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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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보던 책을 처음 보기라도 하면 하루 종일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덕무의 눈을 거치지 않고서야, 어찌 책이 책 구실을 하겠느냐"며 귀한 책을 구해 자신이 보기 앞서 내게 먼저 보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책표지만 바라보아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좀처럼 웃을 일이 없는 생활인지라,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던 집안 식구들도 나중에는 으레 귀한 책을 얻어서 그러려니 생각하였다.
누가 일러 주고 깨우쳐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책을 읽었기에, 막히는 구절이 나오면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얼굴은 먹빛처럼 어두워지고 앓는 사람마냥 끙끙대는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러다 갑자기 뜻을 깨치기라도 하면, 나는 벌떡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크게 고함질렀다.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깨친 내용을 몇 번이고 웅얼거렸다. 눈앞에 누가 있는 양 큰 소리로 일러 주며 웃기도 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집안 식구들도 나중에는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온종일 방에 들어앉아, 혼자 실없이 웃거나 끙끙대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하며 책만 들여다보는 날도 많았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간서치(看書痴)'라고 놀렸다. 어딘가 모자라는, 책만 보는 바보라는 말이다. 나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p.21-22쪽

두둑한 책의 무게가 얇은 홑이불을 눌러 체온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주었다. 따스했다. 두툼하게 솜을 넣은 비단 이불이 부럽지 않았다. 낡고 헤져 초라한 나의 이불은 이제, 중국의 역사로 무늬를 넣은 멋진 이불이 된 셈이다. 이불깃은 더 이상 와삭거리지 않고, 간혹 위로 들린 깃마저 책들이 꼭꼭 여며 주었다. 그 손길이 무척 따스하고 편안해, 그날 밤 나는 모처럼 깊이 잠을 잘 수 있었다.-p.28-29쪽

보다 못한 벗들이 가진 것을 조금씩 내어 서재를 지어 주자는 의논을 한 듯싶다. 얼마 전, 백탑 아래 사는 또 다른 벗 서상수(徐常修)의 집에서 꽤 많은 책들이 서적성으로 실려 나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보니 그가 아끼던 책들이 마당에 부려 놓은 나무가 되어 내 집으로 찾아온 모양이다. 다른 벗들도 모두 넉넉한 형편이 아니니, 저 속에는 그들의 책도 제법 들어 있을 것이다.-p.48쪽

내가 윤회매 만들기를 좋아한 까닭은, 살아 있는 꽃 못지않은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모으고 매달릴 수 있는 그 일이 좋아서였다. 나는 윤회매를 만드는 손끝에 나 자신을 모두 실었다. 가난한 살림도 잊고, 어찌 될지 모르는 내 앞날도 잊고, 꽃잎을 만들고 있는 내 존재마저 잊었다. 오직 내 손에서 피어날 맑고 투명한 꽃잎만을 생각했다. 윤회의 순간, 그것도 이글대는 불길이 주는 모진 고통을 견뎌 낸 뒤에 다시 꽃으로 피어나는 그 순간을 보는 것이 나는 좋았다.-p.57-58쪽

우리는 정말 윤희의 중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서자의 신분이라는 우리의 운명, 세운 뜻을 펴 보지도 못한 채 가슴에 품고만 살아가야 하는 이 삶도 윤회의 한 부분일까. 우리에게도 저 꽃처럼 다시 돌아갈 제자리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견뎌 내리라. 저렇게 다시 피어날 수 있다면, 벌통에서 밀랍으로 묵묵히 견뎌야 하는 고통, 말간 액체가 될 때까지 활활 타는 불길에 온몸을 녹여야 하는 고통고 기꺼이 견뎌 내리라. 우리들의 삶도 저렇게 다시 피어날 수 있다면.-p.58-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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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6-24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이 참 끌리는군요..^^
책만 보면 정말 헛똑똑이 바보가 된다지요..^^

비자림 2006-06-24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메피스토님 오셨네요. 반가워요.^^ 밥은 잘 드셨는지요? 호호
저 정말 간서치 되고 싶어요, 이덕무의 글을 읽으며 그가 마치 내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아 좋았어요. 그래서 이 글을 우리에게 보여준 작가 이름도 다시 보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