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책 잡은 손이 허황되고 정신이 나간 듯 집중되지 않았다. 책 한권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고 이 책 저 책 부질없이 옮겨다닌 것이 벌써 일주일이나 됐다. 밖으로 돌아다닐 때는 한순간 화가 솟구치거나 울증이 생겨도 하루를 넘기는 법이 드물었다. 내 건강은 그날의 스트레스를 품고 잠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호언장담해왔다. 그런데 아무리 책에 집중하려고 해도 한두단락만 지나면 언제 옆길로 새는지 모르게 딴 생각과 아집, 속끓임으로 시간 낭비를 하는 한심스런 일이 하루에 서너차례나 생긴다. 매일 적어도 책 한권을 정성스레 읽고 그 요체와 느낀 바를 몇줄 글로 남기자 했던 결심이 한낱 잡념에 쓸려 제 줄기를 못찾고 있는 꼴이라니.
'무릇 남자가 독서를 하고 행실을 닦으며 집안을 다스리고 일을 하는 모든 것에 정신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신력에서 근면함과 민첩함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며 업적도 나오는 것이다. 마음을 굳건하게 세우고 곧장 한결같이 앞을 행해 나아간다면 태산이라도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유아 보아라.1805)
한갓지기 이를데 없는 요즈음의 내 일상을 어지럽히는 잡생각들을 이 잡듯 하나씩 캐내어 보자. 우선 다음달에 책 내는 일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싶은 생각이 머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다.
'남들이 모르게 하려면 안하는 것이 최고이고, 남들이 못듣게 하려면 말하지 않는 것이 최고다. 이 두개의 문장을 평생 동안 외우고 다닌다면 위로는 하늘에 대하여 떳떳하고, 아래로는 집안을 지킬 수 있다. 세상의 재앙이나 우환, 천지를 뒤흔들며 자신을 죽이고 가문을 전복시키는 죄악이 모두 몰래 하는 일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말을 하거나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치열하게 반성해 보아야한다. ...
편지 한통을 쓸 때마다 두번 세번 살펴보며, "이 편지가 번화가의 큰길가에 떨어져 내 원수가 펼쳐보아도 내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인가?"하고 기원한다.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뒤에까지 전해져서 허다한 안목있는 사람들이 본다 해도 내가 놀림거리가 되지 않을 것인가"하고 생각해 본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봉하는 것이다. '(학유에게 노자 삼아주는 훈계. 1810)
뚜렷한 성과로 본보기가 됐거나, 두루 사람들에게 이로운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제 감정도 추스리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던 방황의 기록들을 무슨 염치로 출판하겠다고 나서는 것인지 부끄럽기만 하다. 그 나마 이 책을 손에 들, 몇 남지도 않은 지인들로부터 조차 문 밖으로 내쳐지는 망신을 자초하는 건 아닐까. 글을 손보려 해도 두 해에 걸쳐 매주 꼬박꼬박 써온 것이라 마땅히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할 지 엄두가 안난다. 그리고 그렇게 분칠하고 윤문한다해서 부끄러움이 가려질 것 같지도 않다. 호영형은 백수의 공연한 노심초사일뿐이라며 책 내는 일은 책내서 먹고 사는 놈에게 맡겨두라고 한다. 이런 자신감 부족현상이야 말로 백수의 전형이라며 나보고 진도가 굉장히 빠르다고 걱정한다. 옆에서 소설가 성석제씨가 자기 백수생활의 연조는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 시절부터라고 해서 와 웃었다. 책은 눈 질끈 감고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나서 어제부터 서문과 군데 군데 모자라는 글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전주의 일 때문에 자주 화가 난다. 그 자들의 추접한 소행과 쥐새끼 같은 소인배 근성이 괘씸하기도 하고, 내가 어떤 허물이 있어 중생들이 그런 악의를 품게 했는지, 왜 이렇게 늘상 끝이 좋지 않은지 가슴을 치게 된다. 그냥 서울에 가만히 죽치고 있을 것을. 공연히 이년동안 허튼 짓을 한게 아닌가 싶어 그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 나를 서울에서 내쳤던 박복의 칼 끝이 전주에서도 내내 뒤통수를 찔러댔다. 이 세상에 숨을 곳이 어디 있을까. 사업을 하면서 본연의 평상심을 초개처럼 내던지고 아귀모냥 야차인 듯 부귀와 공명을 좇으며 악행을 서슴치 않았으니 그 보복을 한두해로 어찌 벗어날 수 있을까. 삼가해야 한다. 더욱 조심해야한다. 모두 그리고 빨리, 끊고 잊어야 한다.
'사대부의 마음이란 비 갠 뒤의 바람이나 달과 같이 털끝만큼도 가리워진 곳이 없어야 한다. 하늘과 인간에게 부끄러울 일은 칼로 끊은 듯 범하지 말아라. 그러면 저절로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살져서 편안해지며 호연지기가 생긴다. 만약 옷감 한 자, 돈 한 푼에 잠깐이라도 양심을 저버린다면 즉시 기상이 타락하고 만다. 이것이 인간이 되는가 도깨비가 되는가 하는 관건이다.'(입을 속이는 방법 1810)
내내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 이 말씀대로 올곧이 살아오진 못하였으되 경계를 허물어뜨린 적 없다가 그만 지난 99년 어름 광증이 뻗쳐 눈이 뒤집혔다. 사물을 이해관계로 측량했고 인간관계조차 영리에 따라 멀고 가까움을 정하였다. 이래서 망조가 들었다. 설사 사업이 잘되어 억만금이 손에 들었다 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게다.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후회막급이다.
' 세상에는 두가지 큰 저울이 있다. 하나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이라는 저울이고 하나는 '이익과 손해'라는 저울이다. 이 두가지 큰 저울에서 네가지 등급이 생겨난다.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도 얻는 것이 제일 고급이다.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다가 해를 입는 것이고, 그 다음이 그른 것을 구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다. 최하급이 그른 것을 추구하다가 해를 입는 것이다.
내가 돌아가고 못 돌아가는 일이 참으로 큰 일이기는 하다만, 살고 죽는 것에 비한다면 하찮은 일이다. 사람이란 때로는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하기도 하는 것 처럼, 생명과 의리중에서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추하기도 하는 법이다. 하물며 돌아가고 못 돌아가는 따위의 하찮은 일에도 문득 남을 향하여 꼬리를 치며 애걸한다면, 만일 남북의 국경에 근심거리가 생긴다면 임금을 배반하고 개나 양 같은 오랑캐들에게 투항하지 않을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내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운명이고 내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또한 운명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천명만을 기다리는 것도 참으로 이치에 맞는 일은 아닐 것이다. 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이미 다했다. 마음을 가라 앉히고 염려하지 말고서 조금 세월을 기다리는 것이 도리에 맞으리라.' (세상의 두가지 저울. 1810)
세상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고 찾아주지 않는 것을 염량세태라 탓하며 속을 끓였다. 만나는 이 많지도 않으려니와 그저 푹 쉬라는 하나마나한 얘기만 되뇌일 뿐 진정을 나누려는 이 드물다. 그들을 가벼이 대하지 않았거늘 어찌 이리 무심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 동기간과 가족만 남는다니 기어코 그 말이 맞는가 싶다. 하마 이제 그만 꼭막힌 속내를 풀고 세상이 어지럽고 불안하니 사람들 마음자리도 그러한가보다라고 마음 고쳐 먹었다. 그래도 천복으로 내 살림이 이만하면 밥술 걱정 없이 책을 벗삼아 십수년을 지낼 수 있으니, 오히려 그들의 여유없음을 챙겨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뜬 세상 너나없이 둥둥 떠서 살아가면 그뿐, 새삼 부딪히고 마음상해서 속으로나마 악연맺을 것은 무엔가.
'어떤 사람이 큰 배를 타고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배안에서 물 한잔을 선창 안에 붓고 겨자를 배처럼 띄워놓고는, 자기 자신이 바다위에 떠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고 그것이 떠있다고 비웃는다면 어리석다하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지금 천하가 온통 다 떠다닙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떠다닌다는 사실에 홀로 상심하셔서 자신을 '떠다니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자기 집에 '떠다니는 집'이란 이름을 붙이며 떠다니는 것을 슬퍼하고 계시니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뜬 세상의 아름다움)
지금 내가 방구석에 틀어박혀 빠꼼히 밖을 내다보며 옹졸한 마음에 양미간을 찌푸리는 것은 '바라지 말고 베풀라'는 젊었을 때의 호연지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사회 첫발을 내는 아들에게 이르시길,"사내가 사십전에 재물을 밝히면 사람을 잃게 되노니 돈벌 생각 말고 사람벌 생각하렴. 그리하면 그 사람이 사십후에 재물을 벌어다 주리라'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십수년을 열심히 사람벌이에 나서 적지 않은 사람재목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아뿔싸 마음 한번 잘못 먹은 덕에 벌어놓은 재목을 삼사년만에 모두 탕진하고 말았으니. 이제라도 반성한다. 바라지 말고 베풀어라. 그리고 베풀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려라. 일가를 대하듯 해라. 바라는게 있으면 구차해지고, 원망하게 된다. 보답을 바라면 치사해진다. 내 도리를 다하고 그것으로 끝이어야 한다.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 대하는 도리가 다 이렇다.
'훗날 너희에게 근심거리가 있는데도 저들이 보답하지 않더라도 너희는 마음속에 절대로 한을 품지 말아라. 한결같이 내 마음으로 미루어 용서하며 '저 사람이 마침 그럴 사정이 있나 보다. 그렇지 않으면 힘이 모자라는 것이리'라고 여기고, 절대로 "내가 전에 이렇게 저렇게 했는데 저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한다"고 경박한 말을 입에 올리지 말아라. 이 말이 한번 발설되기만 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공덕은 하루아침에 바람에 날리는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말것이다. '(바라지 말고 베풀어라.)
다산을 더욱 공부해야겠다. 아침부터 책을 잡기 어려울 만큼 심사가 복잡하다면 망서림없이 다산을 모셔 말씀을 들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