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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1.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단순하다. 1부의 제목이 읽기. 2부의 제목이 쓰기이길래 그냥 집어들었다. 이 제목을 통해서 내가 알고 싶었던 의미란 'how to'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는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글을 쓰는가? 나는 그게 궁금했다. 사르트르의 <말>에서 그것을 굳이 찾으라고 하면 못찾을 것도 없지만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가 아니었다.
2.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 자서전이다. 읽기와 쓰기라는 소제목만 보고 읽은 책인데 자서전이었다. 59세에 발표한 이 작품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서술한다. 사건 위주의 서술이 아니라 생각 위주의 서술이다. 사르트르의 깊은 성찰과 빛나는 문장을 읽을 수 있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삶을 살아왔는지 아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3.
이 책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책이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로 태어나서 우여곡절을 거치며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없는 실존을 사르트르라는 존재의 본질로 빚어나가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여러가지 시행착오들은 진정성있게 다가온다.
4.
이제 본론을 시작해보자.
인정욕구. 사람들은 누구나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한다. 보통 사람들은 인정욕구(타인의 기대)를 충족하며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자신의 내면에 인정욕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에 큰 좌절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본질이 아닌 타자가 원하는 본질. 엄밀하게 말해서 할아버지가 요구하는 본질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어른들에게 신동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그렇게 해서 남들의 환심을 구걸했다. 이러한 감정들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아주 깊게 생각한다.
이 문장들은 그런 점을 토로하는 문장들이다.
33. 나는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다. (중략) 나쁜 소문이나 안 날까 무척 두려워했던 나는 오직 나의 훌륭한 행동을 통해서만 남을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고는 그런 안이한 승리를 스스로 마련하고는 자기의 성질이 착하다고 혼자 믿어버린 것이다. (중략) 나는 악이 발붙이기에는 나쁜 땅이다. 착한 연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애써 노력하거나 스스로를 억제할 필요가 없었다.
34. 세대의 싸움에서 흔히 어린애와 노인은 한패가 되는 법이다. 어린애가 신탁을 내리면 노인이 그것을 푼다. 자연은 말을 하고 경험은 통역을 하는 것이다.
36.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창조해 나간다. 나는 증여자인 동시에 증여물이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나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 알았겠지만, 죽었으니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남들의 사랑에 함빡 젖어 있으니까 권리가 없고 또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주니까 의무도 없다. 단 하나의 임무가 있다면 그것은 환심을 사는 것이다. 만사를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44. 사람은 저항함으로써만 자신을 확정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속속들이 불확정적인 존재였다.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앞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사랑한 일이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워하는 동시에 환심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또한 환심을 사려는 동시에 사랑할 수도 없는 법이니까.
나는 나르시스였을까? 아니, 나르시스조차 아니었다. 남의 환심을 사는 데만 너무도 골몰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으니 말이다.
93. 결국 나는 가짜 어린애였고, 가짜 샐러드 바구니를 들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내 행위가 한낱 시늉으로 변질하는 것을 느꼈다.(중략) 어릿광대 짓으로 어른들의 비위를 맞추기만 했던 내가 어찌 그들의 속내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겠는가?
5.
54. 할아버지의 서재는 거울 속에 사로잡힌 세계였다. 그것은 현실의 세계와 똑같은 무한한 부피와 다양성과 의외성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터무니없는 모험에 나섰다. 책이 눈사태처럼 쏟아져내려 그 속에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의자와 책상 위로 기어올라가지 않고는 못 배겼다.
결과적으로. 유년시절의 그는 타인의 환심에 굶주렸던 수동적인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책더미에 파묻힌 점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결정적인 장면이긴 하지만. 완벽을 위해서는 하나의 오점마저도 용서할 수 없었던 사르트르는 인정욕구의 그늘진 면을 바라본다.
완벽한 것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생각한 그의 관념은 그것을 쫓기 위한 필생의 노력이 이어질 것을 예고했다. .
56. 사람과 짐승이 모두 '진짜로' 거기 있었다. 삽화는 그들의 몸이고 글은 그들의 영혼이며 독특한 본질이었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짐승은 그 원형과 다소간 닮은 점은 있지만 원형의 완전성에는 못 미치는 흐리멍덩한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정신 상태로 보아 플라톤주의자가 된 나는 지식에서 출발해서 사물로 향했다. 나로서는 사물보다도 관념이 한결 현실적이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관념이 먼저 주어졌고, 더구나 사물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그것은 동화되고 분류되고 규정되고 사색된 세계, 그러면서도 아직도 무서운 세계였다. 나는 책에서 얻은 무질서한 경험과 현실적인 일들의 부조리한 흐름을 혼동했다. 나의 관념론은 바로 여기에 유래한 것이며 나는 그것을 청산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한편, 어머니와 할머니에 의하여 할아버지의 책장(뜻모를 어려운 책더미)에서 벗어나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는 책(81. 어머니는 나를 다시 어린이답게 만들어 줄 만한 책들을 구하기 시작했다)의 황홀경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러한 책을 읽으며 어린 사르트르는 막연히영웅을 꿈꾸게 된다. 영웅 (초인, 철인 )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낙관적인 세계를 꿈꾼다. 어린 나이의 사르트르는 그곳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했다.
82. 그것은 순수한 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선 앞에 무릎 꿇기 위해서만 나타난 악이어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면 모든 것이 다시 제대로 자리 잡게 되어 있었다.
84. 이러한 잡지와 책을 통해서 나는 내 속에 가장 깊이 스며든 환상인 낙천주의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6.
영웅을 꿈꾸고, 영웅이 되려는 그의 상상력은 책을 읽는 것을 뛰어넘어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나중에 이르러서는 직접 글을 쓰는 행위로 전이된다. 보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의 전환. 여기에 여러 변곡점이 숨겨져 있다.
95. 사람들은 내게 우리 모두가 서로 연극을 꾸미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타일렀고 나도 그 점을 인정했다. 다만 나는 그 주역을 맡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청천벽력에 망연자실한 순간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가짜 주역을 연출하고 있음을 깨달은 때였다. 대사도 있었고 여러 차례 무대에 얼굴을 내놓기도 했지만 정작 나 자신을 보여 줄 장면은 없었다. 한마디로 내 역할은 어른들의 상대역에 불과했다.
124. 모든 일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다. 상상적인 아이였던 나는 상상으로 나를 방위한 것이다. 나는 한결같이 정신적 유희만을 일삼았다. 나는 잘못 등장했다가 병풍 뒤로 물러가고, 온 세계가 조용히 나를 요구하는 바로 그 순간에 알맞게 다시 출현하곤 했던 것이다. (중략) 이제는 남의 환심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압하는 것이 목표였다.
136. 나는 한없이 흐뭇했다. 내가 살고 싶은 세계를 발견했고, 절대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등이 다시 켜졌을 때의 불안은 또 어떠했던가! 그 등장인물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는데, 그들은 그들의 세계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들의 승리를 내 골수에 사무치도록 느꼈지만, 그것은 다만 그들의 승리였고 내 것은 아니었다. 거리로 나서자 나는 내가 여분의 존재라는 것을 다시 느껴야 했다.
그는 책과 영화에서 이상적인 세계를 발견했고, 그 세계를 눈으로 훑어가면서 절대의 경지와 쾌감에 도달했지만. 책을 덮거나 전등이 꺼지는 순간 그 존재들은 사라지는 허무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 허무함은 어린 사르트르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 주위에서 주인공의 승리를 응원하는 여분의 존재라는 것을 상징하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이 감정은 낯선 감정이 아니었다. 몸이 약한 사르트르로서는 이러한 허무함과 여분의 존재라는 감정은 현실에서도 종종 느끼는경험이었다. 결국, 책과 영화를 보는 것. 이러한 수동적인 형태의 생활로는 그가 원하는 본질에 닿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보는 것이 수동적이라면 쓰는 것은 능동적이다. 154페이지의 인용구. 그의 상상이 상상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글로 현상화가 일어날때의 전율을 읽으면 보는 것과 쓰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게된다. 그는 말과 글을 통하여 세상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책 속의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안에서 그는 마침내 절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절대자로서의 쾌감을 마음껏 즐겼다.
154.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기쁨이 넘쳐흘러서 금방 펜을 놓았다. 속임수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말이 사물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써 놓은 꼬불꼬불한 작은 글씨가 도깨비불과 같은 빛을 잃고 차츰차츰 탁하고 단단한 물질처럼 굳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를 흥분시켰다. 그것은 허상의 실상화였다. 내가 호명만 하면 사자도 제2 제정 시대의 대장도 또 사막 지대의 베두인도 어김없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글자와 한 몸이 되어 영원히 사로잡혀 있게 될 운명이었다.
166.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 글을 쓰기 전에는 거울 높이밖에는 없었다. 한데 최초의 소설을 쓰자마자 나는 한 어린애가 거울의 궁전 안으로 들어선 것을 알았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그런들 어떠랴, 나는 기쁨을 알았다. 이중의 노리개와 같던 어린애가 이제 자기 자신과 사적인 데이트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7.
쓰는 것은 쾌감을 불러왔지만, 진정한 쓰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그의 고백은 '깊이에의 강요'와 비슷하다. 상상하고 글로 써내려간 글 안에서만 영웅이 되는 것에 만족했던 어린 사르트르는 이제 조금씩 자신의 글을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한마디로 위대한. 그것을 넘어 절대적인 작가를 욕망한다.
180. 위대한 작가는 편력기사와 닮은 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남들로부터 뜨거운 감사의 표현을 자아내는 사람들이다.
183. 벌써 나의 존재를 요구하는 곳이 어디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너무 이르다. 나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욕망을 채워 줄 아름다운 대상이다. 그러니 앞으로 얼마 동안은 무명으로 남아 있어도 전혀 상관없다. 때로는 할머니가 대여 도서관으로 나를 끌고 갔다. 생각에 잠긴 듯한 키 큰 부인들이 불만스러운 낯을 하고 마음을 채워 줄 작가를 찾아서 이벽에서 저 벽으로 조용히 왔다 갔다 했다. 나는 그 거동이 재미있었다. 물론 그런 작가가 있을 리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니까 말이다. 아직은 그들의 치맛자락에 묻혀 있는 꼬마, 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 꼬마니까 말이다
183에 적힌 그의 자신감을 봤을 때, 사르트르는 언젠가는 반드시 위대한 작가가 될 인물이었다. 184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마침내 사르트르라는 존재가 스스로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을 알린다.
184. 샤를 슈바이체르가 할아버지라는 것이 분명하듯이, 내가 작가라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날 때부터 그랬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불안이 이와 같은 흥분을 좀먹는 때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보증해준 것으로 믿었던 그 재주가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는 싫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의 사명이라고 치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를 밀어주는 사람도, 나를 진실로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어서 그런 사명을 나 스스로 꾸며 냈다는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세계로부터 불쑥 출현하여, 남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는 그런 '타자로서의 나'가 되기 위하여 '자연'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나는 내 '운명'을 마주 보았고 똑바로 인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자유'였다. 나는 내 자유를 마치 외적인 힘처럼 내 앞에 우뚝 세워 놓았던 것이다. 요컨대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완전히 속일 수도 없었고 미몽에서 완전히 깨어날 수도 없었다. 나는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망설임은 전부터 지녀 오던 문제를 다시 야기했다.
이런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사르트르라는 존재의 '본질'. 이것의 깨달음은 불멸의 존재를 꿈꾸는 단계로 한단계 더 발전한다. 죽음 이전의 삶이란 이란 자신이 위대한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고, 죽음 이후의 삶이란 살아있는 동안의 노력이 제대로 평가될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
207. 나는 죽음에 현혹되었다. (중략) 나는 죽음과 영광을 같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내 목표로 삼았다. 나는 죽고 싶었다. 때로는 무서운 생각이 이런 초조감을 짓눌렀지만 그 공포가 오랫동안 계속된 일은 없었다. 나의 거룩한 기쁨이 다시 태어나, 나는 벼락이 떨어져 뼈까지 홀랑 타 버릴 순간을 기다렸다. 우리의 깊은 의지는 서로 떨어질 수 없이 얽힌 기도와 도피로 이루어져 있다. 남들로부터 생존의 구실을 얻기 위해서 글을 쓰겠다는 나의 주책없는 기도에는 비록 허풍과 거짓이 많았지만 동시에 어떤 현실성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 그 후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글을 쓰고 있지 않는가?
209. 나는 다시 태어나고 마침내 완전한 인간이 된다.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우렁차게 외치는 인간, 물질만이 지니는 단호한 부동성으로 자기 자신을 정립한 완전한 인간이 된다. 사람들이 나를 들고 열어 본다. 나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또 때로는 파닥거리게 한다. (중략) 나의 힘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서 악한 자를 쳐부수고 착한 자를 보호한다. 아무도 나를 잊을 수 없고 무시할 수도 없다. 나는 다루기 쉽지만 무서운 우상이다. 나의 의식은 조각조각 갈라진다. 잘 된 일이다. 다른 의식들이 나를 나누어서 지니니까 말이다. 남들이 나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그들의 눈 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이다. 남들이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가 보편적이면서도 독특한 언어로 변모해서 그 모든 사람들의 입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수백 만의 시선을 위해서 나 자신을 장래의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나는 가장 깊숙한 불안을 준다. 내게 손을 대려고 하면 나는 살짝 사라져 버린다. 나는 아무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곳에 '있다'. 인간의 기생충인 나는 나의 선심을 통해서 인간을 파먹고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나의 부재를 되살리게 한다.
8.
환심을 사려는 인간 -> 책과 영화를 통해 영웅을 상상하는 인간 -> 자신의 손끝으로 직접 영웅을 써내려가는 인간 -> 위대한 작가가 되려는 인간 -> 죽음을 초월한 존재가 되려는 인간
솔직히 말해서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다. 그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었고, 글을 써왔던 것이다. 이 마음가짐이 어느 순간에 시작되어서 얼마나 지속되어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광기와도 같은 이 집념은 그의 마지막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아주 조금은 그의 내면에 새겨져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제 그의 고백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268.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었다. 선택된 자, 지옥의 연대기 편집자, 자신의 원형질액을 들여다보는 유리와 강철로 된 사진 현미경이었다.
270.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도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은 그 속에 자기를 투사하고, 거기서 제 모습을 알아본다. 오직 이 비판적 거울만이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중략) 사람이란 신경병을 떨어 버릴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이라는 고질병에서 치유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닳고 지워지고 모욕당하고 따돌림당하고 묵살당한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온갖 특징은 50대 인간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대개의 경우 그것들은 어둠 속에 납작 엎드려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방심하기만 하면 당장 다시 고개를 들고 변장을 하고는 백일하에 뚫고 나온다. 나는 오직 나의 시대를 위해서만 글을 쓴다고 진심으로 주장하지만, 현재의 내 명성이 짜증스럽다.
272. 그런 이야기는 그만해 두자. 할머니 같으면 이렇게 말하리라.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 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 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죽음과 시대를 초월한 존재가 되려는 인간 -> 그저 묵묵히 쓰고자 하는 보통 존재의 인간
이 세 부분을 읽어보면 초인이 되려는 그의 욕망. 그의 글을 통하여 몇 세대 이후의 인간도 그를 잊지 못하고, 그를 기억하고, 그를 사랑하게끔. 그렇게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싶어하는 그의 욕망. 그가 '문학병'이라고 일컫는 그것이 많이 수그러들었음을 알 수 있다. 270에서 그는 그저 욕망에 의한 글쓰기가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글쓰기. 다음 시대가 아닌. 현재를 위한 글쓰기에 매진하려고 한다.
272에서는 초인과 철인에 대한 권위의식마저 벗어던진다. '엘리트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할머니의 말씀 덕분이기도 하고, 책에서 간략하게 서술하는 교우관계의 긍정적인 요소를 통하여 깨닫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에서는 272의 문장이 가장 중요한 문장이긴 하지만, 그가 272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겪었던 모든 생각들이 소중하다고 나는 느꼈다. 그가 문학병이라고 말한 그 광기마저도. 그러한 광기가 없었다면 '본질'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고, 깨달음도 없었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