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인 1 - 레제르 만화 컬렉션
장 마르크 레제르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레제르의 만화를 보면 항상 묘하게 이중적인 감정을 느낀다. 무덤덤하면서도 충격적이고, 잔혹하면서도 따뜻하고, 깊은 슬픔과 유쾌함이 공존하는 이 흘려 쓴 필기체 같은 만화를 보고 나면 나는 인간이란 참 복잡한 감정을 지닌 동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의 제목 '원시인'은 말 그대로의 원시인은 아닌 듯하다. 그들의 모습은 석기시대의 원시인이되 그들이 하는 짓을 보면 빌딩 숲 속 현대인의 무자비함이 오버랩된다. 레제르가 우리에게 '그렇게 사는 너희들이 원시인이야'라고 말하는 듯.

그런데 이 사람의 매력은 잔혹함, 비열함, 어리석음 등을 묘사하는데 너무도 천연덕스럽고 무심하다는 것이다. 다리가 떨어져나가고, 목을 매달고, 사람이 짓이겨지는 장면이 수시로 묘사되는데도 이 사람의 그림을 따라가다보면 그게 별일 아니라는 듯이,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이(그건 사실이기도 하다) 조금의 감정표현도 없다. 그래서 나도 그런가 보다 하면서 책장을 슬렁슬렁 넘기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딱 덮고 나면 마음 속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나와 내 하루를 점령하는 걸 느끼곤 당황한다.

<채소밭>이란 소제목의 만화가 제일 먼저 나온다. 농부가 열심히 밭을 갈아 곡식을 일궈 놓으면 그때마다 코끼리가 밭을 짓밟고 다 먹어치우고는 사라진다. 농부의 우는 모습을 떠올린 코끼리가 미안한 마음에 밭을 갈아주러 가 보지만 낙심한 농부는 이미 목을 맨 후. 코끼리는 애도하며 양심의 가책에 눈물을 흘리나 그 눈물은 암컷을 유혹하는 데 이용되고 이제는 둘이 같이 밭을 짓밟으러 다닌다.

유쾌하게 낄낄거리다(코끼리의 표정이 너무 즐거워 보였던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슬픈 이야기였던 것이다. 열심히 일해도 남는 것 없는 힘든 사람이 인생을 포기한 얘기. 그리고 또 이것은 우리의 양심을 들쑤시는 얘기이기도 하다. 남의 불행에 눈물 흘려주는 척, 자책하는 척 하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미화시키지 않던가.(그리고 그것이 이성을 꼬시는데 사용되는 것도 사실이다)

<깊은 슬픔>: 절구질하는 여인은 등 뒤에서 빽빽 울어대는 아기,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남편, 의심하는 행인, 지나가는 개까지 절구통에 넣고 찧어버린다. 개와 함께 살던 노인은 슬픔에 겨워 스스로 절구통 속에 들어간다.

레제르는 스스로 절구통 속에 들어가는 노인을 일컬어 '깊은 슬픔'이라 했을지 모르나 나는 절구질하는 여인의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나도 인생이 괴로울 땐 애고 남편이고 주변사람들이고 모두 마음 속에서 절구질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마 레제르도 그래서 깊은 슬픔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레제르가 자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 비열하거나 어리석은 등장인물들을 무조건 미워하지만은 않아서 나는 그가 좋다. 그는 인간의 모순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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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4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0-04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프한 리뷰네요.
추천하고 갑니다.^^

깍두기 2004-10-04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항상 감사^^ 님 덕에 제가 용기있게 리뷰를 쓰는 것 같습니다.

숨은아이 2004-10-1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저도 룰루랄라~!

픽팍 2004-10-22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굉장히 잘 쓰시네요
문장을 읽고 있는데 마치 초밥을 먹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깔끔하고 뒷끝이 없다고 할까?
암튼 대단해요 꼭 읽어 볼께요 ㅋ

깍두기 2004-10-22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픽팍님. 이렇게 노골적인(?) 칭찬을 들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저도 님의 서재에 놀러가 봐야겠습니다

픽팍 2004-10-23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서재 관리 안해요 ㅋㅋㅋ
그냥 둘러보는 것만 좋아해서리
저도 마이 리뷰 이제 서서히 써 보려구용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