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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미시 ㅣ 아시아클래식 6
파질 율다시-오글리 구연, 레프 펜콥스키 채록.러시아어번역, 최종술.백승무 옮김, 이영진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11월
평점 :
1.
해야 할 일도 많고, 의욕적으로 읽어야 할 책도 제법 많은데. <알파미시> 덕분에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한 느낌이다.
절대로 이 책이 나쁜 책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의 구성과 번역된 문장들은 매우 훌륭하다.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민중 영웅 서사시 <알파미시>는 10~11세기에 처음 탄생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이후부터 갱신을 거듭하면서 대표적인 구전문학의 하나로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1900년 대를 살았던 매우 뛰어난 구연가 파질 율다시 오글리의 기억과 입을 통하여 <알파미시>는 마침내 완성된다. 이 작품은 러시아 혁명기를 거쳐서 1939년 우즈베키스탄의 시인 하미트 할림잔을 통하여 인쇄본으로 편찬된다.
<알파미시>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의 판소리 문학처럼 산문과 긴 운문이 교차로 담겨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운문이 굉장히 훌륭했다. 운문에 담긴 강렬한 묘사들(전투에 관한 묘사. 그리고 각 인물의 심리에 관한 묘사.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훔칠 만큼 강렬한 외침들이 주로 담겨있다.)은 이 작품이 왜 오랜 시간 사랑받아 왔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알파미시의 출사표를 담은 운문 한 꼭지를 옮겨본다.
140~141.
소금이 내 마음의 상처에 뿌려졌어요.
고통으로 나는 낙타처럼 울부짖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것이 쉬울 리가 있나요?
쿨타이 할아범, 나 없이도 행복하세요!
내 고통이여, 넌 연기처럼 녹아 없어져라.
조국이여, 번성하여라.
나에게 축복을 해다오.
쿨타이 할아범, 나 없이도 행복하세요!
내 친구이자 누이여.
너는 나와 함께 태어났고,
우린 하나의 젖으로 자랐어.
넌 나와 어린 시절부터 우애가 깊었고,
넌 내 희망의 봄이었어.
누이여, 부디 살아서 건강하게!
킬미크 초원에서 포로가 된 그녀가,
나르시스의 눈을 가진 내 여인이,
빨간 볼을 가진 내 여인이,
거기서 슬픔 때문에 노랗게 질리지 않도록
나는 그녀를 구출하러 간다네.
누이여, 부디 살아서 건강하게!
온 세상을 둘로 보고,
적들을 응징하고 박멸한 다음,
사랑하는 누이에게 돌아와서,
내 조국을 통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누이여, 부디 살아서 건강하게!
내 발아래엔 날렵한 준마가 있어.
예전 삶과 작별을 고하고,
산과 산을 내달려,
이 나라와 저 나라로 가서
어디에 좋은 부족이 있고, 어디에 나쁜 부족이 있는지 보리라.
누이여, 부디 살아서 건강하게!
승리자의 얼굴은 무섭도다.
교활한 칼미크 인이여, 벌벌 떨거라.
나는 적들을 용서하는 것에 익숙지 않다!
영광스럽고 위대하게 돌아올 것이다.
할아범, 기도를 해주시오
당신들 모두 부디 살아서 건강하시오!
2.
<알파미시>의 오랜 시간 동안의 방랑기. 이 모든 것의 근본적 원인인 바이부리와 바이사리의 갈등과 그로 인한 바이사리의 이동은 칼미크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 그런데 이 피해의 잘못은 고의가 아니어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바이사리에 대한 처벌이 불합리하다는 것과 그의 딸인 바르친에 대한 칼미크 전사들의 추잡한 욕망에 대한 것으로서 초점이 옮겨진다. 이것으로서 이 작품은 처음부터 선악구도의 정당성을 흩트려 놓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 작품. 다스탄이라고 부르는 문학 장르에서 <알파미시>의 주인공. 알파미시는 완벽한 존재라는 것도 불편하게 했다. 그의 영웅담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였다. 태초에 강한 왕족의 피를 물려받은 알파미시. 예언자의 입을 통해 절대적인 존재라고 공인받은 알파미시는 애초에 역전 불가능한 선한 존재였다. 이 차이는 90명의 칼미크 전사들은 물론이거니. 칼미크의 왕조차도 닿을수도 없었으니 그들은 저절로 악당이 되어야만 했다. 그 힘의 차이를 깨닫고 순순히 그와 우정을 나누는 인물로 그려지는 카라잔은 조국을 배신한 인물이 아니라 현명한 인물로 둔갑해버린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를 위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거나 혹은 제왕적 리더십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알파미시>의 알파미시는 그와 같은 절대권력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3.
나는 평생 살면서 알파미시 같이 완벽한 인간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런 완벽한 인간을 그리워하거나 바라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이 완벽해 보인다면 그것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완벽하게 보이려고 노력할 뿐이지. 그 자체가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인물을 찾고 싶다면 리니지 같은 게임의 최고 클래스 캐릭터를 찾거나, 혹은 어떤 계통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최고의 인물을 찾는 것이 빠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얻은 결과물조차 그 결실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과 노력과 자본을 투자해서 얻은 결과지, 알파미시처럼 태어났을 때 부터 무지막지한 힘을 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어떤 게임이나 어떤 스포츠 종목이나 어떤 계통에서 절대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조차 한 부분에서 태생적인 소질을 타고 났을지는 몰라도 알파미시처럼 모든 면에서 선이라는 이름의 완벽한 인간성을 부여받진 못한다.
현실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도 알파미시와 같은 완벽함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 권력 투쟁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존 롤스가 제시하는 '무지의 장막'이라는 것을 제거해버린다면 그들은 가장 먼저 자신들에게 불리한 족쇄를 제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점 또한 인간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알파미시 같은 존재를 믿으며 기다리고, 알파미시같은 존재를 통해 자긍심을 얻는다는 것이 굉장히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러한 제왕적 리더십을 갖춘 인물을 갈구하는 것 자체가 아래로부터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당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위로부터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알파미시>는 평평한 것처럼 그렸지만 결코 평평하지 않았다. 실제로 평평할 수 없고, 그들에게 평평할 것을 요구할 것도 아니지만 막상 그 기울어짐을 직접 목격하니 강한 저항심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