 '소년들' 과의 갈등. 이 갈등은 결국, '레오'가 소년들의 몽둥이에 맞아 죽음으로서 해결되지만, 소년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야만성을 환기시키는 작용을 한다.


화자 '나'는 그 갈등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레오'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순수한 동생은 커다란 마음에 상처를 입고, 말 없이 무리를 떠난다. 소녀 또한 소녀를 살리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했던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이른다.


뭉쳐있던 그들에게 발생하는 균열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4. 아이들을 다루는 어른의 필살기. 솎아내기


어른들은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되었다 싶었던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촌장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말라며 협박한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 이유로 조만간 다른 소년들이 마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협박이 통하지 않자 '어른'은 회유를 통해서 그들을 갈라놓는다. 탈영병은 동물을 사냥하듯이 죽창을 찔러 상처입힌 후 헌병대에 넘기고, 조선인 소년 '리'에 대해서는 그들의 가족의 안전을 위협함으로써 입을 막고, 나머지 13명의 소년에게는 배불리 먹을 음식을 제공함으로써 돌려세운다.  


마지막으로 굴복하지 않은 한 사람이 바로 '나' 였다.

그런 그에게 촌장은 이야기한다.


228. "알아? 너 같은 놈은 어릴 때 비틀어 죽이는 편이 나아. 칠푼이는 어릴 때 해치워야 돼. 우린 농사꾼이야. 나쁜 싹은 애당초 잡아 뽑아버려.(중략) 알겠어? 응? 우린 말이야. 너를 벼랑으로 밀어 떨어뜨릴 수도 있어. 널 죽인다 해도 누구 한사람 그걸 탓할 놈은 없어"


(중략)"너희들, 내가 이놈을 죽이면 그걸 순경한테 일러바칠 사람 있어?"

목을 꽉 졸려 뒤로 몸이 젖혀진 내 앞에서 동료들은 겁먹은 채 입을 꾹 다물어 나를 배반했다.


230. "우린 너를 죽일 수도 있지만 살려주겠다. 넌 오늘 밤 안으로 마을에서 나가. 그리고 아주 멀리 도망쳐. 경찰에 신고해봤자 누구 한 사람 널 위해 증언할 놈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둬. 넌 감화원으로 되돌아가는 한, 탈주한 벌을 받게 된다는 걸 잊지마."

5. 표류하는 존재. 솎아내어진 '나'


231. 나는 갇혀 있던 막다른 구렁텅이에서 밖으로 추방당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바깥에서도 나는 여전히 갇혀 있을 테지. 끝까지 탈출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 안쪽에서도 바깥쪽에서도 나를 짓이기고 목을 조르기 위한 단단한 손가락, 우람한 팔은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다.


232. 나는 흉포한 마을 사람들로부터 달아나 밤의 숲을 내달려 나에게 가해지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맨 먼저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나에게 다시 내달릴 힘이 남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녹초가 되어 미친듯 분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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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인문학 - 제자백가 12인의 지략으로 맞서다
신동준 지음 / 이담북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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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세와 난세

신동준 선생의 <난세의 인문학>은 치세와 난세를 분리하여, 치세 때의 정치와 난세 때의 정치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간단히 요약하자면, 치세와 난세의 정도에 따라서 덕치(민주주의)와 법치(공화주의)를 적절히 조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88. 천하가 태평할 때는 위정자들이 맹자의 왕도 주장을 좇아 걸간의 승려처럼 면벽수도를 할지라도 크게 탓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천하가 들썩이는 난세의 시기다. 이때마저 현실과 동떨어진 형이상의 탐구에 침잠한 나머지 맹자처럼 '하필왈리' 운운하는 것은 나라를 통째로 적에게 넘기는 짓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조선은 총 한 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한 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맹자의 왕도 이념에 기초한 성리학의 폐해가 이토록 컸다.    

2. 치세? No,난세! Yes.

경제 불황의 연속. 부의 양극화.

우리의 인생에 과연 치세의 시기가 있을까?

나는 지금 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 전체에서도 치세보다는 난세가 훨씬 빈번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신동준 선생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마키아벨리즘을 세상을 뒤엎은 정치 사상으로 평가하는 것과. 맹자의 사상을 공자와 순자의 보다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성리학의 폐단을 여러번 강조하는 것으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한편, 난세에 아주 잘 어울리는 후흑학을 소개한다.

83. <후흑학>에 나오는 <면후술>과 <침흑술>. '면후'는 낯가죽이 두껍고, '심흑'은 속마음이 시꺼먼 것을 뜻한다. 당시 이종오는 중국의 전 인민이 면후술과 심흑술을 결합한 후흑술로 무장해야만 서구 열강의 침탈로부터 중국의 독립을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난세의 인문학>이 추구하는 리더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를 첫번째 조건으로 삼지는 않는다. 리더의 탄생과정은 민주적이 되건 강압적이 되건 그다지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난세에는 의사결정이 빠른 제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철인(哲人, 철학을 함양한 지식인)'이 아니라 후흑학을 공부해서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고, 자연스러운 위압감이 풍기는 강력한 철혈(鐵血)의 리더를 의미한다.

3. 난세에 대처하는 기업의 자세

권력자에게 취업청탁을 받게 되면 기업은 쾌재를 부른다. 그들은 그 순간 바로 '을'의 자세로 자신을 낮추고, 권력자의 부탁을 마지못해 들어주는 척한다. 이 '현대판 음서제'의 모든 원인은 권력자에 있으며, 그들 또한 피해자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기업 입장에서는 권력자의 자식을 자신의 회사에 취업시키는 것보다 더한 이익은 없다. 기업에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혹은 기업에게 유리한 법안은 발의하거나, 불리한 법안은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 기업에 보호막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의 딸, 혹은 아들과 같이 하는 편이. 몇  지속적으로 교육시켜야 하는 신입사원 한 명을 뽑는 것보다 훨씬 더 이득인 것은 분명하다.

난세의 기업의 처세술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사 한꼭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영악하다. 난세의 개인보다. 난세의 조직이 더 무섭다.

시사저널 기사 전문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66190

양비론적인 측면에서 공평한 사례.

http://pastacafe.blog.me/220454342113

4. 평가는 유보


이 책에 담긴 지식의 방대함에 존경을 표한다. 그것이 지혜가 되지 않고, 술수가 되어서 아쉽긴 하지만... 분명히, 서브 텍스트로 충분히 참고할 정도의 충분한 깊이가 있는 글이며, 미처 몰랐던 중국과 일본 사상의 변화 과정도 소개한다. 특히, 일본 정치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지식이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12인의 사상가를 공부할 때, 들춰볼 날이 분명히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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