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0
서유미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은행나무 노벨라


서유미 작가의 <틈>은 젊은 감성을 위한 테이크아웃 소설 시리즈라는 컨셉으로 출간된 작품 중 하나다. 이 시리즈는 손바닥 크기100페이지 남짓한 짧은 분량이 특징인데. 개인적으로는 일반적인 소설에서 분량만 얇아져서 서유미 작가의 날카로운 문장을 더 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2. 불륜. 신뢰 관계에서 벌어진 틈


45.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건, 그가 언젠가부터 자신이 있는 곳과 행선지와 동행인을 속였고 마음을 숨기거나 다른 마음을 품은 채 살았다는 뜻이다.


5동안 연애를 했던 애인과 헤어졌을 때,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온 남편이 그녀를 배신하게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 횡단보도 앞. 정지선을 넘은 것도 모르고 정신을 팔고 있는 차. 그 차는 다름 아닌 남편의 차였다. 그런데 차 안에서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자리에는 유난히 목선이 아름다운 어떤 여인이 그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여인의 목선이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여자는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두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그녀의 외형은 처녀 때와는 사뭇 달라졌다. 그녀의 겉모습은 누가 봐도 아줌마였다. 아줌마라고 불리는 것이 처녀로 불리는 것보다 훨씬 더 익숙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 변화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애써 정당화했다.


45. 따져보면 원인은 도처에 있다. 때로는 존재의 이유조차 파멸의 원인이 된다. 멀쩡하게 매달려 있던 줄이 갑자기 끊어지거나 바닥이 무너지기 전에는 그것이 얼마나 허약하고 허술한지 깨닫지 못한다. 틈이 벌어지고 부서지고 깨진 뒤에야 그게 애초에 견고하지 않고 연약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랑은 얼마나 훼손되기 쉬운가. 믿음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누군가 정신 차리라고 여자를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사실 흘러버린 세월과 그에 따라 뚱뚱해진 체형이 남편이 그녀가 아닌 다른 여인에게 미소를 흘리는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독한 아픔과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그녀는 그녀 자신을 학대하며 또 다른 원인을 찾아냈을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남편의 잘못이었다. 육아와 살림을 모두 떠맡기는 것도 모자라 젊음까지 관리하라니. 너무 가혹했다.  


3. 동병상련. 같은 틈을 공유한 사람들


69. 누군가에 대해 알게 되는 건 길이가 아니라 깊이라는 걸 시간이 아니라 순간이라는 걸 절감했다.


정윤주. 미호와 지유의 엄마지만. 소설에서는 작가에 의해 '여자'라고 지칭된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남편의 불륜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런 자신을 제어할 방법은 아무리 찾아봐도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그녀를 애처롭게 보이게 했다.  


<틈>에서 목욕탕(찜질방)은 그녀와 같은 상처받은 존재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한편, 흡연 문제로 남편과 다툼이 발생하고, 그로 인하여 틈이 벌어진 민규 엄마 김승진은 목욕탕에 있는 여자 흡연실에서 끽연의 자유를 만끽한다, 윤서엄마 임정희라는 인물은 민규 엄마의 소개로 친해진다. 이 세 람의 만남은 남편과 남을 헐뜯는 삭막한 사회에 지친 영혼들의 만남이었고, 동시에 부부생활의 벌어진 틈을 공유한 사람들끼리의 만남이었다.


78. 찜질방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흘리는 다양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땀 흘리는 것보다 지저분한 얘기를 주고받는 일에 관심이 더 많았다. 동창이나 친척의 남편, 시어머니, 친구 아들, 친구 딸에 대한 자랑과 험담은 가장 흔한 소재였다. 중간 중간에 누군가 105동 여자 알지? 110동 반장 말이야, 하고 미끼를 던지면 동네 여자들은 살진 잉어들처럼 달려들었고 요리조리 물어뜯었다. 그것이 진실인지 루머인지의 여부보다 먹음직스러운가, 뜯어 먹을 게 많은가가 더 중요했다. 그런 얘기는 솔깃하고 흥미진진했지만, 얘기의 현실성보다 말하는 사람의 욕망만 덕지덕지 들러붙어서 찐득하게 흘러내렸다.


아줌마들이 모이면 보통 이런 안 좋은 소문들을 나눔으로써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녀들은 그런 영양가 없는 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이 세 여인은 뒷담화가 성행하는 시간과 그것을 쏟아내는 사람과 거리를 두었기에 만날 수 있었다. 자기 자녀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의 어머니로 얼굴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는 동질감이 그녀들을 한순간 가깝게 했다.


4. 벌어진 틈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102. "남자 다 거기서 거기예요. 아주 괜찮은 놈, 천하의 나쁜 놈만 빼면 그놈이 그놈이야. 다들 치명적인 흠 하나씩은 있다고요. 여자도 그렇지만. 그게 내가 견딜 수 있는 거냐. 없는 거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결론을 말하자면, 끙끙 앓던 고민을 세 사람의 비밀로 공유한다. 이로써 심리적으로 위안을 얻는다. 미호와 지유의 엄마인 정윤주는 남편의 서재를 뒤져서 불륜의 흔적을 찾고, 혼자 아파하는 어리석은 짓은 이제 그만둔다. 그녀는 남편을 불러내어서 직접 얼굴을 보고, 그 여자가 누구인지 물어볼 것 같았다. 


민규 엄마처럼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맞바람을 필 것 같지는 않았다. 민규 엄마는 좀 더 쾌락에 조금 더 큰 비중을 둔 인물이고,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틈>이라는 소설은 엄연히 정윤주의 삶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봤을 때, 민규 엄마는 그저 조력자의 역할이고, 그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민규 엄마 정도의 개방적인 성격이 필요하다고 서유미 작가는 판단했던 것 같다. 반면에 윤서 엄마의 역할은 굉장히 미미하다. 둘보다는 셋이 나을 것 같아서 억지로 끼워넣은 느낌이랄까? 윤서 엄마 한 사람으로 모든 여성을 담아내려는 듯한 의도가 보였다. 


정윤주와 임정호의 만남 이후에 어떤 전개가 이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녀가 좋아서 먼저 접근했던 임정호라는 자상한 남자는 과거의 임정호일 뿐. 현재의 임정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단서는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틈과 그가 생각하는 틈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는 정도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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