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하루 한 리뷰>를 지키지 못했다! 어제 리뷰를 적다가 내용의 부피가 너무 커져 버렸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제야 올린다.
‘하루 한 책 한 리뷰’이걸 실천하는 독서가가 있다. 일본의 마쓰오카 세이꼬이다. 그는 <독서의 神>이란 책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는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리뷰를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한다. 자기나름대로의 원칙을 만들어 5년 동안 장대한 북 내비게이션 프로젝트<센야센사쓰>를 진행하고 있다. 절대 똑같은 저자가 아니어야 하고, 똑같은 분야의 책은 안 되는 것으로 원칙을 정하고 매일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나는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하루를 빼먹은 셈이다. 그래도 그렇게 노력하고 싶다.
마쓰오카 세이꼬는 ‘편집공학’으로 유명한다. ‘편집독서’이다. 김정운 교수가 <에디톨로지>에서 강조하는 말,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오직 편집이 창조이다’라는 말은 마쓰오카 세이꼬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작년 11월부터 본격적인 독서의 가도에 올랐는데, 처음에 독서법에 대한 책을 몇 권 섭렵한 것이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 <독서의 神> 이 책은 경이적인데, 책 내용이 인터뷰 형식으로 되어 있어 조금 아쉽다는 것이다.
오늘의 리뷰는 기독교신앙서적 가운데 하나를 택했다. <시대묵상>이란 책이다. 저자는 지금 신학대학원(조직신학 전공) 교수이다.
한 사람 人
저자가 미국으로 유학하여 LA에 살았을 때 일화이다. 집에서 돌 던질만한 거리(?)-이 표현 영어문장에서 나오는, 진짜 반가운 문구!-에 디즈니랜드가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학교와 교회와 집만 왔다갔다 출입한 꽉 막힌(?) 경건한 학생이었다.
그의 용모 또한 독일 전차 군병을 방불케하는 용모이다. 각진 마스크에 이국적인 생김새... 저자의 전공이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인데, 외모 또한 ‘조직적이다’, ‘목사가 아니라 검사 같다’고 주변인들이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런 용모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스타일이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가 표현처럼 저자는‘불 붙는 논리’로 강의한다. 그러기에, 저자의 강의는 항상 설레었고 수업을 들으면서 모두가 가슴이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그가 세속(속세)에 물들지 않고 한 길만을 추구하며 달려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한 심장 心
보통 교수사역을 시작하면 오랫동안 연구와 공부로 인해 불안정했던 삶이 안정세로 접어드는 셈이다. 그러면 교수사역만 해도 벅찰 것인데, 저자는 교수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교회를 개척했다. 서울에 아주 작은 교회를 개척했다. 저자의 위치와 배경이라면, 명성있고 인기있는 큰 교회의 목사로서 사역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교수사역을 하면서 ‘코끼리도 싫어하는’교회개척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많은 숫자의 성도가 모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강의가 ‘불 붙는 논리’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옆에 책과 이론과 신학과 학문만이 즐비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영혼과 현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가! 그는 그걸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이렇게 말하면 교수사역만 전념하시는 분들을 평가절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길 바란다. 절대 그런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소위 성공적으로 목회를 해서 이름깨나 알려진 젊은 목사들에게 선지자적 메시지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다....젊어서부터 잘나가는(?) 교회만 경험했기에 실패 혹은 무명의 밑바닥에서 병든 교회와 이 시대의 아픔을 통관하는 혜안을 터득하는 영적 숙성의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시대를 깨우는 광야의 소리는, 시류에 영합하는 영특함과 잔꾀가 없어 시대가 알아주는 목회를 하지 못하고 낙오했다는 멸시를 받고 오랜 고독 속에서 하나님께 빚어진 사람에게서 흘러나온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이렇게 준비된 사람을 일시에 풀어놓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유명한 목사들에게 기대할 것이 별로 없다. 다만, 풀뿌리처럼 묻혀 있는 이름 없는 자들이 생각 외로 많다는 사실이 한국 교회의 희망이다.‘(시대를 깨우는 광야의 소리,102p)
‘...목사 돼서 성공하는 것보다 망해야 제대로 목사의 길을 가는 것일 거다.’(갑질하는 목사,163p).
저자에게는 한 사람을 향한 뜨거운 심장이 있어 교수사역을 하면서 개척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더 존경을 받는지도 모른다.
한 책 冊
Facebook에서 올려진 칼럼형식의 글들을 모아 출간한 책이다. 읽으면서 마음이 얼마나 저미었는지 모른다. 학생들에게 농담도, 대화도 잘 건네시지 않는 분이 교수사역을 하면서 개척까지 하시다니. 그 분의 내면은 겉으로 보이는 독일장교가 아니셨다. 이 책(冊)은 그 분의 ‘영혼의 숨결’(영혼의 폐부)을 들여다볼 수 있다.
‘꽃은 시드니까 아름다운 거예요....이 땅에서 피지 못한 인생들이여, 너무 상심하지 마시라. 어차피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이 시든다. 이 땅에서 덧없는 아름다움과 영광의 꽃을 피우려고 안달하다가 영원한 세계에서 영구히 시들어 버릴 수 있다....이렇게 보면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만 가는 우리 인생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영원한 만개를 기대하며 잘 시들어 가자.’(시들어 감의 미학,66-67p).
오늘날의 모든 문화는 감각적이고 미학적이고 유혹적이다. 젊음을 선호하고 탱탱한 피부와 근육질의 몸 문화에 미쳐있다. 그건 사실이다. 나도 자주 미쳐가는 걸 보면.‘몸’문화가 현대를 지배하고 있다. 거기에 우리는 목맨다. 건강과 웰빙과 고령화사회를 대비하기 위한 젊음을 나름대로 준비한다. 돈도 준비한다. 누군가 그런 이야길 한다. 예전에는 나이든 노인에게 ‘당신은 암입니다’라고 하면 충격을 받았다. 당연하다. 그런데, 요즈음은 ‘당신은 암이 아닙니다’라고 하면 더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왜? 더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현대인들에겐 있는 것이다. 더 살아야 한다면 더 일해야 하고, 은퇴 이후에도 현실의 생계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현대인의 무거움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이야기가 잠깐 비껴갔는데, 노인이 되어 간다는 것은 굉장히 무력하고 슬픈 대목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인생의 노선이다. 거기에 너무 큰 무게중심을 두면 생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영원한 만개를 기대하며 잘 시들어 가자!’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싶다.
‘요즘 곱게 늙어 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다. 나이 들어 추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젊은이들의 귀감이 될 만한 어른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이 나라의 비극이다. 주님의 은혜로 잘 익은 노인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죄로 삭고 썩어 악취를 풍기는 꼰대들이 되어 가니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하나님도 그런 늙은이는 어쩔 수 없어 내버려 두신다. 나이 들어 얼굴은 쭈글쭈글해지고 추해져도 우리 속사람은 더 아름답고 청아해져야 할 텐데....젊어서부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지 않으면 별 수 없이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던 늙은이 꼴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잘 익는 은혜,180-181p).
‘100세 시대가 도래한다는데 어떻게 노후를 의미 있게 보낼지 우리 사회가 깊이 고민할 때가 된 것 같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빨리 죽고 싶다고 하는 말은 공인된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오래 살고 싶지 않다. 겨우 환갑이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피곤하다. 솔직히 요지경인 세상에 별로 미련이 없다.
오늘, 우리의 몸뚱이는 이 땅에 있지만 영적으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된 사람들이라는 설교를 해서 그런가. 오늘따라 그곳이 조금은 그립다.‘(체면이 밥 먹여 주냐, 101-102p).
이 책은 <잘 시들어가는 한 목사의 에세이집>이다.
한 국민 民
몇 년 전, 자신을 예언자 운운하던 한 미치광이가 한국에 12월에 전쟁이 난다며 하나님의 계시라고 헛소리를 해 댄 적이 있다. 그러면서
‘전쟁이 날 것이니 한국을 떠나 피신하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그런 때일수록 조국에 남아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고통받으며, 이 나라에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주님께 간절히 구할 것이다. 주님의 교회와 사랑하는 조국을 버리고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만일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면 나는 외국에 있다가도 한국에 들어올 것이다.’(정말 전쟁이 난다면?,112p).
전쟁이 터지면 우리나라 사람들 중 권력과 돈이 있는 이들은 외국행을 택할 것이 분명하다. 과거의 이승만 대통령처럼 그런 망국적 자세를 취할 사람이 이 나라는 많을 것으로 확신한다. 어쩌면 지난 세월 일제가 심어준 ‘식민주의적 사관’의 교육 탓도 있으리라. 나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나도 그 교육을 받은 세대인데, 나 또한 그런 자리에 있으면 그런 짓을 하진 않을까 두렵고 떨린다. 그런데, 저자는 전쟁 터지면 외국에 있다가도 한국에 들어와야 하지 않느냐 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저자는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오래했기에 미국시민권자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교수사역을 위해 한국에 들어오면서 시민권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 시민권을 따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매는가! 아니 시민권이 아니라 영주권이라도 따려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몸부림치는지 모른다.
인생은 제대로 살아야 하고 그리고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 잘 죽어야 한다. 정말 잘 죽어야 후세들이 욕을 먹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시선 觀
“세월호 청문회 중계하지 않는 KBS, MBC, SBS, 느그가 언론이냐?”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을 보았다. 다른 청문회는 앞다투어 취재하면서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세월호 청문회는 방송3사가 약속이라도 한 듯 중계를 하지 않았다.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알아서 기는 것인가. 서슬이 시퍼런 독재 군사정권 아래서도 굽히지 않았던 저널리즘의 정신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인가. 암울한 시대에도 기개가 살아 있는 언론은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정신이 죽은 언론은 시대의 어두움과 절망을 심화시킬 뿐이다.
시대를 바라보는 혜안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눈먼 사람들과, 이런 참극을 부추긴 언론은 혹독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후손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언론의 배신, 186-187p).
이민생활을 15년 정도 하시고 오셨다는데, 역시 객관적이고 분별력 있는 시선을 소유하셨다. ‘나는 정치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정부가 기본적인 역할만 해 주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그런데 작금의 정치 현실은 나같은 사람도 정치에 신경을 끄고 살기 힘들게 만든다.’(국가화합의 길,200p).
‘나는 여당 편도 야당 편도 아니다. 나는 이 세상 정권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정부가 최소한의 기능만 해 주면 나까지 이렇게 떠들 필요가 없다....이 정권에 분개하는 이들 중에 나 같은 이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들이 모조리 종북 좌빨인가? 나는 한국에 나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선택하였다. 나는 미국보다 조국에 대한 애정이 더 깊다. 나 같은 이도 좌파로 몰아가는 나라인데도 말이다.’(좌파 딱지,250p).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애간장을 끓이며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는데도 세월호 인양하는 데 1,073일이나 걸렸다. 시리고 아픈 이 시대를 역사는 어떻게 기억할까? 세월호 참사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며 악하고 비정한 세대 또한 민족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세월호 인양,273p).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사고하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 생각 思
‘청빈을 스스로 공개하는 순간 청빈의 숭고한 가치는 사라진다. 물질을 버림으로써 명예를 얻는 것은 가치 있지만, 물질이라는 저급한 탐욕을 버린 대가로 명성이라는 고급적 탐욕에 사로잡힌 격이 될 수 있다. 영특한 이들이 이런 짓을 잘한다. 아무리 자기 PR시대라고 하지만 주의 종들은 자신의 선함과 잘남에 대해서는 나팔 불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이 주님의 인정과 상을 잃지 않는 비결이다’(목사사례공개, 196,p).
예수님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짓을 잘 했다. 도덕적인 헌신과 내려놓음을 자랑질하는 것...종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이런 욕망을 퍼져 있다. 다 ‘도토리 키재기’이다. 정말 ‘군자’다운, 정말‘예수님처럼’투명한 청빈이 필요하다.
‘가수는 노래가 한번 히트하면 평생 그 노래를 재탕하며 돈을 버는데 목사는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해도 같은 교회에서 다시 써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설교 사역은 굉장히 소모적인 일이 된다......그러나, 하나님 나라 사역의 핵심 가치는 효율성이 아니다. 특별히 작은 교회를 섬기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주의 종은 하나님의 소모품이라는 말이 있다...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통해, 자격 없는 자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말씀을 무한히 탕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증명된다. 하나님은 효율성이 아니라 주님이 맡기신 일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우직하게 충성하는가에 따라 목회의 성공 여부를 가리신다.’(불후의 명곡과 소모되는 설교,106p).
한 선생 師
‘나는 오래 걷는 것을 싫어한다. 특별히 다른 운동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호흡운동만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 내가 오늘은 족히 만 보는 걸은 듯하다. 그것도 강의실에서 말이다. 학생들이 성령론-구원론 기말시험을 치르는 1시간 반 동안 강의실 안에서 계속 걸었다.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강의실에서 다섯 개나 되는 통로 사이를 계속 오가며 제법 다리 운동이 된다.
걷기를 그토록 싫어하는 내가 많이 걸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학생들이 시험 치느라 고생하는데 나 혼자만 물끄러미 앉아 있기보다는, 그들과 함께한다는 의미로 그들 곁을 돌아다닌 것이다. 질문도 받아 주고 여분의 답안지도 갖다 주었다. 가까이서 한 사람씩 지켜보며 그들의 얼굴을 익히고 속으로라도 축복하며 귀한 사역자들이 되기를 기도했다. 모두가 귀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평소 강의 시간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아주 괜찮은 선생인 척 자랑질 한 꼴이 되었는데, 사실 무료한 시간 죽이기를 걷기 운동으로 승화시켰을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자신들 주위를 뺑글뺑글 도는 나를 의아하게 생각했을 학생들의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해서다.‘(만 보 걷기,182-183p).
우리 시대는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선생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이 부여되는 자리이다. 한국사회의 현실은 공무원과 교사가 최고의 취업의 자리로 등극했다. 취업을 위해 목맬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 나랏일을 하는 공무원이나 다음세대의 주자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정말 자질이 충분한 자들이 등용되었음 좋겠다는 바램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사무적인 역할 감당과 자발적인 책임의식과 헌신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참된 선생이 많아졌음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 웃음 喜
‘치과에 가서 잔뜩 폼을 잡고 대기석 쇼파에 앉았다. 그런데 내가 신은 신발의 짝이 다른 것 아닌가. 현관에 놓인 두 켤레 구두를 섞어 신고 나온 것이다. 난생 처음 있는 일이다. 내 신조가 폼생폼사인데 맛이 갔나 보다. 조직신학을 전공해서인지 모든 것이 칼같이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머리털 한 올도 흘러내리면 못 견디는데 오늘 완전 스타일 구겼다. 내 구두를 보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 시대를 앞서가는 패션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을까? 아내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셔텨를 눌러 댄다.’(202-203p).
원래 이런 분이 아니신데, 너무 우스워서 혼이 났다. 칼 같은, 검사타입의 저자가 이런 면을 보여주시다니! 그리고 그걸 글로 많은 이들에게 오픈할 수 있다니. 체면과 권위를 중시한다면 절대 공개할 수 없는 사안인데, 너무 소탈하셔서 마음이 더 훈훈해진다.
한(韓) 교회 會
‘우리 목사들이 그보다 더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교회개혁이다. 새 창조의 은혜로 세상을 새롭게 하라고 보냄받은 목사와 교인들이 제 역할을 못하면, 무능한 정부가 세상을 부패시킨 것 보다 더 심하게 세상을 부패시킨다. 그리스도인이 청산해야 할 적폐의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우리 스스로 개혁과 회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이제는 교회가 바뀔 차례다’(새 대통령에게 바란다, 290p).
그렇다. 사람들은 저마다 개혁대상을 밖으로 칼을 겨누어 시위한다. 하지만, 정작 개혁해야 할 대상은 내 마음이고 내 자신이다. 그건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기독교가 그게 안 되니깐 온갖 비난을 몸소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이야길 한다. 바틀비는 ‘탈진’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탈진’은 피로의 또 다른 면모이고, 현대는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난’시대이고, 그것은 곧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72p)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의 현재가 바로 피로사회가 아닌가 싶다. 산업혁명 이후로 달려온 기계문명의 메카니즘, 그것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한국교회가 지독한 성장지상주의의 아우토반을 달리다가 과부하가 온 것이 아닐까! 부모가 자기 자식을 챙기지 않고 돈벌이에 목을 매고 자기 자녀들 보다 다른 이웃 자식들을 챙긴다면, 자녀들이 발끈하지 않을까! 우리 국가가 그런 자화상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한민국, 우리의 조국도, 우리의 교회도 ‘피로사회’로, ‘피로로 찌들어’수많은 사회적 질병을 양산하고, ‘쓸모없는 것의 쓸모’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라고 한병철을 자신의 장chapter를 마감했는데, ‘아 대한민국이여! 아 한국교회여!’ 라고 절규하고 싶다!
한 소망 望
그래도, 저자를 우리에게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본의 아니게 리뷰가 길어졌지만, 다시 책을 읽으면서 다시 저자의 심장박동소리를 듣는 듯 해 너무 좋았고 감사했다! 한국교회가 바닥을 치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분이 건재하시기에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