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의 장례 문학과지성 시인선 194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3월
품절


봄밤 2

봄밤에는 몸 속에 적힌 불륜들이 슬그머니 눈뜬다
이 가등과 저 가등 사이
수천의 빗줄기가 소문의 꼬리를 끊고 진상을
가려놓지만
불빛 가장자리로는 여전히 기웃대는 시선들로 붐벼
속내는 좀처럼 길바닥 아래로 흘러 넘치지 않는다
잔등을 보이고 돌아가는 사람은 밤새도록
더듬어왔던 그 한 번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가등들만 불쌍한 외눈으로 서로의 알몸을 마주 비
추며
제 속의 둥근 욕망을 지척대는 빗줄기로
간신히 식히고 있다-p.47쪽

등꽃

내 등꽃 필 때 비로소 그대 만나
벙그는 꽃봉오리 속에 누워 설핏 풋잠 들었다
지는 꽃비에 놀라 화들짝 깨어나면
어깨에서 가슴께로
선명하게 무늬진 꽃자국 무심코 본다
달디달았던 보랏빛 침잠, 짧았던 사랑
업을 얻고 업을 배고 업을 낳아서
내 한 겹 날개마저 분분한 낙화 져내리면
환하게 아픈 땡볕 여름 알몸으로 건너가느니-p.48쪽

통 화


광섬유의 신경올을 통과하는 말들이라면
햇살의 길인들 왜 못 가랴
나는, 화창한 봄날 뜰 한 모퉁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네게 텔레파시의 신호음 보낸다
세 번만 벨이 울리거든
마음의 기미를 듣고서 내게 응답해다오
햇님의 통화로 땅 깨어나듯
시듦 없는 사랑은 먼 숨결로도
애송지마다의 새싹 촉촉이 적셔놓는다
발 없는 마음에도 말씀의 날개 달아맨다
나무는 나무끼리, 꽃들은 꽃들끼리
어느 것도 서로의 기미에 응답 않는 기적이란 없다
잠시 전 바람결로도 이미
수많은 파장 건너갔으므로
일손 놓고 바라보면 앞산 수풀조차
빗살 무늬로 파랑이지 않느냐-p.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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