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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ㅣ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평점 :
로마인 이야기, 즉 로마사는 우연챦게 세계사 도서들을 산발적으로 읽어가다가 구미에 당기게 된 책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16번째 책이기도 한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를 에피타이저로 읽고 나니 그가 이야기하는 로마인 이야기의 전체적인 조망을 할 수 있어 참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숲을 한 번 보고 나무를 본다는 그런 느낌이다.
1권은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부제를 달고 있다. 여기서는 제 1장, 로마의 탄생과 제 2장, 로마 공화정의 이야기를 다룬다.
제 1장, 로마의 탄생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
로마의 탄생은 기원전 753년에 로물루스에 의해서 건국되었다. 모든 나라의 건국신화는 존재한다. 우리나라도 단군신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로마도 로물루스 쌍둥이 형제의 전설, 신화가 존재한다. 건국신화는 그 나라의 건국에 대한 웅대함과 화려함을 돋보이기 하기 위한 하나의 과장법이다.
왕정 정치 7대(代)와 그들의 출신성분
로마는 공화정의 정치시스템을 취하기 이전에 7명의 왕정 정치가 있었다. 로물루스를 비롯하여, 제 2대 누마(사비니족 출신), 제 3대 툴루스(라틴계 로마인 출신), 제 4대 안쿠스(사비니족 출신), ,제 5대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최초로 선거운동을 한 인물-(혼혈 에트루스크 출신), 제 6대 세르비우스(타르퀴니우스의 사위), 제 7대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세르비우스의 사위) 왕이다.
로마의 초대 왕정 제도에서 왕의 선출 기준은 독특하다. 왕들의 출신을 보면 알겠지만 라틴계, 에트루리아계, 사비니족, 순수 로마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사회가 얼마나 순수로마인이 아닌 다른 속주(식민지)나 이방 세계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평등한 권리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로마는 열려진 사회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로마의 지형과도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로마인의 개방성은 지형적인 조건과도 맞물린다
로마는 7개의 언덕으로 지형적인 조건을 갖추어 있기에 전쟁을 안할래야 안 할 수 없는 도시국가였다. 완전히 고립된 것도 아니고 완전히 트인 평지도 아닌 이런 언덕의 지형적인 조건 자체가 로마의 국민성, 즉 ‘개방성’의 결과물을 낳게 된 것이기도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개방성을 들면서 ‘로마를 강대하게 한 요인은 종교에 관한 사고방식이었다’고 전한다.
로마의 이러한 개방성이 로마로 들어온 에스투르크인 5대왕 타르퀴니우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개인적으로 보고 싶다. 타르퀴니우스는 정말 에트루리아인이었지만 그는 정말 로마인이 되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았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다음 6대 왕을 바로 사위인 '세르비우스‘를 선택한 것이다. 혈통과 인맥과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이러한 로마의 ’왕의 간택‘부분만 보더라도 로마의 특수성을 엿볼 수 있다.
로마인의 개방성은 종교적인 원인도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종교적인 개방성-로마는 다신교였다-오히려 로마를 더욱 로마답게 했으며 나라를 더욱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유일신교가 로마의 종교였다면 로마는 그만큼 타민족과 그 민족이 가진 종교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로마인이 가진 것은 바로 ‘개방성’이었다고 한다. 이 민족 특유의 ‘개방성’이 그리스가 그렇게 융성하였지만, 그렇게 빨리 쇠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로마가 더욱 번성케 한 원인으로 꼽고 있다.
로마는 로마인만의 군대를 원한다
하지만 로마의, 로마인의 이러한 개방성은 군대 편성에 있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첫째, 로마는 말기가 될 때까지 용병제도가 없었다. 도시국가였던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 국가인 타렌툼은 로마의 침략기세를 알고 그 당시 전쟁에서 탁월한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타렌툼은 군사력은 없었지만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은 돈을 주고 고용한 남한테 국가 수호를 맡기는 것을 싫어했다. 둘째는, 로마의 유력자는 많은 사람을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제로 결정된 수만큼 병사를 제공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로마는 16세-40세까지의 건장한 남자에게는 ‘세금’ 대신에 ‘병역’의 의무를 지웠다. 그래서 이것은 ‘혈세’라고도 했다.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로마 건국 초기의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이란 이 그림은 우리에게 로마의 역사의 한 대목을 보여준다. 로물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로마시민들이 건립 당시에 대부분 독신 남자였기 때문에 여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웃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하여 여인들은 우리 나라식으로 말하자면 ‘보쌈’하기에 이르른다.
서양에는 지금도 신랑이 신부를 안아들고 신방 문턱을 넘는 풍습이 있다. 이 사건 이후로 시작된 로마인의 풍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244년의 왕정 시대의 종말
로마는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치세를 끝으로 공화정 시대로 들어간다. 로물루스가 건국한지 기원전 753년부터 244년째인 기원전 509년의 일이었다. 민회에서 선출되는 것은 같지만, 임기가 1년밖에 안 되는 2명의 집정관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루크레티아 사건은 이미 사명을 끝낸 왕정의 숨통을 끊어놓은 데 불과했다.
로마의 영웅들
-이들은 1,2,3, 4,5 권의 주인공들인 셈이다.
제 2장, 로마 공화정
로마 공화정의 공로자, 브루투스
사적인 추문을 교묘히 이용하여 왕정 타도까지 이끌고 간 공로자는 바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그는 그후 500년 동안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왕정 회복을 위해 에트루리아 인들을 끌어들인다. 여기서 에트루리아의 명장인 포르센나와 이를 죽이기 위해 적장으로 뛰어든 ‘왼손잡이 무티우스’의 일화는 감동적이다.
로마의 공화정의 씨를 뿌린 사람은 브루투스였고, 뿌리를 내린 사람은 푸블리콜라였다. 이 두 사람의 뒤를 이은 로마인 가운데 왕정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먼훗날 최고의 실력가인 카이사르 황제가 등장하기까지는 말이다.
로마에 영향을 미친 그리스인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사를 기술하기 위해서 로마에 영향를 미친 그리스의 역사를 잠시 기술하고 있다. 독자의 주된 포커스는 로마인 이야기이기에 그리스인 이야기를 하니 흥미가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이고, 역사는 사람들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로마이든, 그리스이든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리스의 인물 중의 인물, 페리클레스
그리스의 역사를 들추다 보면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만난 반가운 인물,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 능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자기 제어 능력, 지속하려는 의지 의 5가지 분류기준을 만들어 100만점 만점을 준 카이사르와 더불어 유일무이한 인물, 페리클레스가 등장한다.
그리스는 트로이의 건너편에 있었다
나는 그리스의 역사를 맛보면서 또 다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이전부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섭렵하고자 했는데 말이다. 그리스 이야기에서 우리는 유명하디 유명한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영화 ‘트로이’...브래드 피트의 멋진 마스크와 몸매로 우리들의 감동을 자아냈던 그 트로이가 바로 그리스 땅 건너편에서 벌어진 실화 아닌 실화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나는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초코 우유를 마셨다. 일단 먹어야 살지...ㅋ)
그리스(아테네)의 시민권 VS 로마의 시민권
그리스의 역사 가운데 아테네, 아테네는 아테네 시민권을 가질려면 부모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이 아테네 시민이어야 가능했다. 이것도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면 더욱 배타적으로 바뀌어, 부모가 모두 아테네 태생이 아니면 시민권을 가질 자격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테네에서 오랫동안 살고 학교까지 열어 아테네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평생 동안 시민권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페리클레스는 자신이 아테네 출신이 아닌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반면에 로마는 시민권에 대해서 아주 개방적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러한 아테네에 대해서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주려면 자연히 시민의 수를 제한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피력했다. 아테네와는 상반된 이러한 시민권에서의 개방성을 보더라도, 그리스인인 플루타르코스는
“패배자를 동화시키는 방식만큼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요인은 없다”
고 했다.
그렇지만 외국인에게 자국민과 똑같은 세금을 물리면서도 피선거권은커녕 선거권조차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오늘날에도 드물지 않다.
그리스와 스파르타가 펼친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의 아테네와 더불어 펠로폰네소스의 스파르타가 있다. 아테네는 경제력으로, 스파르타는 군사력으로, 두 무리가 충돌을 회피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충돌을 보류하게 된 원인이 바로 ‘페르시아 전쟁’이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격렬한 내분이 특징인 그리스 역사에서도 드물게 그리스 전체가 일치단결하여 적과 맞서 싸운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이기도 했다. 페르시아 전쟁은 경제적인 이유로 일어난 경제 전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종교적 이유로 일어난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영화 300의 크세르크세스, 델로스 신탁,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
그리스 연합군은, 아테네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스파르타에서는 영화 ‘300’의 스파르탄과 함께한 레오니다스 왕이 지휘하였다.
이국인들이여,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하라.
조국에 대한 사랑에 목숨을 바친 우리는 모두 이 땅에 잠들어 있노라고.
스파르타 전사들의 명성은 후세에까지, 지금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라도 접하게 된 슬프고도 영웅적인 에피소드이다. 그러나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들이 희생이 허사는 아니었다. 스파르타인조차도 그리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싸운다는 것을 그리스 전체가 알았기 때문이다. 위기 앞에서의 공동전선은 이것으로 확고부동해졌다.
그리스가 중심인 ‘델로스동맹’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B.C 478년에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끈 페르시아와 전쟁이 끝났고 그리스는 밀레토스, 에페소스, 그리고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고향이기도 한 할리카르나소스 같은 이오니아 도시들도 그리스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에게 해도 다시금 그리스인의 바다가 되었다. 아테네의 해군과 스파르타의 육군의 합동작전의 성과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는 패권국가가 되었고 그리스의 폴리스(도시국가)들은 항구적인 방어체제를 갖출 필요를 느꼈고 이로 인해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은 200개나 되는 도시국가의 연합체가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가 얼마나 많은 도시국가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본부로는 델로스 섬이 선정된 것이다.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이러한 평화관계는 그리 길지 못했다. 아테네가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스파르타는 동맹 참가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기네,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델로스 동맹 VS 펠로폰네소스 동맹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긴 뒤, 바다에서는 아테네가, 육지에서는 스파르타가 점점 강해져갔다. 이 두 강대국의 적대관계는 기원전 431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47년 동안 냉전 상태로 계속된다.
테미스토클레스 VS 아리스티데스
그리스는 이제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양분되었다. 하지만 아테네의 정치판은 급진파인 테미스토클레스와 온건보수파인 아리스티데스로 갈등이 빚어졌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전의 페르시아 보다 이제는 스파르타가 더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아리스티데스는 우리의 적은 페르시아이고 스파르타는 우방국가임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결국 테미스토클레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는 불과 7년 전의 원수나라였던 페르시아로 추방당하게 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명장이었다. 원수의 나라 페르시아에게 환대를 받으며 10년 동안 평안하게 생활하였지만 결국 그는 70살에 독배를 마시고 자결하고 만다. 왜냐하면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그에게 아테네 해군과 싸우러 가는 페르시아 해군을 지휘해주지 않겠느냐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리 조국에서 추방된 신세지만 칼부리를 조국을 향할 순 없었기에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30년)
명장 테미스토클레스의 부재로 인해 아테네는 위기를 겪지만 이 때 저 유명한 펠리클레스가 등장한다.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테네에는 ‘도편추방제’라는 제도가 있어서 아테네시민의 6천표 이상의 반대표를 받으면 추방당하게 된다. 아무리 탁월한 군주라도 이러한 ‘도편추방제’에 발목을 잡히기 마련이다.
페리클레스 이전의 테미스토클레스도, 키몬도 이 제도의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한 번도 이 제도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30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아테네의 부흥를 꾀한 위대한 왕이다. 페리클레스의 시대가 바로 ‘그리스 문화’가 왕성하게 꽃피운 시대이기도 하고 기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전에 철학의 중심은 이오니아지방이었지만 이제 그리스 철학의 중심은 아테네로 옮기게 되었는데 바로 이 무렵이었던 것이다.
그리스와는 다른, 로마만의, 로마인만의
이 페리클레스 시대에 그리스를 시찰하기 위해, 그리스의 법과 문화를 살피기 위해 로마에서 찾아와, 1년 동안이나 머물렀던 세 명의 로마인이 있다. 시오노나나미는 이 로마인들이 본 그리스의 문화와 정치와 경제 등의 총체적인 통찰과 관점이 로마를 더욱 성숙시켰다고 말한다.
그리스의 황금기를 관찰한 로마인이었지만 로마인은 결코 아테네를 모방하고자 하지 않고 독자적인 로마만의, 로마인만의 그 무엇을 만들어 냈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우리가 알다 싶이 로마는 공화정 제도를 가지고 있다. 아테네에서, 그것도 황금기를 지나고 있는 아테네에서 관찰하고 경험한 민주제를 그대로 가져올 수 있었으나 로마의 세 사람은 로마인만의 특유한 개방성 하에 이러한 것들을 맹목적인 답습이나 모방은 거두절미하고 잘 여과시켜 적용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세 가지 특징
왜냐하면 로마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로마는
첫째, 농경민족인 로마는 본디 보수적 경향을 가지고 있기에 변혁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개혁이 불가피해도 천천히 추진했다.
둘째, 로마에서는 귀족과 평민의 대결 태세가 강력했다.
셋째, 로마의 평민들은 과두정치 아래서의 기회균등을 요구했지만, 과두 정치 자체를 바꾸려고 하진 않았다.
로마의 심장은 원로원이다
로마의 공화정
공화정 로마는 원로원, 집정관, 민회 이렇게 삼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과 평민의 불평등을 계기로 인해 평민들의 거센 저항과 파업은, 후에 ‘호민관’이란 제도를 탄생시켰다. 호민관은 평민 출신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권력이었다.
로마는 ‘클리엔테스’를 가지고 있다
또한 로마를 이해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Keyword가 있다. 그것은 ‘클리엔데스’이다. 이것은 영어의 ‘client’인데 말 그대로 ‘자기 사람(들)’을 지칭한다. 원로원 수하에 있는 클리엔데스라는 말은, 바로 ‘원로원의 사람들’이란 의미이다. 로마는 누구 누구의 사람이라는 이러한 ‘클리엔데스’가 많았다. 그래서 개개인이 확고한 귀속의식이 존재했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적으로는 개방적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로마의 가장 큰 보물은 바로 ‘사람’인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한 아테네
한편, 선진국 그리스에서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04년에 결국 아테네가 페리클레스를 잃고 스파르타에게 패한 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 혼돈 속을 헤매고 있었다. 기원전 399년에는 혼돈에 빠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했다.
로마의 위기-켈트족의 침입
후진국 로마에서는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B.C 390년 북쪽 지방의 에트루리아인들로 인해 일종의 방파제역할을 했던 것이 에트루리아인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켈트족(갈리아인)이 로마를 침입해 온 것이다. 그러면서 로마는 공황사태에 빠졌다. 방어전을 지휘하게 된 포필리오스 레나의 말은 켈트족이 어떤 인간들인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적이 라틴족이나 사비니족처럼 전투가 끝난 뒤에도 우리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번 적은 흉포한 짐승이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맥없이 무너진 로마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소수의 인원들이 올라가 최후의 저항을 했다. 이것은 로마가 건국 이후에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굴욕이었다.
로마의 가장 큰 미덕은 ‘명예’
로마인이 가장 중시하던 미덕은 명예였다. 켈트족의 침입은 로마인의 명예심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로마인들은 명장 카밀루스를 추방시킨 시점이었다. 로마인들은 탁월한 인재들을 항상 잃어버리고나서 소중한 지 아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욕할 수 없는 것이 그게 바로 ‘로마인’이기 때문이다. 항상 ‘소 잃어보고 외양간 고치는’ 격인 것이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이다!
결국 7개월 간의 굴욕스런 시간을, 굴욕적인 몸값인 300킬로그램의 금괴를 켈트족에게 준 다음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켈트족의 침입’이 로마가 다시 더 위대하게 된 원인으로 꼽고 있다. 로마는 다시 일어서는데 4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지만 이 사건은 로마인의 마음에 깊이 새긴 못과 같은 교훈을 주었던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기원전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정면으로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가 승리를 쥐게 되었지만 스파르타는 배타적인 사회이기도 하고 생활철학이 없는, 단순한 ‘군사력’을 바탕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 패권의 길이가 길래야 길 수가 없었다. 기원전 371년에 스파르타에서 테베로 패권이 넘어가지만 10년도 채 못되어 기원전 362년, 그리스의 주도권은 마케도니아의 손으로 넘어간다. 기원전 352년에 위대한 대왕, 알렉산더가 태어난다.
로마의 일어섬-세 가지 전략(구도)하에
로마는 다시 일어서려고 한다.
첫째, 방위를 중시하면서 파괴된 로마를 재건할 것.
둘째, 로마에 등돌린 동맹 부족과 싸워서 국경 안전을 확보할 것.
셋째,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해소하여 사회안정과 국론통일을 이룩할 것. 이것은 정치개혁을 의미했다.
로마의 심장은 바로 원로원이다.
로마의 심장은 바로 ‘원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정’ 정치의 나라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정치체제를 바꾸기 위해 개혁을 시도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가져간 경우이다. 원로원은 ‘로마’인 것이다.
켈트족의 침입 이후 로마는 이전의 ‘라틴 동맹’에서 ‘로마 연합’이라는 약간은 변형된 정치 건축의 걸작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로마는 ‘라틴 동맹’의 그 비극을 몸소 체험했기에 새로운 시스템인 ‘로마 연합’을 동맹국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 나간다.
로마의 길
로마는 모든 길로 통한다
로마는 이 로마 연합의 효율적인 소통을 위해 ‘로마 가도’를 설치하게 되는데 이것은 ‘로마의 동맥’과도 같은 것이다. 이 ‘가도’의 설치는 로마의 위대한 점이다. 여기서 ‘로마는 모든 길로 통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길’이 로마가 숙명적으로 전쟁을 영원히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로마인의 두 번째 굴욕-삼니움족에 의한 ‘카우디움의 굴욕’
로마인의 ‘켈트족의 침입’ 이후 두 번째로 절대로 되풀이되서는 안 될 치욕은 바로 기원전 321년에 삼니움족에게 당한 ‘카우디움의 굴욕’이었다.
병법의 천재, 피로스-얼짱이닷!!!ㅋㅋ
병법의 천재,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와 대결 구도에 이르게 되었다. 켈트족과 에트루리아인 공동전선을 펼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로마였다. 하지만 타렌툼이란 도시국가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선 타렌툼이 고용한 용병격인 ‘에페이로스의 왕인 피로스’를 물리쳐야 했다.
피로스 왕의 실책의 3년
‘병법의 천재’였던 피로스와 전쟁에서 로마는 빈번히 패배를 거듭했다. 하지만 피로스는 로마와의 전쟁에 대한 명분도 약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는 시라쿠사를 거쳐 카르타고에 관심이 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3년의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버렸다. 죽도 밥도 안 되었다. 반면 로마는 시칠리아에서 에너지를 소모한 피로스의 3년의 시간 동안에, ‘로마 연합’을 단단히 굳히고 힘을 더욱 모으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다
로마는 타렌툼에 대한 정복욕은 없었으나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이라는 역사적 필연이 되고 말았다. 기원전 270년 무렵인 이 시기에 이르러, 로마는 북쪽으로는 루비콘 강에서 남쪽으로는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완성했다.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뒤부터 헤아리면, 무려 500년에 이르는 긴 세월이 걸린 사업이었다.
로마인 이야기 1권의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로마의 융성한 원인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융성한 원인을 보편적인 사람들이 찾듯이 정신적인 태도에서 찾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리비우스, 폴리비오스, 플루타르코스, 디오니시오스의 작품에 나타난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로마가 융성한 원인을 정신적인 것에서 찾지 않은 세 사람의 태도다. 로마의 흥망성쇠는 건강한 정신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당사자들이 만들어 낸 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이들 세 사람은 기독교가 보급되기 이전에 태어났으니깐 당연한 일이지만 나도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사실, 기독교가 아니면, 이전에 로마를 바라보던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것 역시 프랑스 혁명을 모르고 죽은 세 사람한테는 당연한 것이나, 프랑스 혁명이 드높인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이념에 이 세 사람은 전혀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념의 방해를 받지 않으니깐 현실을 직시하는 것도 그만큼 쉬워진다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디오니시오스가 거론한 로마의 종교적인 자세,
폴리비오스가 지적한 정치체제,
플루타르코스가 말한 포용력
은 고대에서는 모두 이례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들은 로마인의 개방적인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Epilogue...
로마인 이야기 1번째 작품을 마무리했다. 흥미진지한 순간들이었고 아직 이러한 시간을 14번이나 더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한 쾌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로마인 이야기와 더불어 ‘로마인 이야기 길라잡이’-만2천원하더라...ㅠ-와 전질 사면 끼워주는 ‘시오노 나나미 20문 20답’을 동시다발적으로 읽으면서 참고하고 있다. 이 기회에 로마사를 한 번 뿌리뽑아 볼 작정이다. 하지만 과연 뿌리가 뽑힐까? 하하하...
시오노 나나미는 열정의 대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과 동일한 습관대로 아침 7시에 식사를 준비하여 하고 8시 30분부터 저녁 5시까지만 글을 썼다고 한다. 그것은 로마인의 보편적인 습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타자기나 노트북으로 자판을 두들기며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만년필 한 자루를 가지고 ‘로마인 이야기’라는 ‘황금의 알’을 낳았다. 1년에 한 권씩, 총 15권을 매년 한 권씩, 그리고 15년 만에 출산한 것이다.
이제 칠십줄에 들어선 그녀에게 이러한 ‘로마, 로마인에 대한 열정’은 정말 배우고 싶다. 자신의 삶을 통째로 집어 삼킬만한 그 무엇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붙잡기 위해 로마로 건너가서 5년 동안 유학하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의사 남편과 결혼을 하면서 그녀는 로마에 눌러 앉은 것이다. 대단한 여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자, 이제 그만 하고 ‘한니발 전쟁’으로 출두할란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포에니 전쟁‘...생각만해도 가슴이 뛴다!!! 들리는가? 내 심장박동소리를...ㅋㅋ
Written By Karl21
P.S...퇴근하자마자 ‘로마인 이야기, 1권’을 정리할 요량으로 시작했던 작업이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물론 자기 전에 한 번 더 수정했다. 몇 시간을 투자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