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기술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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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 가지 침묵


신중한 침묵이 있고, 교활한 침묵이 있다.

아부형 침묵이 있고, 조롱형 침묵이 있다.

감각적인 침묵이 있고, 아둔한 침묵이 있다.

동조의 침묵이 있고, 무시의 침묵이 있다.

정치적 침묵이 있다.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러운 침묵이 있다.


2.


18세기 프랑스에 살았던 세속사제.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가 쓴 <침묵의 기술>.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우리 자신을 위해 읽는 방법이다. 이것은 편집자와 번역가가 굉장히 오래된 찾아내서 출간한 의도이기도 하다. 말과 글이 범람하는 인터넷 시대. 페이스북의 좋아요나 공감을 얻기 위하여 (수많은 팔로워의 추천을 받으면 광고가 따라오고 그것으로 돈을 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거리낌 없이 학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디누아르 신부가 주장하는 침묵의 14가지 원칙은 굉장히 실용적인 조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디누아르 신부가 분류한 열 가지 종류의 침묵과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에 관한 부분은 당신이 인터넷이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접하는 말과 글과 같은 정보나 혹은 당신이 제공할 정보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진지하게 침묵의 기술을 적용해보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원래 의도는 따로 살피지 않아도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열가지 종류의 침묵과 침묵이 어떻게 시작되고 작동하는지에 관한 설명(39페이지부터 64페이지까지)은 편집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기 때문에 굉장히 공을 들여서 배치해놓았다. 이것을 잘 기억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3.


두 번째 방법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원래의 목적을 살피면서 읽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18세기 프랑스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읽는 것이다. 18세기 유럽. 굉장히 치열했을 유물론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철학자. 그리고 종교인과 정치권력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디누아르 신부가 믿는 가치를 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설파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침묵의 기술>의 흥미로운 요소다. 21세기의 사람들이 봤을 때, 과격하고 오른쪽으로 치우친 느낌의 디누아르 신부의 관점에 대하여 옳고 그르다를 논하는 것보다 흥미로운 것은 18세기 보수층의 소명의식을 디누아르 신부라는 상징으로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224. 인간이란 워낙에 거짓과 타락을 좋아해서, 신성한 기적의 문헌에 반하는 글에 끌리기 마련이다. 정녕 신앙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의심하고 부정하기 시작하면 그 무엇도 제동을 가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인가 싶다.


디누아르 같은 보수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와 국가가 지배하는 세계관을 보호하는 것이다. 디누아르 신부는 절대적인 진리가 신과 군주에게 이미 부여되어 있다고 평생 믿으면서 안정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의 사상이 변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따라서 디누아르의 관점에서는 유물론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존엄한 존재에 균열을 내고 전복시키려는 무리이므로, '악'으로 규정하고 비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당연한 것이다. 결국, 일반 대중들은 종교와 국가를 뒤흔드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이다.


230.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여, 목자들의 가르침에 다소곳이 귀 기울여라. 특히 알고자 하는 욕망이 그대를 수많은 위험에 노출시킬 때 덕 있는 자들의 경건한 대화를 경청하고, 그대의 순박한 심성으로 신을 찬양하라.


231. 신앙을 저버린 자들, 당대의 철학자를 자처하는 글쟁이들에게 고하노라. 부디 한 번이라도 진리를 깨달으려는 마음을 갖고, 진리를 추구하고 따르려는 지각 있는 자세를 가져보기를.


이런 의견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말에 대한 침묵의 14가지 원칙은 자연스럽게 부차적인 것이 되고, 디누아르가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논점이 이동한다. 글이 말을 대체한다. 말에 대한 침묵의 14가지 원칙이 글에 대한 침묵의 14가지 원칙이 되는 것이다.   


4. 침묵의 14가지 필수 원칙


말에 글을 대입하면 '말에 대한 침묵'이 아닌 '글에 대한 침묵'의 14가지 원칙이 된다.


첫 번째 원칙,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입을 연다.


두번째 원칙,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듯이 입을 다물어야 할 때가 따로 있다.


세번째 원칙, 입을 닫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말을 잘할 수 없다.


네번째 원칙,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은 나약하거나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입을 닫아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은 경솔하고도 무례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원칙, 일반적으로, 말을 하는 것보다 입을 닫는 것이 덜 위험하다.


여섯 번째 원칙, 사람은 침묵 속에 거함으로써 스스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침묵을 벗어나는 순간 자기 자신보다 남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일곱 번째 원칙, 중요하게 할 말이 있을수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혹시라도 후회할 가능성은 없는지 다시 한 번 되뇌어보아야 한다.


여덟 번째 원칙, 지켜야 할 비밀이 있을 때에는 아무리 입을 닫고 있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할 때 침묵은 넘칠수록 좋다.


아홉 번째 원칙, 아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입을 닫을 줄 아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현명한 자의 침묵은 지식 있는 자의 논증보다 훨씬 가치 있다.


열 번째 원칙, 침묵은 이따금 편협한 사람에게는 지혜를, 무지한 사람에게는 능력을 대신하기도 한다.


열한 번째 원칙, 사람들은 보통 알이 아주 적은 사람을 별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을 산만하거나 정신 나간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말을 많이 하고픈 욕구에 휘둘려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느니, 침묵 속에 머물러 별 재주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편이 낫다.


열두 번째 원칙, 용감한 사람의 본성은 과묵함과 행동에 있다. 양식 있는 사람은 항상 말을 적게 하되 상식을 갖춘 발언을 한다.


열세 번째 원칙, 아무리 침묵하는 성향의 소유자라 해도 자기 자신을 늘 경계해야 한다.


열네 번째 원칙, 침묵이 필요하다고 해서 진솔함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생각들을 표출하지 않을지언정 그 무엇도 가장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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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것들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프로이트 이야기
베벌리 클락 지음, 박귀옥 옮김 / 소울메이트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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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나를 고민케하는 화두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하여 찾아왔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요점은 당신에게 어떤 시련이 다가오더라도 삶에 대한 의지와 미래에 당신이 추구할 목표를 찾아낸다면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책을 읽을 당시에도 그렇지만, 최근에도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잘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쉽사리 정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어떤 목표를 앞에 두고, 이 행동이 옳고 저 행동은 그릇된 것을 머리는 너무나 잘 알지만 옳은 방향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반복하고 내일부터는 안 그래야지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역설적인 문제를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그 심각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잊어버렸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나는 이 문제를 <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라는 기이한 책을 읽으면서 간접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이반 오소킨은 인생을 잘못 살아온 결과. 돈도 잃고, 사랑도 잃는다. 그렇게 나락으로 전락한 자기 신세를 한탄한다. 만약, 신이 현재의 기억을 안고 인생을 다시 살게 해준다면 정말 열심히 살겠다고 기도한다. 그런 기도 후에 정말 신이 나타나서 그의 인생을 리셋시킨다. 새로 태어났음에도 그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기억을 간직한 덕분에 그 사건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지만 막지 못하고 그는 다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이 이야기를 읽은 후에 나에게도 그런 성향이 작용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목표로부터 자꾸만 엇나가는 인간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왜 살찐 사람은 빚을 지는가?>라는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빌어와 "눈앞의 작은 이익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먼 미래를 보며 계획했던 목표가 순간 흐릿해지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그렇게 굳은 다짐을 했던 이반 오소킨의 결심이 흐트러졌을 것이다." 라고 정리를 하긴 했지만, 어느새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이반 오소킨을 회상하며 그때 쓴 리뷰를 다시 보고 나서야 되새길 수 있는 내용이다.


2.


<프로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것들>. 이 책에서도 지금의 고민과 관련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54.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과연 인간이 가진 공격성의 근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으로 성 본능 뿐만 아니라 다른 본능이 존재한다고 가정. 성본능이 새로운 삶과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성질과 연관되어 있다면, 또 다른 본능은 활동적인 삶 이전에 고요한 상태로 회귀하려는 충동으로써 분해와 죽음을 유도한다고 보았다.


'죽음충동'. 프로이트는 장기간에 걸친 전쟁에 대한 공포로 인해 "모든 삶의 목표는 죽음이다."라는 비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150. 프로이트는 전반적으로 인간의 삶에 강한 본능이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특히 성장. 새로운 삶, 발전을 이끄는 성 본능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성 본능과 함께 물체를 파괴하고 살아있는 것을 무생물의 상태로 되돌리는 '죽음본능'이 등장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격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본능을 강조했다면, 그의 사후에 정립된 정신분석의 이론들은 '대상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크게 변화했다.


153. 프로이트는 섹스에 우선하는 본능이 있다고 주장했다. 초기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충동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무생물로 돌아가는 죽음의 단계에서 발견된다. (중략)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내부 원인에 따라 죽은 뒤 무기물로 돌아간다는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생명체의 목표는 죽음이다.'라는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154. 이 주장은 죽음본능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반복강박'에 대해 설명한다. 생명체는 자신의 흔적을 지워가며 발전을 멈추려는 특징을 보인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죽음본능'이라는 개념이 어쩌면 목표로 향하는 올바른 길을 막아서는 본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 본능은 우리를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상태로 이끄는 힘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이 '죽음본능'이라는 것이 자신을 계속 발전시키려는 노력들을 전부 무화시키려는 본능이 아닐까? 인간이 점차 늙고,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이 죽음본능이라는 것도 늙어가는 육체에 맞게 인간을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활동성을 점차 약화시키는 개념이 아닐까?   


결국, 의미를 찾아가는 능동적인 활동을 통하여 쾌락을 느끼는 본능과 발전을 멈추고 아주 평온한 상태로 머물다가 죽음으로 돌아가려는 죽음본능. 이 두 가지 본능이 우리 안에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다. 죽음본능이라는 것이 좀 더 강력하고 말이다. "누군가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했었는데, 자신의 안에 이미 죽음의 본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청난 괴물을 만난 느낌이다.

 

3.


이 괴물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봤다. <왜 살찐 사람은 빚을 지는가?>에서도 할인율의 문제를 제시한다. 눈앞의 작은 이익과 편안함에 취해 미래의 목표에 소홀해진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눈앞의 작은 이익을 미래의 목표와 연관되는 목표로 설정하면 될 일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에 다시금 발길이 닿는다.


박웅현의 <인문학으로 광고하라>에서도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책, <몰입>의 부제는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이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이 말의 뜻은 삶의 의미와 목표를 항상 자신의 가까이에 두고, 죽음본능이 당신을 유혹하기 전에 먼저 쾌락본능에 취해있는 상태를 유지하라고 조언해주는 듯하다. 이 괴물에 대해 잘 알게 되었으니. 이제 죽음본능을 멀리하는 일만 남은 것 같다.


34. 그는 삶의 본질에 대한 고통스러운 진실을 깨달았다. 삶은 절대 성장과 발전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파괴와 상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222. 삶이 어려운 이유는 과거에 형성된 두려움과 욕망의 희생양이 되어 판단력을 상실한 채 과거에 갇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과 꿈을 자유롭게 다루고 현재와 미래를 바탕으로 재구성한다면 우리의 삶은 창의적으로 변할 수 있다.  


235. 인간의 삶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면 개인이 어느 정도 삶을 통제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궁극적으로 스토아학자들은 정신을 개인이 장악할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했다. 그 결과 개인에게 일어난 일 자체보다는 개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236. 개인이 만족스럽게 살아가려면 자신이 속해 있는 우주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소망과 삶에 대한 태도를 맞춰나가야 한다. 세계가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인간의 소망에 맞춰 압박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실망과 불만족을 야기할 뿐이다.


"인간이 행복해야 한다는 목표는 신의 '창조'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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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스 - 어떻게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는가
애덤 그랜트 지음, 홍지수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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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덤 그랜트의 <오리지널스>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말한다. 순응하는 길이 하나요. 독창성을 발휘하는 길이 다른 하나다. 순응하는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미 잘 닦여진 길로 앞선 무리를 따라가며 현상을 유지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로서 당신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것을 따름으로 인하여 본연에 내재되어 있던 창의적인 의지를 빼앗긴다.


그랜트는 기존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서 학습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선구자들이 남겨놓은 업적을 잘 이어받아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다수의 보통 사람들. 그중에서도 사회적 취약계층의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이들조차도 순응하는 길. 다시 말해서, 현상 유지를 지지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기존 체제를 정당화하면 그것을 부정하는 것보다 당장 고통에서 벗어나는 효과가 있고, 그 현상이 고착화되면 '세상이 그런 식이라서 불만을 품어봤자 소용없다'는 심리로 굳어진다고 분석했다.


2.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세상에 순응하고,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용기를 잃은 대다수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창성을 발휘한 소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독창적인 가치를 집단주의로부터 지켜나가면서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는가를 연구한 내용이었다.


독창성을 발휘한 사람들. 오리지널스의 가장 큰 특징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오리지널스의 결심은 그들 개개인호기심으로부터 발생한다. 호기심은 '기시감'의 반대말인 '미시감'.  늘 봐온 익숙한 것에서 발견되는 경향이 많고, 창조적인 사람은 기존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 대입하여 색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으로부터 탄생된다.


독창성을 발휘한 사람들. 오리지널스는 즉흥적이지 않았다. 직관에 의존하지 않았고, 이성에 많은 부분 의존했다. 그들은 무슨 일을 진행하기에 앞서서 굉장히 다양하고 많은 아이디어를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수집했다. 그 아이디어를 실행하기에 앞서 자신의 머릿속에서 여러 차례 구동시켰고, 당장은 늦어지더라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행착오를 고쳐나가기도 했. 고의로 아이디어를 간헐적으로 노출시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이 앞으로 제시할 아이디어를 친숙하게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 독창성을 발휘해도 안정하다고 느끼는 순간. 혹은 그들의 지위가 당신의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는 위치에 충분히 도달했다고 판단한 이후에야 그들은 안심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펼쳐 보였다.


이성적 판단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즐기는 오리지널스는 또 한 번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당신의 능력을 판단할 누군가에게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당신의 약점을 미리 노출시킴으로써 당신 자신을 굉장히 균형적인 시각을 갖춘 영리한 인물로 포장하는 한편, 당신의 앞에 선 그들을 똑똑한 사람으로. 당신과 같이 진심으로 문제점을 해결할 믿음을 가진 동료로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점이 순응하지 않는 오리지널스의 특징이었다.  


책에서 소개된 내용을 더 설명하자면. 오리지널스는 어릴 때부터 그들에게 규칙을 부여하고, 행동을 강제하기보다는 어떤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와 설명을 통하여 그들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을 방법을 찾도록 유도하는 훈육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내면화시킴으로써 독창성을 기를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부모가 통제할 수 없는 전문적인 수준에 다다르면 자녀가 선택할 수 있는 분야의 멘토를 소개해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3.


오리지널스라는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이 생각해내지 못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업가 집단이나 정치인 집단 같은 거대한 집단에 오리지널스가 존재한다면 이들은 분명 집단주의에 반하는 소수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소수자들의 의견을 경청한다면, 거대한 단체가 가지고 있는 집단 사고를 깨뜨리는 데 분명히 도움을 줄 것이다. 299. 집단사고는 독창성의 적이다. 사람들은 사고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대신 가장 지배적인 기존 사고방식에 순응하라는 압력을 느끼는데, 소수자들의 의견이 자유롭게 표출되는 공간에서 집단사고의 압력은 사라진다.


312. "소수의 의견이 중요하다. 그들의 의견이 결국 옳다고 판명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관심을 갖게 하고, 사고를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소수 의견이 틀리다고 해도, 의견이 다른 소수는 기발한 해결 방법을 찾아내고 질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데 기여하게 된다." 


따라서 강력한 문화.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려거든 "그들은 반대하겠지만, 우리는 강제로라도 이렇게 하겠다."에서 끝낼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이것을 하려고 하는데, 당신의 의견을 들을 때는 나의 의견의 옮음을 잠시 내려놓고 비판적인 시각에서 들어볼 용의가 있다." 까지 되어야 진정으로 합리적 결정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400. 우리는 대부분 행복을 추구하면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즐기겠다는 선택을 한다. 독창적인 사람들은 시류를 거스르는 힘겨운 투쟁을 감내하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들은 생명과 자유를 존중하고 신장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쾌락을 충족시키는 일은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도 뒤로 제쳐둔다. 그러나 멀리 보면 그들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기회를 얻는다.


독창적인 사람이 된다 함은 행복을 추구하는 가장 쉬운 길은 아니지만, 숭고한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행복을 느끼기에는 최적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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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바 2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5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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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유무. 이것은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부모의 바람이 담긴 이름이었다. 이 이름을 건네받은 조그만 존재는 온몸에 두려움을 가득 끌어안고 조심스레 세상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소설은 그 시작을 묘사함으로써 시작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7. 나는 이 세상에 왼발부터 등장했다. 라는 첫 문장이었다.


아유무와 그의 누나인 다카코. 그리고 그들의 부모 이바마시와 아쿠쓰는 유별나게 극단적인 성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낯선 곳. 이란과 이집트라는 공간에서 삶을 거닐기 시작했다. 일본은 그들에게 굉장히 불편했다. 누구의 간섭도 존재했고, 제멋대로 규정한 편견에도 맞서야 했지만, 이란과 이집트는 최소한 그런 불편함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통의 편지는 이 가족의 평화를 깨트려버렸다. 가족으로서 함께 걷는 일은 이제 그만둬야 했다. 이제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그들 각자의 발걸음을 옮겨야 할 시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유무의 눈에 가족들의 걸음걸이는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아유무 자신만큼은 이 정도면 적당한 삶이 아닐까 안도할 따름이었다. 아유무. 그는 지극히 정상인이라고 생각했고, 정상적인 삶은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기만큼은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2.


수많은 사람 중에 대부분은 그럭저럭 괜찮은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리라 생각한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도중에 갑자기 머리카락이 빠진다거나. 살이 급격히 불어난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태어날 때는 울퉁불퉁한 당신의 존재가 세월이라는 삭풍에 의해서 조금씩 깎여나가 둥글둥글해지고 약해지고 작아지는 것이 순행이라고 생각하고 삶을 이어나갈 따름이다.


그러나 아유무의 가족들은 마지막까지 하나의 반전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구세주라는 이름을 가슴에 끌어안고 순행이 아닌 역행을 꿈꾼다. 누군가 당신을 깎아내려 할지라도 결코 움츠러들거나 작아지지 않은 자아의 완성을 꿈꾸는 존재들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천성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는데, 이 가족 중에서 제일 보통사람과 평범하고, 공포를 가득 끌어안고 태어났아유무조차도 역행을 즐기는 천성(7. 나는 이 세상에 왼발부터 등장했다. )을 가지고 있었다.


3. 


309. 나는 자신의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나는 내 주위의 것만 믿었다. 그 진리에 바짝 달라붙어 알랑거리고 자신의 감정을 계속 무시했다.


가져온 문장이 적나라한 고백투라서 이 소설의 읽는 맛이 없을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을 옮겨와봤다. 이 문장은 세상에 세상을 두려워하고, 어쩔 없이 살아야 한다고 체념하고,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할 것 같은 행동이나 제스처나 태도를 막연하게 짐작해서 결정하는 행동을 반복한 결과 마주하게 된 거대한 전락의 끝에서 소중한 것을 상실한다. 그 절망의 순간 찾아오는 깨달음의 목소리였다.


<사라바>라는 작품에는 아유무가 자신의 실책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그가 겪어야 했던 시련의 과정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아유무 자신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올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시절의 무지몽매함. 즉, 이렇게 되더라도 나만 괜찮으면 상관없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들이 잔뜩 묻어있다. 솔직히 이것은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작가 니시 가나코는 이것을 아유무의 전 생애를 고백함으로써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깨달음 이후의 결론은 많은 자기계발서적이 주장하는 내용처럼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그 책들과는 다른 것은 잠언 형식으로 좋은 게 좋은 식이라는 방법으로 결론만 내뱉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전적 소설을 연상시킬 정도로 매우 세밀하게 삶을 다루고, 당신을 괴롭히는 괴물을 직접 꺼내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삶 속에서 그것을 건져내고, 그 이후에도 상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부단히 노력한 결과로 탄생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4.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작가의 경험과는 별개로. 상상에만 근거한 창작물이라면 오히려 더 슬플 것 같다. 물론, 소설가는 필연적으로 자신을 감추기를 원하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만 <사라바>와 같이 인간 자체의 내면적 성장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코어. 즉, 핵심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라바>는 읽는 이로 하여금 딛고 일어서게 하는 좋은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사라바>를 되새김질하듯 뒤로 감아서 생각하는 소설이 아니라, <사라바> 이후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를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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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미시 아시아클래식 6
파질 율다시-오글리 구연, 레프 펜콥스키 채록.러시아어번역, 최종술.백승무 옮김, 이영진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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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야 할 일도 많고, 의욕적으로 읽어야 할 책도 제법 많은데. <알파미시> 덕분에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한 느낌이다.

  

절대로 이 책이 나쁜 책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의 구성과 번역된 문장들은 매우 훌륭하다.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민중 영웅 서사시 <알파미시>는 10~11세기에 처음 탄생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이후부터 갱신을 거듭하면서 대표적인 구전문학의 하나로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1900년 대를 살았던 매우 뛰어난 구연가 파질 율다시 오글리의 기억과 입을 통하여 <알파미시>는 마침내 완성된다. 이 작품은 러시아 혁명기를 거쳐서 1939년 우즈베키스탄의 시인 하미트 할림잔을 통하여 인쇄본으로 편찬된.


<알파미시>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의 판소리 문학처럼 산문과 긴 운문이 교차로 담겨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운문이 굉장히 훌륭했다. 운문에 담긴 강렬한 묘사들(전투에 관한 묘사. 그리고 각 인물의 심리에 관한 묘사.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훔칠 만큼 강렬한 외침들이 주로 담겨있다.)은 이 작품이 왜 오랜 시간 사랑받아 왔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알파미시의 출사표를 담은 운문 한 꼭지를 옮겨본다.


140~141.

소금이 내 마음의 상처에 뿌려졌어요.

고통으로 나는 낙타처럼 울부짖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것이 쉬울 리가 있나요?

쿨타이 할아범, 나 없이도 행복하세요!


내 고통이여, 넌 연기처럼 녹아 없어져라.

조국이여, 번성하여라.

나에게 축복을 해다오.

쿨타이 할아범, 나 없이도 행복하세요!


내 친구이자 누이여.

너는 나와 함께 태어났고,

우린 하나의 젖으로 자랐어.

넌 나와 어린 시절부터 우애가 깊었고,

넌 내 희망의 봄이었어.

누이여, 부디 살아서 건강하게!


킬미크 초원에서 포로가 된 그녀가,

나르시스의 눈을 가진 내 여인이,

빨간 볼을 가진 내 여인이,

거기서 슬픔 때문에 노랗게 질리지 않도록

나는 그녀를 구출하러 간다네.

누이여, 부디 살아서 건강하게!


온 세상을 둘로 보고,

적들을 응징하고 박멸한 다음,

사랑하는 누이에게 돌아와서,

내 조국을 통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누이여, 부디 살아서 건강하게!


내 발아래엔 날렵한 준마가 있어.

예전 삶과 작별을 고하고,

산과 산을 내달려,

이 나라와 저 나라로 가서

어디에 좋은 부족이 있고, 어디에 나쁜 부족이 있는지 보리라.

누이여, 부디 살아서 건강하게!


승리자의 얼굴은 무섭도다.

교활한 칼미크 인이여, 벌벌 떨거라.

나는 적들을 용서하는 것에 익숙지 않다!

영광스럽고 위대하게 돌아올 것이다.

할아범, 기도를 해주시오

당신들 모두 부디 살아서 건강하시오! 


2.


<알파미시>의 오랜 시간 동안의 방랑기. 이 모든 것의 근본적 원인인 바이부리와 바이사리의 갈등과 그로 인한 바이사리의 이동은 칼미크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 그런데 이 피해의 잘못은 고의가 아니어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바이사리에 대한 처벌이 불합리하다는 것과 그의 딸인 바르친에 대한 칼미크 전사들의 추잡한 욕망에 대한 것으로서 초점이 옮겨진다. 이것으로서 이 작품은 처음부터 선악구도의 정당성을 흩트려 놓았다고 생각했다.


게다이 작품. 다스탄이라고 부르는 문학 장르에서 <알파미시>의 주인공. 알파미시는 완벽한 존재라는 것도 불편하게 했다. 그의 영웅담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였다. 태초에 강한 왕족의 피를 물려받은 알파미시. 예언자의 입을 통해 절대적인 존재라고 공인받은 알파미시는 애초에 역전 불가능한 선한 존재였다.  이 차이는 90명의 칼미크 전사들은 물론이거니. 칼미크의 왕조차도 닿을수도 없었으니 그들은 저절로 악당이 되어야만 했다. 그 힘의 차이를 깨닫고 순순히 그와 우정을 나누는 인물로 그려지는 카라잔은 조국을 배신한 인물이 아니라 현명한 인물로 둔갑해버린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를 위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거나 혹은 제왕적 리더십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알파미시>의 알파미시는 그와 같은 절대권력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3.


나는 평생 살면서 알파미시 같이 완벽한 인간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런 완벽한 인간을 그리워하거나 바라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이 완벽해 보인다면 그것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완벽하게 보이려고 노력할 뿐이지. 그 자체가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인물을 찾고 싶다면 리니지 같은 게임의 최고 클래스 캐릭터를 찾거나, 혹은 어떤 계통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최고의 인물을 찾는 것이 빠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얻은 결과물조차 그 결실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과 노력과 자본을 투자해서 얻은 결과지, 알파미시처럼 태어났을 때 부터 무지막지한 힘을 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어떤 게임이나 어떤 스포츠 종목이나 어떤 계통에서 절대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조차 한 부분에서 태생적인 소질을 타고 났을지는 몰라도 알파미시처럼 모든 면에서 선이라는 이름의 완벽한 인간성을 부여받진 못한다.


현실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도 알파미시와 같은 완벽함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 권력 투쟁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존 롤스가 제시하는 '무지의 장막'이라는 것을 제거해버린다면 그들은 가장 먼저 자신들에게 불리한 족쇄를 제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점 또한 인간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알파미시 같은 존재를 믿으며 기다리고, 알파미시같은 존재를 통해 자긍심을 얻는다는 것이 굉장히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러한 제왕적 리더십을 갖춘 인물을 갈구하는 것 자체가 아래로부터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당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위로부터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알파미시>는 평평한 것처럼 그렸지만 결코 평평하지 않았다. 실제로 평평할 수 없고, 그들에게 평평할 것을 요구할 것도 아니지만 막상 그 기울어짐을 직접 목격하니 강한 저항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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