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와 거지 펭귄클래식 55
마크 트웨인 지음, 남문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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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읽은 동화책을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하여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왕자와 거지' 와 '피터팬'을 샀다. 그중 '왕자와 거지'부터 읽었다. 그리고 이 책과 함께 며칠 유쾌한 시간 보냈다.
  '왕자와 거지'의 줄거리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긴 소설인지는 처음 알았다. 각 장마다 거지였다가 왕자가 된 톰 캔티, 왕자였다가 거지가 된 에드워드 튜더의 이야기가 아주 유려하게 전환된다. 이쯤에서 우리 똘똘한 톰이 궁금한데? 라고 생각하면 다음 장에 톰 얘기 나오고, 우리 불쌍한 에드워드는 또 무슨 고생을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하면 틀림없이 다음 장에 에드워드 얘기가 나온다. 작가가 어쩜 이렇게 귀신같이 독자 마음을 잘 알까 싶어서 읽는 내내 진짜 신기했다.
 
  마흔을 향해가는 나도 참 재밌게 읽었지만, 책을 좀 좋아하는 고학년 어린이도 펭귄클래식 버전 그대로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전 연령대가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 참 흔치 않은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책 중 하나다.
  16세기의 잉글랜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주석을 참조해서 당시 왕실과 빈민의 생활상을 상상해 보는 것도 꽤 흥미로웠다. 특히 왕자 대신 매 맞아주는 '회초리 시동' 이 기억에 남는다. 관련 주석을 보니 작가가 지어낸 게 아니라 실존했던 것 같다. 근데 너무 불쌍하잖은가. 오로지 맞기 위해 궁에 있는 어린 소년이라니. 원래 소설에 포함되었다가 막판에 제외되어 부록으로 실린 '한 소년의 모험'이라는 에피소드는 온전히 회초리 시동의 이야기인데, 특별히 이런 에피소드까지 쓴 걸 보면 마크 트웨인 역시 왕 대신 매를 맞던 옛날 회초리 시동 소년이 딱했던 모양이다.
  주인공 아이 톰과 에드워드가 의젓한 왕 같다가도 결국 영락없는 어린이라 읽다 보면 그들의 귀여움에 절로 미소 짓게 된다. 에드워드가 죽을 위기에 처해 눈물을 줄줄 흘릴 땐 너무 안쓰럽고, 톰이 옥새로 호두 까먹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또 너무 깜찍하다. 
  일단 '왕자와 거지'는 지루할 틈 없이 재밌었다. 부디 '피터팬'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톰은 녹초가 된 죄수 같은 기분이 들어, 혼자 하겠다는 눈짓을 보내고 장화를 벗으려고 했지만, 역시 대기 중이던 방해자가 잽싸게 무릎을 꿇고 시중을 들었다. 그 밖에 두어 가지를 더 혼자 해보려고 시도 했지만 번번히 방해를 받았고, 결국 톰은 포기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젠장, 숨도 나 대신 쉬어주겠다고 나서지 않는 게 용하네!"

-p.52


고향에 돌아가기만 하면 다들 그의 귀환에 기뻐 어쩔 줄 몰라 할거라고 기대했건만, 오히려 지독한 냉대 속에 죄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기대와 현실의 격차가 너무나 벌어져, 넋이 나가고 만 것이다. 비극이라고 해야 할지 괴상하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지개를 기대하며 어깨춤을 추고 나갔다가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p.216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소년은 마른 몸에 예의 바르되 잘 웃지 않는 아이로 유머 감각이 신통치 않을뿐더러 날 때부터 우울한 기질을 타고 났다.

-p.279 ('부록: 한 소년의 모험' 중)

: 앞에 말한 부록의 회초리 시동에 대한 마크 트웨인의 묘사. 잘 웃지 않고 우울한 기질을 타고난 마른 몸의 소년이 괜히 마음에 들어 적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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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마카롱 에디션
제임스 조이스 지음, 한일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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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9월 어느날 난 더블린에 갔다. 그때가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사치스럽게 보낸 일주일이었는데, 그 일주일 동안 나는 런던(잉글랜드)-에딘버러(스코틀랜드)-더블린(아일랜드) 이렇게 세 군데를 홀로 여행했다. 더블린은 보통 사람들이 안 가는 곳인데, 이상하게 꼭 하루라도 있고 싶었고, 딱 1박 2일 체류하다 왔다. 
  그때 더블린 공항에 내려 시내로 가던 버스 안에서의 기분 정말 잊지 못한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순수하고 청량한 공기, 파란 하늘, 녹색 잔디, 아담한 건물들, 한가한 고속도로. 첫인상은 런던, 에딘버러보다 100배는 좋았다. 더블린의 가장 번화가에 호텔을 잡았는데, 나름 한 나라의 수도이고 어엿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더블린은 평화롭고 느긋하고 조용했다. 이 시골같은 도시가 한때는 영국에서 (독립 전에는 아일랜드도 영국의 일부였으니) 런던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더블린에서 뭘 할지 거의 정해놓질 않아서 정처 없이 떠도는 것 외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런던에 비해 여행책자도 너무 없었고, 1박 밖에 안돼서 본격적으로 뭘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다. 결국 나는 트리니티 칼리지에 있는 고도서관에 가는 것과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오스카 와일드 생가를 보는 것외 특별히 한 일 없이 런던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더블린 사람들'을 읽으며 4년 전 괜히 더블린에 가서 쏘다닌 게 얼마나 잘한 일인가 싶었다. 물론 제임스 조이스가 살던 시대의 더블린과 내가 정처 없이 걸어다닌 더블린은 많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 골목이나 공원 등 도시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못 가본 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을 때보다 훨씬 더 실감 나게 느껴졌다. 그래서 러시아 소설에 줄기차게 나오는 상트 페테르부르그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오래전 로알드 달의 단편 '카티나' 읽었을 때처럼 '더블린 사람들'도 전철에서 다 읽은 후 주책맞게 눈물을 쏟았다.
  8월에 다 읽었으니 읽은 지 벌써 2개월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도 여운이 남아있다. 이 소설이 왜 그토록 슬펐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도저히 행복해지지 않을 것 같은 소설 속 인물들의 인생이 너무 딱해서였던 것 같다. 대단한 행운 혹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흔히 사람들은 '소설같다.' 고 한다. 그런데 이 단편집에는 전혀 소설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만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백만장자가 아니라 백만장자 옆에 있는 어떤 젊은이, 잘 나가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라 그 저널리스트를 친구로 둔 사람, 선거에 출마한 사람이 아니라 선거 운동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 혹은 그냥 하숙인, 직장인, 학생 등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일상은 발전 없는 도시 더블린에서 어떠한 일도 없이 그저 흘러갈 뿐이고 그들은 또 그렇게 지겨운 오늘을 살아간다.   
  '더블린 사람들'의 등장인물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며 낙담해있고 뭔가를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해버리며, 어떠한 일에도 크게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설령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절대 의욕적으로 나설 것 같지도 않다. 그들에겐 그럴만한 용기도 배짱도 의지도 없다. 
  '더블린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소설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래서 조금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제임스 조이스가 그려낸 무기력한 도시와 인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피곤하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행하는 사소한 행동과 그저 그런 일상을 이토록 잘 쓰고 또 한 권의 책으로 엮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블린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라도 결국 대부분은 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살고 있다. 멋지고 폼 나게 비참하거나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으니까. 
  제임스 조이스는 그 누구도 소설로 쓰고 싶지 않고 남루하고 하찮고 보잘 것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삶도 누군가는 알아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소설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도저히 희망이라곤 찾을 수 없는 이 소설을 다 읽은 뒤 오히려 나는 앞으로 남은 인생이 쭉 지금과 같더라도 나름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깊이 절망했지만 끝내 나에게 희망을 준 역설적 소설 '더블린 사람들' 을 아마도 난 영원히 사랑하겠지. 아...  더블린에 또 가고 싶어졌다. 


  아침마다 나는  응접실 마루에 누워 그녀의  문을 지켜보았다. 창틀에서 1인치 정도의 틈새만 남기고 차일을 내렸기 때문에 내가 남의 눈에  리는 없었다. 그녀가 현관 층계로 나올 때면  가슴은 마구 뛰었다. 나는 현관으로 달려가서 책을 움켜쥐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나는 한시도 그녀의 갈색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다다른다 싶으면 얼른 걸음을 재촉해서 그녀 곁을 지나쳤다. 이런 일이 매일 아침 일어났다. 어쩌다가 우연히  마디 말을 나눈  말고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나의 온몸의 어리석은 피를 불러 모으는 소환장과도 같았다.
 -p.37 ('애러비' )


  그녀는 갑자기 겁에 질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벗어나야 ! 벗어나야만 한다! 프랭크가 그녀를 구해 주리라. 그가 그녀에게  삶을, 그리고 아마 사랑 또한 주리라. 그녀는 살고 싶었다.  그녀가 불행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프랭크가 그녀를  팔로 끌어안고,  감싸줄 것이다. 그가 그녀를 구해 주리라.
 -p.49 ('이블린' )


  " 그런데 내가 떠나기 전날  넌즈 아일랜드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짐을 꾸리고 있는데, 누가 유리창에 돌은 던지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유리창이 비에 젖었기 때문에 밖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입고 있던 그대로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 뒤편 정원으로 나가 봤더니,  애가 가엾게도 정원 한구석에서 몸을 벌벌 떨면서  있는거예요."
 (중략)
  "즉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애원했지요. 이러다가는 비를 맞아 죽을 거라는 얘기도 했고요. 그랬더니 그는 살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그때  애의  눈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애는 나무 한그루가  있는 담벼락 끝에  있었어요."
 -p. 281 ('죽은 사람들' )


  P.S.  진짜 마지막 소설 '죽은 사람들' 에서 마이클 퓨리 죽는 부분 읽고 눈물 대폭발했다. 어쩌면  소설집 전체에서 분위기상 제일 이질적이라고도   있는 격정적(?) 부분인데 어찌나 슬프든지. 어린 것이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부분부터 슬펐는데 결국 그가 죽는 부분에선 수습불가 수준으로 울어버리고 말았다네...(원래 혼자 책.영화보다가 잘 운다. 거의 매번 운다고 봐도 무방할정도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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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0-18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더블린 사람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는 글이네요. ㅎㅎ

케이 2017-10-18 11:40   좋아요 0 | URL
솔직히 저는 이 책 배송료 안내려고 추가로 주문한 책이었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 - 마크 트웨인 걸작선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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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한번도 안 펼쳐본 것 같은 새책을 아주 싼값에 구입해서 읽었다.이 책에는 마크 트웨인이 쓴 다섯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첫번째 소설인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 에서는 정직하고 의젓한 주민들이 모여사는 것으로 유명한 마을 해들리버그 주민들에게 원한을 가진 어떤 젊은이가 기필코 그들의 마을을 망하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교묘하게 어떤 사건을 꾸며 결국 마을 주민들을 온 세상에 망신시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소설 정말 신기한 게 젊은이가 왜 그렇게까지 주민들에게 원한을 갖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젊은이가 원한을 품게된 이유가 아니라 근엄한 척 살고 있는 주민들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가식적인지 생생하게 그려내는 데 있기 때문에 마크 트웨인은 과감하게 과거 사건에 대한 서술은 생략해 버렸다. 이 부분이 나에게는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구구절절 서술하지 않고 오로지 한가지 확실한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보니 굉장히 간결한 느낌이 든다.


  제일 기억에 남았던 작품은 '캘러버러스군(郡)의 악명 높은 점핑 개구리' 였다. 이 작품이 그 유명한 마크 트웨인의 데뷔 소설이라는데, 소설가로서 처음 내놓은 소설이 이 정도라니, 역시 인정받는 덴 다 이유가 있나보다. 다 합쳐 3장 정도 밖에 안되는 아주 짧은 소설인데,  요즘에도 가끔 이 소설의 주인공 '스마일리' 생각에 피식피식 웃는다. 켈러버러스군에 살고 있는 스마일리라는 젊은이는 내기에 미쳐 있는데, 하루종일 거의 모든 일에 푼돈을 건다. 이 스마일리가 얼마나 내기에 미쳐 있는지 써놓은 본문의 한 부분을 읽으면 내가 왜 피식피식 웃을 수 밖에 없는지 알 것이다.


  참으로 묘한 녀석이었다고. 언젠가 한번은 워커 목사님의 부인이 앓아누워 살아날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 어느 날 아침, 목사님이 나타나자 녀석이 다가가 그에게 사모님 소식을 물었지. 목사님이 상당히 좋아졌다고 대답했어. (중략) 그러자 스마일리 녀석은 아무 생각도 없이 불쑥 이렇게 말하는거야.

  "하면, 전 사모님이 완쾌되지 않는 쪽에 2달러 50센트를 걸겠습니다."


-p.177


  2달러도 아니고 2달러 <50센트>를 사모님이 완쾌되지 <않는다> 에 거는 이 부분 너무 웃기지 않은가. ㅋㅋㅋㅋㅋㅋ

  내기에 미친 이 얼간이 스마일리는 어떤 개구리를 잡아 멀리 점프하는 훈련을 시켜 가지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개구리 멀리 뛰기 내기를 제안하고 다닌다. 상대방이 내기할 개구리가 없다고 제안을 거절하면 다른 개구리를 손수 잡아다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말 스마일리 이 캐릭터는 마크 트웨인 아니면 창조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머지 '100만 달러 수표'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 '귀신 이야기' 도 읽으며 즐거웠다.  그가 이 소설들을 통해 꼬집고 싶었던 건 돈 앞에서는 영락없는 노예면서 아닌 척하는 당시 미국 사람들과 그 세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풍자한 우스꽝스러운 사람들 모두 2017년 한국 어딘가에서도 분명히 한번쯤 본 적 있는 사람들이었다. 틀에 박힌 말이지만, 이 소설들 역시 시대를 초월했다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은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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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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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이미 읽었기 때문에,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를 무척 기다렸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많은 배우 한명 안나오는데도 정식 개봉을 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줄리언 반스의 원작 소설의 인기 덕분이리라.

  영화를 보며 나는 정말 나의 기억력에 놀랐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나의 '망각력' 에 놀랐다. 분명 재밌게 읽은 책이었다. 강력한 책이었다. 그런데 소설의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결말 외에는 기억나는 부분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이 책을 읽었고, 이 영화를 기점으로 독후감을 제대로 쓰기로 마음 먹었다. 좀 밀리긴 했지만 아직까진 잘 지키고 있다.


  조금 두렵지만 또 어쩔 수 없이 각색을 거쳐 쓸 수 밖에 없겠지만, 약 10년 전 내가 겪은 일을 말해보고자 한다. 이 사건을 상기해내고 또 이렇게 쓰기까지 오래 걸렸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소설 속 베로니카처럼 어떤 남자에게 나를 저주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내가 받은 건 이메일이었지만, 어쨌든 그가 나에게 품은 건 이 소설의 주인공 토니 웹스터가 베로니카에게 그랬던 것 처럼, 오로지 증오와 혐오 뿐이었다. 내가 그런 편지를 받은 이유는 내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블로그에 (익명이긴 해도) 썼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오랜 시간 짝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바보같이 난 그가 내 블로그를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에게도 알려준 적 없는 블로그였으니까. 어떻게 내 블로그를 알게됐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이제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그런데 참 신기한 게 내가 블로그에 그에 대해 뭐라고 썼는지는 하나도 기억 안나고 그가 나에게 쓴 편지 내용만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는 거다. 그 편지에 내가 답장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난다. 역시 사람은 이기적이다. 내가 블로그에 쓴 글이 그에 못지 않게 지저분한 내용이었을 수도 있는건데 그건 전혀 기억이 안나니 말이다.


  베로니카와 비슷한 사건을 한번 겪고 보니, 내가 어린 나이에 치기어린 마음으로 써갈겨 친구 혹은 애인에게 건낸 수많은 편지를 근거로 누군가 나의 인생을 연구한다면 나는 얼마나 추하고 봐주기 힘든 인간일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찔해졌다. 내 필체와 완벽히 일치하는 그 증거들을 앞에 둔다면 사실은 내가 이 정도로 별로인 인간은 아니었다고 변명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헛발질과 실패를 하며 제법 나이가 들고보니 가끔 지인들이 나에게 고민을 상담할 때마다 내 대답은 거의 '하지마.' 가 되어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상대방의 고민이 뭔지 들을 필요도 없는 경우도 꽤 많다. 뭔가를 안한다면, 적어도 최악은 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이렇게 꼰대가 되어버렸다. 내 품위와 자존심을 다 버리면서 나는 왜 사랑을 했을까. 나는 왜 그딴 편지를 썼을까. 나는 왜 매달렸을까. 왜 울었을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한동안 나는 '왜 했을까?' 라는 생각에 수없이 괴로워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토니도 이미 헤어진 베로니카가 자기의 공부잘하는 친구 에드리언 핀과 사귀든 말든, 조금만 참고 그냥 침묵을 지켰다면, 그들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는 결국 썼고, 보냈고, 그 일을 의도적으로 완전히 잊고 살아왔다.


  줄리언 반스는 한 사람의 역사이든 한 나라의 역사이든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기억' 혹은 '추억'이라 불리는 것들이 얼마나 허술한지 '토니 웹스터' 라는 참으로 정떨어지는 주인공을 통해 뼈져리게 일깨워준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언젠가는 토니 혹은 베로니카 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난 그런 적 없다고 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다들 어떤 기억은 남김없이 다 지웠거나 혹은 나에게 유리한대로 왜곡하여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난 이 책을 읽고 또 한번 결심했다. 죽는날까지 자기 미화의 욕구와 싸우며 살겠노라고. 나란 인간은 내가 지금 기억과는 전혀 다른 인간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입니다."

(중략)

"그 일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사소하달 순 있지만요. 그러나 최근 일이지요. 따라서 역사로서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린 그가 죽었다는 것,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것, 그녀가 현재 임신했다는 것, 아니면 과거에 그랬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우리가 뭘 알고 있을까요? 단 한장의 문서 ‘엄마 미안해‘ 라고 쓴 한 장의 유서가 있습니다. (중략) 선생님, 그러니까 오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롭슨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의 여자친구도 사라져버리고, 어쨌거나 누구도 그를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을 때에, 어느 누가 롭슨의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을까요? 문제점이 보이시나요, 선생님?"

-P. 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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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37
오스카 와일드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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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좋아하는 동화책이 너덜너덜해지고 모든 문장을 다 외울때까지 마르고 닳도록 읽는 어린이였다. 그렇게 내가 좋아했던 동화 중에는 '오스카 와일드' 의  '행복한 왕자' 도 있었다. 아직도 그 동화의 삽화가 생생히 기억날 정도다. 어렸을 때 '행복한 왕자'를 좋아했던 어린이였고, '스미스' 의 모리세이가 오스카 와일드의 광팬이란 걸 어디서 들어서, '행복한 왕자' 외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간 그의 작품을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던 중 구입한 e-book 단말기 테스트 겸 단돈 천원에 이 책을 e-book 으로 구입하여 읽었다.

  다 읽은 후 결론은? 너무너무 별로였다...... e-book 으로만 산 게 천만 다행이다. 

  왜 그렇게 별로였는지 말하라면 첫번째로 말하고 싶은 건 이 책의 주인공 중 하나인 헨리가 진심으로 재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헨리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이고, 바질은 실제 자기의 모습,  도리언은 자기가 되길 바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생전 오스카 와일드는 참으로 정나미 떨어지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헨리 이 사람은 인생의 모든 것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헨리는 대단한 통찰력으로 인생의 진리에 대해 멋진 말을 수도 없이 하며 유머 넘치는 사람으로 그려지지만, 나에겐 오히려 이런 모습이 꼰대같이 느껴졌다. (몇 개 문장은 좀 멋지긴 하지만) 자기가 대체 뭔데 인생에 대해 그리 쉽게 단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어휴 정말 재수없고 오만방자한 인물이다.

  그리고, 난 소설에서 작가나 주인공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열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 소설에서는 도리언이 만지는 가구는 네덜란드에서 온 거고 작은 상자는 일본에서 가져온 거고, 뭐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무슨 도리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값진 물건들에 대한 묘사가 시도때도 없이 나온다. 헨리가 도리언에게 준 프랑스 책에 쓰여진 전세계의 사치품들과 진귀한 풍습들이 쭉 쓰여진 11장을 읽을 땐,  대체 이건 뭔가 싶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리언 그레이가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타락한 이유도 터무니 없고, 해설에는 이 소설이 겉모습만 중시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교훈이 있는 소설이라는데 글쎄 나에겐 '다른 거 다 필요없다, 젊고 예쁜 게 최고다.' 라는 것 외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텅빈 소설이었다.

  나는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에서 쓰여진 소설이 가끔 과대평가되고 있단 생각을 가끔 했는데, 이 소설이 딱 그런 사례인 것 같다. 이런 소설에도 '유미주의'란 말을 붙여서 대단한 양 평가해주다니 너무 우스꽝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알프레드 경과의 동성애 사건으로 오스카 와일드의 말년은 참 딱했고, 그의 희곡과 단편소설은 꽤 훌륭한 편에 속한다지만, 당분간은 오스카 와일드 책은 안 읽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모리세이의 취향에도 실망했다면 너무 박한 평가일까.


아래는 헨리의 말 중, 좀 멋지다 생각한 것들.


P.S  e-book 으로만 산 거라 정확한 페이지를 표시하지 못해 e-book 으로 703 페이지 중 몇 페이지 인지 표시했다.

"도리언, 결혼은 절대 하지 말아요. 남자들은 지쳐서 결혼하고 여자들은 호기심으로 결혼을 하죠. 여자든 남자든 결국에는 모두 실망해요."

-p.151/703

"도리언, 건드리고 싶은 것만이 신성한 것예요. 왜 그리 화를 내는 건가요? 언젠가는 그녀는 당신의 것이 될테지요. 인간이란 사랑할 때 처음에는 언제나 자신을 속이는 법이에요. 그리고 사랑이 끝날 때는 상대방을 속이고 말이죠. 그걸 바로 로맨스라고 부르는 거예요. 어쨌든 당신은 그녀와 알고 지내는 거죠?"

-p.167/703

"바질, 자네가 그렇게 얘기하면 도리언은 틀림없이 그 여자와 결혼을 하고야 말 거야. 분명히 그러고도 남을 친구야. 인간이 철저히 바보짓을 할 때는 항상 고귀한 동기가 있거든."

-P.23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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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0-10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품 좋은 줄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빅토리아 시대 영국 문학 과대평가 말씀도 공감합니다.

케이 2017-10-11 09:4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정말 이 작품 너무 별로였습니다. 이 책 바로 전에 읽은 작품이 ‘지루한 이야기‘ 라 더더욱 재미없게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