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우리들의 선생님 - 존 스토트가 새에게서 배운 영적 진리
존 R. 스토트 지음, 이기반 옮김 / IVP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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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죤 스토트의 글의 매력을 힘껏 느꼈던 것 같다. 그가 평생 독신으로 80년 넘게 살아온 것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하고 존경하게끔 한다. 그의 독신을 가능케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조류신학’, 새에 대한 무지한 관심과 관찰이 끼여 있다. 그는 흰올빼미의 둥지를 발견하고서 그것을 관찰한 기쁨을 피력하면서 시므온의 찬송(Nunc Dimittis)를 인용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보았사오니”( 2:29-30) 그는 흰올빼미의 둥지를 찾기 위해 25년간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탁월한 신학자요 사상가요 설교가인 그가 시간이 날 때마다 조류신학에 심취하여 여행을 하고 관찰하고 기행하였던 것이다. 이 책은 죤 스토트의 이러한 삶을 조류에 관한 사진과 성경묵상으로 채우고 있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저술에서 성경적인 원리에 입각한 글을 늘 내뿜고 있다. 소년시절에 그는 자신의 침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겠다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고백한 기독교의 기본 진리의 경험을 떠올리면 참 그는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줄기차게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좀처럼 흩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학부2년 그러니깐 93년도에 연세대 매지리 캠퍼스에서 가진 전국IVF수련회에서 그의 강해를 들을 수 있었고 그의 연로한 모습 속에 감도는 영적인 힘과 파워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강해를 하기 위해 나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금식을 하면서 말씀을 준비하여 우리들에게 전해주었던 일화도 잊지 않고 있다. 학교 선배 형님이 직접 찍은 죤 스토트의 사진도 집에 한 장 가지고 있다. 위대한 우리시대의 신학자, 어느 출판사인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현대의 복음주의 5대 신학자로 마틴 로이드 죤스, 제임스 패커, 프란시스 쉐퍼, 한 사람이 누구더라?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그리고 죤 스토트를 들고 있다.


 조류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성질과 특징들을 기술하면서 성경적인 통찰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글이 참 감칠맛나게 사진과 잘 어우러져 있다. 특히, 새들의 귀소본능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귀소본능에 대한 이야길 잠깐만 하면,

 

여러분은 철새들의 귀소본능을 잘 알 것이다. 새들은 비상하리만치 규칙적이고 정확하게 이동해야 하는 때를 잘 안다. 봄이 되면 왔다가 가을이 되면 더 안전하고 따뜻한 지방, 먼 곳으로 이동하는 그 철새들 말이다. 맹크스슴새라는 새가 있다. 1952년에 유럽에 있는 웨일즈 지방 스코크홀름 섬에서 한 마리를 잡아 약 386km 떨어진 켐브리지 내에서 그 새를 풀어 주었다. 근데 그 새는 7시간 후에 자신의 고향인 스코크홀름 섬의 굴 속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 다른 경우는, 스코크홀름 섬에서 잡힌 맹크스슴새 한 마리가 대서양 건너 4,800km 이상 떨어진 보스턴의 로간 국제 공항에서 풀려난 적이 있다. 그러나, 12일 반나절이 지난 후에 이 새는 자기 굴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렇게 돌아오기 위해 하루에 약 400km를 난 셈이다.[1] 주님은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했다. 그들의 육적인 강한 귀소 본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1] 죤 스토트, , 우리들의 선생님, 이기반 역(서울: IVP, 2001), 21.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8:4-5).


이 글은  전에 내 글에도 발췌 인용하기도 했던 대목이기도 하다. 그가 직접 찍은 사진도 생생하게 나와 있어 읽기가 참 편하고 그의 짧고 명료한 단어들과 문체가 참으로 신선하게 그리고 오랜만에 다가온 서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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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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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현실과 기독교의 관계

-황석영의 ‘손님’을 읽고

세계지도의 아주 작은 여백을 메우고 있는 한반도는 아직도 냉전이라는 분단의 선분을 긋고 있다. 그 분단의 아픈 역사의 한 부분이었던 과거사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소설 ‘손님’의 스토리는 잔학한 미군과 기독청년들의 횡포사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소설 가운데서도 드러나지만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단지 남한과 북한, 두 이념 간의 대립. 갈등구도에서 남. 북한이 자의적으로 해결되었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제3자가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남. 북한의 상처는 더 확대된다. 사람과 사람의 갈등도 제3자가 괜스레, 불필요하게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구도 자체도 어색해지고 양대 구도가 삼각구도로 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분위기는 더 험악해질 수밖에 없다.

황석영의 ‘손님’은 이러한 우리나라의 정치적, 역사적 현장 위에다 기독교를 양념(?)화하여 자신의 논리를 소설화하고 있다. 역사적 불청객으로 둔갑한 기독교인들의 만행에 대해 어떻게 변명을 할 수 없겠으나 기독교의 부정적인 면만 극대화한 것에 대해 서운함이 없지 않다.

솔직히, 우리 민족의 분단을 조장한 것이 서양 즉 미국이긴 하지만 그 미국과 기독교를 equal(=)부호로 동일시한다는 것은 말도 아니 될 뿐더러 분단의 아픈 현실 가운데 기독교가 악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수의 기독교라는 명찰을 단 기독인들의 책임이고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버리고 우리 기독교의 역사적 책임에서 회피하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처사가 아닐 것이다.

소설 속의 기독인의 죄스런 처사가 비록 단편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민족이 가진 상처는 기독교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 한국교회에 친일파 전통이 배여 있다는 뼈아픈 역사현실 위에다 개인적으로 황석영의 소설을 통해서 나로서는-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 중의 한 사람으로서- 6. 25전쟁 이후의 후유증에 대해 기독교는 또 한 번 통감의 의무를 감당해야 할 것임을 생각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교회는 시대를 아우르고 시대를 포용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교회 즉 기독교는 이러한 역사적인 책임성을 걸머쥐고 민족이 가진 동존상잔의 비극, 그것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 모색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더 우리가 민족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의 종교가 기독교라는 것에 있다-물론 나는 종교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Martin Llyod Jones가 쓰는 표현인 ‘기독교는 관계이다’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민족을 향한 선지자적인 눈물을 훔치고, 흘렸던 믿음의 선조들처럼 기독인들은 이런 눈물로 주 앞에서 긍휼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작금의 세태 가운데 남북관계에 대해 기독인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자주 언급되고 있는 ‘흡수통일’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봐도 ‘통일비용’에 대한 남한 국민들의 고통분담금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 현실이기에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남북한의 합일(Unity)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섣부른 긍정이나 부정의 판단 이전에 한국 기독교는 남북한의 분단 현실에 대해서 계속적이고도 진지한 관심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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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2 - 한니발 전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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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도 진화한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진화한다고 믿어 왔다. 나는 진화론을 신봉하진 않지만 인간이 환경과 상황에 적응하면서 진화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로마인 이야기’의 두 번째 작품인 ‘한니발 전쟁’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는 국가가 진화하고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진화한다는 말인가?

로마는 공화정 정치를 추구하는 나라로서 ‘팍스 로마나’를 실현하는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최고의 해운국인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섬에 대한 침략의욕을 드러냈을 때 로마는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포에니전쟁은 카르타고의 이러한 야심으로 인해 발단이 된다. 하지만 로마는 여기서 계속 머물러 있지 않는다.

로마가 더욱 진화하고, 처음에는 ‘온건한 제국주의’에서, 후에는 ‘엄격한 제국주의’로 진화하게 된다. 그러면서 도시 국가인 로마에서 이제는 ‘로마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 책에선 포에니전쟁으로 시작된 ‘로마의 진화과정’의 130년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진화의 원인은 전쟁이었다

2권의 소재는 전쟁이다. 전쟁의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바로 2권의 제목처럼 챔피언(?) 한니발과 도전자 스키피오이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가 뛰어든 전쟁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이 개입하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두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매력들을 개인적으로 구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역겹거나 지겹지 않다. 오히려 흥미롭다. 한니발은 당대 최고의 전략가이자 전사였다고 볼 수 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의 리뷰에서 이야기했던 에피소드이다.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자마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키피오: 우리 시대의 최고의 군인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한니발: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스키피오: 첫째는 그렇고 그럼 두 번째는 누구인가?

한니발: 병법의 천재,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이다.

스키피오: 그렇다면 세 번째는 누구인가?

한니발: 바로 나, 한니발이다.

스키피오: 만약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스키피오)가 지고 당신이 이겼다면?

한니발: 그럼 내가 제일 첫 번째이다.

 

이런 대화 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니발은 최고의 전쟁 영웅이었다. 이러한 한니발, 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로마는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이탈리아 반도가 유린당하게 된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치 전쟁교과서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처럼 전쟁의 과정을 싣고 있다. 물론, 재미있다.

 



국가도 진화하지만 인간도 진화한다

한니발은 당대 최고의 군인이다. 하지만 그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병법을 모방하고 자기화시켰다. 하지만 자기보다 훨씬 어린 스키피오는 한니발을 전쟁터에서 보고 배운 제자인 셈이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섭렵하여 오히려 그것으로 도전장을 내민다. 결국 스키피오의 승리로 끝이 난다.

 

진화의 벼랑 끝에 선 카르타고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의 나라인 카르타고와 로마가 벌인 전쟁이다. 카르타고는 1차, 2차, 3차에 걸친 전쟁으로 결국 패망하게 된다. 적국의 패망의 광경을 목도하던 총사령관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스키피오의 아들의 양자)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영화를 자랑했던 제국의 멸망이라는 위대한 순간을 목격하고 있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 로마도 이와 똑같은 순간을 맞이할 것이라는 비애감이라네.”(455)



 

포에니전쟁의 주인공, 카르타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카르타고의 폐허

‘번성한 자는 반드시 쇠퇴한다’

‘진화한 자는 반드시 쇠퇴한다’

로마인 이야기 2권, ‘한니발 전쟁’은 ‘번성한 자는 반드시 쇠퇴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이것을 두 가지의 줄기로 보고 싶다.

 


첫째는 번성한 국가는 반드시 쇠퇴한다는 Story.

 

당대 지중해의 해운국이었던 카르타고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마케도니아가 멸망한다는 스토리가 전개된다.

둘째는 진화한 인간은 반드시 쇠퇴한다는 Story.

 

그 탁월한 명장, 한니발이 포에니전쟁에서 패배하여 나중에는 시리아까지 도망갔다가 결국은 음독자살을 하게 한다. 한니발의 제자이면서 그를 능가한 명장, 스키피오를 大카토가 모함하여 몰아내고 스키피오는 은둔생활을 하며 생을 마감하게 되는 스토리.

 

비애감이 감도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역사가 주는 이러한 장엄한 교훈의 카타르시스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읽고, 그리고 그 역사로 인해 울고, 그 역사로 인해 울지 않는가?

 

한 여류작가가 쓴 로마인 이야기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거다.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 1-2권을 읽은 후 느끼는 점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한니발’이나 ‘스키피오’, 더 나아가 4-5권에 등장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매니아이다. 로마의 매니아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인물, 영웅에 대한 예찬가이다. 그래서인지 ‘한니발 전쟁’의 주역들을 대하는 태도가 객관적인 태도라기 보다는 주관적인 면이 좀 넘친다. ‘로마가 좋아서 로마와 결혼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이다. 실제로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이탈리아로 갔고 거기서 이탈리아인을 만나 결혼하고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로마인 이야기’의 편향적인 관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여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작가 쓴 로마인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해석하고 그려 나갈까 궁금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존재가치나 의미가 전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벌써부터 3권, ‘승자의 혼미’를 볼 기대로 가득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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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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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즉 로마사는 우연챦게 세계사 도서들을 산발적으로 읽어가다가 구미에 당기게 된 책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16번째 책이기도 한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를 에피타이저로 읽고 나니 그가 이야기하는 로마인 이야기의 전체적인 조망을 할 수 있어 참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숲을 한 번 보고 나무를 본다는 그런 느낌이다.



1권은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부제를 달고 있다. 여기서는 제 1장, 로마의 탄생과 제 2장, 로마 공화정의 이야기를 다룬다.

 

제 1장, 로마의 탄생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

로마의 탄생은 기원전 753년에 로물루스에 의해서 건국되었다. 모든 나라의 건국신화는 존재한다. 우리나라도 단군신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로마도 로물루스 쌍둥이 형제의 전설, 신화가 존재한다. 건국신화는 그 나라의 건국에 대한 웅대함과 화려함을 돋보이기 하기 위한 하나의 과장법이다.

 

왕정 정치 7대(代)와 그들의 출신성분

로마는 공화정의 정치시스템을 취하기 이전에 7명의 왕정 정치가 있었다. 로물루스를 비롯하여, 제 2대 누마(사비니족 출신), 제 3대 툴루스(라틴계 로마인 출신), 제 4대 안쿠스(사비니족 출신), ,제 5대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최초로 선거운동을 한 인물-(혼혈 에트루스크 출신), 제 6대 세르비우스(타르퀴니우스의 사위), 제 7대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세르비우스의 사위) 왕이다.

 

로마의 초대 왕정 제도에서 왕의 선출 기준은 독특하다. 왕들의 출신을 보면 알겠지만 라틴계, 에트루리아계, 사비니족, 순수 로마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사회가 얼마나 순수로마인이 아닌 다른 속주(식민지)나 이방 세계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평등한 권리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로마는 열려진 사회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로마의 지형과도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로마인의 개방성은 지형적인 조건과도 맞물린다

로마는 7개의 언덕으로 지형적인 조건을 갖추어 있기에 전쟁을 안할래야 안 할 수 없는 도시국가였다. 완전히 고립된 것도 아니고 완전히 트인 평지도 아닌 이런 언덕의 지형적인 조건 자체가 로마의 국민성, 즉 ‘개방성’의 결과물을 낳게 된 것이기도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개방성을 들면서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종교에 관한 사고방식이었다’고 전한다.

 

로마의 이러한 개방성이 로마로 들어온 에스투르크인 5대왕 타르퀴니우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개인적으로 보고 싶다. 타르퀴니우스는 정말 에트루리아인이었지만 그는 정말 로마인이 되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았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다음 6대 왕을 바로 사위인 '세르비우스‘를 선택한 것이다. 혈통과 인맥과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이러한 로마의 ’왕의 간택‘부분만 보더라도 로마의 특수성을 엿볼 수 있다.

 

로마인의 개방성은 종교적인 원인도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종교적인 개방성-로마는 다신교였다-오히려 로마를 더욱 로마답게 했으며 나라를 더욱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유일신교가 로마의 종교였다면 로마는 그만큼 타민족과 그 민족이 가진 종교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로마인이 가진 것은 바로 ‘개방성’이었다고 한다. 이 민족 특유의 ‘개방성’이 그리스가 그렇게 융성하였지만, 그렇게 빨리 쇠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로마가 더욱 번성케 한 원인으로 꼽고 있다.

 

로마는 로마인만의 군대를 원한다

하지만 로마의, 로마인의 이러한 개방성은 군대 편성에 있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첫째, 로마는 말기가 될 때까지 용병제도가 없었다. 도시국가였던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 국가인 타렌툼은 로마의 침략기세를 알고 그 당시 전쟁에서 탁월한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타렌툼은 군사력은 없었지만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은 돈을 주고 고용한 남한테 국가 수호를 맡기는 것을 싫어했다. 둘째는, 로마의 유력자는 많은 사람을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제로 결정된 수만큼 병사를 제공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로마는 16세-40세까지의 건장한 남자에게는 ‘세금’ 대신에 ‘병역’의 의무를 지웠다. 그래서 이것은 ‘혈세’라고도 했다.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로마 건국 초기의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이란 이 그림은 우리에게 로마의 역사의 한 대목을 보여준다.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로마시민들이 건립 당시에 대부분 독신 남자였기 때문에 여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웃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하여 여인들은 우리 나라식으로 말하자면 ‘보쌈’하기에 이르른다.

서양에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다. 이 사건 이후로 시작된 로마인의 풍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244년의 왕정 시대의 종말

로마는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치세를 끝으로 공화정 시대로 들어간다. 로물루스가 건국한지 기원전 753년부터 244년째인 기원전 509년의 일이었다. 민회에서 선출되는 것은 같지만, 임기가 1년밖에 안 되는 2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루크레티아 사건은 이미 사명을 끝낸 왕정의 숨통을 끊어놓은 데 불과했다.



로마의 영웅들
-이들은 1,2,3, 4,5 권의 주인공들인 셈이다.

 제 2장, 로마 공화정

 

로마 공화정의 공로자, 브루투스

사적인 추문을 교묘히 이용하여 왕정 타도까지 이끌고 간 공로자는 바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그는 그후 500년 동안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왕정 회복을 위해 에트루리아 인들을 끌어들인다. 여기서 에트루리아의 명장인 포르센나와 이를 죽이기 위해 적장으로 뛰어든 ‘왼손잡이 무티우스’의 일화는 감동적이다.

 

로마의 공화정의 씨를 뿌린 사람은 브루투스였고, 뿌리를 내린 사람은 푸블리콜라였다. 이 두 사람의 뒤를 이은 로마인 가운데 왕정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먼훗날 최고의 실력가인 카이사르 황제가 등장하기까지는 말이다.

 

로마에 영향을 미친 그리스인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사를 기술하기 위해서 로마에 영향를 미친 그리스의 역사를 잠시 기술하고 있다. 독자의 주된 포커스는 로마인 이야기이기에 그리스인 이야기를 하니 흥미가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이고, 역사는 사람들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로마이든, 그리스이든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리스의 인물 중의 인물, 페리클레스

그리스의 역사를 들추다 보면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만난 반가운 인물,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 능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자기 제어 능력, 지속하려는 의지 의 5가지 분류기준을 만들어 100만점 만점을 준 카이사르와 더불어 유일무이한 인물, 페리클레스가 등장한다.

 

그리스는 트로이의 건너편에 있었다

나는 그리스의 역사를 맛보면서 또 다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이전부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섭렵하고자 했는데 말이다. 그리스 이야기에서 우리는 유명하디 유명한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영화 ‘트로이’...브래드 피트의 멋진 마스크와 몸매로 우리들의 감동을 자아냈던 그 트로이가 바로 그리스 땅 건너편에서 벌어진 실화 아닌 실화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나는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초코 우유를 마셨다. 일단 먹어야 살지...ㅋ)

 

그리스(아테네)의 시민권 VS 로마의 시민권

그리스의 역사 가운데 아테네, 아테네는 아테네 시민권을 가질려면 부모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이 아테네 시민이어야 가능했다. 이것도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면 더욱 배타적으로 바뀌어, 부모가 모두 아테네 태생이 아니면 시민권을 가질 자격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테네에서 오랫동안 살고 학교까지 열어 아테네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평생 동안 시민권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페리클레스는 자신이 아테네 출신이 아닌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반면에 로마는 시민권에 대해서 아주 개방적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아테네에 대해서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주려면 자연히 시민의 수를 제한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피력했다. 아테네와는 상반된 이러한 시민권에서의 개방성을 보더라도, 그리스인인 플루타르코스는

“패배자를 동화시키는 방식만큼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요인은 없다”

고 했다.

 

그렇지만 외국인에게 자국민과 똑같은 세금을 물리면서도 피선거권은커녕 선거권조차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오늘날에도 드물지 않다.

 

그리스와 스파르타가 펼친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의 아테네와 더불어 펠로폰네소스의 스파르타가 있다. 아테네는 경제력으로, 스파르타는 군사력으로, 두 무리가 충돌을 회피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충돌을 보류하게 된 원인이 바로 ‘페르시아 전쟁’이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격렬한 내분이 특징인 그리스 역사에서도 드물게 그리스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적과 맞서 싸운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이기도 했다. 페르시아 전쟁은 경제적인 이유로 일어난 경제 전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종교적 이유로 일어난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영화 300의 크세르크세스, 델로스 신탁,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
 

그리스 연합군은, 아테네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스파르타에서는 영화 ‘300’의 스파르탄과 함께한 레오니다스 왕이 지휘하였다.

 

이국인들이여,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하라.

조국에 대한 사랑에 목숨을 바친 우리는 모두 이 땅에 잠들어 있노라고.


 

스파르타 전사들의 명성은 후세에까지, 지금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라도 접하게 된 슬프고도 영웅적인 에피소드이다. 그러나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들이 희생이 허사는 아니었다. 스파르타인조차도 그리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싸운다는 것을 그리스 전체가 알았기 때문이다. 위기 앞에서의 공동전선은 이것으로 확고부동해졌다.

 

그리스가 중심인 ‘델로스동맹’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B.C 478년에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끈 페르시아와 전쟁이 끝났고 그리스는 밀레토스, 에페소스, 그리고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고향이기도 한 할리카르나소스 같은 이오니아 도시들도 그리스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에게 해도 다시금 그리스인의 바다가 되었다. 아테네의 해군과 스파르타의 육군의 합동작전의 성과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는 패권국가가 되었고 그리스의 폴리스(도시국가)들은 항구적인 방어체제를 갖출 필요를 느꼈고 이로 인해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은 200개나 되는 도시국가의 연합체가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가 얼마나 많은 도시국가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본부로는 델로스 섬이 선정된 것이다.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이러한 평화관계는 그리 길지 못했다. 아테네가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스파르타는 동맹 참가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기네,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델로스 동맹 VS 펠로폰네소스 동맹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긴 뒤, 바다에서는 아테네가, 육지에서는 스파르타가 점점 강해져갔다. 이 두 강대국의 적대관계는 기원전 431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47년 동안 냉전 상태로 계속된다.

 

테미스토클레스 VS 아리스티데스

그리스는 이제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양분되었다. 하지만 아테네의 정치판은 급진파인 테미스토클레스와 온건보수파인 아리스티데스로 갈등이 빚어졌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전의 페르시아 보다 이제는 스파르타가 더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아리스티데스는 우리의 적은 페르시아이고 스파르타는 우방국가임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결국 테미스토클레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는 불과 7년 전의 원수나라였던 페르시아로 추방당하게 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명장이었다. 원수의 나라 페르시아에게 환대를 받으며 10년 동안 평안하게 생활하였지만 결국 그는 70살에 독배를 마시고 자결하고 만다. 왜냐하면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그에게 아테네 해군과 싸우러 가는 페르시아 해군을 지휘해주지 않겠느냐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리 조국에서 추방된 신세지만 칼부리를 조국을 향할 순 없었기에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30년)

명장 테미스토클레스의 부재로 인해 아테네는 위기를 겪지만 이 때 저 유명한 펠리클레스가 등장한다.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테네에는 ‘도편추방제’라는 제도가 있어서 아테네시민의 6천표 이상의 반대표를 받으면 추방당하게 된다. 아무리 탁월한 군주라도 이러한 ‘도편추방제’에 발목을 잡히기 마련이다.

 

페리클레스 이전의 테미스토클레스도, 키몬도 이 제도의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한 번도 이 제도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30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아테네의 부흥를 꾀한 위대한 왕이다. 페리클레스의 시대가 바로 ‘그리스 문화’가 왕성하게 꽃피운 시대이기도 하고 기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전에 철학의 중심은 이오니아지방이었지만 이제 그리스 철학의 중심은 아테네로 옮기게 되었는데 바로 이 무렵이었던 것이다.

 

그리스와는 다른, 로마만의, 로마인만의

이 페리클레스 시대에 그리스를 시찰하기 위해, 그리스의 법과 문화를 살피기 위해 로마에서 찾아와, 1년 동안이나 머물렀던 세 명의 로마인이 있다. 시오노나나미는 이 로마인들이 본 그리스의 문화와 정치와 경제 등의 총체적인 통찰과 관점이 로마를 더욱 성숙시켰다고 말한다.

 

그리스의 황금기를 관찰한 로마인이었지만 로마인은 결코 아테네를 모방하고자 하지 않고 독자적인 로마만의, 로마인만의 그 무엇을 만들어 냈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우리가 알다 싶이 로마는 공화정 제도를 가지고 있다. 아테네에서, 그것도 황금기를 지나고 있는 아테네에서 관찰하고 경험한 민주제를 그대로 가져올 수 있었으나 로마의 세 사람은 로마인만의 특유한 개방성 하에 이러한 것들을 맹목적인 답습이나 모방은 거두절미하고 잘 여과시켜 적용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세 가지 특징

왜냐하면 로마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로마는

첫째, 농경민족인 로마는 본디 보수적 경향을 가지고 있기에 변혁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개혁이 불가피해도 천천히 추진했다.

둘째, 로마에서는 귀족과 평민의 대결 태세가 강력했다.

셋째, 로마의 평민들은 과두정치 아래서의 기회균등을 요구했지만, 과두 정치 자체를 바꾸려고 하진 않았다.


로마의 심장은 원로원이다
 

로마의 공화정

공화정 로마는 원로원, 집정관, 민회 이렇게 삼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과 평민의 불평등을 계기로 인해 평민들의 거센 저항과 파업은, 후에 ‘호민관’이란 제도를 탄생시켰다. 호민관은 평민 출신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권력이었다.



로마는 ‘클리엔테스’를 가지고 있다

또한 로마를 이해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Keyword가 있다. 그것은 ‘클리엔데스’이다. 이것은 영어의 ‘client’인데 말 그대로 ‘자기 사람(들)’을 지칭한다. 원로원 수하에 있는 클리엔데스라는 말은, 바로 ‘원로원의 사람들’이란 의미이다. 로마는 누구 누구의 사람이라는 이러한 ‘클리엔데스’가 많았다. 그래서 개개인이 확고한 귀속의식이 존재했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적으로는 개방적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로마의 가장 큰 보물은 바로 ‘사람’인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한 아테네

한편, 선진국 그리스에서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04년에 결국 아테네가 페리클레스를 잃고 스파르타에게 패한 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 혼돈 속을 헤매고 있었다. 기원전 399년에는 혼돈에 빠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했다.

 

로마의 위기-켈트족의 침입

후진국 로마에서는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B.C 390년 북쪽 지방의 에트루리아인들로 인해 일종의 방파제역할을 했던 것이 에트루리아인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켈트족(갈리아인)이 로마를 침입해 온 것이다. 그러면서 로마는 공황사태에 빠졌다. 방어전을 지휘하게 된 포필리오스 레나의 말은 켈트족이 어떤 인간들인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적이 라틴족이나 사비니족처럼 전투가 끝난 뒤에도 우리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번 적은 흉포한 짐승이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맥없이 무너진 로마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소수의 인원들이 올라가 최후의 저항을 했다. 이것은 로마가 건국 이후에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굴욕이었다.

 

로마의 가장 큰 미덕은 ‘명예’

로마인이 가장 중시하던 미덕은 명예였다. 켈트족의 침입은 로마인의 명예심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로마인들은 명장 카밀루스를 추방시킨 시점이었다. 로마인들은 탁월한 인재들을 항상 잃어버리고나서 소중한 지 아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욕할 수 없는 것이 그게 바로 ‘로마인’이기 때문이다. 항상 ‘소 잃어보고 외양간 고치는’ 격인 것이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이다!

결국 7개월 간의 굴욕스런 시간을, 굴욕적인 몸값인 300킬로그램의 금괴를 켈트족에게 준 다음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켈트족의 침입’이 로마가 다시 더 위대하게 된 원인으로 꼽고 있다. 로마는 다시 일어서는데 4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지만 이 사건은 로마인의 마음에 깊이 새긴 못과 같은 교훈을 주었던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기원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정면으로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가 승리를 쥐게 되었지만 스파르타는 배타적인 사회이기도 하고 생활철학이 없는, 단순한 ‘군사력’을 바탕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 패권의 길이가 길래야 길 수가 없었다. 기원전 371년에 스파르타에서 테베로 패권이 넘어가지만 10년도 채 못되어 기원전 362년, 그리스의 주도권은 마케도니아의 손으로 넘어간다. 기원전 352년에 위대한 대왕, 알렉산더가 태어난다.

 

로마의 일어섬-세 가지 전략(구도)하에

로마는 다시 일어서려고 한다.

첫째, 방위를 중시하면서 파괴된 로마를 재건할 것.

둘째, 로마에 등돌린 동맹 부족과 싸워서 국경 안전을 확보할 것.

셋째,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해소하여 사회안정과 국론통일을 이룩할 것. 이것은 정치개혁을 의미했다.

 

로마의 심장은 바로 원로원이다.

로마의 심장은 바로 ‘원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정’ 정치의 나라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정치체제를 바꾸기 위해 개혁을 시도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가져간 경우이다. 원로원은 ‘로마’인 것이다.

 

켈트족의 침입 이후 로마는 이전의 ‘라틴 동맹’에서 ‘로마 연합’이라는 약간은 변형된 정치 건축의 걸작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로마는 ‘라틴 동맹’의 그 비극을 몸소 체험했기에 새로운 시스템인 ‘로마 연합’을 동맹국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 나간다.

 

로마의 길

 

로마는 모든 길로 통한다

로마는 이 로마 연합의 효율적인 소통을 위해 ‘로마 가도’를 설치하게 되는데 이것은 ‘로마의 동맥’과도 같은 것이다. 이 ‘가도’의 설치는 로마의 위대한 점이다. 여기서 ‘로마는 모든 길로 통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길’이 로마가 숙명적으로 전쟁을 영원히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로마인의 두 번째 굴욕-삼니움족에 의한 ‘카우디움의 굴욕’

로마인의 ‘켈트족의 침입’ 이후 두 번째로 절대로 되풀이되서는 안 될 치욕은 바로 기원전 321년에 삼니움족에게 당한 ‘카우디움의 굴욕’이었다.

 


병법의 천재, 피로스-얼짱이닷!!!ㅋㅋ


병법의 천재,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와 대결 구도에 이르게 되었다. 켈트족과 에트루리아인 공동전선을 펼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로마였다. 하지만 타렌툼이란 도시국가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선 타렌툼이 고용한 용병격인 ‘에페이로스의 왕인 피로스’를 물리쳐야 했다.

 

피로스 왕의 실책의 3년

‘병법의 천재’였던 피로스와 전쟁에서 로마는 빈번히 패배를 거듭했다. 하지만 피로스는 로마와의 전쟁에 대한 명분도 약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는 시라쿠사를 거쳐 카르타고에 관심이 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3년의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버렸다. 죽도 밥도 안 되었다. 반면 로마는 시칠리아에서 에너지를 소모한 피로스의 3년의 시간 동안에, ‘로마 연합’을 단단히 굳히고 힘을 더욱 모으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다

로마는 타렌툼에 대한 정복욕은 없었으나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이라는 역사적 필연이 되고 말았다. 기원전 270년 무렵인 이 시기에 이르러, 로마는 북쪽으로는 루비콘 강에서 남쪽으로는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완성했다.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뒤부터 헤아리면, 무려 500년에 이르는 긴 세월이 걸린 사업이었다.

 

로마인 이야기 1권의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로마의 융성한 원인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융성한 원인을 보편적인 사람들이 찾듯이 정신적인 태도에서 찾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리비우스, 폴리비오스, 플루타르코스, 디오니시오스의 작품에 나타난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로마가 융성한 원인을 정신적인 것에서 찾지 않은 세 사람의 태도다. 로마의 흥망성쇠는 건강한 정신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당사자들이 만들어 낸 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이들 세 사람은 기독교가 보급되기 이전에 태어났으니깐 당연한 일이지만 나도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사실, 기독교가 아니면, 이전에 로마를 바라보던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것 역시 프랑스 혁명을 모르고 죽은 세 사람한테는 당연한 것이나, 프랑스 혁명이 드높인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이념에 이 세 사람은 전혀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념의 방해를 받지 않으니깐 현실을 직시하는 것도 그만큼 쉬워진다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디오니시오스가 거론한 로마의 종교적인 자세,

폴리비오스가 지적한 정치체제,

플루타르코스가 말한 포용력

은 고대에서는 모두 이례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들은 로마인의 개방적인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Epilogue...

로마인 이야기 1번째 작품을 마무리했다. 흥미진지한 순간들이었고 아직 이러한 시간을 14번이나 더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한 쾌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로마인 이야기와 더불어 ‘로마인 이야기 길라잡이’-만2천원하더라...ㅠ-와 전질 사면 끼워주는 ‘시오노 나나미 20문 20답’을 동시다발적으로 읽으면서 참고하고 있다. 이 기회에 로마사를 한 번 뿌리뽑아 볼 작정이다. 하지만 과연 뿌리가 뽑힐까? 하하하...

 

시오노 나나미는 열정의 대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과 동일한 습관대로 아침 7시에 식사를 준비하여 하고 8시 30분부터 저녁 5시까지만 글을 썼다고 한다. 그것은 로마인의 보편적인 습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타자기나 노트북으로 자판을 두들기며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만년필 한 자루를 가지고 ‘로마인 이야기’라는 ‘황금의 알’을 낳았다. 1년에 한 권씩, 총 15권을 매년 한 권씩, 그리고 15년 만에 출산한 것이다.

 

이제 칠십줄에 들어선 그녀에게 이러한 ‘로마, 로마인에 대한 열정’은 정말 배우고 싶다. 자신의 삶을 통째로 집어 삼킬만한 그 무엇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붙잡기 위해 로마로 건너가서 5년 동안 유학하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의사 남편과 결혼을 하면서 그녀는 로마에 눌러 앉은 것이다. 대단한 여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자, 이제 그만 하고 ‘한니발 전쟁’으로 출두할란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포에니 전쟁‘...생각만해도 가슴이 뛴다!!! 들리는가? 내 심장박동소리를...ㅋㅋ

 

Written By Karl21

 

P.S...퇴근하자마자 ‘로마인 이야기, 1권’을 정리할 요량으로 시작했던 작업이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물론 자기 전에 한 번 더 수정했다. 몇 시간을 투자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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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다스 2008-02-2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보고 갑니다. 요즘 드라마 '롬'을 보고 있는데요,, 로마에 대해 너무 궁금해 여기저기 찾다가 여기와서 많이 배워갑니다..^^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한성례 옮김 / 부엔리브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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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와 결혼한 시오노 나나미
  나는 시오노 나나미가 왜 로마로 건너갔는지 안다. 그녀는 로마에 대한 최고의 열정가였다. 내가 대학 수업 때 ‘영국 희곡’ 전공의 여교수님은 ‘나는 세익스피어와 결혼했다’면서 평생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그만큼 세익스피어에 대해선 남다른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내가 아는 그 교수님 말을 빌리자면 ‘로마와 결혼한 여인’인 것이다. 나는 아직 시오노 나나미의 평생 대작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글에 대한 느낌이 조금은 미온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 이 텍스트에 대한 느낌을 솔직하게 적어보고 싶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들의 로마, 로마인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가 주는 흥미와 재미는 바로 ‘인간의 역사,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들고 있다. 그렇다. 특히 로마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시오노 나나미가 그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이야기했다고 하는 카이사르의 대목에서 나는 벅찬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로마의 역사를 새롭게 재편하고 구성하기 위해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하면서 루비콘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던 카이사르! 위대한 혁명가의 면모를 보여 주었지만 로마인, 로마라는 특별한 도시는 ‘영웅이 필요치 않는 공화정의 나라’라는 장애물에 부딪혀 아쉽게 막을 내린다. 로마는 모든 개방과 개혁을 스스럼없이 감행하는 특이한 나라이자 도시이지만 로마의 로마됨은 ‘공화정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저자는 지적해준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로마의 자화상을 이처럼 현실적으로 그렸기에 ‘공화정’이라는 정치적인 시스템으로 유지, 보수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영웅이 필요치 않은 나라였지만 영웅은 많았던 로마
  비록 로마인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보편제국’을 꿈꾸었지만 11년이란 아쉬운 세월의 흔적만을 남긴 위대한 카리스마의 인물-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포에니전쟁의 젊은 주인공 한니발과 그의 부하였지만 나중에는 원수가 된 스키피오, 카이사르 보다 70년 먼저 로마의 개혁을 주장하다가 아쉬운 마무리를 한 그라쿠스 형제,  역사가 제대로 구현할 수 없었던 ‘보편제국, 로마’의 꿈을 ‘관용’의 이름으로 구현하려 했던 카이사르(율리우스 시저)와 카이사르의 미완의 꿈을 기민한 처세술로 ‘로마사상 최대의 연기자’로 분한 아우구스투스 등. 힘과 기백이 넘치는 인물들이 로마사를 수놓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자기 나름대로 로마의 불세출의 영웅들의 리스트를 만들고 그 인물들을 5가지로 분류하는데, 이를테면 지적 능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자기 제어 능력, 지속하려는 의지 이다. 이 5가지로 개인적인 성적표를 제출했는데 모두 면에서 만점인 영웅은 카이사르와 페리클레스 뿐이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플루타크 영웅전’에서 나는 브루투스가 시저를 암살하는 장면에서의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슬펐다. 그런데 여기서도 한 시대와 한 나라인 로마의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나아갔지만 그가 너무 앞서 갔던가? 친구인 브루투스도, 당대의 지성의 대가라고도 할 수 있는 키케로조차도 카이사르의 속내를 읽지 못했으니 말이다. 진정한 리더의 발목을 잡는 눈 먼 부하들과 주변인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존재하는구나! 그런데 브루투스에 대한 점수를 보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브루투스의 점수를 보라! 30, 20, 20, 15, 60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해석’이라고 했는데, 시오노 나나미의 해석에 나는 공감하며 호쾌, 상쾌, 유쾌, 통쾌해했다! 하하하

  영웅이 행복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면 여운은 덜할 것이다. 로마의 영웅들은 여운이 깊다. 그것은 그들이 로마를 지독히 사랑하고 염려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로마라는 나라는 바로 ‘공화정’이라는 정치적인 시스템을 가진 나라이다. 이 시스템은 ‘영웅을 필요치 않는 시스템’이고, 이러한 구조의 벽으로 인해 영웅들은 미완성인 채로 남겨지게 된다.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
  로마는 자신들이 점령한 나라와 영토에 대해서 다소 완만한 정책을 썼다. 그것은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말처럼 ‘패자마저도 자신들에게 동화시킨다는 그들만의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로마연합’이라는 식민지에 대한 로마만의 스타일이었고 이것이 후에는 ‘팍스로마나’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로마는 네트워크로서의 도로망을 잘 건설함으로 말미암아 ‘로마연합’이라는 광대한 포괄정책을 잘 구현하기도 한 것이다. 로마사에 대해 막연했던 나에게 저자는 굉장한 통찰을 부여해주었다.

로마인의 개혁 이야기
  로마인의 이야기를 시오노 나나미는 ‘혁명’의 키워드의 관점에서 기술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녀는 로마의 혁명은 과거의 로마를 부정하는 차원이 아님을 밝혔다.
‘자칫하면 개혁이란 오래된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내세우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성공한 개혁은 자신들의 현재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유효한 것을 골라내어 그것이 최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게 재구축해 나가는 작업이 아닐까’(289)
  ‘어제는 오늘의 결과이며 오늘은 내일의 거울이다’
  역사는 바로 그런 것이다. 로마인의 이야기는 오늘의 결과로서의 현실을 주목하게 되며, 오늘은 또 다른 오늘인 내일을 가름하는 시금석이 된다. 로마인의 이야기는 오늘날 여러 측면에서 나눠볼만한 유용한 어제의 오늘인 것이다.

로마인의 대가, 시오노 나나미의 유혹
  사람이 한 우물을 오랫동안 파면 그 분야에 대가가 될 수 있다는 말처럼 시오노 나나미는 나름대로의 로마사의 대가의 위치에 서 있는 듯하다. 대가가 쓴 로마사에 대해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읽고픈 충동을 굉장히 자극하고 도전한다. 조금만 기다려라! 물론 이것이 시오노 나나미가 1권의 책으로 자신의 15권의 시리즈 책을 읽게끔 꼬드기며 유혹하는 것이라고 해도 나는 미소를 감추지 않고 그 꾐에 넘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게끔 시오노 나나미는 글을 적고 있다. 그래서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면 15권을 읽히기 위한 또 하나의 전략적인 masterpiece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15권을 읽기 전에 이 한권으로 ‘로마, 로마인’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 Survey한 것에 굉장한 만족감을 누렸다.

디저트가 아닌 에피타이저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는 또 하나의 디저트라고 보기 보다는 내겐 하나의 에피타이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맛은? 굉장히 좋다.  

Written By Karl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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