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기지 않지만, 이제서야 '개선문'을 읽었다. 꽤 긴 소설이지만 전혀 지루한 느낌 없이 끝까지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대표작 '서부전선 이상없다'와 마찬가지로 '개선문' 역시 이보다 더 우울할 수 없는 결말이지만, 라비크 주변의 친구들이 최소한의 인간미가 있어 마냥 괴롭진 않았다.  

  전쟁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아름다운 파리의 묘사와 의사로서 능력이 출중한 (또 미루어 보건데 외모도 어느 정도 받쳐주는) 독일인 불법 체류자 '라비크'와 이탈리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삼류배우 '조앙'의 쓸쓸한 사랑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나도 뭔가.. 우아해진 거 같고 수준 높아진 거 같고 그랬다. 좋은 소설을 읽은 후 느끼는 은혜 충만한 기분으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지금부터는 그냥 나의 잡소리.


1. 하케의 죽음.

  아무리 생각해도 라비크가 하케를 너무 곱게 죽인 것 같다. 나 같으면 라비크처럼 죽이지 않았다. 간담상조하는 친구 모로소프와 작당하여 내가 당한 만큼 똑같이 죽도록 패주거나, 의사라는 직업을 이용해 죽기 직전까지 그놈의 몸을 난도질 했다가 다시 치료해 주고 또다시 처음부터 반복할 것이다. 뭐 불법체류자 신분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고 증거 인멸해버리는 게 최선이었겠지만 말이다. 사람이 죽는데 너무 곱게 죽어서 아쉬운 건, 영화 '시카리오'에서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토로역)가 복수하는 장면 이후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실제 게슈타포들은 아마 소설보다 훨씬 더 했겠지. 


2. 조앙같은 여자.

  '조앙 마두'는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캐릭터였다. 젊고 예쁘고 매력 있고 남자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살며 잡힐듯 안잡히는 여자. 레마르크의 문체와 소설 개선문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결국 이런 유형의 여자, 모로소프의 말대로라면 닳을 대로 닳은 여자의 끝은 남자에 의해 죽는 것뿐인가... 싶어서 씁쓸했다.

  조앙이 라비크 없는 몇 달을 못 참고 홀랑 돈많은 남자랑 살림 차려놓고선 찾아와서 내가 사랑하는 건 라비크 당신 뿐이라고 개소리를 할 때마다 짜증이 솟구쳤고 라비크가 꼭 이 못돼 처먹은 여자에게 끝까지 넘어가지 않길 바라고 또 바랐지만, 막상 그녀가 죽고나니 불쌍했다. 

  나는 의도치 않게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은 학교와 직장을 다녔는데, 주변에서 조앙 같은 여자를 많이 봤다. 볼 때마다 젊은 여자는 외모, 성격, 정신 상태 상관없이 언제나 나름의 수요가 있구나 싶어서 신기했다. 어렸을 땐 그런 부류의 여자를 경멸했지만, 보통 그런 여자들은 되먹지 못한 놈들 때문에 어떻게든 자기 인생의 오점을 남기니까... 이젠 그들이 안타까울 뿐.


3. 폼나는 라비크

  라비크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친구 둘을 숨겨주었다가 게슈타포에게 죽도록 고문받다 간신히 파리로 도망쳐 온 능력 있는 의사다. 여자의 유혹에도 꿈쩍하지 않고 웬만한 일에는 당황도 하지 않는다. 하여튼 멋있다. 

 소설 초반에는 사랑 같은 거 전혀 믿지 않을 것 같은 이 차가운 도시의 남자 라비크가 조앙이라는 여자와 어떻게 될 것인가.... 도도한 이 남자가 과연 어떻게 조앙을 사랑할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난 은근히 그가 사랑에 빠지지 않길 바랐지만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조앙이 그리 인상 깊게 첫 등장하지도 않았을 테지.

  라비크가 불법체류자라는 동질감으로 처음 보자마자 조앙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게 좋았다. 또 조앙에게 난 너를 다른 남자와 나눠가질 생각 없다고 단칼에 거절할 때, 얼마나 멋있게요. ㅋㅋ

  사실 난 너무 사랑에 목매는 인물은 남녀불문 그닥 애정이 안간다. 나에겐 그런 인물이 너무 현실감 없이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이건 정말로 뻘소리인데,

  오늘 아침 전철에서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소설 속 여자가 '여자는 그것(성기)만 있으면 먹고 산다.'고 말헀나? 하여튼 이런 비슷한 말을 하는 거 보고 정말로 기분이 나빴다. 수능에 나올지도 모른대서 끝까지 읽긴 했다만. 

 20년이 지난 지금도,전쟁과 같은 혼란한 시기에 몸을 팔거나 몸을 파는 것과 다름없는 여자를 대하는 건 참 편치 않다. 물론 전쟁 중엔 어쩔 수 없이 매춘이 활개치겠지만 영화 '풀 메탈 자켓'에서도 그렇고 우리나라 영화 '아름다운 시절'도 그렇고 모든 소설과 영화를 막론하고 전쟁 배경인 예술작품에는 남자에게 성을 착취당하는 여성들이 항상 나오니까. 그런 작품들을 대할 땐 각오를 하게 된달까.

  아마도 남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단 생각을 안하니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강간이나 매춘 장면을 장면을 함부로 팍팍 넣는진 모르겠지만, 참... 전쟁의 비극을 나타내는 방법은 다른 방법도 많을텐데. 이건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반전영화가 '판의 미로'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요즘 흔히 말하는 여성 중심의 소설에 나오는 여성 주인공들 역시 정형화되어 가는 것같아서 좀 별로다. 진취적이고 무척 활동적인 여자 주인공을 보자면 역으로 이런 주인공과 반대되는 여자는 디게 별로야. 라고 말하는 듯해서 거부감들고. ㅋㅋㅋㅋㅋ 그래 뭐 난 그냥 다 불만이네 ㅋㅋㅋ


  결론은 '개선문' 정말 즐겁게 읽었고 라비크 진짜 멋있고 레마르크 다른 소설도 읽고 싶어졌다는 말인데, 참 길게도 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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