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약속
로맹 가리 지음, 심민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로맹 가리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있는 <새벽의 약속>에는 절대적이며 위대한 '신'이 등장한다. 이 신은 인류를 전쟁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는 신들. 어리석음의 신 '토토슈' 와 절대진리의 신 '메즈자브카'. 그리고 편견과 증오의 신 '필로슈'를 혼자서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신이었다.


이토록 위대한 신이 로맹 가리를 탄생시켰다. 로맹 가리는 유대인이면서 러시아의 빈민으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상태로 태어났다. 신은 갓 태어난 로맹 가리를 품에 안고, 이상적인 국가. 프랑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신은 자신을 생함으로써 그를 길러냈다. 로맹 가리의 재능을 믿음으로 살펴주었으며. 그가 위대한 작가와 군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시련에 맞서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13. 나는 팔로 OOO의 어깨를 감싸 안고서, OOO를 위해 내가 벌이려고 하는 모든 투쟁들을 , 내가 내 인생의 새벽에 나 자신과 맺은 약속을 생각하였다. OOO 말이 다 옳았던 것이 되게끔 만들리라. OOO의 희생에 의미를 주리라, 저들과 당당히 세계의 소유권을 두고 겨루어 이긴 다음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는 약속을. 나는 걸음마를 할 때부터 저들의 권능과 잔인함을 알아보도록 너무도 단단히 배웠던 것이다.


로맹 가리는 인생의 어느 새벽에 한 약속을 평생 지키겠다고, 평생동안 신의 말씀을 따르겠노라 맹세한다. 왜냐하면, 신이 자신의 곁에 머무른다면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무사히 비껴나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정체모를 확신이긴 했지만 말이다.


46.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나는 항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고 위험과 대면하였다. 어떤 일도 내게 일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OOO의 해피엔드이므로, 인간이 절망적으로 세계에 부과하려하는 천칭의 균형 이론을 통해 나는 항상 자신을 OOO의 승리로 보았다. 


아래의 문장은 전쟁 중에 그를 찾아온 신의 목소리다. 이 목소리의 공통점은 로맹 가리의 의도대로 무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의 무의식으로부터 튀어나와 그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경고음을 알렸다.


318. OOO는 분개하였다. OOO는 잠시도 나를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OOO는 화를 내고 노발대발하고 항의하였다. 나는 OOO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OOO는 내 피의 혈구 하나하나에서 흥분하였고, 내 심장의 맥박마다 화를 내고 폭동을 일으켰으며, 나를 들볶고 무엇이든 해보라고 재촉함으로써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다. 

320. OOO의 모습은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OOO의 본성 중 가장 강한 무엇이 그때까지 내게 남아 있던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무엇을 결정적으로 눌러 이김으로써, OOO가, 광폭함과 흥분과 무절제와 공격성과 제스처와 드라마에 대한 취향 등 극단적 성격의 모든 면모들을 고스란히 발휘하며, 정말 나로 화해버렸던 것은, 그 이상하고 얼룩덜룩한 군중 속을 고독하게 헤매던 긴 시간 중 어느 때 였을 것이다.
 

321. OOO는 내가 가는 어디에도 따라다녔고, OOO의 목소리는 가차 없는 조롱을 품고 내 속에서 올라왔다. 


2.


159. 다른 수많은 낙오자들이 그렇게 하듯 문학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점점 더 웅변적이고. 점점 더 찬란하고, 점점 더 절망적인 가명으로 뒤덮인 노트들이 책상 위에 쌓여갔고, 단숨에 과녁을 꿰뚫고 싶은, 지체없이 성화를 훔쳐내어 의기양양하게 세계를 밝히고 싶은 욕망 속에서, 나는 책들의 표지 위에서 내게는 새로운 것들인 앙투안 드 셍텍쥐페리, 앙드레 말로, 폴 발레리, 말라르메, 몽테를랑, 아폴리네르 같은 이름들을 읽었다. 


로맹 가리는 우여곡절 끝에 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그가 문학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은 사르트르의 경우와는 달랐다. 사르트르처럼 운명이 저절로 그를 문학이라는 본질로 이끌지 않았다. 신은 가장 먼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다른 분야의 재능이 그에게 없음을 확인했다. 재능이 없어서 테니스 코트 위의 광대가 된 적도 있었다. 망신을 당하는 순간에도 요술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로맹 가리는 다른 수많은 낙오자들이 그렇게 하듯 문학쪽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고백한다.   


134. 마지막 공은 그의 한계 밖에 있으며 그의 모든 작품들은 그 고통스런 확인의 소산인 것이다. (...)

파우스트의 진정한 비극은 자기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다는 사실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비극. 그것은 당신을 위해 당신의 영혼을 사줄 악마가 없다는 사실이다. 구매자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건, 아무도 당신이 마지막 공을 손에 널을 수 있도록 도와주러 오지 않는 것이다. 


재능이 없다는 절박함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작가라는 꿈. 그것마저도 실패할 수 없었던 로맹 가리는 열심히 쓰고, 읽었다. 물론, 창조주의 기대에 부응하여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로맹 가리가 유일하게 부러웠던 점은 마지막 공을 잡을 수 없어도, 그의 재능을 사주고. 재능이 꽃피도록 기다려준 구매자가 바로 곁에 있었다. 아니. 마지막 공을 잡기까지의 그 인내와 노력을 높이 평가해준 구매자가 곁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3.


신의 가호속에서 그는 조금씩 성장한다. 로맹 가리가 재능을 발견하기 전의 이야기. 성스러운 작업에 임하고 있는 위대한 거장에 대한 추억에 대한 에피소드와 사랑을 알게 되지만 그 덕분에 인간은 어떤 것을 결정적으로 획득하거나, 또는 확고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간직할 수 없음을 깨닫는. 유년 시절의 순수함을 읽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로맹 가리의 성장을 보여주는 문장을 읽는 즐거움이 훨씬 컸. 특히, 165페이지의 유머에 대한 고찰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신에게 무조건 의지하는 방법 외에 유머로서 현실을 넘어뜨리고, 적들의 항복을 받아내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상징한다.  


165, 본능적으로 나는 유머라는 것을 발견해내었다. 현실이 우리를 찍어 넘어뜨리는 바로 그 순간에도 현실에서 뇌관을 제거해버릴 수 있는 완전히 만족스럽고 능란한 방법 말이다. 유머는 살아있는 동안 내내 나의 우정어린 동료였다. 진정으로 적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순간들. 그 순간들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유머 덕분이었다. (...)

나는 기꺼이 그 무기가 내 자신을 향하게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나' 나 '자아'를 통해 그 유머가 바로 우리의 근원적 조건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유머는 존엄성의 선언이요, 자기에게 닥친 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의 확인이다. 완전히 유머를 잃은 내 '친구들' 중의 어떤 이들은 나의 글, 나의 말 속에서 내가 이 중요한 무기로 하여금 내 자신을 향하게 하는 것을 보고 슬퍼한다. 유식한 그들은 마조히즘과 자기 혐오에 대하여 말하며, 나아가서는 내가 가까운 사람을 이 해방 작업에 끌어들이기라도 하면, 노출증과 상스러움에 대해 말한다. (...)


사실인즉, '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자아'를 과녁으로 삼지 않으며, 다만 그것을 뛰어넘는다. 인간 조건의 덧없는 모든 육화물들을 통해 내가 공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인간 조건 자체에 대해서요, 밖에서부터 우리에게 부여된 상황, 뉘른베르크의 어떤 법처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된 법에 대하여서 인 것이다. 


남들로부터 조금씩 작품을 인정받고, 전쟁 중에도 쓰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작가의 꿈을 계속해서 이어가던 도중. 결국, 로맹 가리는 마지막 공을 잡을 수 있도록 설계해놓은 커다란 재능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재능이었다.


244. 나의 자아 중심주의는 사실 어찌나 대단한 것인지 나는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나 자신을 발견하며, 그들의 상처 속에서 아파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짐승들, 나아가선 식물들에게까지 확산된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투우장에 모여 상처 입고 피 흘리는 황소를 전율도 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아니다. 나는 그 황소다. 


아울러 <유럽의 교육>과 <자기 앞의 생>에서 읽어낼 수 있었던 '인간됨의 명예'. 이것 또한 신이 그에게 선물한 큰 선물이 아닌가 싶다.


213. 내 책들이 모두 존엄성과 정의에의 호소로 가득 차 있고, 그 속의 인물들이 그토록 열심히, 그토록 소리 높여 인간됨의 명예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스물 두 살이 되도록 병들고 지친 늙은 여인의 노동에 의해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OOO가 무척 원망스럽다. 


4.


179. OOO가 내게 기대하고 있는 것을 이루어내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정의를 보지도 못한 채, 무게와 척도의 인간적 법칙을 하늘에 투영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OOO가 지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에겐 양식에의, 양풍에의, 순리에의 도전이요.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강도 짓이요. 경찰을 부르고 도덕과 법과 권위에 호소해도 좋을 무엇인 것 같이 생각되었다. 


<새벽의 약속>에서 로맹 가리는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신과의 작별의 순간을 걱정한다. 그의 불안함은 너무나 당연했다. 왜냐하면, 로맹 가리의 신은 로맹 가리처럼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신의 이름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로맹 가리는 어머니가 로맹 가리 당신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함을 느꼈고, 더욱 자신의 재능을 향해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의 욕심처럼 일이 풀리지 않는다.


250. 시계와 겨루는 내 경주는 절망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으며, 나의 문학은 그것을 반영하였다. 세상이 놀라서 입을 헤 벌리게 할 어떤 굉장한 꽹과리를 울리고 싶은 욕망 속에서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이상으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위대해지려 하다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과장에 지고 말았다. 모두에게 내 키를 깨닫게 하기 위해 발 끝으로 섬으로써, 나는 내 야망의 치수만을 보여주었다. 천재성을 보여주려 결심한 나머지, 내가 도달한 것은 재능의 결여뿐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을 느낄 때, 올바르게 노래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전쟁 중 내가 죽은 줄로 알았을 때 내 원고 중 하나를 평가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로제 마르탠 뒤 가르가 '성난 양'이라고 했던 것은 옳은 말이었다. 아마도 내 투쟁의 고통스런 성격을 간파했던지, OOO는 나를 돕기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였다.


그는 또 다시 좌절하고 있었다. 세상을 진정시키고, 다스릴 수 있는 유머의 힘을 발견하고, 세상의 모든 존재에서 자신과 닮은 점을 찾아내고, 그의 소설이 지닌 '인간됨의 명예'라는 빛나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로맹 가리는 여전히 마지막 공을 잡으려고 성급하게 글을 썼고, 설익은 원고지를 보며 슬퍼하고 있었다. 


좌절의 이유는 어머니의 남은 삶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기 때문이고, 반면에 그의 역사는 이제 시작되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로맹 가리에게는 신이었던 어머니의 존재는 그의 다급함을 간파하고, 로맹 가리의 의식 안에서 독립된 존재로 자리함으로써 그를 격려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가 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단순하다. 1부의 제목이 읽기. 2부의 제목이 쓰기이길래 그냥 집어들었다. 이 제목을 통해서 내가 알고 싶었던 의미란 'how to'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는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글을 쓰는가? 나는 그게 궁금했다. 사르트르의 <말>에서 그것을 굳이 찾으라고 하면 못찾을 것도 없지만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가 아니었다.


2.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 자서전이다. 읽기와 쓰기라는 소제목만 보고 읽은 책인데 자서전이었다. 59세에 발표한 이 작품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서술한다. 사건 위주의 서술이 아니라 생각 위주의 서술이다. 사르트르의 깊은 성찰과 빛나는 문장을 읽을 수 있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삶을 살아왔는지 아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3.


이 책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책이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로 태어나서 우여곡절을 거치며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없는 실존을 사르트르라는 존재의 본질로 빚어나가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여러가지 시행착오들은 진정성있게 다가온다.


4.


이제 본론을 시작해보자.

인정욕구. 사람들은 누구나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한다. 보통 사람들은 인정욕구(타인의 기대)를 충족하며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자신의 내면에 인정욕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에 큰 좌절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본질이 아닌 타자가 원하는 본질. 엄밀하게 말해서 할아버지가 요구하는 본질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어른들에게 신동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그렇게 해서 남들의 환심을 구걸했다. 이러한 감정들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아주 깊게 생각한다.


이 문장들은 그런 점을 토로하는 문장들이다.


33. 나는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다. (중략) 나쁜 소문이나 안 날까 무척 두려워했던 나는 오직 나의 훌륭한 행동을 통해서만 남을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고는 그런 안이한 승리를 스스로 마련하고는 자기의 성질이 착하다고 혼자 믿어버린 것이다.  (중략) 나는 악이 발붙이기에는 나쁜 땅이다. 착한 연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애써 노력하거나 스스로를 억제할 필요가 없었다. 

34. 세대의 싸움에서 흔히 어린애와 노인은 한패가 되는 법이다. 어린애가 신탁을 내리면 노인이 그것을 푼다. 자연은 말을 하고 경험은 통역을 하는 것이다. 

36.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창조해 나간다. 나는 증여자인 동시에 증여물이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나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 알았겠지만, 죽었으니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남들의 사랑에 함빡 젖어 있으니까 권리가 없고 또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주니까 의무도 없다. 단 하나의 임무가 있다면 그것은 환심을 사는 것이다. 만사를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44. 사람은 저항함으로써만 자신을 확정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속속들이 불확정적인 존재였다.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앞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사랑한 일이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워하는 동시에 환심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또한 환심을 사려는 동시에 사랑할 수도 없는 법이니까.  


나는 나르시스였을까? 아니, 나르시스조차 아니었다. 남의 환심을 사는 데만 너무도 골몰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으니 말이다.


93. 결국 나는 가짜 어린애였고, 가짜 샐러드 바구니를 들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내 행위가 한낱 시늉으로 변질하는 것을 느꼈다.(중략) 어릿광대 짓으로 어른들의 비위를 맞추기만 했던 내가 어찌 그들의 속내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겠는가?


5.


54. 할아버지의 서재는 거울 속에 사로잡힌 세계였다. 그것은 현실의 세계와 똑같은 무한한 부피와 다양성과 의외성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터무니없는 모험에 나섰다. 책이 눈사태처럼 쏟아져내려 그 속에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의자와 책상 위로 기어올라가지 않고는 못 배겼다.


결과적으로. 유년시절의 그는 타인의 환심에 굶주렸던 수동적인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책더미에 파묻힌 점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결정적인 장면이긴 하지만. 완벽을 위해서는 하나의 오점마저도 용서할 수 없었던 사르트르는 인정욕구의 그늘진 면을 바라본다.


완벽한 것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생각한 그의 관념은 그것을 쫓기 위한 필생의 노력이 이어질 것을 예고했다. .


56. 사람과 짐승이 모두 '진짜로' 거기 있었다. 삽화는 그들의 몸이고 글은 그들의 영혼이며 독특한 본질이었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짐승은 그 원형과 다소간 닮은 점은 있지만 원형의 완전성에는 못 미치는 흐리멍덩한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정신 상태로 보아 플라톤주의자가 된 나는 지식에서 출발해서 사물로 향했다. 나로서는 사물보다도 관념이 한결 현실적이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관념이 먼저 주어졌고, 더구나 사물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그것은 동화되고 분류되고 규정되고 사색된 세계, 그러면서도 아직도 무서운 세계였다. 나는 책에서 얻은 무질서한 경험과 현실적인 일들의 부조리한 흐름을 혼동했다. 나의 관념론은 바로 여기에 유래한 것이며 나는 그것을 청산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한편, 어머니와 할머니에 의하여 할아버지의 책장(뜻모를 어려운 책더미)에서 벗어나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는 책(81. 어머니는 나를 다시 어린이답게 만들어 줄 만한 책들을 구하기 시작했다)의 황홀경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러한 책을 읽으며 어린 사르트르는 막연히영웅을 꿈꾸게 된다. 영웅 (초인, 철인 )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낙관적인 세계를 꿈꾼다. 어린 나이의 사르트르는 그곳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했다.

82. 그것은 순수한 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선 앞에 무릎 꿇기 위해서만 나타난 악이어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면 모든 것이 다시 제대로 자리 잡게 되어 있었다.


84. 이러한 잡지와 책을 통해서 나는 내 속에 가장 깊이 스며든 환상인 낙천주의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6.


영웅을 꿈꾸고, 영웅이 되려는 그의 상상력은 책을 읽는 것을 뛰어넘어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나중에 이르러서는 직접 글을 쓰는 행위로 전이된다. 보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의 전환. 여기에 여러 변곡점이 숨겨져 있다.


95. 사람들은 내게 우리 모두가 서로 연극을 꾸미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타일렀고 나도 그 점을 인정했다. 다만 나는 그 주역을 맡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청천벽력에 망연자실한 순간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가짜 주역을 연출하고 있음을 깨달은 때였다. 대사도 있었고 여러 차례 무대에 얼굴을 내놓기도 했지만 정작 나 자신을 보여 줄 장면은 없었다. 한마디로 내 역할은 어른들의 상대역에 불과했다.


124. 모든 일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다. 상상적인 아이였던 나는 상상으로 나를 방위한 것이다. 나는 한결같이 정신적 유희만을 일삼았다. 나는 잘못 등장했다가 병풍 뒤로 물러가고, 온 세계가 조용히 나를 요구하는 바로 그 순간에 알맞게 다시 출현하곤 했던 것이다. (중략) 이제는 남의 환심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압하는 것이 목표였다. 


136. 나는 한없이 흐뭇했다. 내가 살고 싶은 세계를 발견했고, 절대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등이 다시 켜졌을 때의 불안은 또 어떠했던가! 그 등장인물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는데, 그들은 그들의 세계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들의 승리를 내 골수에 사무치도록 느꼈지만, 그것은 다만 그들의 승리였고 내 것은 아니었다. 거리로 나서자 나는 내가 여분의 존재라는 것을 다시 느껴야 했다. 


그는 책과 영화에서 이상적인 세계를 발견했고, 그 세계를 눈으로 훑어가면서 절대의 경지와 쾌감에 도달했지만. 책을 덮거나 전등이 꺼지는 순간 그 존재들은 사라지는 허무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 허무함은 어린 사르트르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 주위에서 주인공의 승리를 응원하는 여분의 존재라는 것을 상징하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이 감정은 낯선 감정이 아니었다. 몸이 약한 사르트르로서는 이러한 허무함과 여분의 존재라는 감정은 현실에서도 종종 느끼는경험이었다. 결국, 책과 영화를 보는 것. 이러한 수동적인 형태의 생활로는 그가 원하는 본질에 닿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보는 것이 수동적이라면 쓰는 것은 능동적이다. 154페이지의 인용구. 그의 상상이 상상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글로 현상화가 일어날때의 전율을 읽으면 보는 것과 쓰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게된다. 그는 말과 글을 통하여 세상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책 속의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안에서 그는 마침내 절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절대자로서의 쾌감을 마음껏 즐겼다.


154.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기쁨이 넘쳐흘러서 금방 펜을 놓았다. 속임수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말이 사물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써 놓은 꼬불꼬불한 작은 글씨가 도깨비불과 같은 빛을 잃고 차츰차츰 탁하고 단단한 물질처럼 굳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를 흥분시켰다. 그것은 허상의 실상화였다. 내가 호명만 하면 사자도 제2 제정 시대의 대장도 또 사막 지대의 베두인도 어김없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글자와 한 몸이 되어 영원히 사로잡혀 있게 될 운명이었다. 


166.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 글을 쓰기 전에는 거울 높이밖에는 없었다. 한데 최초의 소설을 쓰자마자 나는 한 어린애가 거울의 궁전 안으로 들어선 것을 알았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그런들 어떠랴, 나는 기쁨을 알았다. 이중의 노리개와 같던 어린애가 이제 자기 자신과 사적인 데이트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7.


쓰는 것은 쾌감을 불러왔지만, 진정한 쓰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그의 고백은 '깊이에의 강요'와 비슷하다. 상상하고 글로 써내려간 글 안에서만 영웅이 되는 것에 만족했던 어린 사르트르는 이제 조금씩 자신의 글을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한마디로 위대한. 그것을 넘어 절대적인 작가를 욕망한다.


180. 위대한 작가는 편력기사와 닮은 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남들로부터 뜨거운 감사의 표현을 자아내는 사람들이다. 


183. 벌써 나의 존재를 요구하는 곳이 어디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너무 이르다. 나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욕망을 채워 줄 아름다운 대상이다. 그러니 앞으로 얼마 동안은 무명으로 남아 있어도 전혀 상관없다. 때로는 할머니가 대여 도서관으로 나를 끌고 갔다. 생각에 잠긴 듯한 키 큰 부인들이 불만스러운 낯을 하고 마음을 채워 줄 작가를 찾아서 이벽에서 저 벽으로 조용히 왔다 갔다 했다. 나는 그 거동이 재미있었다. 물론 그런 작가가 있을 리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니까 말이다. 아직은 그들의 치맛자락에 묻혀 있는 꼬마, 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 꼬마니까 말이다


183에 적힌 그의 자신감을 봤을 때, 사르트르는 언젠가는 반드시 위대한 작가가 될 인물이었다. 184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마침내 사르트르라는 존재가 스스로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을 알린다.


184. 샤를 슈바이체르가 할아버지라는 것이 분명하듯이, 내가 작가라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날 때부터 그랬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불안이 이와 같은 흥분을 좀먹는 때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보증해준 것으로 믿었던 그 재주가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는 싫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의 사명이라고 치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를 밀어주는 사람도, 나를 진실로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어서 그런 사명을 나 스스로 꾸며 냈다는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세계로부터 불쑥 출현하여, 남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는 그런 '타자로서의 나'가 되기 위하여 '자연'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나는 내 '운명'을 마주 보았고 똑바로 인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자유'였다. 나는 내 자유를 마치 외적인 힘처럼 내 앞에 우뚝 세워 놓았던 것이다. 요컨대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완전히 속일 수도 없었고 미몽에서 완전히 깨어날 수도 없었다. 나는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망설임은 전부터 지녀 오던 문제를 다시 야기했다.


이런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사르트르라는 존재의 '본질'. 이것의 깨달음은 불멸의 존재를 꿈꾸는 단계로 한단계 더 발전한다. 죽음 이전의 삶이란 이란 자신이 위대한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고, 죽음 이후의 삶이란 살아있는 동안의 노력이 제대로 평가될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


207. 나는 죽음에 현혹되었다. (중략) 나는 죽음과 영광을 같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내 목표로 삼았다. 나는 죽고 싶었다. 때로는 무서운 생각이 이런 초조감을 짓눌렀지만 그 공포가 오랫동안 계속된 일은 없었다. 나의 거룩한 기쁨이 다시 태어나, 나는 벼락이 떨어져 뼈까지 홀랑 타 버릴 순간을 기다렸다. 우리의 깊은 의지는 서로 떨어질 수 없이 얽힌 기도와 도피로 이루어져 있다. 남들로부터 생존의 구실을 얻기 위해서 글을 쓰겠다는 나의 주책없는 기도에는 비록 허풍과 거짓이 많았지만 동시에 어떤 현실성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 그 후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글을 쓰고 있지 않는가?


209. 나는 다시 태어나고 마침내 완전한 인간이 된다.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우렁차게 외치는 인간, 물질만이 지니는 단호한 부동성으로 자기 자신을 정립한 완전한 인간이 된다. 사람들이 나를 들고 열어 본다. 나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또 때로는 파닥거리게 한다. (중략) 나의 힘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서 악한 자를 쳐부수고 착한 자를 보호한다. 아무도 나를 잊을 수 없고 무시할 수도 없다. 나는 다루기 쉽지만 무서운 우상이다. 나의 의식은 조각조각 갈라진다. 잘 된 일이다. 다른 의식들이 나를 나누어서 지니니까 말이다. 남들이 나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그들의 눈 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이다. 남들이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가 보편적이면서도 독특한 언어로 변모해서 그 모든 사람들의 입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수백 만의 시선을 위해서 나 자신을 장래의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나는 가장 깊숙한 불안을 준다. 내게 손을 대려고 하면 나는 살짝 사라져 버린다. 나는 아무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곳에 '있다'. 인간의 기생충인 나는 나의 선심을 통해서 인간을 파먹고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나의 부재를 되살리게 한다.  


8.


환심을 사려는 인간 -> 책과 영화를 통해 영웅을 상상하는 인간 -> 자신의 손끝으로 직접 영웅을 써내려가는 인간 -> 위대한 작가가 되려는 인간 -> 죽음을 초월한 존재가 되려는 인간

솔직히 말해서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다. 그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었고, 글을 써왔던 것이다. 이 마음가짐이 어느 순간에 시작되어서 얼마나 지속되어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광기와도 같은 이 집념은 그의 마지막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아주 조금은 그의 내면에 새겨져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제 그의 고백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268. 나는 로캉탱이었다. 나는 로캉탱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의 곡절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었다. 선택된 자, 지옥의 연대기 편집자, 자신의 원형질액을 들여다보는 유리와 강철로 된 사진 현미경이었다. 
 
270.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도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은 그 속에 자기를 투사하고, 거기서 제 모습을 알아본다. 오직 이 비판적 거울만이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중략) 사람이란 신경병을 떨어 버릴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이라는 고질병에서 치유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닳고 지워지고 모욕당하고 따돌림당하고 묵살당한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온갖 특징은 50대 인간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대개의 경우 그것들은 어둠 속에 납작 엎드려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방심하기만 하면 당장 다시 고개를 들고 변장을 하고는 백일하에 뚫고 나온다. 나는 오직 나의 시대를 위해서만 글을 쓴다고 진심으로 주장하지만, 현재의 내 명성이 짜증스럽다. 
 

272. 그런 이야기는 그만해 두자. 할머니 같으면 이렇게 말하리라.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 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 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죽음과 시대를 초월한 존재가 되려는 인간 -> 그저 묵묵히 쓰고자 하는 보통 존재의 인간


이 세 부분을 읽어보면 초인이 되려는 그의 욕망. 그의 글을 통하여 몇 세대 이후의 인간도 그를 잊지 못하고, 그를 기억하고, 그를 사랑하게끔. 그렇게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싶어하는 그의 욕망. 그가 '문학병'이라고 일컫는 그것이 많이 수그러들었음을 알 수 있다. 270에서 그는 그저 욕망에 의한 글쓰기가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글쓰기. 다음 시대가 아닌. 현재를 위한 글쓰기에 매진하려고 한다.


272에서는 초인과 철인에 대한 권위의식마저 벗어던진다. '엘리트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할머니의 말씀 덕분이기도 하고, 책에서 간략하게 서술하는 교우관계의 긍정적인 요소를 통하여 깨닫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에서는 272의 문장이 가장 중요한 문장이긴 하지만, 그가 272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겪었던 모든 생각들이 소중하다고 나는 느꼈다. 그가 문학병이라고 말한 그 광기마저도. 그러한 광기가 없었다면 '본질'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고, 깨달음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은희경 작가의 다섯번째 장편소설 <비밀과 거짓말>은 지방의 소도시 K읍에 관한 이야기다. 이곳은 소설 내내 K라는 이니셜로 표현한다. 작가의 실제 고향이 전북 고창이라 K라고 붙인 것은 아닐 것이다. K읍은 작가의 고향 뿐 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 고향을 뜻함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개개인. 각 존재의 근원이라고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겠다. 처음에는 읽으면서 K읍이 고향이 아니라 더 넓게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몇가지 점에서 국가보다는 고향이라는 개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K읍은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을 고향의 모습으로 현실화한 공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방의 소도시. 촌동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고향은 별볼일 없는 동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소설에서 K읍은 여행객들이 어디를 가기 위해 잠시 들렀다 가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원도 없고, 볼거리도 없기 때문에 K읍의 사람들은 인재를 키워내서 고장을 알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K읍 사람들이 인재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이자 사상이었다.


2.


양반사회 시스템의 신봉자이자 '가문의 전통'을 위해 살아가는<비밀과 거짓말>의 아버지인 정욱은 9대째 K읍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지역유지의 후손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씨가문의 막내아들이다, 정욱은 막내로 태어나는 바람에 가문의 재산을 그렇게 많이 상속받진 못했다. 그럼에도 시대를 읽는데 능한 정욱의 재주와 임기응변. 거기에 덧붙여 가문의 영향력으로 3공시대에 건축업으로 성공하여 지역 내의 기반을 닦는다. 그의 활약상이 소설에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그런 정욱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1960년대 초에 태어났다고 명시(22P)된 이 두 아들의 이름은 영준과 영우다.


이 두 인물은 전통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는다. 격렬하게 저항한다. 그들이 가문의 전통과 맞서는 이유. 소설의 선후관계가 명확하지 않은데, 정리해보면. 정씨가문의 첫째 아들. 즉 정욱의 첫째 형이자 집안의 장손이 단명하여, 영우가 정씨가문의 장손으로 입적되야 했기 때문에 이제 더는 형과 아버지와 한편이 아니라는 강압적인 명령. 그것에 어떤 부조리를 느꼈을 수도 있다.


96. 영우는 대나무집이 보이면 언제나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 무렵의 영우는 자기 편이 아닌 사람을 가려내어 미워하기 시작할 나이였다. 영우가 그렇게도 많은 부정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자기 편일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채 판정을 유보한 대상은 영준이었다. 가장 확고한 한편은 물론 아버지였다. 아버지라는 세계만이 영우의 유일한 꿈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우가 사춘기 이후 십오 년이란 세월 동안 끊임없이 도망쳤던 것 역시 아버지라는 존재로부터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존재는 영우에게 절망과 고독을 의미했다. K읍의 아들이 아버지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출세와 유랑, 그리고 죽음 세 가지 뿐이었다.


그리고 이건 소설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소설의 뉘앙스로 판단한 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영준이 K읍을 떠나기로 결심한 데에는 명선의 죽음에 얽힌 정욱과 영준 사이의 비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준이 이토록 가문을 떠나려고 애쓰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나가던 정욱의 사업이 망했기 때문에 고장에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할 것이다. 


210. 현대인들은 관심이 없다. 가문과 자신이 공동 운명체로서 공과 화를 함께 짐져야 했던 김인우의 기록은 개인적 단자로서 살아가는 도시인에게 단지 '옛날이야기' 일 뿐이다. 혈연은 물론이고 지연과 학연에 의한 부당한 권력은 개인의 능력에 따른 기회 균등이라는 근대적 모럴을 위배한다. 어느 한 사람의 사상적 자유를 집안 전체의 잘못으로 만들어 권력자의 의도대로 사회를 통제하려는 연좌제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했다. 도시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조차 부분적인 동시대인일 뿐이다. 그것이 도시로 나온 K읍의 아들 영준이 생각하는 '사형제 이야기'의 진실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은 고장을 떠나려고 한다. 그리고 떠났다. 영준은 출세를 하는 척 유랑하며, 영우는 유랑하기 위해 유랑한다. 그렇게 둘은 K읍을 떠나 어른이 되고도 K읍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148. 자신의 고향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아직 어린애와 같다. 타향이 다 고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계가 다 타향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


3.


176.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모조리 돌려주겠다는 철저한 자기 존재의 부정이 위악의 가속도를 받아 전의를 단련시켰다.


177. 아무것도 즐기지 못하고 아무것에도 집착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이유는 한 가지다. 자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가문의 사람에게는 출세를 하는 척. 서울로 떠난 영준은 '출세= 법학' 이라는 고리를 끊고자 유랑을 결심한다. 유량의 도구로 선택한 것은 영화였다. 영준은 가문과의 질긴 인연을 끊고, 자기만의 것을 발견하여 그것에 집착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영준은 영화 안에 자신의 온전한 무언가를 담아내기 위해서 살아간다. 자신의 사상을 담아내기 위해 자신의 출신을 감춘다.


소설 속. 굉장한 감각을 가진 영준의 동료 박난아(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의 모두 의미심장하다. 단 한번 박난아라는 본명으로 지칭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바나나로 소개되는 그녀. 나는 그녀의 생각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박난아로 기억할 것이다.). 그녀의 말은 영준의 단호한 결심을 표면에 드러내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171. 감독님 처음 봤을 때는 고아인 줄 알았어요. 가족이 있다는 게 상상이 안 됐어요. 아무하고도 상관없이 태어나 줄곧 혼자 성장하고 혼자 살아온 사람 같더라고요. 이웃이나 동료는 있지만 친척은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 자기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남은 음식은 그 자리에서 버리는 사람. 규칙적으로 면도와 쇼핑과 운동을 하고, 병원에 입원하면 간병인을 고용하고 명절에는 혼자 외국여행을 가고 또 보험이나 적금 든 건 없고 은행통장은 하나밖에 안 갖고 있고 그리고 어쩌다 등 뒤에서 따라오는 자기 그림자를 보면 어색한 표정을 짓는 사람.


<비밀과 거짓말>의 아버지와 두 아들은 K읍을 떠나 오랜 시간 잘 살아간다. 그러다가 아버지 정욱의 죽음과 죽음으로 K읍을 떠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과 유산의 상속자로 언급된 명선의 이름이 공개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준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상속자에 적혀있는 낯익은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영준의 사촌 누이였는데,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어떻게 유산을 전해줄 수 있을까? 사촌 누이. 명선. 그 이름의 진실을 찾아 가는 것이 <비밀과 거짓말>의 진짜 시작이다.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은 마치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플롯과 비슷했다.


4.


225. 성장이란 자신이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위치한 보잘것없는 좌표를 읽게 되면 그 때 비로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년들은 일찍부터 자기라는 존재를 자각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만나기까지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소년이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한가지 연료는 환멸이다.


이 지면을 통해서 결론을 이야기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루어져서는 안될 사랑 때문에 비극이 찾아왔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결론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영준과 영우는 전통(아버지)이 가려놓은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말하기엔 망설여지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형제는 시간과 공간을 자각하고 좌표를 읽을 수 있게 된다. 그 좌표를 마주하면서 아버지와 영우, 아버지와 영준. 이 각각의 관계에서 알게된 진실까지도 공개된다.


283. 정욱은 이따금 생각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비밀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과연 모두가 진실일까. 어쩌면 객관적 진실보다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진 진실이 더 진실할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면 그럴만한 필요가 있는 것이다.


283의 이 문장은 왜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비밀을 감춰왔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생각은 자신보다 주위의 시선이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을 내려놓았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항복 선언이다. 나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은희경 작가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옳지 않음의 반작용이 <비밀과 거짓말>을 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모자람을 많이 느꼈다. 필요이상으로 생각들을 써내려갔지만, 사실 제대로 읽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가장 핵심문장이라고 생각되는 한 구절을 옮기며 마무리하면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결심한다.


5.


191. 인간은 강인함으로 인해 위대해지지만 약점을 통하지 않고는 완성되지 않는다. 위인이란 존재는 철인경기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종으로서의 긍지를 주어 인간을 고양시킨다. 반면 약점투성이인 사람은 때로 인간을 안심시키며 자신과 화해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192. 조금의 망설임이나 어긋남도 없이 앞뒤가 딱 들어맞는 것은 거짓말이기 쉽다. 완벽한 미모라면 성형미인일지도 모르고 기승전결이 완전한 스토리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불완전하게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략) 진실이란 대개 추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밀이나 거짓말은 나약한 존재인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수단이다. 진실이라는 공의에 의해 쫓겨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도달하여 몸을 숨기는 막다른 골목의 어둠이라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안의 그녀
가쿠타 미츠요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1.


세 살배기 딸 아카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전업주부 5년차의 사요코. 그녀는 또래와 쉽사리 어울리지 못하는 아카리 만큼이나 동네 주부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향적인 그녀는 동네 공원 아줌마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파벌을 느끼며 결혼 전에 다녔던 회사생활을 떠올리기도 한다. <대안의 그녀>의 초반부는 이렇듯 외부 세계가 그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과 시어머니도 은연중에 그녀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기분 탓 만은 아닐 것이다. 이래저래 사요코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만의 무엇'이었다. 그것이 일이든. 돈이든.


16. 자기 또래의 여성이 입는 블라우스의 가격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 것일까.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의외로 쇼크였다. 모든 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엄마들의 얽힌 관계를 피해서 공원을 전전하거나 아키라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혼자서만 노는 것, 블라우스의 적당한 가격을 모른다는 사실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일을 하기 시작하면 블라우스의 가격도 알게 될 테고 공원 문제로 골치 아파할 일도 없을 것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카리를 혼내는 일도 줄지 않을까.


2.


<대안의 그녀>는 크게 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사요코의 분투기이며, 다른 하나는 사요코의 현재에서 20년쯤  과거의 이야기다. 여기서도 타인과의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춘기 소녀. 아오이가 등장한다. 그녀는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왕따를 당해서 어머니의 교향인 시골 마을로 전학을 하게 된다. 이미 여러 번 파벌의 희생양이 된 경험이 있기에 그녀는 이곳에서만큼은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주변의 이상징후를 관찰하면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애쓴다.


44. 시간이 지나자 반 안에서 점점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활발해 보이는 여자 아이들, 종례시간이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몸치장을 하는 놀기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 아오이는 어느새 지극히 평범한 여자 아이들로 구성된 그룹에 편입되어 있었다. 오두들 그다지 개성도 없고 그냥 앉는 자리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형성된 그룹 같다는 인상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서 빠져나와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런 그룹이었다.


3.


가쿠다 미쓰요는 사요코가 중심이 된 챕터와 아오이가 중심이 된 챕터 하나를 교차시키는 플롯을 사용한다. 이 플롯 위에 놓인 사요코와 아오이의 모습은 닮았다. 이 둘에서 현대인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가쿠다 미쓰요가 말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모습 내향성을 지닌 인물. 홀로 남겨짐에 서서히 체념하는 인물. 그러나 여전히 타인과의 관계를 그리워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마이너 정서를 가지고 있지만,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인물들이었고,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인물이다.


356. 몇 살이나 나이를 더 먹었는데도 책상을 붙이고 도시락을 함께 먹던 고등학생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가공의 적을 만들어서 한순간에 강하게 단결한다. 하지만 그 단결이 놀라울 정도로 무르다.


가쿠다 미쓰요는 사요코와 아오이처럼 성장이 가능한 현대인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지 않은 구제불능의 현대인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모습은 평상시 아무렇지 않게 뒷담화를 즐기는 부류의 사람. 무리를 지어서 누군가를 따돌리는 데 능한 사람을 생각하면 될 것 같. <대안의 그녀>에서는 기하라를 그런 인물의 대표자격으로 그렸다. 기하라를 바라보는 사요코의 생각을 좇으면 저절로 알게된다.


4.


<대안의 그녀>에서 나나코라는 인물은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나나코가 없으면 주인공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커다란 인물이다. 나나코는 시골마을로 전학 아오이의 곁으로 불쑥 다가온 소녀다. 겉으로 보기에 나나코는 쿨한 소녀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관계로 인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아오이보다 훨씬 더 멀찌감치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알게된다.


197.

"난 학교에서 여러 소문을 듣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소중한 건 학교에는 없으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지금 모두들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야. 내가 짊어질 짐이 아니야. 다른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를 대신 지고 함께 괴로워할 정도로 난 관대하지 않거든."


200.  나나코가 안고 있는 빈 굴에 아오이는 엷은 공포를 느꼈지만, 동시에 끌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 깊고 어두운 구멍은 블랙홀처럼, 강력하게, 공포도 불안도 불운도 주저함도 지루함도 혐오도 이 세상의 모든 불쾌한 기분을 흡수해 안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오이와 나나코는 학교 안에서는 서로 내색하지 않고 지내다가 학교 밖에서는 단짝친구가 된다. 이 어색한 관계는 아오이가 원했기 때문에 유지된다. 그녀들은 여름 방학동안 바닷가 민박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더 친해진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개학이 다가왔다. 그녀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나코가 울면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강하게만 보였던 나나코의 여림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나나코를 남겨두고 혼자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오이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들은 러브호텔을 전전했다. 잔고는 바닥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사고를 일으킨다.


219. 피곤함이 없는 곳, 러브호텔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곳, 자금책을 궁리하지 않아도 되는 곳, 뭐든 잘 되는 그런 곳, 나나코와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지금도 아오이는 믿고 있다.


사고는 기자들이 원하는대로. 진실과는 거리가 멀게 자극적으로 신문과 뉴스에 실린다. 가출한 소녀의 충격적인 사건을 알고나서 부모와 선생님같은 어른들은 그녀들을 갈라놓고, 아이들은 그녀들을 따돌렸다. 그런 생활을 매일 반복하면서 아오이는 나나코처럼 생각하는 게 오히려 편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아오이는 20년 넘게 나나코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살아간다. 타인과는 아주 멀찌감치 거리를 두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따돌림당할까 전전긍긍하는것보다 애초에 선을 그어버리는 편이 차라리 나았던 것이다.


324. 그후. 나나코가 하던 말의 의미를 아오이는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이런 곳에 나의 소중한 것은 없다. 싫다면 관여하지 않으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강한 척하는 것도 허세도 아닌, 단순한 사실이었다.


328.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아오이 속에서 친해지는 것은 더해가는 것이 아니라 상실이었다.


5.


시간이 흐른 현재. 현재의 아오이는 일을 하겠다고 찾아온 사요코로부터 자신의 과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요코와 아오이의 만남과 아오이를 깨달음으로부터 <대안의 그녀>의 플롯 중 첫번째 이야기는 두번째 이야기를 닮아간다. 단지 역할만 바뀌었을 뿐이다. 현재의 사요코가 과거의 아오이 역할을 하고, 현재의 아오이가 과거의 나나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상황에서 부정성이 일어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안의 그녀>의 본질이자 날카로움이다. 과거의 아오이는 나나코와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나코를 순순히 따라갔지만, 현재의 사요코는 아오이를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아오이의 아픈 곳을 건드린다. 이것은 직업을 갖고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 이후의 사요코의 변화가 일으킨 부정성이라고 볼 수 있다.


272. "나도 이대로 하마마츠든 오사카든 가버리고 싶지만, 도망가봤자 해결되지 않잖아. 게다가 나라하시 씨, 모레는 일도 해야 하잖아. 우리 등에 짊어진 일들과 다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잖아. 해변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고등학생들은 아니잖아."


사요코의 생각은 과거의 아오이가 나나코에게 했어야할 말이었다. 나나코의 부족한 점이었다. 어린 아오이에게 나나코는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여린 소녀였다. 나나코를 약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따끔하게 충고할 수 있는 것은 아오이 밖에 없었다. 그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의 사요코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273.이 사람은 정말이지 자신과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모두 다르다, 다르니까 그 만남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라고 자기가 대전제로 깔아놓듯이 말해놓고선, 가정주부가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연락을 했다고 쳐도 지금 상황이라면 얼마나 골치 아픈쪽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가 없을까?


이 생각 이후에 나나코는 마냥 여린 소녀가 아니라 연민의 대상으로 변화한다. 나나코로 살아온 현재의 아오이는 결국, 외톨이가 되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보듬어야했다. 과거의 아오이는 불가능했지만 아오이를 닮은 현재의 사요코는 가능했다. 이것으로 과거의 아오이도 약해빠진 존재가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라는 의견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369. 사요코는 드디어 깨닫게 된 것 같았다. 왜 우리가 나이를 먹는지, 생활 속으로 도망가서 문을 닫아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만나기 위해서다. 만남을 선택하기 위해서다. 선택한 장소를 향해 다시 자신의 발을 내딛기 위해서다.


6.


힘들다. 글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궁금한 사람은 직접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구하고 싶은 분은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절판이라 중고책 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통의 책읽기 - 독서, 일상다반사
가쿠타 미쓰요 지음, 조소영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책을 읽으면서 꼭 이야기해고 넘어가야겠다. 싶었던 것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박경리 선생의 <일본산고>에 대한 감상을 옮겨온다.

 

이 중에서 4번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사무라이 정신. 할복. 그리고 세계대전 당시의 카미카제 부대. 이들은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칼을 배에 쑤셔넣는)으로 죽으라 하는 그들의 주군은 누구인가? 먹이사슬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국과 만세일계와 현인신에 닿아있다. 

 

한국인은 한이 쌓이면 울분을 토하지만, 일본인은 안으로 계속 그 슬픔을 밀어넣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체념하게 되고, 자기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고, 그로부터 마조히즘을 느낀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박경리 선생은 일본의 문학는 삶의 문학이 아닌 죽음의 문학이라고 이름 짓는다. 선생이 쓴 산고 안의 소제목처럼 그것을 풀어낼 '출구가 없는 것'이다.

 

출구를 찾아서 일본의 근대문학은 크게 요동친다. 선생이 보기에 죽음의 문학은 인간의 삶 자체를 조명하는 문학이 아닌. 욕망의 의식을 바깥으로 끌어내어 관찰하는 문학이다. 관찰의 형태로 사랑과 치정이 구분될 수 없는 모양새로 얽힌다. 자살이 미화된다. 이로부터 탐미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장르가 탄생한다. 


나는 <일본산고>를 읽은 후부터 지금까지 한국문학은 삶의 문학에 가깝고, 일본문학은 죽음의 문학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보통의 책읽기>에 소개된 일본문학 감상들을 읽으며, 일본 문학과 '죽음'이라는 말은 너무나 동떨어져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작가 카쿠타 미쓰요는 <보통의 책읽기>를 통해서 시대의 거센 바람. 개인의 실존. 즉. 어쩔 수 없는 내던져짐으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지속적으로 사유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언급하자면. 모로타 레이코의 <게이코>에 대한 감상에서 그녀는 다이쇼, 쇼와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인 게이코를 이렇게 바라본다.

145. 게이코의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쫓아가다 보면 사람의 목숨이나 인생에 대해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희롱하는 시대의 거센 바람이 보인다. 사람은 시대에 따라 살 수밖에 없지만 저자는 게이코를 시대에 희롱당한 여성으로 그리지 않는다. 시대에 저항할 수는 없지만 그 시대를 영양분으로 삼아 살아간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자신에게 닥친 재난도 불행도 게이코는 살아가는 근력으로 바꾼다.


이외에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저자로 잘 알려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서전 <문맹>(국내 미출간인데 하루빨리 출간되기를 소망한다,) 에 대한 감상문에서 저자는 아고타를 살게 한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평한다.


135. 저자에게 있어 '쓴다'라는 행위는 삶과 같은 의미였다. 돌아갈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를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 어릴 적 나에게 충격을 안겨준 소설이 그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음을 알게 되니 놀라움과 동시에 더욱 깊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속까지 관통하는 그 강인함은 언어와 함께 빼앗긴 가족과 추억을 되돌려 받기 위한 의지이며,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기도 했다는 것을. 저자에게 있어 쓴다는 것은 끝나지 않은 싸움이다. 역시 깊은 속마음까지 관통하는 책이다.


결론은 시대나 어떤 문학은 삶이고 어떤 문학은 죽음이라는 문제를 국가에 대한 분류로 하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점이다. 어떤 국가의 소설은 삶의 소설이고, 어떤 국가의 소설은 죽음의 소설일 리가 없다. 더 나아가서 작가의 경우에도 <추락하는 새는 날개가 없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인간실격>, <타나토스>와 같은 작품을 쓰는 작가에게 죽음을 쓰는 작가라고도 할 수 없다. 그들의 의식이 삶을 다룰 때도. 죽음을 다룰 때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삶과 죽음을 구분해서 소설을 분류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2.


이 책을 읽으면서 대단한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된 일본소설 하나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2015년 나오키상 수상작인 니시 가나코의 <사라바>라는 소설이다. 아마도 <보통의 책읽기>의 저자인 가쿠타 미쓰요가 굉장히 반가워했을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감상에서 좋은 소설이라고 말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보통에 얽힌 그녀의 글을 간추리며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생긴다.


12. '보통'이라는 건 커플 양쪽 모두의 공통된 인식이어야 한다. (중략)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보통'이 형성된다. 하지만 그건 최대공약수의 '보통'이며, 모두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중략) 책과의 관계도 그와 꼭 닮았다.


209. 평범함, 범용함이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다. 개성은 보통이 아닌 것과 동의어가 되어 타인과 다른 것, 일반에 매몰되지 않는 비뚤어짐을 무턱대고 찬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참을 수 없다.


223. 개성은 존중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아무리해도 바꿀 수 없는 '핵심'이란 결코 독창성이나 창조력 같은 것이 아니라 좀 더 투박하고 때묻지 않은 그 무엇이고, 산다는 것은 나와 다른 것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핵심과의 싸움이 아닐까. 그 싸움을 지탱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사람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좋아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230.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해야만 하는 것, 특수해야만 하는 것이 개성이 아님을 이 소설을 읽고 있다 보면 절실히 깨닫게 된다.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있는 것만으로도 특수하고,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절박하게 외치지 않아도 사람과 사람은 이렇게 서로에게 다가설 수 있다.


252. 그녀는 머물 곳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획득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 (중략) 세상은 보통이 아닌 것을 배제하려 한다. 보통보다 많이 뚱뚱한 귀국자녀 후키코 씨가 따돌림을 당했던 것처럼. 그래서 우리들은 배제되지 않기 위해 보통인 척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머물 곳을 자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보통이라는 환상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면 자신이 머물 곳은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이 소설은 "어떤 부분에서는 일본인은 안으로 계속 그 슬픔을 밀어넣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체념하게 되고, 자기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고, 그로부터 마조히즘을 느낀다고 평가한다." 라는 박경리 선생의 주장을 완벽하게 따르고 있다. 8.내게는 이 세계밖에 없다, 여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체념과 자기학대에 대한 심리묘사도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박경리 선생이 파악한 그들의 단점을 인정하고, 그다음을 모색한다는 것이 <사라바>가 대단한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니시 가나코는 이러한 체념적 행위(다카코에서 아유무로 전이)가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309. 나는 자신의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나는 내 주위의 것만 믿었다. 그 진리에 바짝 달라붙어 알랑거리고 자신의 감정을 계속 무시했다. <사라바>는 이것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그려냄으로써 삶과 죽음의 문학에 얽힌 틀을 완전하게 깨뜨려버렸다.


3.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는 것도 같지만 머리가 아파서 이쯤에서 그만하고 생각나면 나중에라도 다시 해보려한다.

여기에 소개된 작가와 작품을 알게 돼서 기쁘게 생각한다.


처음에 읽을 때는 1부에서 다룬 작가의 전작으로 만들어진 작가론적인 글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3부를 읽고 책을 덮은 후에는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3부에서 특히 감상 속의 깊은 사유가 느껴졌다.


메모해 둔 구절을 옮기며 마무리하고 싶다.


20. 나는 이야기를 따라잡기 위해, 순수하게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는다. 15년을 걸려 깨달았다. 세상에는 나보다 오백 배, 천 배 책을 읽은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건 소용없다. 그렇게 뒤만 좇을 바에야 지식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 나를 부르는 책을 한 권 한 권 읽는 편이 낫다.


26. 이 세상에는 추악한 것이나 번잡한 것. 절망과 불안과 질투와 체념 같은 것들이 소용돌이친다. 그러한 것들, 혹은 그러한 낌새가 머리가 아닌 몸이 알지 못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은 읽을 수 없다.


35. 삶에 얽히는 번거로움, 모순, 잔혹함, 여의치 않음,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과 싸우거나 나약해지는 모습을 나는 이 다자이 오사무의 언어에서 본다.


37. 우리들은 늘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여 분류하면 안심할 수 있다.


75. 보통 사람은 자신의 핵을 이루는 부분을 숨기고 살아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오랜 시간 무방비 상태로 사람들에게 계속 드러내면 매우 위험하다. (중략) 그래서 사람은 지식과 이데올로기와 경험 혹은 이력, 지위가 있다면 지위, 돈이 있다면 돈, 그런 것들로 튼튼하게 무장하고 있다. 그러한 무장을 완전히 거부한 작가가 찰스 부코스키이다.


92. 하나하나의 소설이 사람의 생의 무게를 훌륭히 그려내고 있어 아프거나 수명을 다해서 사망한 것이 아닌 죽음의 수수께끼는 삶의 수수께끼이기도 하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닫게 된다.


94.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저항'이다. 세상, 상식, 안주, 권력, 또 자신에게까지 줄곧 저항했다. 그녀가 만들어낸 것 모두가 저항으로부터 생긴 알력이다. 알력은 지금의 우리들에게 자유와 선택을 위임해 주었다.


104.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맛보는 것.


106. '우리들은 연결되어 있으면서 단절되어 있다.'


121. '가족은 무엇일까'라는 한정적인 물음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무엇일까'


138. "좋아, 사랑해"라는 감정만이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는 이유는 아남을 깨닫게 한다. 강한 애증이 관계의 농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247. 나에게 좋은 단편소설이란 실제 페이지 수의 몇 배로 세계가 부풀어 오르는 소설이다. 한창 읽고 있는 동안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소설도 있고, 다 읽자마자 왈칵하고 세계가 넓게 퍼지는 소설도 있다.


263. 내가 아는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색다른 힘을 갖고 있다면 내가 보고 있는 현실로 침식해온다.


268. 우리들은 강하거나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은 것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공포나 불편함, 쾌락, 슬픔에도 의존한다.


4.


이  작품은  2005년 <대안의 그녀>라는 작품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가쿠타 미쓰요라는 작가가  2003년부터 2009년 까지 쓴 독서일기를 엮은 책이다. 오래 전에 이 책을 사놓은 기억이 있어서 반가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