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바 2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5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1.


아유무. 이것은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부모의 바람이 담긴 이름이었다. 이 이름을 건네받은 조그만 존재는 온몸에 두려움을 가득 끌어안고 조심스레 세상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소설은 그 시작을 묘사함으로써 시작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7. 나는 이 세상에 왼발부터 등장했다. 라는 첫 문장이었다.


아유무와 그의 누나인 다카코. 그리고 그들의 부모 이바마시와 아쿠쓰는 유별나게 극단적인 성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낯선 곳. 이란과 이집트라는 공간에서 삶을 거닐기 시작했다. 일본은 그들에게 굉장히 불편했다. 누구의 간섭도 존재했고, 제멋대로 규정한 편견에도 맞서야 했지만, 이란과 이집트는 최소한 그런 불편함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통의 편지는 이 가족의 평화를 깨트려버렸다. 가족으로서 함께 걷는 일은 이제 그만둬야 했다. 이제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그들 각자의 발걸음을 옮겨야 할 시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유무의 눈에 가족들의 걸음걸이는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아유무 자신만큼은 이 정도면 적당한 삶이 아닐까 안도할 따름이었다. 아유무. 그는 지극히 정상인이라고 생각했고, 정상적인 삶은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기만큼은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2.


수많은 사람 중에 대부분은 그럭저럭 괜찮은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리라 생각한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도중에 갑자기 머리카락이 빠진다거나. 살이 급격히 불어난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태어날 때는 울퉁불퉁한 당신의 존재가 세월이라는 삭풍에 의해서 조금씩 깎여나가 둥글둥글해지고 약해지고 작아지는 것이 순행이라고 생각하고 삶을 이어나갈 따름이다.


그러나 아유무의 가족들은 마지막까지 하나의 반전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구세주라는 이름을 가슴에 끌어안고 순행이 아닌 역행을 꿈꾼다. 누군가 당신을 깎아내려 할지라도 결코 움츠러들거나 작아지지 않은 자아의 완성을 꿈꾸는 존재들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천성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는데, 이 가족 중에서 제일 보통사람과 평범하고, 공포를 가득 끌어안고 태어났아유무조차도 역행을 즐기는 천성(7. 나는 이 세상에 왼발부터 등장했다. )을 가지고 있었다.


3. 


309. 나는 자신의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나는 내 주위의 것만 믿었다. 그 진리에 바짝 달라붙어 알랑거리고 자신의 감정을 계속 무시했다.


가져온 문장이 적나라한 고백투라서 이 소설의 읽는 맛이 없을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을 옮겨와봤다. 이 문장은 세상에 세상을 두려워하고, 어쩔 없이 살아야 한다고 체념하고,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할 것 같은 행동이나 제스처나 태도를 막연하게 짐작해서 결정하는 행동을 반복한 결과 마주하게 된 거대한 전락의 끝에서 소중한 것을 상실한다. 그 절망의 순간 찾아오는 깨달음의 목소리였다.


<사라바>라는 작품에는 아유무가 자신의 실책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그가 겪어야 했던 시련의 과정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아유무 자신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올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시절의 무지몽매함. 즉, 이렇게 되더라도 나만 괜찮으면 상관없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들이 잔뜩 묻어있다. 솔직히 이것은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작가 니시 가나코는 이것을 아유무의 전 생애를 고백함으로써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깨달음 이후의 결론은 많은 자기계발서적이 주장하는 내용처럼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그 책들과는 다른 것은 잠언 형식으로 좋은 게 좋은 식이라는 방법으로 결론만 내뱉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전적 소설을 연상시킬 정도로 매우 세밀하게 삶을 다루고, 당신을 괴롭히는 괴물을 직접 꺼내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삶 속에서 그것을 건져내고, 그 이후에도 상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부단히 노력한 결과로 탄생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4.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작가의 경험과는 별개로. 상상에만 근거한 창작물이라면 오히려 더 슬플 것 같다. 물론, 소설가는 필연적으로 자신을 감추기를 원하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만 <사라바>와 같이 인간 자체의 내면적 성장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코어. 즉, 핵심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라바>는 읽는 이로 하여금 딛고 일어서게 하는 좋은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사라바>를 되새김질하듯 뒤로 감아서 생각하는 소설이 아니라, <사라바> 이후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를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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