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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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넘어서는 안 될 문

 

나쓰메 소세키의 <문>의 주인공인 소스케는 우유부단한 인간의 전형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고, 끈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심한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챙겨야 할 최소한의 것조차 포기했고. 하나뿐인 동생에게 가야 할 몫까지 잃게 했다. 그에게 요오네라는 아내가 있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 신기했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결혼할 수 있었을까?

 

189. 일은 겨울 밑에서 봄이 머리를 쳐들 무렵에 시작되어 벚꽃이 다 지고 어린잎으로 색을 바꿀 무렵 끝났다. 모든 것이 생사를 건 싸움이었다. 청죽을 불에 쬐어 기름을 짜낼 정도의 고통이었다. 아무 준비도 안 된 두 사람에게 돌연 모진 바람이 불어 둘을 쓰러뜨렸던 것이다. 두 사람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어디나 온통 모래뿐이었다. 그들이 모래투성이가 된 자신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언제 바람을 맞고 쓰러졌는지도 몰랐다.

 

이것만 봐서는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청죽을 불에 쬐어 기름을 짜낼 정도의 고통이 어떤 고통인지도 모르겠고, 모래투성이가 된 두 사람의 모습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치 않다. 야스이가 누이라고 소개했던 요오네의 정체 또한 그렇다.

 

확실한 것은 그는 문을 넘었기 때문에, 요오네와 혼인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선택으로 누군가는 일본을 떠났고 말이다.

 

2. 넘어서지 못한 문

 

딱 한 번 문을 넘어선 소스케. 그의 젊음과 활발함이 절정에 달했던 순간의 선택은 사회적 규범이라는 기준에서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문이었다. 

 

로 인하여 나쓰메 소세키의 <문>이라는 작품을 소스케로 하여금 그 이후의 어느 한 지점. 가장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로 추락시켜 독자와 만나게 했다. <문>은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그가 왜 바닥을 기어야 하는가 설명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위에서도 설명했듯 정확한 사건의 개요를 알 수는 없었다.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252.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 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이 문의 빗장을 열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수단과 방법을 머릿속에서 분명히 마련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열 힘은 조금도 키울 수 없었다. 따라서 자신이 서 있는 장소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이전과 손톱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닫힌 문 앞에 무능하고 무력하게 남겨졌다. 그는 평소 자신의 분별력을 믿고 살아왔다. 그 분별력이 지금은 그에게 탈이 되고 있음을 분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취사선택도, 비교 검토도 허용하지 않는 어리석은 외골수를 부러워했다. 또는 신념이 강한 선남선녀가 지혜도 잊고 여러 가지로 생각도 하지 않는 정진의 경지를 숭고한 것이라며 우러러보았다.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밖에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가는 것은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원래의 길로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고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문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문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아래에 옴짝달싹 못 하고 서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소스케는 완전히 항복했다. 종교가 그를 바로 잡아줄 수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들른 사찰의 수업들은 그의 정신 문을 피해서 도망치라고 외친 결과로 행해진 것들이었다. 과거에 이미 넘어선 문. 하지만 예고도 없이 다시 그의 앞에 돌아올 지도 모를 문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어차피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지만 소스케와 요오네의 부부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금슬이 좋았다. 서로에 대한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요소가 아닌가 싶다.

덧붙여. 문 앞에서 망설이다가 문을 피하는 존재가 낯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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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질문들
김경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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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컨셉


뒤 커버에 굵은 글씨로 적힌 문장에 따르면 <세상을 바꾼 질문들>은 1. 무엇이 그들에게 의문을 품게 했는지 2. 그들이 찾은 답은 무엇인지 3. 그것이 세상을 어떻게 바꿨을지. 이런 구성으로 많은 인물의 업적을 다루는데 충실한 책이다.


처음 이 책에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시의 힘>에서 소개된 에드워드 사이드를 다루었기 때문인데. 이 학자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학자. 제국주의의 전성기 시절 서양인의 중심에서 동양인에 관한 왜곡된 시선과 편견을 다룬 사상. '여성적, 감성적, 나약함, 수동적'인 특성으로 동양을 가두려 한 차별을 폭로했던 학자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가 오리엔탈리즘의 내면에 깔린 차별의식을 전 세계인에게 고발한 이유는 바로. 그의 이름은 영어로 '에드워드' 였지만, 그의 뿌리는 '사이드'라는 아랍계의 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과 서양의 차별에 관해서 이야기한 사람. '에드워드 사이드', 남성과 여성의 차별에 이의를 제기한 '메리 울프턴크래프트'. 흑인과 백인의 차별에 분노한 프란츠 파농 등. <세상을 바꾼 질문들>에는 차별을 극복한 인물들의 소개가 이어진다. 


2. 의외의 수확. <당신들의 천국>의 연장


마키아벨리를 다룬 2장.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를 다룬 3장에서 <당신들의 천국>의 조원장을 생각나게 하는 인용문을 여러 차례 발견한다. 조원장도 로베스피에르처럼 생각했다. 조원장의 초인적인 그것은 독재자의 미화라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당신들의 천국>에서의 리더십은 마키아벨리즘의 리더십.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의 리더십을 허용하는 모양새였다.  


55. 군주는 시민을 하나로 묶고 충성스럽게 하는 한 잔인하다는 비난에 개의치 말아야 한다. 몇 가지 잔인한 세례를 보여 줌으로써, 너무 관대하게 행동하여 사회를 무질서하게 하고, 이에 따라 살인이나 도둑질이 발생하게 하는 군주보다 훨씬 관대해지기 때문이다. 살인이나 도둑질은 시민 전체를 해치기 쉽지만, 군주가 내린 명령에 따른 처형은 몇몇 개인만 해치기 때문이다.


67. 로베스피에르는 항상 진정성 있게 혁명의 주체에 대해 생각했고, 그 주체는 늘 프랑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이었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혁명의 정신을 정착시키고 구체제를 뿌리 뽑아 혁명을 완수하는 유일한 방법은 민중과 손을 잡아 그들의 힘으로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계급적 차별과 '어리석고 무식한' 민중의 배제는 혁명에 대한 배신이자, 실패의 지름길이었다.  


70. 일신의 부귀영화는 그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었다. 그는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혁명 정신의 실현만이 혁명을 궁극적으로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과 그런 생각에 따른 혁명. <당신들의 천국>에서는 간척지 개발. 이들을 보며 이상욱은 그것 역시도. 100% 순수한 민중의 '자유'가 아니라 로베스피에르가 생각하는 안에서의 '자유', 조원장이 추구하는 동상을 위해 희생되는 '자유'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3. 테슬라 모터스. 일론 머스크.

 

지난번에 이웃 블로그에서 테슬라 모터스라는 책을 잠깐 본 기억이 있는데. 그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상을 바꾼 질문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언젠가는 직면하게 될 지구의 멸망에 대비하여 화성으로의 이주를 계획하는 일론 머스크. 그의 생각은 엉뚱하지만, 그의 행동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그가 세운 스페이스 엑스라는 민간 기업이 로켓을 발사하는 데 성공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그 성능을 계속 발전시키는 동시에,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여서, 화성 이주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 전기차를 개발했는데, 그 회사 이름이 테슬라 모터스였던 것이다.


무릇, 전기 자동차라면 성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환경 보호 측면에서 이용하기를 권하는 것이 요즘 시장의 이치인데. 테슬라 모터스에서 개발하는 전기차는 그런 고정 관념은 처음부터 배제하고, 성능 그 자체로 다른 회사 자동차와 경쟁하기 위해서 연구 개발하는 그의 철학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철학을 증명하듯. 가장 처음 개발한 것이 고가의 스포츠카였고 말이다.  


4. 마무리, 책을 쓴 이유이자 바람.


359. 우리에게는 왜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는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때이다. 그 첫걸음은 머스크처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가치 있는 질문을 만들어 내는 사고와 상상력을 가진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다.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데'는 돈이 든다. 하지만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이 되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이는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돈을 모으는 것보다 그 돈을 모을 인재를 키우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중요하며 궁극적으로 더 가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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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부 선생님, 안녕 오사카 소년 탐정단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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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류


이 소설은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던 <오사카 소년 탐정단>의 속편에 해당하는 작품이자. 1986년부터 1993년에 이어진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스타일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와 동시에 과거의 히가시노 게이고와의 작별을 의미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350. 이번에야말로 이 시리즈를 끝마치려고 합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작가 자신이 이 세계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이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조금 더 넓은 세계로 나갈 것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탐정 소설이 될 뻔 했다가 이 한 줄의 고백 덕분에 새롭게 다가왔다.

그는 당시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인간의 더 깊은 부분을 보고, 보다 더 나은 것을 쓰고 싶어 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쉬워 보이는 일일 수 있지만, 변화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는 이런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 태반이다.

이러한 작가의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있었기에, 몇십 년이 흐른 현재. 일본을 넘어서 이곳 한국에서까지 가장 유명하고 널리 읽히는 대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대단하진 않아도 친숙한


요즘은 참 대단한 추리소설이 많이 나온다. 특히, 인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소설들이 인기를 뜰고 있다. 그것에 비하면 <시노부 선생님, 안녕!>은 어딘지 모르게 어설픈 구석이 있다.

특히, 만화 <명탐정 코난>처럼 시노부 선생과 그녀의 주변 인물(뎃페이와 이쿠오 같은 그녀의 제자들)의 활약에 의해서 명쾌하게 사건이 해결되는 탐정 소설식 구성. 그로 인하여 범죄가 매우 가벼운 일상처럼 다가온다는 점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그려지는 자애로움1 그의 초기작품인 <시노부 선생님, 안녕!>에서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구나. 그것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변하지 않은 작가의 고유한 특성이구나 싶은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 아닐까... 그렇게 평하고 싶다.

  1. <신참자>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상황에서 마주치게 되는 진실. 오히려 공개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는 비밀을 지켜주려는 등장인물의 의리. 겉으로는 티격태격해도 속으로는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끔 하는 수줍은 배려심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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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블 이야기
헬렌 맥도널드 지음, 공경희 옮김 / 판미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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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의 아버지는 뷰파인더를 통해 진실을 파헤쳤다. 120. 그것을 자신의 기억이 아닌 세상의 기억에 아로새겼다. 그녀의 아버지의 삶은 없어지는 것을 다루는 게 아니라 사라지는 것을 막는 삶이었다. 아버지는 생물학적인 아버지이기 이전에 그녀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법(사진, 뷰파인더, 진실, 정직)을 가르쳐 준 절대적인 스승으로서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메이블 이야기를> 펼쳤을 때, 정직한 아버지는 그녀의 곁을 이미 떠난 뒤였다. 그는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 되었고, 책을 읽는 나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만 그녀의 아버지를 잠깐 동안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메이블 이야기>의 곳곳에서 아버지를 찾으러 다녔고,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놓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이것이 그녀의 상실감이 극에 달한 이유였다.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빈 공간이 너무나 컸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부재를 메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아버지의 온화함이 있었던 어린 시절과 아버지를 잃은 차가운 현재를 이어주는 아주 특이한 접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참매였다. 그녀는 참매 사육과 참매에 관한 서적을 탐독했었고, 아버지를 기억하며 또 다시 그것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라는 기억과 상실이라는 연장선에서 그녀는 메이블이라는 실존에서의 참매와 만나게 된다.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 이런 불안이 그녀의 정신 일부를 잠시 밖으로 빠져나가게 했고, 그 빈 공간을 참매에 대한 집착으로 채워야 했다.

참매는 그저 단순한 동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기억이 묻어있는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참매와 참매와 함께 하는 하루하루는 옳았어야 했다. 따라서 T.H. 화이트라는 인물이 쓴 매와 관련된 실패의 기록을 읽으며, 그것은 정보가 부족했던 과거의 오류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오류를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H is for Hawk. 알파벳 H로 시작하는 수많은 단어 중에서 그녀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Hawk. 단 하나였다. 이로써 참매는 그녀의 모든 것이 되었고,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빠져들어야 할 하나의 가치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바로 Hawk.

 

하지만.. 이 책은 개인의 고유한 가치와 그것을 계발하는 한 인간의 정신을 다룬 작품이 아니었다.

 

257. 메이블은 내 상처를 태워 없애는 불꽃. 매 안에는 후회나 깊은 슬픔이 있을 수 없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매는 오직 현재에 살았고, 그게 나의 피난처였다. 나는 매의 줄무늬 있는 날개의 움직임에 몰두하는 것으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매 안에 죽음이라는 퍼즐이 붙잡혀 있다는 것을 그 안에 나 또한 붙잡혀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2.

 

281. 마음을, 기술을, 영혼을 하나의 일에 매 훈련에, 경마에서 기술을 배우거나 카드 게임에서 숫자를 맞추는 데 쏟고 난 다음 그것에 대한 통제를 포기해 버린다. 그게 함정이다. 일단 주사위가 던져지고 말이 달리고, 매가 주먹에서 떠나면 자신을 그저 운에 맡길 뿐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 해 온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행운이 따를 거라며 달랜다. 매는 사냥감을 잡고, 카드는 패가 딱 맞고, 말은 1등으로 들어올거라고. 이 작은 망설임이라는 공간에 있기가 어색하다. 세상의 자비에 완전히 맡겨진 안전한 기분이 든다. 이것은 쾌감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헤맨다. 그리고 운명의 작은 가망성들을 향해, 세상이 나가는 그곳을 향해 달려간다. 그것은 미끼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와 슬픔으로 무력해지면 마약, 도박, 술에 빠진다. 망가진 영혼의 목덜미를 뒤고 개처럼 흔들어 대는 중독에 빠진다. 메이블과 나갔던 그날 나는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뒤집어보면, 그녀는 자신의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매의 허락도 없이 매를 그녀의 삶 한 가운데 끌어들였고, 메이블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특별한 존재로 정의했다. 그녀는 혼자 사랑에 빠졌고 중독되었다. 매는 인간과 감정의 교류를 할 수가 없는 동물인데.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매를 반려동물로 취급하였다. 매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메이블 이야기>는 상실에서 매에 대한 집착을 통한 현실 도피. 그로 인하여 그녀의 의식은 아버지의 부재를 극복하는 대신 세상과 거리를 두고, 눈앞의 적을 제거하는 매의 습성을 닮아가는 자신. 토끼의 목을 비트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들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H is for Hawk. 라는 공식은 환상이었던 것이다. 현실은 H isn’t for Hawk. 인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그녀는 상실의 빈 곳을 채우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이 깨졌음을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행위가 중독이었음을 깨우친 그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의사를 찾아가고, 메이블과 일체감을 느꼈던 기억에서 벗어나 다시금 타자로 분리된다.

 

428. 나는 매를 내 세계에 데려왔고 그러다가 내가 매의 세계에 사는 체 했다. 이제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는 분리된 채 행복하게 각각의 삶을 공유한다.

 

<메이블 이야기>는 안식처로 삼고 있던 울타리가 무너지면 뛰어난 두뇌를 소유한 인간이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혼란스러움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임을 말한다. 어쩌면 똑똑한 사람일수록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중독에 쉽게 빠질 수 있고, 그것이 어쩌면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도 알려준다.

 

중독이라는 개념이 술과 도박과 마약과 게임 같은 대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 친화적인 취미. 매를 기르는 것. 이것은 분명 인간에게 좋은 영향을 줄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생물은 자연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고, 인간은 또 인간의 삶을 살아야단다 것을 인정해야만 애완 동물에 대한 지나친 애정 투사라는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작품이지만. 뭐랄까.. 아름다운 문장과 묘사를 위해 글의 중심이 흔들리는 경향이 있는 편이고, 또 이미지화가 어려워서 읽는 것 자체는 버거운 편에 속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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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J의 다이어리
전아리 지음 / 답(도서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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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으면 행복해지는 책


작년 즈음. 누군가 물어본 적이 있다. 읽으면 행복해지는 책 좀 추천해달라고. 그때 나는 그런 책이 어디 있냐며 책꽂이 한켠에 꽂혀있는 가브리엘 루아의 <싸구려 행복>이라는 제법 묵직한 책을 떠넘기듯 던져주었다. 사실 그 책은 읽지 않은 책이었고, 돌려받고 난 지금도 여전히 읽지 않은 책이다. 결국, 나 역시 지금까지 읽으면 행복해지는 책을 찾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때 전아리 작가의 <간호사 J의 다이어리>라는 소설이 존재했었다면. 이 이야기 정도면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에 지친 영혼에 조금이나마 청량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그에게 선뜻 추천해 줬을 것 같다.  


2. 작가 전아리


전아리 작가는 몇 전에. <주인님, 나의 주인님>이라는 단편집으로 만난 적이 있다. 냉소가 스며있는 문장들. 폭력이라는 현실을 날카롭게 찔러오는 문장을 읽으면서 감각이 대단하다고 느꼈었다.

 

56. 방관하는 자보다 더 나쁜 건 섣불리 끼어드는 자다. 무관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쭙잖은 관심이다. 나를 패는 패거리보다도 쥐새끼처럼 몰래 동영상을 촬영한 놈이 더 원망스럽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자를 억지로 도우려는 것은 경솔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진배없다.


270. 고통 앞에 무너지는 건 별로 질책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 있으면 도망치거나 그냥 주저앉아 버리라고 권하고 싶다. 맞서서 한계를 뛰어넘는 재미도 좋겠지만, 때론 도피하는 즐거움도 나쁘지 않다. 도피는 포기와는 다르다. 언제나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는 강박 또한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다.


<주인님, 나의 주인님>의 소설 속 문장(56)과 작가의 말(270)을 옮겨봤다. 그녀는 고통을 앞에 두고 견디고 극복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고통에 직면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고통 앞에서 도망칠수도 있고, 주저앉아버리는 선택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3. 안식처. 몰라 병원


<간호사 J의 다이어리>에서 그녀는 다른 관점에서 고통을 바라본다. 이 작품에서 그녀를 지배하는 고통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 사람을 병들게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인간 관계의 폭력이 아니라. 떼어놓고 보면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 자체의 외로움으로부터 찾아온다.

나몰라 병원이라는 부르는 곳에 드러누운 환자들 뿐만 아니라 강호사와 의사까지도 모두 하나 같이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외로웠기 때문에 평소보다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 바로 앞에 있는 누군가에게 자기를 많이 알아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21.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나몰라 병원>이라 부른다. 어지간히 아파서 시내에 나갈 힘이 없거나, 단골 환자들을 제외하고는 동네 사람들조차 개인병원에 갔으면 갔지, 이 병원은 못미더워 하는 편이다.(중략) 다른 병원이라면 코드 레드는 환자가 위독할 때나 쓰이는 신호이지만 우리 병원에서 코드 레드란 주로 간호사들이 위험해질 때 쓰이는 편이다. 


때문에 나몰라 병원에서의 일과는 그야말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간호사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 실연당한 아픔을 분노로 승화시켜 복수를 계획하려다가 얼떨결에 진짜 간호사가 되어버린 정소정 간호사. 앞으로해도 정소정. 뒤로해도 정소정. 그녀는 떠들썩한 나몰라 병원에서 가족같은 환자와 티격태격 하면서 간호사라는 직업에 충실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시에. 한 인격체로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특히, 외로움에 대처하는 방법도 배운다.


그녀의 일기를 조금 옮겨봤다.

차츰 단단해지는 그녀의 내면을 읽어보자.


176. 이 침착함은 나의 커리어다. 내가 알게 모르게 쌓아온 능력인 것이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는 걸 보는 순간 어쩌면 이 사람을 살릴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안도했다. 내가 뒤뜰에 나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격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라서 다행이라고.


병, 통증, 죽음은 환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 낯선 방문객은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에게도 영향을 준다. 누군가가 피를 철철 흘리거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만큼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인간이라는 범위안에서 인정할 수 있는 정상인 중에는 없을 것이다. 죽음을 목격하거나 처참한 사고를 보고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의연함을 되찾을 수 있는 이유? 우리는 환자에 대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병원을 떠나고 나면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모든 상황을 회피하며 일자리를 그만둘 것이고, 언젠가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이 일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자, 이제 어리광은 그만 부리자'라고 마음먹고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난 순간 동석이나 닥터 박에 대해 쌓여 있던 불편한 심정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사라졌다.


198. 포기하는 것도, 계속 가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다. 누구도 그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만류할 권리는 없다. 때로는 타인의 부축 없이 혼자 만의 힘으로 일어서야 할 때도 있다. 힘든 순간도 삶의 일부다. 그 순간을 스스로 이겨낼 줄 알아야만 삶은 비로소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거다.


205. 퇴원한 환자가 다시 통원 치료를 받으러 오지 않는 한, 우리 의료진들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렇지만 서운하거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만남은 짧을수록 행복한 것이므로.


206. 어딘가 아프다면, 혼자서 참지 말고 가던 길을 멈추어 병원으로 들어와야 한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212.

왜 꼭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하느냐면 그에 대한 정답은 없다.

모든 건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고, 그 선택들이 모여 당신의 삶을 만든다.

그 삶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삶이냐고?

당연히, 나도 모른다.


<간호사 J의 다이어리>의 문장들. 어떻게 보면 단순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각 문장과 그녀의 생각들이 작품 속 이야기와 어우러져서 거부감없이 다가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이 작가는 여전히 대단하구나. 게다가 작품의 성격도 지난 작품보다 훨씬 밝고, 부드러워져서 더 많은 독자가 그녀를 좋아해 주겠구나 싶은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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