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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소설을 끼고 살았던 20대가 정녕 내게도 있었던가 싶게 나는 요 몇 달 간 소설을 읽지 않았었다. 주부와 엄마의 자리를 해 내는 일상의 고단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소설'이라는 것이 더 이상 내게 별다른 감흥을 자아내지 않을 정도로 내 의식의 외피가 두꺼워지고 늙어가고 있는 탓이리라.
'심윤경'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마음 속에 담아 두게 된 소설, 나는 심윤경을 한 번 만나 보리라 마음먹고 소설 속으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갔다.
사십대의 남자 이현이 여섯 살에 겪었던 첫 사랑의 기억은 놀랍게도 어떤 결혼식의 신부였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그의 볼에 살짝 입맞추었는데, 정확히 그 순간 그의 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하나의 감각이 우지끈 부러져 사라지고 말았다. 그 감각은 다시 되살아나지 못했고 그는 이후 일평생 일종의 정신적인 장애 상태로 살게 되지만, 그 순간 그 일이 치명적인 사고였음을 냉정하게 인식하기엔 너무 감미로웠다.
운명적 사랑, 신비로운 사랑, 치명적 사랑과 맞닥뜨린 상황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여섯 살에 겪은 그 묘한 감정, 절대적인 사랑의 느낌을 이현은 지하매점 앞에서 다시 느낀다. ‘살구 향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여인’은 바로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비현실적인 감각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이현에게 그녀는 “그분은 제 어머니이십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녀를 낳기 하루 전에 돌아간 이현의 첫사랑, 이제 이현은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으로 첫사랑의 딸인 이진과 결혼을 하게 된다. 지하매점에서 사소한 계산도 할 줄 모르는 비현실적인 여자 이진은 어머니가 없고 아버지 이세 공과도 정이 없는 외롭고 폐쇄적인 여자이다. 그녀가 정성을 들이는 일은 단지 타인의 영혼을 기록하는 일 뿐이다. 무당이나 신 내린 여자처럼 미래를 예측하거나 죽은 자와 소통하는 게 아니라 산 자들의 영혼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영혼을 기록하고 그 기록은 ‘이진의기록’이란 타이틀을 달고 네 가지 독립적인 이야기를 담아 놓았다.
전혀 다른 줄거리를 갖춘 네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모두 삶의 장애물에 치여 허덕이는 가련한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과 그들의 고뇌,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는 점이다.
당연히 이 소설은 여러 서술자가 등장하게 된다. 이진이 기록한 이야기들의 주인공들과 이현, 이진, 그리고 독특하게도 자신의 영혼을 이진에게 보여 주며 존재의 밑바닥까지 보여 주었던 부총리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첫 만남에서 프로포즈를 하고, 3년 간의 계약결혼을 한 이현과 이진의 결혼은 모래성 같았지만 그럭저럭 잘 유지되었다.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인 이진의 면모라든지 세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이현의 내력이라든지 하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게 둘의 공존은 균형을 이루었지만, 예기치 않은 곳에서 복병이 숨겨져 있었다. 이현의 입장에서는 아주 사소한 감정적 배신에 불과하다고 한 그 일은 과연 무엇일까?
극적인 반전이었고 소설다운 반전이었다. 이진이라는 인물의 신비성과 비현실성이 그러했고 이 소설 전체가 그러했지만 비현실적인 결말을 두 번이나 읽으며 나는 내 앞에 놓인 현실과 내가 이루어가는 현실, 인간 관계의 고리, 내 존재의 본질 중 가장 연약한 부분 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뒤틀린 자아, 소외된 자아들이 많이 등장하는 현대 소설을 읽다 보면 가끔 삶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슬픔을 환기하게 되어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소설을 더 멀리 하게 된 것 같다.
‘이현의 연애’도 제목이 주는 낭만성과 달리 내게 사랑에 대해, 존재의 의미에 대해 조금은 슬픈 여운을 남겨 주었다.
하지만 소설의 재미는 책을 다 덮었을 때의 감흥보다 페이지를 넘길 때, 어떤 구절에 직면했을 때 내 의식의 동공들이 열리고, 내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파장들이 생겨나는 것 같은 강렬한 자극을 받았을 때 생기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잊었던 친구를 만난 듯 '소설'이 나의 일상으로 다시 걸어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