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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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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


  대학교 1학년 때였던가. 글쓰기 교양 수업에서 영화 오만과 편견을 보는 과제가 있던 걸로 기억한다. 영국을 배경으로 해서인지 바람이 많아 특유의 착 가라앉은 분위기와 '다아시'라는 조금 이상한 이름, 엘리자베스 역의 키이라 나이틀리의 미모만 떠오른다. 영화를 본 직후 책을 빌렸는데 재밌게 읽었음에도 리디아와 위컴의 야반도주밖에 머리에 남지 않았다.


  저번달에 고전 읽기 방법을 바꾼 후로 첫 책이다. 위키 문서 기준으로 <1984>와 함께 가장 많이 번역되었다.(주요 10개 출판사 중 9개) 우연히도 고전 함께 읽기 모임에서 이 책을 골랐다. 크레마샤인이 맛이 가는 바람에 아이패드로만 봐야 하나 걱정하다가 그냥 종이책을 샀다. 많은 사람들이 고르는 민음사판 말고 가장 아끼는 열린책들판.


  <오만과 편견>이 시대에 남긴 가장 큰 족적을 보면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의 시작을 알렸다는 점이란다. 하지만 그런 걸 알 게 뭐냐, 나는 19세기는 커녕 지금의 사실주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거창한 문학사적 의미를 떠나 수많은 플롯이 존재하는 지금에도 매우 재밌는 로맨스 소설이다. 영화, 드라마, 연극, 그리고 원작을 바탕으로 각색된 작품까지,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점에서 원작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소설은 현실의 거울이라고 하듯 <오만과 편견>도 당시의 시대상을 잘 표현한다. '재산이 많은 미혼 남성이라면 반드시 아내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널리 인정되는 진리이다'라는 첫문장은 결혼을 통하여 신분 계층의 이동을 간절히 원하던 당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딸들의 결혼에 목매면서 시종일관 교양 없음을 보여주는 베넷부인부터 놀기를 좋아해 파티 다니기를 밥먹듯이 하는 리디아와 키티, 애정보다 미래를 택한 샬럿까지 많은 인물을 통해 소설이 표현한 시대의 여성의 면을 은근히 비춘다. 그외에 콜린스나 빙리 양, 캐서린 부인 등 다른 인물도 행동과 말투로 시대의 표면을 자연스럽게 풍자해내는 점도 눈에 띈다.


  그런데 6년만에 다시 읽은 책에서 의문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다시와 위컴에 대해 오해하는 바를 풀어쓴 장문의 편지를 읽은 엘리자베스는 이후 자신이 가졌던 편견을 부끄러워하고 다아시의 청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자, 여기서 심히 의심되는 게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게 마음을 조금씩 여는 이유가 사람을 잘못 판단했고 그때부터 진짜 다아시의 품성이 보여서일까, 자신의 오판을 보정하기 위한 심리적 기제일까, 다아시의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오면서일까. 급변하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도 나이가 먹으니 캐릭터가 다르게 보이나보다. 아아, 엘리자베스도 커서 보니 은근히 속물기질이 있었다. 실망이야. (심리적 기제 때문에 감정이 증폭된 것으로 본다)


  책은 네 커플이 결혼해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허나 콜린스-샬롯 부부는 애정보다 미래를 택한 결혼이고 위컴-리디아 부부는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남편의 애정이 진작에 사라진 결혼이다. 신분상승을 원하는 이들, 그저 가정이라는 존재를 원했던 이들은 돌고 돌아 다시 베넷 부부와 같은 가족을 만들 것이다. 베넷 씨는 부인을 그리 사랑하지 않고 속으로 비난할 정도고 다섯의 딸 중에 제인과 엘리자베스를 가장 아낀다.(사실 둘만 아끼는 것 같다. 은근히 무서운 아저씨다) 아무리 사실주의 문학고 소설의 묘사가 그 시절을 그린다지만 과연 애정 없는 결혼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라는 걱정이 된다.


  200년 전 소설이 지금까지 재밌게 읽힌다는 건 소설에서 그린 인물과 사건이 그때뿐 아니라 지금에도 충분히 공감가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보이지 않은가. 사랑보다 돈을, 지위를, 가문을 선택한, 사랑을 빙자한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하지만 혼탁한 세상에서 진짜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건 오만과 편견을 내려놓은 적당한 자존심이라 생각한다. 아, 물론 예나 지금이나 사랑의 완성은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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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물 교양의 탄생 - 명작이라는 식민의 유령
박숙자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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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대학교 3학년 시절, 막 전역해 까까머리였던 나는 문득 고전읽기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어떤 순으로 책을 읽어야 할까. 재밌는 거? 사람들이 많이 읽은 거? 나는 무식하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처음부터 읽기로 했다. 1권, 변신이야기부터 말이다. 두 권의 책을 빌린 후 결국 한 쪽도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 이유는 귀찮음. 아마 그때부터 읽었다면 지금쯤 200권 가량은 읽었을텐데 많이 아쉽다.

그리고 최근 고전 읽기 방법을 바꿨다. 그냥 재밌는 것, 대중적인 것부터 읽기로 했다. 많이 번역된 순으로 읽는 거다. 많이 번역됐다는 건 그만큼 인지도가 있고 많은 이들이 읽었다는 뜻이고, 독서를 함에 있어 적어도 남들만큼은 읽었다는 뜻도 된다. 남들이 읽은 것을 나는 읽지 못했다는 건 내 자부심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독서는 결국 교양의 증거가 되고 만다.

명작이라는 조건은 무엇일까. 저자는 명작의 기호가 fine인지 famous인지 묻는다. 일찍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식민지시대에 들어서야 외서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한다. 독서가라면 좋은 책을 읽고 싶어하기에 다들 서양 명작을 찾아 읽었다. 그들은 책을 어디서 접했을까. 원서보다는 일본에서 번역한 책이 많이 유통되었다고 한다. 대중은 그당시의 세계문학전집을 보통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으로 기억한다. 재밌는 건 전집 목록이 선정된 이유다. 식민지 시대의 명작은 고전의 의미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유명한 작품을 넓게 아우르는 이름이었다.

명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문학작품이 퍼지면서, 명작은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독자의 지적 수준을 반영하는 교양의 기호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곧 과시욕과 연결된다. 현재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 책은 문고본이나 페이퍼백 책이 매우 적다. 이는 실용보다 보관과 눈요기용 독서에 치중한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옛날도 마찬가지였다. 울긋불긋한 종이에 인쇄된 춘향전, 토끼전보다는 황금색 술로 장식된 두꺼운 양장본인 문학전집을 선호했다. 디킨스 전집이 무려 28만원에 팔리는 황당한 사건(1920년대에 28만원이라니!)은, 책이란 저자의 목적을 독자에게 널리 알리는 데 존재하는 것이어서 가격이 싸야 정상이라는 상식에 반하는 일이었다. 이제 책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감싸는 외형 또한 중요하게 됐다. 물론 식민지시대나 지금이나 책꽂이에 꽉꽉 들어선 두꺼운 세계문학전집은 자신을 과시하는 도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속물교양의 민낯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사고 많이 읽은들 뭐하겠는가. 읽는 행위 자체는 무한정 올바른 일이지만 그것으로 젠 체하고 타인을 무시하며 혼자만의 아집에 쌓인다면 그런 교양은 무용하다. 교양은 과시하거나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키워내고 품어내는 것이다. 이제 마음을 비울 때이다.

아, 물론 나는 아직 속물교양이 가득한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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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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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나온 별 것 아닌 것 같은 순간도, 결국 쌓이다보면 시간이 되고,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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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프레임 -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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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


  중세의 마녀사냥을 다루었다.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그때의 논리 프레임인 '마녀 프레임'은 현재 어떻게 변주되어 살아 있는가. 발췌만 해도 좋은 글들이니 이번엔 발췌만 나열한다.



  체제에 위기 국면이 오면 언제나 이념으로 똘똘 뭉친 결사체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반대로 말하면 근본주의 창궐은 특정 체제에 위기가 닥쳤음을 반영하는 증상이라고 볼 수 있다.    _21쪽


  이렇듯 마녀사냥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유 거리를 던져준다. 권력과 권위 그리고 이념을 통해 통제되었던 질서 정연한 세계가 무너지고 아노미 상태를 맞이하는 상황은 1987년 이후 민주화 체제를 맞이한 한국 상황을 연상시킨다. 일부 냉전 세력 인사들이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냉전 시절이 좋았다"라고 발언하는 것은 인식적 혼란과 도덕적 아노미 상태를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질서 정연한 세계를 다시 복원하기 위해 이들이 택한 방법은 '색깔 논쟁'이었다. 현대판 마녀사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빨갱이 떄문에 세상이 혼란스러워졌다고 말하지만 과연 사실일까? 과도한 단순화에 불과한  발상이다. 제6공화국 시절부터 한국 경제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로 편입하기 시작했다. 세계 무역 협정에 가입하고 농수산물 개방을 실시했던 과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냉전 체제를 붕괴하게 만들고 도덕적 해이를 초래한 장본인으느 빨갱이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였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냉전 수구 세력 반대편에 있는 통칭 진보 세력에게도 마찬가지 효과로 작용했다. 과거처럼 정권 투쟁만을 내세우면서 자기 정체성을 보전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 것이다.    _65쪽


  새로운 의학 지식은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론과 의료 행위 사이에 있는 괴리를 인지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실들과 빈번하게 조우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 지식 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진단을 위한 준거점을 찾을 수 없는 상태에서 발견되는 낯선 사례들에 대해 이 시기 의사들은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즉 과학적 세계관은 특정한 것을 명확하게 했던 만큼 그 명확성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미지의 것'으로 남겨놓아야 했다. 여기에 의사들은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고 따라서 지적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여러 가지 방책들을 고안하였다. 이는 지식과 정치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_90쪽


  합리성은 종종 비합리성을 옹호하기 위해 동원되고는 한다.    _92쪽


  극단적으로 주장하면 마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할 수가 없었다는 쪽이 옳을 것이다. 오늘날 초등학생조차도 마녀가 실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마녀는 판타지나 옛 이야기에서 의미를 가진 상상 속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16세기와 17세기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마녀는 실제로 존재했다. 또한 존재해야 했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마녀를 존재하게 한 것은 마녀 프레임이었다. 프레임을 작동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는 숭고한 대상을 필요로 한다. 이 대상은 욕망이 실현될 수 없다는 한계를 은폐하기 위한 절대적 대상이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경험과 증명을 초월해 있다는 뜻이다. 마녀는 불가능한 초기 근대 과학을 정당화하는 숭고 대상으로 작동했다. 자신이 세계를 온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녀가 발명되었다.    _112쪽


  "마녀는 실재로 존재한다기보다 얼빠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    _122쪽


르네 지라르가 지적한 것처럼 문화는 폭력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순화제일지도 모른다.    _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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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사냥꾼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장수미 옮김 / 단숨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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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043. 눈알사냥꾼, 제바스티안 피체크


  피체크의 전작 <눈알수집가>는 진즉에 알았던 책이다. 제목도 제목이지만(눈도 아닌 눈알이라니. 게다가 수집이라니) 표지 정중앙에 떡하니 박힌 퍼런 눈은 자연스레 이 책을 피하게 만들었다. 장르도, 사이코스릴러란다. 스릴러도 즐길 종류가 많은데 하필 '사이코'라니, 거참 정이 안 갔다. 넬레 노이하우스마저 극찬했다는 화려한 광고문구는 뻔한 마케팅 같아서 싫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후속작 <눈알사냥꾼>을 만났으니, 오호 통재라. 썩 좋지 않은 이미지의 책을 읽어야 하다니, 손에 든 건 반드시 읽어야 성이 차는 '쓸데없는 의무감'은 모든 독서가에게 축복이자 벌일 것이다. 나름의 기한인 4월 마지막 주까지 읽으려 했으나 워낙 벌려놓은 일이 많아 손도 못 대다가 조금 짬이 나서 책을 펼 수 있었다.


  사실 독일 스릴러는 국내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건 넬레 노이하우스가 쓴 '타우누스 시리즈'다. 유럽이 항상 서늘하고 습기가 많아서일까. 미국의 크라임스릴러는 둔중하고 단호한 면이 있다면 유럽 스릴러는 끈적거리고 분위기가 쎄-하다. 책 뒤에 '인간의 정신 가장 깊은 곳을 꿰뚫는 스릴러. 작가가 미쳤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홍보문구가 있는데 이는 유럽 스릴러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도대체 왜인지 모르겠는데 이쪽은 범죄 자체가 엽기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눈알수집가>에서는 납치한 아이들의 왼쪽 안구를 파내고, 후속작인 <눈알사냥꾼>에선 납치한 여자의 눈꺼풀을 도려낸다. 끝까지 읽다보면 별 시답잖은 이유들이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그랬단다. 그래, 그러니까 사이코스릴러라는 이름이 붙었다. 공감 능력이 없는 사이코패스와는 다르게 그냥 뇌 한 부분이 훼까닥 미쳐서 제정신이 아닌 범인들이다. 아무리 작가와 등장인물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지만 이쯤 되면 작가를 한번쯤 의심해 볼 만하다.


  읽는 재미만큼은 확실한 책이다. 사흘이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읽었으니 한 번 펼 때마다 100쪽 조금 넘게 본 셈이다. 의학적 지식도, 형사들의 수사도 나오지 않는다. 다른 스릴러 장르보다는 전문적인 내용이 적고 읽기 편한 내용들로 쓰였다. 그렇다고 이야기의 밀도가 낮은 것도 아니다. 알리나가 갇힌 방에서 탈출하는 장면은 맹인인 인물의 시선과 행동을 꽤나 잘 표현했다.


  편집도 훌륭한 편이다. 한 장(章)이 길지 않기 때문에 느껴지는 속도감이 매우 빠르다. 장마다 등장하는 인물이 교차로 등장하는 동시에 앞선 장에서 말했던 소재나 인물이 바로 뒤에 나온다. 적절한 긴장감을 줌과 동시에 나름 훌륭한 복선과 반전을 만드는 편집은 고전적이지만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다만 결말이 의외인데, 앞에서 쌓았던 점수를 단숨에 깎고 말았다. 모두 다 꼭두각시 인형극에 놀아난 게 되버린 것처럼 보이는 결말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눈알수집가>의 후속작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눈알사냥꾼>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게 아니라 <눈알수집가 2권>으로 나왔어야 한다고 본다. 이 책의 메인 악당인 차린 주커 박사도 생각보다 임팩트고 적고 말이다.


  결말이 조금 아쉽지만 앞서 말했듯이 재미 하나는 보장한다. 단, 전작인 <눈알수집가>를 먼저 보길 권한다. 책 중간중간 나오는 전작의 에피소드나 인물 사이의 관계가 파악된다면 읽는 재미가 한층 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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