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명깊게 읽은 책을 소개하기위해 떠는 수다는 무조건 용서돼야 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경험한 책과의 짜릿한 교감을 털어놓는 기쁨. 그것은 꼭꼭 숨겨둔 애인을 딱 한 친구에게만 살짝 귀뜸할 때의 자랑스러움과 맞먹는다. 입술을 삐쭉거리며 그 수다를 받아주지 못하는 야만인들과는 당장 절교하라.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듯이 책읽은 자랑은 자만이 아니다.

한동안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세프>를 읽어보라고 수다를 떨었다. 창피한 얘기지만 나도 끝까지는 읽지 못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책읽기 4단계>중에서 훑어보기를 끝내고 3단계 제대로 읽기를 하려던 차에, 엄청난 일이 쏟아졌던 것이다. 책을 탁자위에 보름 남짓 올려놓고 그 앞을 왔다갔다하며 입맛만 다셨다. 그러나 훑어보기만 해도 50%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에 용기백배해 부피에와 류비세프의 만남을 주선하기로 했다. 

엘리제르 부피에는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이다. 작가가 만난 사람이라 하니 완전히 허구는 아닌 것 같다. 물론 부피에란 이름은 작명한 것이고. 소설속의 가상 인물 부피에와 실존인물 류비세프가 이 페이퍼에서 소개팅으로 만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나의  필요 때문이다.

한 사람은 나무를 줄기차게 심었고, 다른 한 사람도 역시 56년동안 고집스레 시간관리를 했다. 묵묵히 나무를 심은 양반 덕분에 강산은 푸르게 푸르게 변했고 아귀처럼 싸우던 사람들도 천사가 됐으며, 맑은 물이 도랑에 넘치자 사랑도 함께 넘치게 됐단다. 이 책의 편집자(우리나라 사람인 듯)가 조금 우습게 도식화했지만 <한사람의 끈질긴 노력-새로운 숲의 탄생-수자원의 회복-희망과 행복의 부활>이 줄거리의 전부다. 시간관리로 평생을 빼꼭하게 채운 류비세프옹의 위대함은 운명에 대한 개인의 저항에 있다. 그는 적당히 살면서 운명과 타협하거나 비굴하게 무릎을 꿇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내인생은 나의 것. 신이 내게 부여한 시간만큼은 내가 완전하게 통제관리하겠다는 당돌한 생각을 그는 놀랍게도 스물두어살에 했다. 부피에가 숲을 살려 희망을 주었다면, 류비세프는 운명에게 농락당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준 셈이다.

두 노인은 모든 면에서 난형난제다. 부피에옹이 1947년에 89세로 작고하셨고, 류비세프옹은 1972년에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으니 나이로 따지면 부옹이 훨씬 연배다. 두 분 모두 평생을 규칙적인 생활과 탁월한 마인드 컨트롤, 소박한 밥상으로 살았기 때문에 무병장수했을 것이다. 규칙적인 것으로 따지면 류옹이 반발 앞선다. 이 양반은 심지어 두 아들이 전쟁통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에도 지극히 담담한 몇 줄의 일기(라기보다 시간관리기록부)를 남겼다. 2차대전이 발발했어도 그 얘기는 쓰지 않았다. 그런 일에 쓸 시간을 마련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자린고비처럼 시간을 장농에 차곡차곡 쌓아둔게 아니다. 하루에 8시간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연구시간을 제외한 10시간을 자유시간으로 남겨두었다. 물론 자유시간도 철저하게 관리했으니 굳이 표현하자면 사회주의적 자유라고나 할까. 그 시간에 연 70여회의 연주회와 연극을 관람했고 이즈베스치야를 비롯한 수많은 신문과 잡지, 저널을 탐독했으며, 문학과 역사, 철학, 사회과학을 망라하는 폭넓은 독서를 했다. 이 모든 행위들은 독후감과 독서목록, 노트, 메모, 편지를 통해 낱낱이 사실로 증명될 수 있다하니 지독한 영감이다.

나그네가 하룻밤 같이 지내면서 보니 부피에옹은 매일 밤 한자루의 도토리를 탁자위에 쏟아놓고 잘생긴 것만 골라서 다음날 하루종일 심고 다닌다는 것이다. 땀들이를 위해 앉아서 생각하노니, 저 언덕에는 자작나무를 심어야 겠는걸,  단풍나무가 절딴났으니 굴참나무로 바꿔심어야겠어, 양들이 자꾸 어린 나무를 작살내니 저것들을 다 팔아버리고 오라 꿀벌을 쳐야겠군. 그러면 열매들이 열게 아닌가. 뭐 이랬다는 것이다. 혼자 살다보니 어느새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조금 전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외로움은 환경이 만들지만, 고독은 사나이가 선택하는 것>이라고 최민수가 말했단다. 마치 묵언수행을 하는 선승처럼 부피에는 수십년의 세월동안 그렇게 고독을 선택한 것이다.

이제 밤이 깊었으니 얘기를 마무리짓자. 부피에는 그 자신의 삶을 통해서 어떤 이름없는 사람도 나폴레옹 못지않은 위대함으로 높여질 수 있음을 증명했다. 참 좋은 대목을 하나 적어놓는다.

"참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세계를 아름답게 바꾸어 놓는 것은 권력이나 부나 인기를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남을 위해, 공동의 선을 위해 침묵 속에서 서두르지 않고 속도를 숭배하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며 일하는 아름다운 혼을 가진 사람들이며, 굽힘없이 선하게 살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다음에 올 말을 되뇌일 때마다 지독한 이기심에 진저리를 치게 된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류비세프는 많은 일을 끝내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는 하려고 했던 그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시간통계 방법을 통해 그는 자신을 연구했다. 자신이 얼마나 읽고 쓸 수 있는지, 연구하고 생각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였다. 스스로에게 터무니없이 무거운 부담을 지우지는 않았지만 그는 능력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바로 그 한계까지 능력을 사용하였다. 이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자기 인식의 길이었다. "

"류비세프는 천재가 아니었다. 천재란 선구자들이 쌓아왔던 노력에 종지부를 찍는 존재이다. 나는 류비세프가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흥미를 느낀다. 천재는 분석될 수 없고 따라서 연구해봤자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 천재는 그저 바라보고 감탄하면 되는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류비세프에게는 스스로 성공적으로 실천해낸 그 어떤 삶의 비결이 있다. 비록 그 자신은 특별한 비결이나 기적의 존재를 부인했지만 말이다. 시간통계 외에도 류비세프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생활 원칙을 지켰다.

1. 의무적인 일은 맡지 않는다.

2. 시간에 쫓기는 일은 맡지 않는다.

3. 피로를 느끼면 바로 일을 중단하고 휴식한다.

4. 열 시간 정도 충분히 잠을 잔다.

5. 힘든 일과 즐거운 일을 적당히 섞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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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2-24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류비셰프 읽어 보려고 신청했는데, 오늘쯤 책이 도착할 것 같은데 아직 안 오네요. 잘 보고 갑니다. ^^
 

지난주(04. 2.16~20)는 평생 가장 많은 영화를 보았던 한 주로 기록될 것이다. 닷새동안 열편 정도의 비디오(DVD)를 보았으니 말이다. 어느날은 무려 세 편을 본 적도 있으니 무슨 곡절이 있지않고서야 그런 무작시런 짓을 할 리 없음을 가까운 분들은 능히 짐작하리라. 

잠깐 내가 눈으로 꿀떡 삼켜버린 영화 메뉴를 상기해본다. 빌리 엘리어트, 인생은 아름다워, 드럼라인, 로렌조오일, 록키, 쥬라기공원3, 미세스 다웃파이어, 오즈의 마법사,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콘택트, 파인딩 포레스터,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면면히 만만찮은 영화들이다. 가족영화 아니면 우정, 꿈, 도전, 사랑에 관한 매우 강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들이다. 죄다 추천영화로 지목될 만큼 작품성과 주제의식이 뛰어난 작품들이지만 민망하게도 나의 비디오 취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출발비디오여행>같은 영화 소개 프로그램의 덕으로 스토리야 뜨르르 꿰고 있지만 내가 해결해야할 문제는 그정도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공부잘하는 아이들의 습관> 12회차 교육프로그램중에서 8차시까지 회당 두세개의 영화자료가 등장하는데 한 편당 10~15분 상당으로 압축하는 일이 맡겨졌다. 교육용이므로 예고편처럼 날라리 편집을 해선 못쓴다. 나름대로 줄거리가 잡혀야하고, 감동도 주어야 하며 메시지도 분명히 전달돼야한다. 두시간짜리 영화를 냄비에 넣고 사정없이 졸이되, 탄 내가 나거나 모양이 구겨지면 안된다. 그러자면 타임코드를 정신없이 잘게 잘라서 연결해야 한다. 

소파에 앉아서 땅콩을 오독오독 씹으며 느긋하게 보긴 애전에 틀린 노릇이다. TV에 코를 바짝 대고 두 눈은 화면과 액정시계를 번갈아 쳐다봐야 하니 영락없는 이경규 눈깔이다. 한편을 처음 볼 때는 대충 타임코드를 딴다. 두번째는 일이초를 면도칼로 저미듯이 비디오를 난도질친다. 그리고 나서 잊어먹을까봐 얼른 컴퓨터에 타임코드를 적고 나래이션을 박는다. 그렇게 열몇편을 본 것이다. 

이번 작업은 내게 매우 유익했다. 우선 심란하던 차에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일에 푹 빠져 있었다. 둘째, 어떤 책에서(선물이란 책) 당면한 한가지 일에 집중해야 성공한다던데 지난 날 능력도 없는 주제에 너무 많은 일을 펼쳐놓고 동분서주한 탓에 이 모양이 됐나 싶어 자책하고 있던 차에 제대로 집중하는 기회를 갖게 됐다. 이렇게 한가지 패턴의 일을 일주일동안이나 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세째, 영화 하나를 진중하게 본 적이 없었는데 무려 열두세편을 눈이 빠지게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까지 재가면서 보게 됐으니 대단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네째,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이런 나의 노동이 학동들에게 우정과 사랑, 꿈과 실천의 중요성을 감동적으로 환기시키는 교육물로 쓰인다니. 그 정도의 노고로 이만한 업적을 남겨주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이문을 크게 남긴 장사꾼처럼 가슴이 뿌듯하다.

영화<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는 지난주에 주마등처럼 지나간 영화가운데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새삼스럽게 줄거리를 소개하지는 않겠다. (그런데 웬만한 영화포털을 검색해보면 하나같이 영화 줄거리를 절반만 소개하고 끝이다. 독자에 대한 상당한 배려임에 분명하다. 나같으면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겠구마는. 여하간 어떻게 신세 좀 질 요량으로 뒤지다 헛물만 켰다.) 반성하건데 나는 이른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착한 일을 해본 기억이 없다. 전철에서 껌 한통 사본 적 없고, 구세군 냄비에 돈 천원을 넣어본 일이 없다. 소년소녀 가장돕기 모금도 자발적으로 해 보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 내가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서 한조각의 마음조차 써 본 일이 없다는 뜻이다.

내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마는, 솔직히 그다지 악질은 아닌 것 같다. 천성이 물러터진 탓에 냉정해지려고 애를 쓴다. 사람들이 나보고 냉정하다고 하는 걸 보면 후천적인 노력이 제법 효과를 본 모양이다. 그렇다고 착하다는 얘긴 절대 아니다. 착하려면 적어도 일관돼야 한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일관된 관심을 보여야 하며, 일관되게 도와줘야 한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할 것없이 일관되게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 그렇길래 착한 일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다. 평생을 남몰래 선행을 베풀어온 분들을 보면 옷깃을 여미게 된다. 전재산을 아낌없이 장학기금으로 기부하고 다시 막노동을 시작하는 거친 손을 보면 부끄러워진다. 

한사람이 세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자는 소년의 <도움주기> 캠페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엄청난 연쇄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여섯명만 거치면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케빈베이컨의 이론>에 따르면 이 캠페인은 아주 짧은 시간에 전세계 사람들을 선행의 고리로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훌륭함은 단 세명의 사람에게 착한 일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세상인가를 간파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하물며 소년은 자기의 생명까지 바쳐야 했다. 

나는 세상과 어떻게 교류하고 있는가. 내가 있다는 것이 이 세계에 어떤 의미인가. 가까운 사람들에게라도 무슨 의미를 주고 있기는 한 것인가. 허황되게 이름 석자 남겨보겠다고 설쳐댔던 자국이 깊어 앞으로는 일삼아 그 이름을 지우고 다녀야할 판이다. 아이들에겐 이렇게 가르쳐야겠다. 네가 세상에 무슨 선행을 하리라 뜻과 계산이 서지 않은 채 섣불리 이름을 남기려다간 짧은 인생 영광은 짧고 후회만 길게 남으리라.

친구는 우스개로 내게 '세상에 폐나 끼치지 말라'고 했다. 그말이 옳다. 난세에 사업한다고 몫돈 깨먹지 말고 가만히 앉아있는게 돈 버는 일이라 한다. 한 평생 자연이 감당 못할 오염물질이나 잔뜩 내놓고, 그보다 더한 악덕을 일삼으며(대부분 자기는 잘하는 일이랍시고 하는 짓이다), 사람들이 성악설을 믿게끔하는데 톡톡히 일조하는,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조심해야겠다. 몰라서 그랬다는 말이 통하는 나이가 지났다. 이제부터 그런 말을 하면 몇가지 죄가 더 추가될 뿐이다. 골방문을 걸어 잠그고 앉았어도 죄를 짓게 되니 이도저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그저 부지런히 착한 생각과 착한 행동을 이어가는 것이 궁여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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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뮤즈여 내게 오라>의 카테고리안에 집어넣는 데는 1초의 망서림도 없었다. 다른 카테고리들이 너무 무거워 이런 류의 책을 섣불리 들이밀었다간 불쌍한 책만 왕따당할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기엔 약간 (가벼워서) 부담스러웠다. 당최 이런 책을 즐겨 하지 않는데 어쩌다 농담이란 제목의 책을 두권이나 한꺼번에 샀는지도 모르겠다. 그 중 한권은 휘리릭 보고 냅다 집어던졌는데, 나머지 한권은 한참 지난 후에야  찾아 읽고 그도 모자라 이렇게 페이퍼로 남길 생각을 했는지 심사를 나도 모르겠다.

아마 농담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내던진 책은 정말 농지꺼리 책이었고, 이 책은 나름대로 재미있는 서양 금언 모음집이다. (사람들에게 선물할 책은 아니어도 슬쩍 권할 만은 하다는 뜻) 뮤즈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청취자를 울리거나 웃겨서 카타르시스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희극과 비극이 한 몸인 까닭도 그런 맥락이다. 최고의 신파는 대성통곡하다 설핏 웃게 만든다. 희곡도 웃기다 못해 엉엉 울게 만드는 것이 최고다.

이주일이 가고 난 후에 웃기는 사람이 없다. 가슴은 커녕 목구멍도 제대로 넘기지 못한 허접쓰레기 말들이 난무한다. 전두환 이후로 정치도 웃기지 않는다. 요즘 정치는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아침마다 신문 펴기가 두렵고 9시뉴스 안본 지가 기억도 안난다. 누구말 마따나 이 나라 정치인이 세비받고 하는 일이 국민을 웃겨주는 게 첫째라면 보통 직무유기가 아니다. 하기야 웃기는 것으로 밥을 먹고 산다는 치들이 제것 하나 못 만들고 남의 표정과 소리 흉내내기를 지치지도 않고 하는 걸 보면 한 무리 원숭이떼를 보는 것 같다. 주둥이에서 단 1센티도 깊이 안들어가고 나불대는 경박하고 무뇌아적인 코미디가 훗날 블랙 코미디의 좋은 소재가 될게다. 그들은 웃기면 그만 아니냐고 한다. 하지만 웃겨서 부끄럽고, 얼빠진 채 따라 웃다가 창피해지니 문제다.

제대로 삶의 무게를 실어 턱턱 던지는 농담을 듣고 싶었다. 짜증나고 심드렁하고 슬프기 때문에 누구라도 멋진 농담 한마디 던져주면 고맙게 웃고, 탄력받으면 확 울어버릴 생각이었다. 어쩌겠나. 당대인의 육담을 기대하긴 어렵고, 책을 통해 역대에 입심좋기로 소문났던 양반들의 말 보시를 받는 것으로 허기를 때울 수 밖에. 막시무스의 <농담>은 그러던 차에 얻는 한사발의 식은 밥과 간간한 나물 몇 점이다.  

팽개친 또다른 <농담>에 관해 몇자 남길 때 '당장 멱살이라도 바짝 옭아매고 싶게 미운 사람한테 내 대신 걸판진 욕 한바가지 시원하게 끼얹어준다면 속세에 그만한 적선이 어딨겠느냐'고 했다. 그런 점에서 그 책은 영 젬병이었다. 그러나 막시무스의 <농담>은 톡쏘고 넘어가는 말맛이 어르신들껜 외람되지만 아주 제법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은 들을 만큼 들었다. 지금 내겐 그렇다면 성공의 아빠는 알고보니 누구였더라는 현실 얘기가 더 당긴다. 이 책에 한페이지씩 담긴 짧은 말들은 격언이나 금언이 아니면서도 그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아마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빙그레 웃거나 껄껄 파안대소를 할게다. 사심없는 웃음의 무게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금언의 중량보다 훨씬 더 나간다.     

<농담>에서 발췌한 몇 가지 이야기.

한 여자가 자기 아들을 남자로 만드는 데는 20년이 걸리고,  

또 다른 여자가 그 남자를 바보로 만드는 데는 20분이 걸린다.

 

한 여자의 일생에도 두 남자가 있다.  

른 하나는 늑대.  또다른 하나는 양치기.

정상적인 경우, 늑대가 양치기에게 '장인'이라고 부른다.

 

사랑의 두 가지 치료법                                                                                                        

1)만나지 않는다. 전화도 편지도 하지 않는다. 

2)더 쉽고 확실한 방법: 상대방을 보다 더 잘 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생각하기 위해 앉아 있다가는 

곧바로 머리가 아프냐는 질문을 받는다.

 

소란스러움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암탉은 달걀 하나를 낳아 놓고 

마치 소행성이라도 낳은 양 소리를 쳐댄다.

 

사람은 교육받은 수준 만큼만 궁금해 한다. -루소

 

교육을 통해 읽을 줄은 알지만

무엇을 읽어야 할 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교육에 돈이 많이 들어 손해라고 생각한다면  

무지는 얼마나 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생각해보라.

 

도대체 왜 우는거지? 내가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루이 14세

 

죽기전에 왜 회개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회개하지 않고 죽은 자에게  다음 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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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책 잡은 손이 허황되고 정신이 나간 듯 집중되지 않았다. 책 한권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고 이 책 저 책 부질없이 옮겨다닌 것이 벌써 일주일이나 됐다. 밖으로 돌아다닐 때는 한순간 화가 솟구치거나 울증이 생겨도 하루를 넘기는 법이 드물었다. 내 건강은 그날의 스트레스를 품고 잠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호언장담해왔다. 그런데 아무리 책에 집중하려고 해도 한두단락만 지나면 언제 옆길로 새는지 모르게 딴 생각과 아집, 속끓임으로 시간 낭비를 하는 한심스런 일이 하루에 서너차례나 생긴다. 매일 적어도 책 한권을 정성스레 읽고 그 요체와 느낀 바를 몇줄 글로 남기자 했던 결심이 한낱 잡념에 쓸려 제 줄기를 못찾고 있는 꼴이라니.

'무릇 남자가 독서를 하고 행실을 닦으며 집안을 다스리고 일을 하는 모든 것에 정신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신력에서 근면함과 민첩함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며 업적도 나오는 것이다. 마음을 굳건하게 세우고 곧장 한결같이 앞을 행해 나아간다면 태산이라도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유아 보아라.1805)

한갓지기 이를데 없는 요즈음의 내 일상을 어지럽히는 잡생각들을 이 잡듯 하나씩 캐내어 보자. 우선 다음달에 책 내는 일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싶은 생각이 머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다.

'남들이 모르게 하려면 안하는 것이 최고이고, 남들이 못듣게 하려면 말하지 않는 것이 최고다. 이 두개의 문장을 평생 동안 외우고 다닌다면 위로는 하늘에 대하여 떳떳하고, 아래로는 집안을 지킬 수 있다. 세상의 재앙이나 우환, 천지를 뒤흔들며 자신을 죽이고 가문을 전복시키는 죄악이 모두 몰래 하는 일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말을 하거나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치열하게 반성해 보아야한다.  ... 

편지 한통을 쓸 때마다 두번 세번 살펴보며, "이 편지가 번화가의 큰길가에 떨어져 내 원수가 펼쳐보아도 내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인가?"하고 기원한다.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뒤에까지 전해져서 허다한 안목있는 사람들이 본다 해도 내가 놀림거리가 되지 않을 것인가"하고 생각해 본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봉하는 것이다. '(학유에게 노자 삼아주는 훈계. 1810)

뚜렷한 성과로 본보기가 됐거나, 두루 사람들에게 이로운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제 감정도 추스리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던 방황의 기록들을 무슨 염치로 출판하겠다고 나서는 것인지 부끄럽기만 하다. 그 나마 이 책을 손에 들, 몇 남지도 않은 지인들로부터 조차 문 밖으로 내쳐지는 망신을 자초하는 건 아닐까. 글을 손보려 해도 두 해에 걸쳐 매주 꼬박꼬박 써온 것이라 마땅히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할 지 엄두가 안난다. 그리고 그렇게 분칠하고 윤문한다해서 부끄러움이 가려질 것 같지도 않다. 호영형은 백수의 공연한 노심초사일뿐이라며 책 내는 일은 책내서 먹고 사는 놈에게 맡겨두라고 한다. 이런 자신감 부족현상이야 말로 백수의 전형이라며 나보고 진도가 굉장히 빠르다고 걱정한다. 옆에서 소설가 성석제씨가 자기 백수생활의 연조는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 시절부터라고 해서 와 웃었다. 책은 눈 질끈 감고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나서 어제부터 서문과 군데 군데 모자라는 글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전주의 일 때문에 자주 화가 난다. 그 자들의 추접한 소행과 쥐새끼 같은 소인배 근성이 괘씸하기도 하고, 내가 어떤 허물이 있어 중생들이 그런 악의를 품게 했는지, 왜 이렇게 늘상 끝이 좋지 않은지 가슴을 치게 된다. 그냥 서울에 가만히 죽치고 있을 것을. 공연히 이년동안 허튼 짓을 한게 아닌가 싶어 그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 나를 서울에서 내쳤던 박복의 칼 끝이 전주에서도 내내 뒤통수를 찔러댔다. 이 세상에 숨을 곳이 어디 있을까. 사업을 하면서 본연의 평상심을 초개처럼 내던지고 아귀모냥 야차인 듯 부귀와 공명을 좇으며 악행을 서슴치 않았으니 그 보복을 한두해로 어찌 벗어날 수 있을까. 삼가해야 한다. 더욱 조심해야한다. 모두 그리고 빨리, 끊고 잊어야 한다. 

'사대부의 마음이란 비 갠 뒤의 바람이나 달과 같이 털끝만큼도 가리워진 곳이 없어야 한다. 하늘과 인간에게 부끄러울 일은 칼로 끊은 듯 범하지 말아라. 그러면 저절로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살져서 편안해지며 호연지기가 생긴다. 만약 옷감 한 자, 돈 한 푼에 잠깐이라도 양심을 저버린다면 즉시 기상이 타락하고 만다. 이것이 인간이 되는가 도깨비가 되는가 하는 관건이다.'(입을 속이는 방법 1810)

내내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 이 말씀대로 올곧이 살아오진 못하였으되 경계를 허물어뜨린 적 없다가 그만 지난 99년 어름 광증이 뻗쳐 눈이 뒤집혔다. 사물을 이해관계로 측량했고 인간관계조차 영리에 따라 멀고 가까움을 정하였다. 이래서 망조가 들었다. 설사 사업이 잘되어 억만금이 손에 들었다 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게다.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후회막급이다.

' 세상에는 두가지 큰 저울이 있다. 하나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이라는 저울이고 하나는 '이익과 손해'라는 저울이다. 이 두가지 큰 저울에서 네가지 등급이 생겨난다.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도 얻는 것이 제일 고급이다.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다가 해를 입는 것이고, 그 다음이 그른 것을 구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다. 최하급이 그른 것을 추구하다가 해를 입는 것이다.

내가 돌아가고 못 돌아가는 일이 참으로 큰 일이기는 하다만, 살고 죽는 것에 비한다면 하찮은 일이다. 사람이란 때로는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하기도 하는 것 처럼, 생명과 의리중에서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추하기도 하는 법이다. 하물며 돌아가고 못 돌아가는 따위의 하찮은 일에도 문득 남을 향하여 꼬리를 치며 애걸한다면, 만일 남북의 국경에 근심거리가 생긴다면 임금을 배반하고 개나 양 같은 오랑캐들에게 투항하지 않을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내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운명이고 내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또한 운명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천명만을 기다리는 것도 참으로 이치에 맞는 일은 아닐 것이다. 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이미 다했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염려하지 말고서 조금 세월을 기다리는 것이 도리에 맞으리라.' (세상의 두가지 저울. 1810)

세상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고 찾아주지 않는 것을 염량세태라 탓하며 속을 끓였다. 만나는 이 많지도 않으려니와 그저 푹 쉬라는 하나마나한 얘기만 되뇌일 뿐 진정을 나누려는 이 드물다. 그들을 가벼이 대하지 않았거늘 어찌 이리 무심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 동기간과 가족만 남는다니 기어코 그 말이 맞는가 싶다. 하마 이제 그만 꼭막힌 속내를 풀고 세상이 어지럽고 불안하니 사람들 마음자리도 그러한가보다라고 마음 고쳐 먹었다. 그래도 천복으로 내 살림이 이만하면 밥술 걱정 없이 책을 벗삼아 십수년을 지낼 수 있으니, 오히려 그들의 여유없음을 챙겨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뜬 세상 너나없이 둥둥 떠서 살아가면 그뿐, 새삼 부딪히고 마음상해서 속으로나마 악연맺을 것은 무엔가.

 '어떤 사람이 큰 배를 타고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배안에서 물 한잔을 선창 안에 붓고 겨자를 배처럼 띄워놓고는, 자기 자신이 바다위에 떠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그것이 떠있다고 비웃는다면 어리석다하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지금  천하가 온통 다 떠다닙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떠다닌다는 사실에 홀로 상심하셔서 자신을 '떠다니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자기 집에 '떠다니는 집'이란 이름을 붙이며 떠다니는 것을 슬퍼하고 계시니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뜬 세상의 아름다움) 

지금 내가 방구석에 틀어박혀 빠꼼히 밖을 내다보며 옹졸한 마음에 양미간을 찌푸리는 것은 '바라지 말고 베풀라'는 젊었을 때의 호연지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사회 첫발을 내는 아들에게 이르시길,"사내가 사십전에 재물을 밝히면 사람을 잃게 되노니 돈벌 생각 말고 사람벌 생각하렴. 그리하면 그 사람이 사십후에 재물을 벌어다 주리라'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십수년을 열심히 사람벌이에 나서 적지 않은 사람재목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아뿔싸 마음 한번 잘못 먹은 덕에 벌어놓은 재목을 삼사년만에 모두 탕진하고 말았으니. 이제라도 반성한다. 바라지 말고 베풀어라. 그리고 베풀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려라. 일가를 대하듯 해라. 바라는게 있으면 구차해지고, 원망하게 된다. 보답을 바라면 치사해진다. 내 도리를 다하고 그것으로 끝이어야 한다.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 대하는 도리가 다 이렇다.

'훗날 너희에게 근심거리가 있는데도 저들이 보답하지 않더라도 너희는 마음속에 절대로 한을 품지 말아라. 한결같이 내 마음으로 미루어 용서하며 '저 사람이 마침 그럴 사정이 있나 보다. 그렇지 않으면 힘이 모자라는 것이리'라고 여기고, 절대로 "내가 전에 이렇게 저렇게 했는데 저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한다"고 경박한 말을 입에 올리지 말아라. 이 말이 한번 발설되기만 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공덕은 하루아침에 바람에 날리는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말것이다. '(바라지 말고 베풀어라.)

다산을 더욱 공부해야겠다. 아침부터 책을 잡기 어려울 만큼 심사가 복잡하다면 망서림없이 다산을 모셔 말씀을 들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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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영형은 농반진반으로 이 책이 잘팔려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했다. 번역하는 사람이 책 많이 팔리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고 했더니 매절과 로얄티를 섞었다고 한다. 그냥 재미있다고 할 것을 공연히 <이책은 언제부터 재미있을라나>하고 이러쿵 저러쿵 입을 놀렸다. 후회했다. 작가나 번역가들에겐 말조심을 해야겠다.

조선과 중앙의 북섹션들이 비중있게 키워놓았고, 호영형이 번역한 책 중에선 그나마 대중적인 내용이어서, 음...팔려고 작심한 모양이구나, 그럼 나도 편하게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른 읽기 시작했는데 50쪽이 지나, 백쪽이 넘어가도 영 재미있을 기미가 안보이는게 아닌가. 이런 낭패가 있나. 형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뒤로 가면 재밌어. 좀 참고 읽어봐.> 물론 나는 번역자의 이런 조언을 받는 극소수의 독자만이 누리는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형에겐 미안하지만 <(내게는) 별로 재미는 없는 책>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책이 왜 재미없는가를 궁리하다보면 의외로 재미있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인상비평에 불과하지만 BBC의 다큐멘터리는 늘 이런 풍이다. 내셔널 지오그라피나 디스커버리와는 앵글도, 스토리텔링도 다르다. 아메리칸 블렌드 커피와 얼그레이의 차이라고나 할까. 점잖다못해 시종 무덤덤하고, 권위적인 대신 신뢰감을 갖게 한다. 좀처럼 카메라 렌즈를 피사체에 가까이 들이대는 법이 없다. 시청자에게 미안해서 서비스삼아 한두 컷씩 집어넣는 볼거리도 일체 불허한다. 이 책을 쓴 피터 퍼스트브룩은 바로 BBC의 프로듀서로, <에베레스트에 지다 Lost on Everest 1999>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다. 나중에 형도 역자후기에서 코멘트했지만, 이 책은 다큐멘터리이되 클로즈업보다 롱샷으로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따라서 찾는 사람이나 찾는 대상을 둘러싼 드라마틱한 디테일은 거의 없다. 그 비슷한 서술이 거의 책의 말미에 있지만 엔간한 참을성이 아니면 그 전에 책장을 덮거나 아니면 가쁜 숨을 몰아쉬고 후딱 지나가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본다. 에베레스트에 처음 올랐을지도 모른다는 것 말고는 세상사람들에게 딱이 어필할 게 없는 인물,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의 뒤를, 그것도 실종후  70년이 지난 후에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어떻게 찍을 것인가. 신안 해저보물을 뒤지듯 할 것인가, 아니면 동물의 왕국처럼 찍어댈 것인가. 그냥 BBC답게 찍는 것이 맞고, 책도 이렇게 덤덤하게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겉장에 박힌 색바랜 사진에 대한 설명조차 없어서 누가 맬러리고, 누가 어빈인지도 모른 채 책의 절반이상을 읽어야 할까. (그러니까 그게 뭐가 중요하냐니까? 설사 바뀐다해도 당신이 무슨 피해를 입을 것도 아니면서. 처음엔 화가 났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재미없어도 이 정도 큰소리칠 수 있다는게 신기하다.)

이 책이 재미없는 두번째 이유를 들기 전에,  호영형에 대한 존경의 염을 숨길 수가 없다. 가끔 책이 맘에 안들면 앞뒤의 조각글을 뒤적여본다. 거기서 저자나 평론가들이 쓴 글을 보고 다시 초발심을 내어 완독했던 예가 여러번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그나마 다 읽게 된데는 역자의 <옮기고 나서>가 크게 한몫을 했다. 형은 느닷없이 <프로라는 것이 좁은 굴을 깊이 파고 들어가 그 구멍속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운을 떼더니  <삶의 어느 구석에서나 최선을 다해 인간됨의 범위를 넓히려고 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마치 형은 프로라고 하는 것들이 인간화를 위해 기여한 게 뭐있는데 라고 일갈하는 듯하다. 우리는 프로페셔널리즘을 숭상해 마지 않는다. 스스로 프로연하고 어린 아이들한테도 프로가 돼야 한다고 윽박지른다. 너는 아마츄어 수준이야라는 얘길 들으면 대뜸 멱살을 잡거나 그만한 용기조차 없을 땐 자라목으로 주눅들고 만다. 그렇다고 프로가 나쁘고 아마가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이 세상의 일들이 한결같이 프로지상주의의 잣대로 재단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프로페셔널리즘은 어쩔 수 없이 물신주의의 역한 구릿내가 난다. 직업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완벽성과 효율성, 그리고 희소성과 환금성을 두루 내포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선 당연히 찬양받아 마땅한 미덕이다. 따라서 프로는 언제나 아름답고 섹시한 승자로 포장되어 대중들을 매혹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의 활약상에 이목구비를 집중시키면서 대중들은 <재미있어!!!>를 연발한다.

맬러리와 어빈은 프로가 아니다. 승리하지도 못했고, 사생활에서 흥미를 끌만한 구석도 없다. 그들은 등산으로 돈을 버는 시대에 태어나지도 못했다. 한 사람은 건망증이 심하고 주의가 산만하며 칠칠치 못했지만 능선을 타는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 한 젊은이는 노를 잘 저어 옥스포드에 갔다는 뒷얘기를 들을 만큼 공부는 잘 못했지만 뛰어난 기술자였으며, 힘과 열의로 빛나는 청년이었다. 허구(픽션)이 아니라면 재미있게 포장할 어떤 특별함도 갖추지 못한 두사람의 아마츄어들이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올라간다는 지극히 어눌한 대답밖에 할 줄 모르는 산사나이일 뿐이다. 저자는 에베레스트에서 스러진 위대한 아마츄처 등산가들을 탐욕스러운 대중들에게 재밋거리로 던져주려는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지금껏 대중들, 즉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재미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마치 가수나 PD처럼 그들에게 잘 보이겠다는 생각만으로, 정말 소중한 것들을 까뭉개거나 모른 척 했다. 나를 재미있게 못만들면 무능력하고 한심한 놈이라고 무시하기도 했다. 반대로 대중들로부터 멀어진다는 불안감때문에 잠 못들고 좌절하기도 했다. 무덤덤하지만 당당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늘 초조하게 두리번 거렸고 마치 원숭이처럼 털을 고르느라 분주했다.

반성한다. 나는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더불어 살다가 한참 못보면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 친구 소식 뜸하더니 지난 가을에 세상 떴다는군.> <그래? 그런데 뭘하던 친구였더라?> <나도 자세히는 몰라. 아 참 자네 골프는 많이 늘었나.> 잊혀지는게 그다지 서러울 것도 없다. 오히려 나쁜 인상으로 기억될까봐 부담스러워 하는 성격이다. 바라건데 <그래도, 후회는 없다>라는 말 한마디 남길 수 있기를. 맬러리와 어빈이 정상 부근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들도 할 수 있다면 정상에 꼭 오르고 싶었을 테고, 그에 수반하는 명예와 작은 물질적 여유를 바랬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어야할 만한 댓가는 애당초 없었다. <에베레스트에 누가 먼저 올랐나>는 예나 지금이나 호사가들의 화제에 불과할 뿐. 호영형 말마따나 정말 사진속의 두 사람은 내게 웃으며 말한다. 그게 뭐가 중요한데? 

형. 그래도 이 책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책은 솔직히 재미없는데 역자후기가 썩 괜찮았어. 그리고 얼핏보면 부랑자처럼 보여서 <그래도 후회는 없다>라는 제목이 엉뚱하게 해석될 소지가 있는 두 친구도 멋진 것 같군. 이 책 산 거 후회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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