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영형은 농반진반으로 이 책이 잘팔려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했다. 번역하는 사람이 책 많이 팔리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고 했더니 매절과 로얄티를 섞었다고 한다. 그냥 재미있다고 할 것을 공연히 <이책은 언제부터 재미있을라나>하고 이러쿵 저러쿵 입을 놀렸다. 후회했다. 작가나 번역가들에겐 말조심을 해야겠다.

조선과 중앙의 북섹션들이 비중있게 키워놓았고, 호영형이 번역한 책 중에선 그나마 대중적인 내용이어서, 음...팔려고 작심한 모양이구나, 그럼 나도 편하게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른 읽기 시작했는데 50쪽이 지나, 백쪽이 넘어가도 영 재미있을 기미가 안보이는게 아닌가. 이런 낭패가 있나. 형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뒤로 가면 재밌어. 좀 참고 읽어봐.> 물론 나는 번역자의 이런 조언을 받는 극소수의 독자만이 누리는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형에겐 미안하지만 <(내게는) 별로 재미는 없는 책>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책이 왜 재미없는가를 궁리하다보면 의외로 재미있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인상비평에 불과하지만 BBC의 다큐멘터리는 늘 이런 풍이다. 내셔널 지오그라피나 디스커버리와는 앵글도, 스토리텔링도 다르다. 아메리칸 블렌드 커피와 얼그레이의 차이라고나 할까. 점잖다못해 시종 무덤덤하고, 권위적인 대신 신뢰감을 갖게 한다. 좀처럼 카메라 렌즈를 피사체에 가까이 들이대는 법이 없다. 시청자에게 미안해서 서비스삼아 한두 컷씩 집어넣는 볼거리도 일체 불허한다. 이 책을 쓴 피터 퍼스트브룩은 바로 BBC의 프로듀서로, <에베레스트에 지다 Lost on Everest 1999>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다. 나중에 형도 역자후기에서 코멘트했지만, 이 책은 다큐멘터리이되 클로즈업보다 롱샷으로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따라서 찾는 사람이나 찾는 대상을 둘러싼 드라마틱한 디테일은 거의 없다. 그 비슷한 서술이 거의 책의 말미에 있지만 엔간한 참을성이 아니면 그 전에 책장을 덮거나 아니면 가쁜 숨을 몰아쉬고 후딱 지나가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본다. 에베레스트에 처음 올랐을지도 모른다는 것 말고는 세상사람들에게 딱이 어필할 게 없는 인물, 조지 맬러리와 앤드류 어빈의 뒤를, 그것도 실종후  70년이 지난 후에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어떻게 찍을 것인가. 신안 해저보물을 뒤지듯 할 것인가, 아니면 동물의 왕국처럼 찍어댈 것인가. 그냥 BBC답게 찍는 것이 맞고, 책도 이렇게 덤덤하게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겉장에 박힌 색바랜 사진에 대한 설명조차 없어서 누가 맬러리고, 누가 어빈인지도 모른 채 책의 절반이상을 읽어야 할까. (그러니까 그게 뭐가 중요하냐니까? 설사 바뀐다해도 당신이 무슨 피해를 입을 것도 아니면서. 처음엔 화가 났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재미없어도 이 정도 큰소리칠 수 있다는게 신기하다.)

이 책이 재미없는 두번째 이유를 들기 전에,  호영형에 대한 존경의 염을 숨길 수가 없다. 가끔 책이 맘에 안들면 앞뒤의 조각글을 뒤적여본다. 거기서 저자나 평론가들이 쓴 글을 보고 다시 초발심을 내어 완독했던 예가 여러번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그나마 다 읽게 된데는 역자의 <옮기고 나서>가 크게 한몫을 했다. 형은 느닷없이 <프로라는 것이 좁은 굴을 깊이 파고 들어가 그 구멍속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운을 떼더니  <삶의 어느 구석에서나 최선을 다해 인간됨의 범위를 넓히려고 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마치 형은 프로라고 하는 것들이 인간화를 위해 기여한 게 뭐있는데 라고 일갈하는 듯하다. 우리는 프로페셔널리즘을 숭상해 마지 않는다. 스스로 프로연하고 어린 아이들한테도 프로가 돼야 한다고 윽박지른다. 너는 아마츄어 수준이야라는 얘길 들으면 대뜸 멱살을 잡거나 그만한 용기조차 없을 땐 자라목으로 주눅들고 만다. 그렇다고 프로가 나쁘고 아마가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이 세상의 일들이 한결같이 프로지상주의의 잣대로 재단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프로페셔널리즘은 어쩔 수 없이 물신주의의 역한 구릿내가 난다. 직업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완벽성과 효율성, 그리고 희소성과 환금성을 두루 내포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선 당연히 찬양받아 마땅한 미덕이다. 따라서 프로는 언제나 아름답고 섹시한 승자로 포장되어 대중들을 매혹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의 활약상에 이목구비를 집중시키면서 대중들은 <재미있어!!!>를 연발한다.

맬러리와 어빈은 프로가 아니다. 승리하지도 못했고, 사생활에서 흥미를 끌만한 구석도 없다. 그들은 등산으로 돈을 버는 시대에 태어나지도 못했다. 한 사람은 건망증이 심하고 주의가 산만하며 칠칠치 못했지만 능선을 타는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 한 젊은이는 노를 잘 저어 옥스포드에 갔다는 뒷얘기를 들을 만큼 공부는 잘 못했지만 뛰어난 기술자였으며, 힘과 열의로 빛나는 청년이었다. 허구(픽션)이 아니라면 재미있게 포장할 어떤 특별함도 갖추지 못한 두사람의 아마츄어들이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올라간다는 지극히 어눌한 대답밖에 할 줄 모르는 산사나이일 뿐이다. 저자는 에베레스트에서 스러진 위대한 아마츄처 등산가들을 탐욕스러운 대중들에게 재밋거리로 던져주려는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지금껏 대중들, 즉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재미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마치 가수나 PD처럼 그들에게 잘 보이겠다는 생각만으로, 정말 소중한 것들을 까뭉개거나 모른 척 했다. 나를 재미있게 못만들면 무능력하고 한심한 놈이라고 무시하기도 했다. 반대로 대중들로부터 멀어진다는 불안감때문에 잠 못들고 좌절하기도 했다. 무덤덤하지만 당당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늘 초조하게 두리번 거렸고 마치 원숭이처럼 털을 고르느라 분주했다.

반성한다. 나는 결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더불어 살다가 한참 못보면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 친구 소식 뜸하더니 지난 가을에 세상 떴다는군.> <그래? 그런데 뭘하던 친구였더라?> <나도 자세히는 몰라. 아 참 자네 골프는 많이 늘었나.> 잊혀지는게 그다지 서러울 것도 없다. 오히려 나쁜 인상으로 기억될까봐 부담스러워 하는 성격이다. 바라건데 <그래도, 후회는 없다>라는 말 한마디 남길 수 있기를. 맬러리와 어빈이 정상 부근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들도 할 수 있다면 정상에 꼭 오르고 싶었을 테고, 그에 수반하는 명예와 작은 물질적 여유를 바랬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어야할 만한 댓가는 애당초 없었다. <에베레스트에 누가 먼저 올랐나>는 예나 지금이나 호사가들의 화제에 불과할 뿐. 호영형 말마따나 정말 사진속의 두 사람은 내게 웃으며 말한다. 그게 뭐가 중요한데? 

형. 그래도 이 책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책은 솔직히 재미없는데 역자후기가 썩 괜찮았어. 그리고 얼핏보면 부랑자처럼 보여서 <그래도 후회는 없다>라는 제목이 엉뚱하게 해석될 소지가 있는 두 친구도 멋진 것 같군. 이 책 산 거 후회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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