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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기술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열 가지 침묵
신중한 침묵이 있고, 교활한 침묵이 있다.
아부형 침묵이 있고, 조롱형 침묵이 있다.
감각적인 침묵이 있고, 아둔한 침묵이 있다.
동조의 침묵이 있고, 무시의 침묵이 있다.
정치적 침묵이 있다.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러운 침묵이 있다.
2.
18세기 프랑스에 살았던 세속사제.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가 쓴 <침묵의 기술>.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우리 자신을 위해 읽는 방법이다. 이것은 편집자와 번역가가 굉장히 오래된 책을 찾아내서 출간한 의도이기도 하다. 말과 글이 범람하는 인터넷 시대. 페이스북의 좋아요나 공감을 얻기 위하여 (수많은 팔로워의 추천을 받으면 광고가 따라오고 그것으로 돈을 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거리낌 없이 학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디누아르 신부가 주장하는 침묵의 14가지 원칙은 굉장히 실용적인 조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디누아르 신부가 분류한 열 가지 종류의 침묵과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에 관한 부분은 당신이 인터넷이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접하는 말과 글과 같은 정보나 혹은 당신이 제공할 정보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진지하게 침묵의 기술을 적용해보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원래 의도는 따로 살피지 않아도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열가지 종류의 침묵과 침묵이 어떻게 시작되고 작동하는지에 관한 설명(39페이지부터 64페이지까지)은 편집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기 때문에 굉장히 공을 들여서 배치해놓았다. 이것을 잘 기억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3.
두 번째 방법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원래의 목적을 살피면서 읽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18세기 프랑스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읽는 것이다. 18세기 유럽. 굉장히 치열했을 유물론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철학자. 그리고 종교인과 정치권력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디누아르 신부가 믿는 가치를 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설파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침묵의 기술>의 흥미로운 요소다. 21세기의 사람들이 봤을 때, 과격하고 오른쪽으로 치우친 느낌의 디누아르 신부의 관점에 대하여 옳고 그르다를 논하는 것보다 흥미로운 것은 18세기 보수층의 소명의식을 디누아르 신부라는 상징으로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224. 인간이란 워낙에 거짓과 타락을 좋아해서, 신성한 기적의 문헌에 반하는 글에 끌리기 마련이다. 정녕 신앙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의심하고 부정하기 시작하면 그 무엇도 제동을 가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인가 싶다.
디누아르 같은 보수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와 국가가 지배하는 세계관을 보호하는 것이다. 디누아르 신부는 절대적인 진리가 신과 군주에게 이미 부여되어 있다고 평생 믿으면서 안정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의 사상이 변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따라서 디누아르의 관점에서는 유물론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존엄한 존재에 균열을 내고 전복시키려는 무리이므로, '악'으로 규정하고 비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당연한 것이다. 결국, 일반 대중들은 종교와 국가를 뒤흔드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이다.
230.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여, 목자들의 가르침에 다소곳이 귀 기울여라. 특히 알고자 하는 욕망이 그대를 수많은 위험에 노출시킬 때 덕 있는 자들의 경건한 대화를 경청하고, 그대의 순박한 심성으로 신을 찬양하라.
231. 신앙을 저버린 자들, 당대의 철학자를 자처하는 글쟁이들에게 고하노라. 부디 한 번이라도 진리를 깨달으려는 마음을 갖고, 진리를 추구하고 따르려는 지각 있는 자세를 가져보기를.
이런 의견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말에 대한 침묵의 14가지 원칙은 자연스럽게 부차적인 것이 되고, 디누아르가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논점이 이동한다. 글이 말을 대체한다. 말에 대한 침묵의 14가지 원칙이 글에 대한 침묵의 14가지 원칙이 되는 것이다.
4. 침묵의 14가지 필수 원칙
말에 글을 대입하면 '말에 대한 침묵'이 아닌 '글에 대한 침묵'의 14가지 원칙이 된다.
첫 번째 원칙,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입을 연다.
두번째 원칙,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듯이 입을 다물어야 할 때가 따로 있다.
세번째 원칙, 입을 닫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말을 잘할 수 없다.
네번째 원칙,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은 나약하거나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입을 닫아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은 경솔하고도 무례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원칙, 일반적으로, 말을 하는 것보다 입을 닫는 것이 덜 위험하다.
여섯 번째 원칙, 사람은 침묵 속에 거함으로써 스스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침묵을 벗어나는 순간 자기 자신보다 남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일곱 번째 원칙, 중요하게 할 말이 있을수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혹시라도 후회할 가능성은 없는지 다시 한 번 되뇌어보아야 한다.
여덟 번째 원칙, 지켜야 할 비밀이 있을 때에는 아무리 입을 닫고 있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할 때 침묵은 넘칠수록 좋다.
아홉 번째 원칙, 아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입을 닫을 줄 아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현명한 자의 침묵은 지식 있는 자의 논증보다 훨씬 가치 있다.
열 번째 원칙, 침묵은 이따금 편협한 사람에게는 지혜를, 무지한 사람에게는 능력을 대신하기도 한다.
열한 번째 원칙, 사람들은 보통 알이 아주 적은 사람을 별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을 산만하거나 정신 나간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말을 많이 하고픈 욕구에 휘둘려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느니, 침묵 속에 머물러 별 재주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편이 낫다.
열두 번째 원칙, 용감한 사람의 본성은 과묵함과 행동에 있다. 양식 있는 사람은 항상 말을 적게 하되 상식을 갖춘 발언을 한다.
열세 번째 원칙, 아무리 침묵하는 성향의 소유자라 해도 자기 자신을 늘 경계해야 한다.
열네 번째 원칙, 침묵이 필요하다고 해서 진솔함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생각들을 표출하지 않을지언정 그 무엇도 가장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