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명깊게 읽은 책을 소개하기위해 떠는 수다는 무조건 용서돼야 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경험한 책과의 짜릿한 교감을 털어놓는 기쁨. 그것은 꼭꼭 숨겨둔 애인을 딱 한 친구에게만 살짝 귀뜸할 때의 자랑스러움과 맞먹는다. 입술을 삐쭉거리며 그 수다를 받아주지 못하는 야만인들과는 당장 절교하라.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듯이 책읽은 자랑은 자만이 아니다.

한동안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세프>를 읽어보라고 수다를 떨었다. 창피한 얘기지만 나도 끝까지는 읽지 못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책읽기 4단계>중에서 훑어보기를 끝내고 3단계 제대로 읽기를 하려던 차에, 엄청난 일이 쏟아졌던 것이다. 책을 탁자위에 보름 남짓 올려놓고 그 앞을 왔다갔다하며 입맛만 다셨다. 그러나 훑어보기만 해도 50%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에 용기백배해 부피에와 류비세프의 만남을 주선하기로 했다. 

엘리제르 부피에는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이다. 작가가 만난 사람이라 하니 완전히 허구는 아닌 것 같다. 물론 부피에란 이름은 작명한 것이고. 소설속의 가상 인물 부피에와 실존인물 류비세프가 이 페이퍼에서 소개팅으로 만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나의  필요 때문이다.

한 사람은 나무를 줄기차게 심었고, 다른 한 사람도 역시 56년동안 고집스레 시간관리를 했다. 묵묵히 나무를 심은 양반 덕분에 강산은 푸르게 푸르게 변했고 아귀처럼 싸우던 사람들도 천사가 됐으며, 맑은 물이 도랑에 넘치자 사랑도 함께 넘치게 됐단다. 이 책의 편집자(우리나라 사람인 듯)가 조금 우습게 도식화했지만 <한사람의 끈질긴 노력-새로운 숲의 탄생-수자원의 회복-희망과 행복의 부활>이 줄거리의 전부다. 시간관리로 평생을 빼꼭하게 채운 류비세프옹의 위대함은 운명에 대한 개인의 저항에 있다. 그는 적당히 살면서 운명과 타협하거나 비굴하게 무릎을 꿇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내인생은 나의 것. 신이 내게 부여한 시간만큼은 내가 완전하게 통제관리하겠다는 당돌한 생각을 그는 놀랍게도 스물두어살에 했다. 부피에가 숲을 살려 희망을 주었다면, 류비세프는 운명에게 농락당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준 셈이다.

두 노인은 모든 면에서 난형난제다. 부피에옹이 1947년에 89세로 작고하셨고, 류비세프옹은 1972년에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으니 나이로 따지면 부옹이 훨씬 연배다. 두 분 모두 평생을 규칙적인 생활과 탁월한 마인드 컨트롤, 소박한 밥상으로 살았기 때문에 무병장수했을 것이다. 규칙적인 것으로 따지면 류옹이 반발 앞선다. 이 양반은 심지어 두 아들이 전쟁통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에도 지극히 담담한 몇 줄의 일기(라기보다 시간관리기록부)를 남겼다. 2차대전이 발발했어도 그 얘기는 쓰지 않았다. 그런 일에 쓸 시간을 마련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자린고비처럼 시간을 장농에 차곡차곡 쌓아둔게 아니다. 하루에 8시간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연구시간을 제외한 10시간을 자유시간으로 남겨두었다. 물론 자유시간도 철저하게 관리했으니 굳이 표현하자면 사회주의적 자유라고나 할까. 그 시간에 연 70여회의 연주회와 연극을 관람했고 이즈베스치야를 비롯한 수많은 신문과 잡지, 저널을 탐독했으며, 문학과 역사, 철학, 사회과학을 망라하는 폭넓은 독서를 했다. 이 모든 행위들은 독후감과 독서목록, 노트, 메모, 편지를 통해 낱낱이 사실로 증명될 수 있다하니 지독한 영감이다.

나그네가 하룻밤 같이 지내면서 보니 부피에옹은 매일 밤 한자루의 도토리를 탁자위에 쏟아놓고 잘생긴 것만 골라서 다음날 하루종일 심고 다닌다는 것이다. 땀들이를 위해 앉아서 생각하노니, 저 언덕에는 자작나무를 심어야 겠는걸,  단풍나무가 절딴났으니 굴참나무로 바꿔심어야겠어, 양들이 자꾸 어린 나무를 작살내니 저것들을 다 팔아버리고 오라 꿀벌을 쳐야겠군. 그러면 열매들이 열게 아닌가. 뭐 이랬다는 것이다. 혼자 살다보니 어느새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조금 전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외로움은 환경이 만들지만, 고독은 사나이가 선택하는 것>이라고 최민수가 말했단다. 마치 묵언수행을 하는 선승처럼 부피에는 수십년의 세월동안 그렇게 고독을 선택한 것이다.

이제 밤이 깊었으니 얘기를 마무리짓자. 부피에는 그 자신의 삶을 통해서 어떤 이름없는 사람도 나폴레옹 못지않은 위대함으로 높여질 수 있음을 증명했다. 참 좋은 대목을 하나 적어놓는다.

"참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세계를 아름답게 바꾸어 놓는 것은 권력이나 부나 인기를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남을 위해, 공동의 선을 위해 침묵 속에서 서두르지 않고 속도를 숭배하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며 일하는 아름다운 혼을 가진 사람들이며, 굽힘없이 선하게 살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다음에 올 말을 되뇌일 때마다 지독한 이기심에 진저리를 치게 된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류비세프는 많은 일을 끝내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는 하려고 했던 그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시간통계 방법을 통해 그는 자신을 연구했다. 자신이 얼마나 읽고 쓸 수 있는지, 연구하고 생각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였다. 스스로에게 터무니없이 무거운 부담을 지우지는 않았지만 그는 능력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바로 그 한계까지 능력을 사용하였다. 이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자기 인식의 길이었다. "

"류비세프는 천재가 아니었다. 천재란 선구자들이 쌓아왔던 노력에 종지부를 찍는 존재이다. 나는 류비세프가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흥미를 느낀다. 천재는 분석될 수 없고 따라서 연구해봤자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 천재는 그저 바라보고 감탄하면 되는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류비세프에게는 스스로 성공적으로 실천해낸 그 어떤 삶의 비결이 있다. 비록 그 자신은 특별한 비결이나 기적의 존재를 부인했지만 말이다. 시간통계 외에도 류비세프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생활 원칙을 지켰다.

1. 의무적인 일은 맡지 않는다.

2. 시간에 쫓기는 일은 맡지 않는다.

3. 피로를 느끼면 바로 일을 중단하고 휴식한다.

4. 열 시간 정도 충분히 잠을 잔다.

5. 힘든 일과 즐거운 일을 적당히 섞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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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2-24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류비셰프 읽어 보려고 신청했는데, 오늘쯤 책이 도착할 것 같은데 아직 안 오네요. 잘 보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