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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오후 ㅣ 샘터만화세상 4
마정원 지음 / 샘터사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로드무비님의 리뷰를 통해 약간의 스포일러를 당한 터라 충격이 크진 않았지만, 아이들에게 출근길에 하듯이 태연히 용돈을 쥐어주고 창문으로 투신을 해버린 그 장면은 확실히 가슴이 철렁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고, 정신지체 누나와 남겨진 소년의 삶은 더욱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그것을 그리는 작가의 시선은 지극히 무표정하다. 마치 끔찍한 장면을 소리없이 슬로우 비디오로 촬영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나른한 오후라.....이 역설적이면서도 사실적인 표현 앞에서 나는 백주대낮에 인간이 벌이고 있는 모든 죄들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더 섬뜩했다.
첫 작품이 너무 절망적인 내용이어서 <과꽃>과 <첫눈 내리던 날>은 지극히 슬픈 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슬픔이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어쨌든 서로를 안아주지 않는가. <나른한 오후>에서 자기들 둘 말고는 아무도 그들을 위로해 줄 자 없는 세상에서, 그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참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작가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그 <희망>을 조심스레 행간에 끼워놓고 있다는 느낌, 자기가 그린 것들을 사랑한다는 느낌은 확실했다. 마지막에 부록처럼 수록된 <우리 이웃들>이란 갤러리에서 작가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들을 그 대상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그림체로 그려 내놓아, 우리가 그들을 실물로 보는 것보다 더 그들을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건강하고 재미난 어린아이, 열심히 일하며 때로는 행복해하고 때로는 힘들어하는 노점상, 노숙자(그 중엔 이외수를 똑 닮은 인물도 있었다. 어찌나 우습던지^^) 등이 자신을 진솔하게 드러내 놓고 있는 그림들을 보면서, 작가가 그들 속에 있지 않다면 이런 그림은 나오지 않을 거야.... 어린 사람이 참 훌륭하구나....하고 나이든 철딱서니 없는 아줌마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