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읽으면
행복해지는 책
작년 즈음.
누군가 물어본 적이 있다. 읽으면 행복해지는 책 좀 추천해달라고. 그때 나는 그런 책이 어디 있냐며 책꽂이 한켠에 꽂혀있는 가브리엘
루아의 <싸구려 행복>이라는 제법 묵직한 책을 떠넘기듯 던져주었다. 사실 그 책은 읽지 않은 책이었고, 돌려받고
난 지금도 여전히 읽지
않은 책이다.
결국, 나
역시 지금까지
읽으면 행복해지는
책을 찾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때 전아리 작가의 <간호사 J의 다이어리>라는 소설이 존재했었다면. 이 이야기 정도면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에 지친 영혼에 조금이나마 청량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그에게 선뜻
추천해 줬을 것 같다.
2.
작가 전아리
전아리
작가는 몇 년
전에.
<주인님,
나의 주인님>이라는 단편집으로 만난 적이 있다. 냉소가
스며있는 문장들. 폭력이라는 현실을
날카롭게
찔러오는 문장을
읽으면서 감각이
대단하다고
느꼈었다.
56.
방관하는 자보다 더 나쁜 건 섣불리 끼어드는 자다. 무관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쭙잖은 관심이다. 나를 패는 패거리보다도 쥐새끼처럼 몰래
동영상을 촬영한 놈이 더 원망스럽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자를 억지로 도우려는 것은 경솔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진배없다.
270.
고통 앞에 무너지는 건 별로 질책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 있으면 도망치거나 그냥 주저앉아 버리라고
권하고 싶다. 맞서서 한계를 뛰어넘는 재미도 좋겠지만, 때론 도피하는 즐거움도 나쁘지 않다. 도피는 포기와는 다르다. 언제나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는 강박 또한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다.
<주인님,
나의 주인님>의 소설 속 문장(56)과 작가의 말(270)을 옮겨봤다. 그녀는
고통을 앞에 두고 견디고
극복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고통에 직면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고통 앞에서 도망칠수도
있고,
주저앉아버리는 선택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3.
안식처. 나몰라
병원
<간호사
J의 다이어리>에서 그녀는 다른 관점에서 고통을 바라본다. 이 작품에서 그녀를 지배하는 고통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 사람을 병들게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인간 관계의 폭력이 아니라. 떼어놓고 보면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 자체의 외로움으로부터
찾아온다.
나몰라
병원이라는 부르는 곳에
드러누운 환자들 뿐만 아니라 강호사와 의사까지도 모두 하나
같이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외로웠기 때문에 평소보다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 바로 앞에 있는 누군가에게 자기를 많이 알아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21.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나몰라 병원>이라 부른다. 어지간히 아파서 시내에 나갈 힘이 없거나, 단골 환자들을 제외하고는 동네 사람들조차
개인병원에 갔으면 갔지, 이 병원은 못미더워 하는 편이다.(중략) 다른 병원이라면 코드 레드는 환자가 위독할 때나 쓰이는 신호이지만 우리
병원에서 코드 레드란 주로 간호사들이 위험해질 때 쓰이는 편이다.
때문에
나몰라 병원에서의 일과는 그야말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간호사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 실연당한 아픔을 분노로 승화시켜 복수를
계획하려다가 얼떨결에
진짜 간호사가
되어버린 정소정 간호사. 앞으로해도 정소정. 뒤로해도 정소정. 그녀는
떠들썩한
나몰라 병원에서
가족같은 환자와 티격태격 하면서 간호사라는
직업에 충실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동시에.
한 인격체로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특히, 외로움에 대처하는 방법도 배운다.
그녀의
일기를 조금 옮겨봤다.
차츰
단단해지는
그녀의 내면을 읽어보자.
176.
이 침착함은 나의 커리어다. 내가 알게 모르게 쌓아온 능력인 것이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는 걸 보는 순간 어쩌면 이 사람을 살릴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안도했다. 내가 뒤뜰에 나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격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라서 다행이라고.
병,
통증, 죽음은 환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 낯선 방문객은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에게도 영향을 준다. 누군가가 피를 철철 흘리거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만큼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인간이라는 범위안에서 인정할 수 있는 정상인 중에는 없을
것이다. 죽음을 목격하거나 처참한 사고를 보고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의연함을 되찾을 수 있는 이유? 우리는 환자에 대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병원을 떠나고 나면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모든 상황을 회피하며 일자리를 그만둘 것이고, 언젠가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이 일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자, 이제 어리광은 그만 부리자'라고 마음먹고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난 순간 동석이나 닥터 박에 대해 쌓여 있던 불편한
심정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사라졌다.
198.
포기하는 것도, 계속 가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다. 누구도 그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만류할 권리는 없다. 때로는 타인의 부축 없이 혼자 만의 힘으로
일어서야 할 때도 있다. 힘든 순간도 삶의 일부다. 그 순간을 스스로 이겨낼 줄 알아야만 삶은 비로소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거다.
205.
퇴원한 환자가 다시 통원 치료를 받으러 오지 않는 한, 우리 의료진들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렇지만 서운하거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만남은 짧을수록 행복한 것이므로.
206.
어딘가 아프다면, 혼자서 참지 말고 가던 길을 멈추어 병원으로 들어와야 한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212.
왜
꼭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하느냐면 그에 대한 정답은 없다.
모든
건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고, 그 선택들이 모여 당신의 삶을 만든다.
그
삶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삶이냐고?
당연히,
나도 모른다.
<간호사
J의 다이어리>의 문장들. 어떻게 보면 단순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각 문장과 그녀의 생각들이 작품 속 이야기와
어우러져서 거부감없이 다가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이
작가는 여전히
대단하구나. 게다가
작품의 성격도 지난
작품보다 훨씬 밝고,
부드러워져서 더 많은 독자가 그녀를 좋아해 주겠구나 싶은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