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0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상룡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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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 때 도저히 도서관 대출기한을 못 맞출 것 같아 읽다 포기했던 소설, '미성년' 을 읽었다. (변명하자면, 그때 빌린 '미성년'은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한 권짜리였다.) '상처받은 사람들' 을 읽고 바로 '미성년'을 읽었는데, '상처받은 사람들' 의 지극히 정상인 '이반'과 '미성년'의 약간 미친 '아르까지'(아르까지 마까로비치 돌고루끼)간 인물의 차이가 어마어마해서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주인공인 아르까지는 귀족 '베르실로프'(안드레이 뻬뜨로비치 베르실로프) 와 베르실로프 가문의 하녀였던 '소피야 안드로예브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로서, 그들에게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이 외롭게 자랐다. 그는 엄마 소피야의 전남편 '마까르 돌고루끼'의 성을 물려받았는데, 공교롭게도 '돌고루끼' 란 성은 유명 귀족의 성이라 만나는 사람마다 아르까지에게 "그럼 돌고루끼 공작입니까?"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이 너무 싫은 아르까지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거리낌 없이 자신을 베르실로프의 사생아라고 소개한다. 귀족이 아니란 이유로 하숙집 주인에게 구박당하고, 학교에서도 '람베르뜨'라는 동급생에게 괴롭힘당하는 아르까지는 결국 살짝 정신이 이상해지고 마는데, 본인은 그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기는 남들은 가지지 못한 대단한 '이념'을 품고 있고, 그 '이념'을 이루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끊임없이 수행해왔음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이 아르까지가 품은 '대단한' 이념이란 결국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백만장자가 되려는 이유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홀로 지내고 싶어서라고는 하지만, 이 미성숙한 젊은이가 '이념'이라고까지 말하면서 치켜세운 꿈이 한낱 백만장자라니 참 허무했다. 이 '이념'의 실체를 말해주지 않고 얼마나 많은 페이지에 걸쳐 아르까지의 두서없는 방백이 이어지는지.. 소설 읽은 독자들은 아시리라. 아르까지는 계속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지만, 이 젊은이가 미쳐버린 결정적 이유는 고독이었다. 사랑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은데 아버지란 작자는 자기를 아들 취급도 안 해주고, 이에 대한 반발심리로 사랑해 마지않는 어머니에게도 차갑게 대한다. 하지만 난 하숙집 앞에 버려진 갓난 아이를 아무 대책도 없이 자기가 키우겠다고 나서고, 죽은 갓난 아이 때문에 밤새 울부짖는 이 아르까지에게 참 정이 갔다.


  끝없이 떠드는 아르까지 때문에 피곤할 때도 있는데, 진짜 신기한 게 어느 정도 지나면 이 아르까지가 말하는 것과 정반대의 소설 속 상황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소꼴스키 공작 앞에서 자기는 여자가 정말 혐오스럽다고 열정적으로 말한 지 얼마 안 지나, 소꼴스키의 딸 '까쩨리나'에게 첫눈에 반해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비틀거리며 황급히 저택을 떠나고, 제르가쵸프가 주도하는 정치 모임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몇 번씩 다짐해놓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아무도 안 궁금해하는 자기의 '이념' 에 대해 말하고, 이념을 이루기 위해 학창시절 굶는 연습을 했고 외투를 오래 입는 법을 연구했다고 해놓고선 미친 듯 룰렛과 도박에  빠져 밤을 지새우는 아르까지를 보다 보면, 아르까지가 말하는 것과 실제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르까지가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라고 말하면, 너무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나는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 하면 결국 말하겠구나 싶고, '걱정하지 않았다'고 하면 너무 걱정스러워서 초조하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이 역시 도스토예프스키가 의도한 바겠지.


  람베르뜨의 꼬임에 넘어가 자기가 어쩌면 까제리나와 혼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는 안타까운 아르까지에게 "아르까지야! 또 속냐!!!" 라고 외치고 싶지만, 결국 그는 아주 시원하게 속아넘어가고, 베르실로프는 소피야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자화상에 키스까지 하며 난리쳐놓고선 갑자기 또 까쩨리나에게 눈이 멀어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아르까지는 소설 초반보다 한결 정상같아 지는데, 그렇다고 아르까지가 미성년 시절보다 훨씬 현명하게 남은 성년 시절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의 아버지 베르실로프를 보면 그렇진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혈질에 언제나 허둥대며 미숙한 아르까지가 아버지 베르실로프와는 달리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기원하며 책장을 덮었다.


  사실은 이렇다. 내가 처음 <이념>에 대해서 몰두한 것은 뚜샤르 사숙에 있을 때 그렇게 놀림거리가 되었던 사생아라는 내 신분 때문도 아니고, 홀로 우수에 잠겨 지내던 유년 시대의 아픈 기억 때문도 아니며, 내 상황에 대한 복수심이나 저항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도 전혀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내 개인적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열두 살쯤 됐을 때부터, 즉 자신에 관한 올바른 자각을 가지기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나는 사람들을 싫어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싫어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왠지 사람들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친한 사람들에게까지도 순진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모조리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물론 내키지 않으면 그렇게 할수도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에 회의적이고 우울하며 비사교적인 자신이, 무엇 때문인지 항상 억제해 버리는 자신이, 때로는 내 자신도 아주 서글프게 느껴졌다.

-p.1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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