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로맹 가리 지음, 이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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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싶었다. 잘못은 우리 별에 없어를 힘겹게 읽다가 포기한 친구에게, 자기 앞의 생이 재밌다고 빌려줘버리다니, 크나큰 실수고 자만이었다. 쿠어. 그는 그 책을 읽으며 얼마나 한탄하고 있을까.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되나 좌절할지도… 는 내 자만. 부디 재밌게 읽길 바란다. 나처럼 울컥하지는 않더라도.
원래는 니콜라스 카의 유리감옥을 읽을 예정이었는데 프랑스소설의 감수성에 푹 빠진 바람에 로맹 가리의 책을 한권 더 꺼냈다. 자기 앞의 생도 그렇지만, 순전히 로맹 가리라는 작가 이름과, 엄청나게 뭔가 있어뵈는 제목 때문에 구입한 책이다. 스토리도 없고 인물도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계속 읽힌다. 재미는 없는데 재밌어? 흐음? 여튼, 이제 절반 왔다. 아마 이놈 덮고나면 한동안 소설만 읽을 것 같은데… 안돼, 기껏 사온 유리감옥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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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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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시간은 흐르지만 모모는 자기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한다. 모모는 주변을 보며 앞으로의 생을 상상한다. 생이 나를 지나치고나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로자 아줌마처럼 반쯤 미쳐있을까? 카츠 선생님처럼 자신의 고통을 견디면서도 남을 돌봐주는 어른이 될까? 평온하게 자신만의 세상에 갇힌 하밀 할아버지의 모습은 어떨까? 거울 앞에 서서 아무리 얼굴을 찡그리고 허리를 수그려 봐도 도무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난다는 건 다소 현명해진다는 얘기와 같다. 오랜 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때 자신의 앞에 펼쳐진 시간이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생이 짓밟고 간 자리는 어떠했는가. 삶의 기쁨과 환희가 아직도 남아 있는가? 모모가 가장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는 처녀 적부터 다 늙어 대머리가 될 때까지 과거의 기억에 붙들려 괴롭게 산다.
모모는 더빙 NG 때문에 앞으로 되돌리는 영화를 보고는, 로자 아줌마의 아름다웠던 때를 떠올린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로자 아줌마가 비극을 맞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다먼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하지만 그건 그저 영화에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은 과거로 돌아가 젊어지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과거로 돌아가기에는 지금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래, 시간이 흐른다는 건 완전 검지도 희지도 않은 일이다. 흰색은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다. `앞`이란 단어는 `앞에 펼쳐진`이란 미래와 `앞에 있었던`이란 과거의, 이중적인 의미를 품는다. 하지만 그 의미가 어떠하든, 무엇보다도, 또 언제든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어린 모모는 알고 말았다. 슬픔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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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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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 074. 부활. 톨스토이.


이미 읽은 지 한참 지난 책... 세네 줄로 짧게 써본다.


분명히 읽었던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내 기억의 <부활>은 죄지은 남자가 죄 때문에 한참 고뇌하다가 결국 유죄를 받아들이고 유형을 가는 이야기다. 거기에 쏘냐라는 여자가 옆에 붙어 함께... 읽다보니 기억났다. 이 스토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물론 죄와 벌도 온전히 읽은 게 아니라, 맨 앞과 맨 뒤 각각 수십쪽씩밖에 읽지 않았다)


러시아 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그렇게 들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들(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을 무진 재미없게 읽다가 때려쳤던 나로서는 러시아 소설은 항상 무섭다. 빅토르 위고처럼 곁가지로 빠지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집중하기 힘들다. 거기엔 러시아식 이름도 한몫하는데, 이놈의 이름은 다 거기서 거기처럼 보이는데다가 지들 맘대로 애칭으로 부르느라 더더욱 헷갈린다.


부활도 그러긴 마찬가지다. 주인공격인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의 이름이 너무 많다. 거기다 그들이 만나는 인물들도 엄청나다. 감옥과 죄수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상류사회의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제각각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줄줄이사탕으로 인물 소개가 계속된다. 덕분에 중간중간 등장하는 감옥에 투옥된 이들의 사연을 깜빡해버렸다. (다른 책을 동시에 읽느라 집중하지 못했다는 것은 변명 아닌 변명)


소설은 제목처럼 부활을 다룬다. 흔히들 생각하는 하나님의 부활은 아니다. 네흘류도프는 땅은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며 적은 소작료만을 받고 농민들에게 넓은 땅을 나눠준다. 억울하게 투옥된 이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경청하고 이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냈던 네흘류도프는 당시 부조리한 사회관습을 깨는 혁명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젊은 시절, 네흘류도프와 순수한 사랑을 나눴지만 타락한 네흘류도프에 의해 자신도 타락하게된 마슬로바. 억울하게 유죄를 선고받고 유형지로 향하는 마슬로바는 유형수들과 지내며 차차 예전의 순수함을 찾아간다. 감옥에 갇힌 이들이 모두 악한이 아니다. 정치가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택도 없는 이유로 가둔 정치범과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도 있었다. 이들과 가까워진 마슬로바는 타락한 과거를 차차 잊는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는 각각 위와 아래로부터의 사회 개혁(또는 인식 바꾸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부활>의 백미는, 과거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네흘류도프의 청혼을 거절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위'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뚝심으로 서려는 '아래'의 결연한 모습이 빛난다.


책은 읽기 자체가 매우 재밌다. 여러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다. 다만 톨스토이가 만년에 쓴 책이어서인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너무나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톨스토이의 생각을 담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의 형태를 빌린 긴 논설문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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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산책자 - 8인의 철학자, 철학이 사라진 시대를 성찰하다
애스트라 테일러 엮음, 한상석 옮김 / 이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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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


  이번에 내게 소개된 세 권의 책은 문학, 철학, 자연과학이었다.(책을 일일히 적지 않겠다) 평소라면 응당 문학책을 골랐을터이나 올해 독서기록을 보니 철학책이 하나도 없다. 작년에는 그나마 개론서라도 읽었는데 말이다. <히틀러의 철학자들>을 읽고서 다시 철학에 관심을 가진 김에 철학 관련 서적인 <불온한 산책자>를 골랐다.


  책은 다큐멘터리 ‘성찰하는 삶’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8명의 현대철학자들을 연구실에서 끄집어냈다. 거리와 공원, 차 안, 심지어 쓰레기장에서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뭔가 고차원적이고 어려워보이는 철학을 현실과 접목시키려는 의도이다.


  소개된 철학자들을 살펴보자. 코넬 웨스트, 아비탈 로넬, 피터 싱어, 마이클 하트, 마사 누스바움, 콰메 앤서니 애피아, 슬라오볘 지젝, 주디스 버틀러. 오 마이 갓. 이름을 아는 건 단 두 명인데다가 둘 다 책을 자세히 읽어보기는 커녕 어떤 사상을 내세우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1장인 ‘진리’를 펴고서 후회했다. 아, 이 책, 잘못 골랐구나.


  확실히 어려운 편이다. 보통의 철학 개론서나 철학사책은 철학적 사고를 차근차근 보여준다. 기본과 시초가 되는 사유와 철학자를 소개하고 단계적으로 쌓거나 반론을 제기하면서 전개된다. 하지만 <불온한 산책자>는 가벼운 마음과 ‘뇌’로 읽어서는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다.


  책은 철학자들이 쉽게 설명하기보다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다. 첫 독서에서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이고 니체, 로크, 데리다(겨우 1년 전에 처음 들어본 데리다라니!)까지 기저에 알아야 한다. 진입장벽이 너무나도 높아서 진땀 흘렸다. 게다가 1장(코넬 웨스트, 진리)과 2장(아비탈 로넬, 의미)이 다른 장보다 상대적으로 어려운 편이다.


  앞의 두 장은 ‘철학은 거리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책의 카피를 (적어도 내게는) 잘 반영하지 못하지만 다행히도 3장(피터 싱어, 윤리)부터는 읽는 재미가 생긴다. 3장은 아주 재밌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전략) 당신이 얕은 연못 옆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연못을 다 지나갈 때쯤, 어린 아이 한 명이 연못에 빠져 죽을 위험해 처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중략) 당신이 연못에 들어가 꺼내 주지 않으면 아이는 물에 빠져 죽을 수 있는 상황이지요. 물에 들어간다고 당신이 위험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연못이 얕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 그러나 당신은 좋은 구두를 신고 있죠. 아무리 연못이 얕아도 연못에 들어가면 구두는 십중팔구 망가질 겁니다.

어떤 선택을 할 거냐고 물어보면 누구나 당연히 구두 따위는 잊고 아이를 구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죠. “좋습니다. 나도 당신 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당신이 지금 신고 있는 구두 값 정도만 <옥스팜>이나?<유니세프> 같은 곳에 기부한다면, 가난한 나라의 아이를 한 명 이상 구할 수 있을 겁니다.” (121쪽)


  어찌 보면 궤변이라 할 수 있겠지만, 원래 무언가 의미를 담은 말들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어쨌든, 이 부분을 읽고 나는 적금 10만원을 줄이고 그 돈을 유니세프에 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바꾸는 자기계발서적이나 경영서보다 이런 책이 떄론 도움이 될 때도 있단 말이지.


  이외에도 몇 구문을 집어두었지만 모두 파편적인 의미만을 가지기 때문에 메모만 해두었다. 파편적이라는 것 어려움과 동시에 책의 단점이기도 하다. 한 권으로도 모자를 사유의 향연을 짧은 부분에 담으려니 전체적으로 욕심이 과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이들은 독자(또는 시청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뭐,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만.


  겨우 마지막 장을 덮은 나와 달리 책을 같이 읽으신 분은 재독을 하셨다.(난도가 있는 1, 2장은 빼고!) 이분도 처음엔 나와 같은 느낌을 받으셨단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책을 덮고 싶고. 재독하니 그나마 인터뷰어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정말 어렴풋이 알겠다고 하셨다.


  그렇다. 이 책은 난이도도 높은 주제에 두세 번은 읽어야 큰 의미로 다가오는 책이었다. 깊게 읽기보다는 넓게 읽기 습관을 가진 나로서는(사실 그리 넓지도 않다) 힘들 수밖에 없던 책이었다. 철학이 사라진 시대를 성찰한다는 멋진 카피가 마음에 콱 와닿는, 철학을 좀 공부하셨던 분에게는 추천드릴 만한 책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22쪽)


지적 쾌락은 늘 특정한 사회질서, 즉 지배구조를 통해 형성된 사회질서를 전제로 하고 그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34쪽)


일종의 이차적인 보완 장치인 글은 모든 것을 적어 놓기 때문에 모든 기억을 지워 없앱니다. 글은 망각을 조장합니다. (68쪽)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이론가의 의무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를 상대로 한 사적인 작은 전쟁터에 서는 겁니다. 사람들은 공포탄만 쏘아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의 의무는 큰 목소리를 내는 것, 당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 추문을 의식하고 실망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확신하더라도 성실하게 그런 일을 해 나가는 겁니다. (80, 81쪽)


토머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한에서 재산을 향유할 자연권이 있다. 그러나 필요를 모두 만족시켰다면,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다면, 반면에 다른 살마은 자기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떄 재산에 대한 우리의 권리는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그 사람의 권리를 능가하지 못한다. (130쪽)


적절한 말투로 말하면 어떤 헛소리라도 심오한 생각처럼 들ㄹ비니다. 내가 지혜라는 것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이유죠.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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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프리모 레비


  리뷰글은 아니고, 책을 읽고 생각나는 것과 생각해야 할 것들을 몇 자 적는다.


  책의 중반부는 거의 졸면서 봐서인지 기억에 남은 건 크게 없다. 아우슈비츠에서 가해자의 행동과 피해자의 아픔은 이미 다른 책들에서 많이 봐왔기에 가슴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적은 편이다. 또한 수용소 안의 사람들끼리 서로 밀쳐내고 편을 가르는 것 또한 심리학이나 사회학 서적에서 많이 다뤄온 문제이기에 그다지 새로울 건 없다. (1986년에 쓰인 책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슬슬 역사나 정치, 사회학에 관심을 갖다보니 가장 눈에 띄는 건 1장, 상처의 기억이다. 뭐, 이것도 그다지 새로운 내용은 없다. 기억을 피하기 위해 가해자는 ‘나는 위에서 시킨대로 했을 뿐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심지어는 ‘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라고 뻥을 친다. 반대로 피해자는 아픈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어 기억을 지우고 무의식 아래로 묻어버린다. 외려 피해자들은 (학살 사실을 알았으면서) 왜 미리 피하지 않았냐고 의뭉스러운 질문을 받기도 한다.


  이것은 기억이 변하면서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줄기차게 인용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살면서 타인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머릿속 메모리는 휘발성이 강하고 보존력이 약하기에 불완전한 것들이 모이면 더욱 탁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어떤 의도’마저 섞인다면 ‘사실’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져 본모습을 잃어버린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캐논은 줄기차게 광고했다. 문자화되고 형상화된 기록은 불안정하고 말랑말랑한 기억을 끝내 이기고 그 위에 선다. 영화 ‘메멘토’는 맥락이 없는 기록이 어떤 비참한 결과를 빚는지 처절하게 그린다. 항상 메모장을 들고다니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는 행동은, 언젠가 잊혀질 기억을 끝없이 기록함으로써 조금 더 완벽에 가깝게 가려는 시도이다.


  기록이나 기억은 완전성의 차이가 있을 뿐 무언가를 보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 공통점에 ‘의도적인 압력’을 가하는 순간 보존의 의미는 퇴색된다. 단순히 ‘있음’을 의미하지 않고 자신(또는 집단)의 의도를 견지하게 되며 곧 이기적인 싸움으로 변한다. 불완전한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기 마련이고 종래에는 결국 기록이 곧 기억이고 진실이 되고만다. 역사는 결국 역사가들이 쓴 승리자의 기록일 뿐이라는 씁쓸한 사실만이 한번 더 떠오른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고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편 날, 페이스북에서 한 링크를 보았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은 없었고(유대인종 차별은 있었되 몇천만을 이유 없이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각 라거에서의 일은 그저 노동력 확보를 위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과거에 그들의 과오를 반성하고 사과했지만 근래 들어 고갤 치켜드는 네오나치의 주장이다.


  가까이 보면 일본의 망언도 마찬가지다. 군국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배상을 했다는 이유로 외려 군대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일본뿐 아니라 자칭 ‘세계 평화의 수호자’라는 미국도 눈앞의 이익에만 돌아서 기억을 망각하기는 매한가지다. 위안부 할머님들도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기억을 해줄 이들이 점점 줄어드어 아우슈비츠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잊혀져가고 남들에 의해 왜곡되고 만다. 그분들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상스러운 소리를 하는 이들이 많다.


  아우슈비츠는 없었어. 위안부는 사실 돈 때문에 우리를 따라다닌 거지. 친일은 무슨, 너희가 종북이야. 광주사태(부득이하게 이렇게 쓴다)는 북괴의 소행이라니까. 이 헛소리를 듣고도 반박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을 논리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종전에 읽었던 <바른 마음>에서 언급했듯이 사람은 감성이 먼저고 이성이 나중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정해지고 그럴 듯한 이유를 붙인다. 논리로는 웬만해서 이 틀을 깨기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둘째는, 다소 시답잖다. 논리로 그들의 생각을 깰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런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무지, 이것이 가장 큰 이유다. 아는 것 없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팩트’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일이고, 팩트를 기반으로 한 논리가 없다는 것을 단번에 증명해준다. 이러면 할 말이 없어진다.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이 지식과 논리가 없다면 어린애의 땡깡이나 마찬가지다. (다소 비약인가?)


  당연한 걸 가지고 왜 따지려드냐. 일일히 대응한다는 건 오히려 불씨를 지피는 일이니까 아예 무시해라. 이런 생각을 가지다가 독도는 다케시마가, 동해는 일본해가 되어가고 있다. 그들에게 이기고 싶다면 감정적인 대처보다 우선 무엇이든 알고 대응해야 한다. 이건 대승적인 차원에서도 필요하지만 개개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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