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는 한때에 꼬삼비의 싱사빠나무 숲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는 몇 개의 잎사귀를 손에 들고 제자에게 질문하였다. '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것이 더 많은가? 내 손 안에 잎사귀 몇 개와 여기 숲 전체의 잎사귀 중에서.'
'선생님, 세존의 손 안엔 아주 적은 잎새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싱사빠나무 숲 전체에 있는 잎들이 정말로 훨씬 더 많습니다.'
'그와 같다. 비구들이여, 내가 아는 것 중에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것은 아주 적은 것에 지나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매우 많다. 그러면 왜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쓸데가 없기 때문이다. ....열반에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어떤 학자들이 헛되이 시도하는 것처럼, 부처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을 추측하려는 것은 우리에게 무익하다.
순전히 사변적이고 비현실적인 문제만을 만들어 내는 쓸데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을 논하는 것에 부처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것들을 "견해들의 황무지"라고 여겼다. 부처 자신의 제자들 중에도 이런 태도가 못마땅한 자가 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예의 하나로 말룽꺄뿟타를 들 수 있다. 그는 형이상학적 문제인 유명한 고전적 질문들을 부처에게 던지고 대답을 요구하였다.

하루는 말룽꺄뿟따가 오후 일과의 '명상'수행에서 일어나, 부처에게 와서 인사하고는 한쪽 켠에 앉아서 말하였다.
'선생님, 제가 홀로 명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세존께서 제쳐 놓으시고 거부하시어 설명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즉, (1)우주는 영원한가? 아니면 (2)영원치 않은가? (3)우주는 유한한가? 아니면 (4)무한한가? (5)영혼과 몸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6)영혼과 몸은 제각각인가? (7)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하는가? 아니면 (8)죽은 뒤에는 존재치 않는가? 아니면 (9)죽은 뒤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치 않는가? 아니면 (10)존재치 않으면서 (동시에)존재치 않은 것도 않은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세존께서는 제게 설명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세존께 와서 이 문제들에 대해 여쭈어 보려 하였습니다. 세존께서 그것들을 제게 설명해 주신다면 저는 계속 세존 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를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들을 설명해 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이 "동아리"를 떠나가 버리겠습니다. 세존께서 우주가 영원한 것을 아신다면 제게 그렇다고 설명해 주십시오. 만약 세존께서 우주가 영원치 않다는 것을 아신다면 그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만약 세존께서 우주가 영원한가 그렇지 않은가 등등에 대하여 모르신다면 모르는 사람으로서 솔직히, "나는 모른다. 나는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하십시오.'

말룽꺄뿟따에세 해준 부처의 대답은 오늘날 세계에서 그런 형이상학적 의문으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불필요하게 마음의 평화를 뒤흔들어 버리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정말 유익하다 아니할 수 없다.

'말룽꺄뿟따야, 내가 너에게 "이리 오너라. 말룽꺄뿟따야. 내 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르라. 그러면 네게 그 문제들을 설명해 주겠노라"라고 말한 적이 있더냐?'
'없었습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말룽꺄뿟따야, 네가 "선생님, 저는 세존 밑에서 거룩한 삶으로 따르려 합니다. 그러면 세존께서는 그 문제들을 제게 설명해 주시리라 믿습니다"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이순간에도 나는 네게 "이리와서, 내 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르라. 그러면 네게 그 문제들을 설명해 주겠노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 또한 내게 "선생님, 저는 세존 밑에서 거룩한 삶으로 따르려 합니다. 그러면 세존께서는 그 문제들을 제게 설명해 주시리라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어리석은 자여, 이런 마당에 누가 누굴 거부하느냐?'

'말룽꺄뿟따야, 만약에 누가 "나는 그 문제들을 설명해주기 전에는 세존 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래에게서 이 질문들의 답을 듣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말룽꺄뿟따야.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친구와 친척이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아라. "누가 내게 활을 쏘았는지를 알기 전엔 이 화살을 뽑아내지 않겠다. 끄샤뜨리야일까, 아니면 바라문일까, 바이샤일까, 아니면 수드라일까? 이름이 무엇이고 성씨가 무엇일까? 키가 클까, 작을까, 중간일까? 피부 색깔은 까말까, 갈색일까, 아니면 누런색일까? 그 작자는 촌사람일까? 읍내 사람일까? 아니면 도회지 사람일까? 무슨 활로 나를 쐈는지 알기 전에는 이 화살을 뽑아내지 못하겠다. 어떤 종류의 활시위를 썼을까? 어떤 화살일까? 무슨 깃털이 화살에 쓰였나? 살촉을 뭘로 만들었나?" 말룽꺄뿟따야, 그 사람은 이런 것들 중에 어떤 것도 알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말룽꺄뿟따야, 그와 같이 어떤 이가 "나는 세존께서 우주가 영원한가 아니면 연원치 않은가 따위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기 전에는 그분 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여래에게서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부처는 말룽캬뿟따에게 거룩한 삶은 그런 견해들과 무관하다고 설명하였다. 누가 그런 문제에 대해 어떤 주의주장을 갖더라도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 슬픔과 비애, 아픔, 통한, 고통이 있다. "내가 밝힌 것은 바로 이 삶에서 이런 것들이 그치는 것(즉, 열반)이다."
'그러하니 말룽캬뿟따야, 내가 설명해야할 것을 설명하고 설명하지 말아야될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내가 설명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주는 영원한가, 영원치 않은가? 등등(열 가지 견해 : 十無記)을 설명하지 않았다. 말룽꺄뿟따야, 왜 나는 그것을 설명치 않았는가? 그것들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정신적인, 거룩한 삶에 근원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더러움에 대한] 혐오와 [집착을] 여읨, [둑카(苦)의] 그침, 평안, [지혜를] 깊이 꿰뚫음, 완전한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네게 그것들을 말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면 말룽꺄붓따야, 내가 설명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둑카(苦), 둑카의 생겨남, 둑카가 그침, 둑카가 그치도록 인도하는 길을 설명하였다. 말룽꺄뿟따야, 내가 왜 그런 것들을 설명하였는가? 그것에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거룩한 삶에 근원적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땨문이다. 그것들은 [더러움에 대한] 혐오와 칩착을 여읨, 중지, 안정, [지혜를] 깊이 꿰뚫음, 완전한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설명하였다.'

 

1.'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ㅡ 제목에 꽂혀서 이 책을 산 것 같다.

2. 교정을 어떻게 봤는지 오자 및 띄어쓰기 잘못된 것이 내가 저 위의 구절을 치는데만도 몇 군데나 눈에 띄었다. 나도 띄어쓰기에 심히 약하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틀린 것이 보일 정도니. 그러나 내용이 좋아서 다 용서가 된다. 원제가 <What the Buddha taught>인데 불교를 공부하면 처음 배우게 되는 중요한 내용들-사성제, 無我, 수행 등-에 대한 핵심적이고 간략한 설명이 일목요연하게 되어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3. 위의 인용구절을 읽으면서

(1) 부처님은 꽤 유머감각이 있으셨던 분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말룽꺄뿟따 : 스승님, 우주가 무한한지, 유한한지, 영원한지, 영원하지 않은지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스승님 곁을 떠나버리겠습니다.

부처님 : 내가 언제 가르쳐 줄 테니 있으라고 한 적 있느냐? 네가 언제 가르쳐 주면 있겠다고 한 적 있느냐?
그런 마당에 안 가르쳐 주면 가겠다는 건 뭔 헛소린고?

위의 파란색 부분을 짧게 줄이면 이렇게 될 것 같은데, 심각하게 결심하고 질문했던 제자 말룽꺄뿟다는 저 대목에서 허망해서 무릎이 꺾였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2)내가 만일 부처님과 동시대, 같은 곳에 살아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저 말룽꺄뿟따(이름도 어렵네. 타이핑 진짜 힘들다) 같은 제자가 되었을 것 같다. 이 글을 읽으면서도 '부처님은 아셨을까, 모르셨을까?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저 열가지는 저절로 알아지는 것 아닐까?' 요러고 있으니.
'지적 호기심'이란 좋은 것, 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것이 한발만 삐끗 잘못 나가면 '쓸데없는 지적 유희'가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요즘 여기저기서 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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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천자문 2006-12-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룽꺄뿟따라면 한문 경전에 '만동자' 라고 나오는 그 양반이네요. 십팔불공법에 분명히 붓다는 '모든 것을 아는 자' 라고 명시하고 있으니 말룽꺄뿟따가 품은 의문에 대한 답을 고타마 붓다도 당연히 알았을 것이라고 교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거기에 대해서 고타마 붓다가 확실하게 대답을 안 해주고 떠났으니 뭐 증거는 없고 그렇게 추측만 할 뿐이죠. ㅎㅎ

깍두기 2006-12-1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글자가 '만'자 였군요. 뭔 동자라고 써있는데 당최 어려워서 읽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거 궁금해 할 시간에 열심히 수행해도 성불할까말까다, 부처님 말씀 간단히 요약하면 그것인 것 같은데, 그래도 궁금해 하는 중생을 위해 한 말씀만 해 주시지.
아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언어로 할 수 없는 그런 진리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